수능시험이 있던 지난 13일도 어김없이 추웠다.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산간에는 벌써 눈이 내렸단다.

인사동거리도 겨울을 재촉하는 스산한 바람이 분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뒤로하고 모두들 총총걸음이다.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인사동은, 임 떠난 듯 쓸쓸하다.
분주한 청소부의 빗자루 끝에 가을이 다 쓸려간다.

사진,글 / 조문호

 

 

서양화가 정복수의 바닥화 작업장은
인간의 유골을 모아둔 공동묘지 같다.

신체들은 분해되어 여기 저기 흩어졌고,
그 영혼들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바닥화에 누워 욕망을 털어내니 마음이 편하고,
몸 가린 옷을 벗으니 구천을 떠도는 것 같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2014. 11. 3 / 인사동, 나무화랑
사진 : 정영신 / 글 : 조문호

 

 

 

"산에서 살긴 살지만, 북한에는 간 적도 없고 정치적 이념도 관심 없다. "

 

"그러면 무슨 죄로 잡혔는가?
돈 없이 술 마신 무전취식일까? 아니면 몰래 사진 찍다 걸린 파파라치일까? "


"그도 저도 아니다.
단지 돈을 벌지 못해 가족들을 부양하지 못한 죄다."

 

"분명 죄는 지었는데 감방에 잡아넣을 수가 없으니, 그 것이 문제로다." 

 

지난12일 강원도 영월에서 벌어진 한 순간의 장면이다.
시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기념사진 찍다 무의식적으로 취해진 동작이다.

사진: 정영신, 글: 조문호



비가 왔다 갔다 한다.
추위를 재촉하는 가을비가..

가을은 깊어만 가는데,
사람들 옷차림은 한여름 같다.

날씨도 사람도 제 정신이 아니다.

 

2014.10.2 / 인사동

사진,글 /조문호

 

 

 

 

 

 



무주 설천장을 거쳐 금산장에 갔다.
가는 날이 인삼축제라  장터가 흥청댔다.
풍물꾼들 풍악소리가 장터를 덥쳤다.

가는 곳 마다 인삼천지다.
거짓말 좀 보태 노인 반, 인삼 반이다. 
난생 처음 인삼튀김 맛도 봤다.

시골 축제는 노인들의 잔치다.

 

2014.9.27 금산장

사진.글 / 조문호

 

 

 

 

 

 

 

 

 

 

 

 

 

 

 

 

 

 

 

 

 

 

 



박광호씨가 일산에서 그룹전 한다는 소식이 '인사동연가' 카페 글방에 올랐다.
개막 한 시간 전에서야 알게 되어, 하던 일을 제켜놓고 일산 '아람누리 미술관'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광호씨는 몸이 불편해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럴 때 만나지 않으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일산미술인회'는 15년전 서양화가 이목일씨와 지금의 회장이 주도하여 만든 미술인모임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는 미협지부의 실력 없는 화가들이 득세하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는데,

작가들을 선별해 가입시켜서인지 전시작들의 수준이 보통은 넘었다.
박광호씨 외에도 아는 작가가 두 분 더 있었지만, 건망증이 많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다,

전시작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이야기를 꺼낼 형편이 아니다.

반평생동안 생선뼈만 그려 온 박광호씨의 최근작은 늘 궁금했는데,

아쉽지만 오늘 걸린 작품으로 대략의 흐름은 가늠하게 되었다.

한 때는 생선 뼈가 상형문자처럼 너무 도식적이어 약간 회의감을 가진 적도 있지만,

오늘 걸린 작품에서 그 형상의 꿈틀거림을 보게 되어 또 다른 기대를 하게된 것이다.

언제 열릴지 모르지만 벌써 그의 개인전이 기다려진다.

회원전 개막식을 끝내고 모두 뒤풀이에 갔으나, 우리만 남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진 고생 끝이지만, 두 아들 잘 키워 어엿한 사회인으로 내놓았다기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광호씨의 처 신경희씨가 4년전 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를 연재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음달 중국 청도 청우림갤러리에서 그림전시회까지 갖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두 내외가 그림 그리며 잘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기름 넣으라며 돈까지 주니 기가 막혔다.

그를 알게 된 지도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내가 부산 남포동에서 '한마당'이란 국악주점 할 때, 단골손님으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가난하지만 세상에 굴하지 않고 그림그리는 모습이 늘 의연했지만, 때로는 애잔하기도 했다.

술이 취해 술집의자에서 꼬부려자기도 했으나 어찌 보면 둘 다 그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잘난 사진 때문에 장사 팽개치고, 서울로 야반도주하여 지긋지긋한 제2막이 시작된 것이다.
성북동 외딴 곳에 달세방 하나 얻어 놓고 '월간사진'이란 잡지사에서 일할 무렵이다.
인사동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가까워 버스 타러 가는데, 포장마차에서 "형"하며 부르기에 돌아보니 광호씨였다.

죽었던 친구 살아온 듯 반가웠으나, 불러놓고는 술이 취해 그 자리에 뻗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이산가족 만나듯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세월이 30년이 되었건만 아직 둘 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겁지급 살아가는데,

그는 몹쓸 병에 걸려 걸을 수 조차 없으니 더 안타까운 것이다.
스스로 만든 팔자이긴 하나 죽는 날까지 좋아하는 그림 그리고, 사진 찍으며 사니 더 이상 바랄 것은 없구나.

죽으면 돈 싸 가지고 가지는 않으니까...

"제발 성질 좀 죽이고, 고생한 도화엄마 잘 다독여 주거라"

 

 

 

 

 

 

 

 

 

 

 

 

 

 

 

 

 

 

 

 

 

 



 

 

지난 9월4일은 내 생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스스로 생일을 챙기지 않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더 많았으나,
이젠 아내가 대신 챙겨,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번 생일은 추석 대목장과 겹쳐 구미 해평장에서부터
안동 구담장, 문경 가은장을 돌아다니는 촬영 길에 나섰다.
구미 해평장에서 일하다 공윤희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오후7시경 ‘유목민’에서 생일잔치를 할 것이니 참석하라”는 것이다.
느닷없는 전갈에 당황했다.

 

작업을 서둘러 일찍 상경할 수밖에 없었고, 가까스레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공윤희, 전활철씨 외에도 장경호씨가 기다렸고,
뒤 이어 조준영, 노광래, 김명성씨가 나타났다.
고맙게도 전활철씨는 미역국을 끓여놓고, 공윤희씨는 생일케익까지 준비했으나,
촛불켜고 박수치며 축하하는 절차들이 몸에 익지않아 어색했다.

주인공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이 날은 술을 마셔도 덜 취했다.
담담한 기분으로 소주를 마시며 끝나기만 기다렸으나 
피로감이 몰려와 결국은 탈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못난 사람 생일을 거두어 준 공윤희, 전활철씨와 함께 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명동선생께서는 “사진하려면 독해야 한다”는 말씀을 늘 하시지만,
천성 때문인지 그게 잘 안 된다.

지난 22일 맛있는 삼계탕을 먹자는 전갈을 받고 아내와 함께 선생님 자택이 있는 약수동으로 갔다.

서둘렀으나 선생님께서 먼저 나와 약수역 3번 출구에서 기다려 송구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생애 처음으로 사진전을 가져 장안의 화제를 만들었던, 지난 전시 후 처음 뵙는 자리인지라

그 때 찍은 기념사진 몇 장을 드렸더니, 선생님의 드라마틱한 삶이 실린 ‘신동아’ 9월호를 보여주셨다.

그 잡지에 몰랐던 사실이 실려 여쭈었더니, 당시의 숱한 이야기보따리를 꺼 내셨다.

재미있는 일화로는 맛 선도 보지 않고 결혼한 삼일 째 되던 날 아내의 누드를 찍겠다고 방을 스튜디오로 꾸몄단다. 누드 찍는다는 생뚱맞은 이야기에 승강이를 벌이다 촬영용 램프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났다는 것이다. 호랑이 만난 사슴같이 놀란 신부가 맨발로 뛰쳐나가 시어머니를 찾았는데,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가 “미친놈”이라며 꾸짖어, 유일하게 미수로 끝난 사건이 되고 말았단다.

치열한 삶을 살아오며 선생님이 이룬 업적들은 너무 많았다.

1960년 4월19일 경무대 앞의 발포사진은 유일하게 사진으로 남은 ‘혁명최전선’의 기록이 되었다.

유지광을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찍어 그들을 체포하게 했던 장충단공원집회 사진도,

개표할 때 정전시켜 표를 바꿔치기하는 장면을 찍은 특종사진도 모두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4,19 유공자로 지정되고, 종군기자 시절의 공적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았다.

물론 보상을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병든 아내를 보살피는 원로사진가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정부에서 주는 보조비라고는 모두 합쳐 한 달에 36만원 밖에 되지 않고,

왠 만한 노인들에게 다 주는 기초노령연금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노인 연금 20만원인 너 보다는 내가 많으니 내가 밥을 산다”며 지갑을 여신다.

놀란 아내가 계산대에 달려 나가니 “다시 보지 않으려면 계산하라”며 어름장을 놓으시는 것이다.

선생님! 사 주신 삼계탕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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