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대목장 촬영지로 함안 가야장을 찾았다.

아라가야의 문화를 꽃피운 함안은 어린 시절 집안 어른 뵈러 간 적이 잦은 곳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발길이 끊겨 버린 곳이다.

가까이 있는 마산은 사흘이 머다 하고 쫒아 다녔으나, 함안에 들릴 기회는 전혀 없었다.

오래전 ‘무진정’ 촬영하러 갔던 일과 가야 장터에 두 번 간 것이 전부다.

 

오전10시 무렵 함안에 도착하여 100년 전통의 함안 가야장 부터 들렸다,

5일, 10일 열리는 가야장은 기존 상인 점포 80여개와 노점상 250여개가 들어선 큰 장이다.

설 대목장이라 사람들은 붐볐으나, 장터 분위기는 심상찮았다.

노점상 머리에는 붉은 띠를 감았고, 한 쪽에선 행인들의 서명을 받고 있었다.

 

가끔 장에 가보면 장옥 신설에 따라 기존상인과 행상들의 분쟁이 더러 있긴 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장터문화 활성화로 시작된 ‘문화관광형시장’ 정책의 부작용이다.

새로운 장옥으로 교체하며 기존의 장터개념인 난장이 해체됨에 따른 분쟁인 것이다.

장터를 찾는 주민들이 겨울철 설렁한 장옥보다 햇살을 받는 노점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한 자리에 고정된 매점보다 변화무쌍한 난장을 찾는 것이 장터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 사업은 토목업자와 추진업체만 배불리고 기존 전통시장을 망친 사업이었다.

 

상인들의 분쟁은 돈과 관련된 이권이 걸린 문제라 싶게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함안장은 군청에서 기존상인들 편에 서서

행상들의 진입을 막는다는 점이 다른 지역 분쟁과는 좀 달랐다.

난장이 들어 설 자리에 관용차를 줄지어 세워 장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함안군에서 코로나 방역차원에서 지난 해 두 달 동안 장터를 폐쇄하다가

지난 1월 중순 다시 개장했으나 효율적인 관리라는 이유를 내세워

 시장 입구의 노점상 영업만 막았다는 것이다.

 

행인들 서명을 받던 행상 이야기로는

"장날만 되면 장사해야 할 자리에 공무원과 상설시장 상인들 차량을 배치해 영업을 못하도록 막고 있다"며

함안 군민 2000여명이 '오일장 폐쇄 반대 서명'을 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함안군에서는 "시장번영회와 노점상 간의 이견이 커서 시간을 갖고 해법을 마련할 계획" 이라지만,

관에서는 기존상인과 행상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중재자 입장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관민이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난제다.

 

장터에서 빠져나와 아라가야 지배층 묘역이 몰려 있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찾아 나섰다.

말이산 고분군은 삼한시대부터 아라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의 고분군으로

아라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집중 조영된 곳이다.

현재까지 240여기의 고분이 발굴조사 됐는데, 높은 봉분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른 시기 고분까지 합하면

1000기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남에 분포된 유적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20년 기준,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보급 상형토기와 말 갑옷 금은제 장신구 등

 1만2000여점이나 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500여 년 전 아라가야가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꽃 피운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말이산 고분군 옆 함안박물관 연 밭의 '아라(阿羅)홍련'도 빼놓을 수 없는 관심거리다.

연꽃에 ‘아라’란 이름을 붙여진 건 함안의 '아라 홍련'이 유일한데.

삼국시대 쯤에 세워진 함안의 성산산성 발굴이 시작되면서

성 안의 연못 자리에서 연 씨앗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연 씨앗 10개를 넘겨받아

이 중에서 두 알의 씨앗을 골라 국립지질자원연구원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한 알은 760년 전, 다른 것은 650년 전의 씨앗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피는 연꽃은 뿌리로 번식시키지만,

농업기술센터에서 그 씨앗으로 씨담그기와 싹 틔우기를 시도했단다.

그중 세 알이 기적처럼 싹을 틔웠고, 2010년 7월 6일 첫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씨앗이 발아에 성공해 꽃을 피운 첫 사례란다.

 

700여 년 전 씨앗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꽃으로 다시 피어난 것이었다.

‘아라홍련’이 당시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함께 피어 난 셈이다.

 

자리를 옮겨 칠원면 무기리 마을회관 뒤편에 있는 주씨 고가(周氏古家)에 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솟을삼문이 붉디붉은 정려로 장식된 옛집이었다.

충신 정려와 효자 정려를 나란히 받은 국담 주재성(菊潭 周宰成, 1681~1743)의 생가이자 주씨 종가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통곡을 하였다고 하는데,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와 서재를 ‘감은재’(感恩齋)라 이름 지을 정도니,

두 부자의 충효정신은 알아볼만한 것이다.

 

주씨 고가의 자랑거리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이다.

무기연당은 비록 자그마하고 소박한 연당이지만, 우리나라 전통 정원을 대표하는 곳의 하나이다.

네모진 연못 가운데 동그랗게 만들어놓은 인공 석산(石山)의 어울림이 매우 단아하고,

연못 둘레에 계단이 되도록 이중으로 쌓은 석축 또한 든든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무기연당은 자그마하되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되 심심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우리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함안에는 무기연당 외에도 루나 정자가 대체로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무진정과 악양루를 위시하여 조려가 말년에 은거생활을 한 채미정과

낙동강 물굽이를 바라보는 위치의 대산면의 합강정과 반구정도 있다.

 

남명 조식의 제자 이길이 반구정을 들렀다가 남긴 시 한 구절이 마음에 남는다. 

“명리의 마당에서 말(言)의 함정에 빠지느니

골짜기에 숲속에서 마음의 칼 피하리라

백구에게 짐짓 세상사를 잊은 듯이

화단을 바라보며 달을 보고 누웠네.”

 

오래 전 찍은 무진정은 국도 79호선을 따라 진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온다.

연못과 섬, 홍예교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푸른 암석 위에 앉은 정자가 바로 무진정인데,

조선 중종 2년(1507년)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낸

무진 조삼 선생이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무진정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너머 바위 위에 숨듯이 들어서 있다.

담 너머 연못 전체를 정원으로 삼은 정자는 수생식물에 의한 초록 물빛과

치렁치렁 드리운 왕 버들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

 창을 접어 사방으로 활개 치듯 열 수 있도록 한 누마루도 소박한 듯 멋스럽다.

운치로 보면 악양루보다 한 수 위로 볼 수 있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도 없는

그야말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양식을 보여준다.

 

무진정의 자태도 자태지만, 정자의 주인공인 함안 조씨 가문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만 1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학문만이 아니라 대쪽 같은 성품도 대를 이었다.

고려가 망한 뒤 벼슬을 물리치고 절개를 지킨 조열은 정종이 손수 편지를 보내는 정성을 보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의 손자가 생육신 중의 한 명인 조려다.

조려는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통곡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백이산에 숨어 살았다.

조려의 손자가 바로 무진정의 주인인 조삼이다.

 

이들이 돋보이는 건 당대의 권력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기보다 대의에 어긋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생육신 조려의 자취는 그의 생가가 있는 군북면 원북리 일대에 남았는데,

조려의 위패를 모신 서산서원이나

말년에 은거생활을 했다는 작은 연못을 갖춘 정자 채미정도 다 그곳에 있다.

 

해마다 4월 초파일이 되면 무진정 연못에서 ‘낙화놀이’가 열린다.

연못에 철사로 바둑판 모양의 등줄을 걸어놓고 숯을 빻아 한지로 만든 것을 촘촘하게 매달아 놓고

불을 붙여 즐기는 불꽃놀이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화려한 꽃불이 장관을 이룬다는데,

한 번 가 본다는 게 미루다 보니 아직 보지 못했다. 올 초파일도 거리두기로 보긴 틀린 것 같다.

 

더 보고 싶은 유적은 많았지만 대산리 석조삼존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다음 대목장 촬영지로 정해진 영산장으로 옮겨야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본관 터와 고향을 순서대로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함안과 영산이 가까워 차례대로 갈수야 있겠지만,

둘 다 장날이 같은 날이란 것도, 우연의 일치로는 예사롭지 않았다.

 

 함안에서 옛일을 떠올리고, 영산의 아버지 무덤에서 사죄했다.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도 있던데...

 

사진, 글 / 조문호

 

2012, 화령장에서

 

장 따라 다니며 만났던 시골 부부들의 정겨운 사진에서

새삼 부부 금실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금실이란 것이 저울로 달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살다보면 미운 정 고운 정 쌓여 곰 익은 것이 금실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장에 오는 부부들이 승용차나 트럭을 타고 오기도 하지만,

얼마 전 만해도 경운기가 대부분이고, 오트바이나 삼륜차 등 종류도 가지가지였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소가 끄는 달구지가 더 많았지요.

장에 같이 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 해가며 친구도 되고 애인도 되며 정을 쌓아갑니다.

나 역시 전국 장터 찾아다니며 쌓은 금실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3 금산장

 

'금슬(琴瑟)'은 거문고 금자와 비파 슬 자로 거문고와 비파지만, 부부간의 사랑을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

거문고와 비파처럼 잘 어울린다는 말이겠지요, 아름답지만 덤덤한 화음처럼...

그러나 금슬보다 금실이란 말을 많이 써, 사전에도 부부간의 사랑을 '금실'이라 해놓았습니다.

자주 쓰면 그 말이 표준말이 되기도 하지요.

 

나도 글 쓸 때 문법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글이란 내가 편하게 말 할 수 있고 상대가 쉽게 알아채면 그만이니까요.

법이나 문법이나 일률적으로 규정지어놓은 것을 싫어하는 건, 규정지울 수 없는 게 너무 많거든요.

누가 한말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과거는 고체이고, 현재는 액체이고, 미래는 기체다”란 말을 읽은 적 있습니다.

말이나 법이나 모든 것들이 굳어버린 과거를 붙들고 고민하기보다,

현실에 맞는 것들이 바람직하다는 말이겠지요.

 

왜 갑자기 부부금실 이야기가 길어졌느냐 하면 스스로의 금실 무게를 달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은 금실보다 계산에 의해 사는 내외도 많으니,

금실이란 말도 금으로 만든 실처럼 귀하게만 느껴집니다.

 

1995 고창장

 

헌법도 얼마나 잘 못 된 게 많습니까?

난, 아내와 이혼하고 지금은 동지로서 만납니다.

부부 언약보다. 동지로서의 맹서를 충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 또한 말장난에 불과하겠지만, 법이 만들어 낸 모순입니다.

 

돈 안 되는 다큐사진가로 몇 십 년 살다보니 살기 힘들었거든요.

벌이가 없으니사진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었겠습니까?

기초생활수급자만 되면 사는 게 문제없을 텐데, 아내가 젊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도 다큐 사진하는 거지인데, 이런 좆 같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난, 대마초도 마찬가지지만 잘 못된 법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동지서약서 쓰고, 사진하는 동지로 만납니다.

이제 이혼한지 5년차로군요.

이혼하여 쪽방 촌에 들어오고부터 사는 게 훨씬 나아졌습니다.

동지 일을 자기 일처럼 한다는 동지서약서 보면 눈물 날 정도로 웃깁니다.

 

2014년 밀양장

 

인생은 한 편의 장편 드라마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장터 갈 땐 내가 기사가 되어주고,

쪽방 컴퓨터 고장 나면 동지가 기사 되는 그런 식으로 만나는데,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코로나 시국인데, 누굴 만나겠습니까?

코로나 전에는 주말에만 함께 지냈으나, 지금은 일주일에 닷새 정도 함께 지냅니다.

비좁은 정영신씨 집에 같이 있는 동안은 하루 스무 네 시간을 반경 10미터 내외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니, 밀착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동지의 금실도 부부 금실 못지않다는 것을 감히 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4년 전, 광화문광장에서 동지를 만나 사진가 이정환씨 카메라에 잡혔네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순정의 드라마랍니다.




몇 일 전 봉화장에서 만난 서씨 아지매 이야기다.
통통한 알밤 한 되 박 펼쳐 놓고 쪼그려 앉은 모습이 안 서러워,
“아지매는 사는 게 어떻냐?”고 물어 보았다.

“사는기 다 그렇지 별거 있는기요?”
"별거 아닌 게 힘들게 한다"며 투덜거렸더니, 측은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 무렵, 옆자리에 있던 아낙이 맛보라며 서씨에게 김밥을 건네준다.
“별 생각 없는데...” 하시면서도 한 점 집어 맛있게 드셨다.

돌아서는 귓전으로 들려오는 아지매 말에 인정이 묻어있었다.
“밥이나 묵고 댕기는지 모르겠다”
바로, 낯선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숱한 사람과 부딪히고 살아도 연관이 없으면 아무 관심도 없는 비정한 세상에
낯 선 사람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다.

정이 메말라 기계처럼 사는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타인에 대한 정은 멸종되지 않았다.
시골장터에서나 만날 수 있는 훈훈한 정경이다.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된 세상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나주 세지장

 

정음 신태인장

 

경산 자인장

 

경주 양남장

 

공주 산성장

 

광주 말바우장

 

군위 우보장

 

성남 모란장

 

보령 웅천장

 

보은장

 

부여 홍산장

 

동해 북평장

 

사천 곤양장

 

사천 장황장

 

순창 복흥장

 

양평 지평장

 

순천 주암장

 

안성 일죽장

 

영광장

 

영덕 남정장

 

영산포장

 

예천 용궁장

 

완주 삼례장

 

완주 삼례장

 

음성장

 

의령 신반장

 

임실 신평장

 

정선장

 

정음 신태인장

 

제주장

 

청원 미원장

 

청원 미원장

 

태백 철암장

 

태백 통리장

 

평택 통복장

 

포항 죽장장

 

익산 함열장

 

 

 

함안 가야장

 

완주 삼례장

 

문산장

 

의성 금성장

 

예산 삽교장

 

김제 원평장

 

남양주 진접장

 

증평장 (정숙현/88)

 

무주장

 

순천 승주장

 

보성 벌교장

 

평창 대화장

 

양산 서창장

 

안동 재산장

 

양평 용문장

 

 

고성 거진장

 

연천 전곡장

 

울산 언양장

 

용인 백암장

 

포항 도구장

 

울산 언양장 (유귀선/75세)

 

의성 옥산장

 

임실 강진장

 

청양장

 

천안 병천아우네장

 

칠곡 동명장

 

화천장

 

포항 홍해장

 

김포 통진장

 

포항 구룡포장

 

홍성장

 

포항 기계장

 

화성 조암장

 

완도 노화장

 

암안 군북장

 

남원장(박경순/82)

 

합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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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장

 

정선장

 

 

포항 송라장

 

포항 죽장장

 

 

장흥 대덕장

 

 

 

 

하동 진교장

 

 

 

 

 

 

단양장

 

단양장

 

 

 

영암 독천장

 

 

영암 독천장

 

 

 

 

 

천안 병천아우네장

 

나주 세지장

 

 

평택 안중장

 

논산 양촌장

 

논산 양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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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장 / 권창수 / 80세

 

경주 건천장 / 한순남 / 80세

 

고흥 녹동장 / 박순아 / 80세

 

 

곡성장 / 전순례 /79세

 

광양 옥곡장 / 오미자 / 74세

 

 남원 인월장 / 정구식 / 63세

 

부산 노포장 / 박술련 / 70세

 

대산장 / 유묘연 / 65세

 

대천장 / 김점순 / 68세

 

성주장 / 조소연 / 80세

 

 

영암장 / 문 전 / 73세

 

예산장 / 장정환(68세) 방희열(65세)부부

 

 

진해 웅천장 / 이숙희 / 60세

 

월내장 / 김천숙 / 86세

 

의령장 / 박말남 / 83세

 

 제주 한림장 / 조대옥 /68세

 

제주장 / 박점례 / 82세

 

 

김해 진례장 / 안상환 / 56세

 

진천장 / 박동환 (74세) 이수남 (71세) 부부

 

차황장 / 이월순 / 81세

 

청도장 / 양귀분 / 80세

 

  청양장 / 임호남 / 62세

 

청원 부용장 / 김정자 / 78세

 

칠원장 / 김석곤 / 74세

 

태안장 / 정귀숙 / 65세

 

 

 

논산장 / 백필순 / 8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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