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숙 글 , 김경미 사진 , <Born in Insadong 새로 본 인사동 > 표지
"이 집이 바로 종로의 '주택 왕'이라 불리던 정세권씨가 세운 한옥입니다."
인사동 중앙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한옥 카페에 앉아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인사동 전문가답게 술술 이야기가 풀려나왔다. 최근에 출판한 <새로 본 인사동>의 글을 쓴 김경숙씨의 말이었다. 정세권씨는 그냥 주택사업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한 독립지사였음을 그는 누누이 강조했다.
필자도 1935년 무렵 빈곤하기 그지없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 터를 무상으로 제공한 사실을 알기에 정세권 동상을 인사동이나 북촌, 아니면 최근에 뜨고 있는 익선동에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사진을 찍은 동생 김경미씨는 사진작가답게 연신 사진에 담고 소리에 담느라 분주했다. 인터뷰를 지난 4일은 월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은 분주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늦가을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인사동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매가 낸 인사동 책이라 더욱 흥미가 갔다. 정세권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서 김경숙씨는 문화정책 전문가답게 인사동 문화정책에 대한 소견을 쏟아냈다.
"인사동과 인접해 있는 북촌, 안국동,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에 정세권 선생이 지은 한옥밀집지역이었습니다. 북촌은 개발규제 구역으로 묶였다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 재정비되면서 한옥들이 보존되어 대표 문화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북촌문화센터도 있고, 민간인들의 문화 활동도 활발합니다. 관광객들로 인한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해 구청이 '북촌 특별관리지역 지정'도 했습니다. 재개발계획에 묶여 낙후되었던 익선동은 재개발이 무산되자 젊은 개발자들이 들어와 특색 있는 실내장식의 음식점 밀집지라는 콘텐츠를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인사동은 상가로 개조된 한옥들을 북촌처럼 대표 콘텐츠로 내세울, 전통문화 관련 영업장은 줄었습니다. 역사문화예술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문화체육관광부도 참여하는 자문 팀을 구성해서 전통문화 콘텐츠를 보다 다각적으로 구축하고 활용할 방안으로 모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시작된 인사동지구단위계획 개정 용역의 마무리 시점이 다가오는데요. 이 용역 보고서는 개정안이지만 인사동의 미래를 결정할 기초 키잡이입니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청사진이 담기면 좋겠습니다.“
▲ < 새로 본 인사동 > 을 펴낸 자매 김경숙 ( 오른쪽 ), 김경미씨 , 인사동 한옥 카페에서 .
- 저자분의 견해와 <새로 본 인사동> 내용이나 구성을 보면 이 책은 좀 더 심화된 인사동 길라잡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와 한국 문화지구 1호로 지정되면서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관광객들은 인사동길의 중심도로만 보고 가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한국인이 알아야 할, 그리고 외국인에게 소개하면 좋을 인사동 역사문화의 상당 부분은 중심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들에 대부분 푯돌과 표지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장소들을 일일이 검색하지 않아도 좀 더 깊이 있고 손쉽게 둘러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역사, 인물, 항일, 교육, 건축, 문화로 나누어 각각의 시간과 공간을 155장의 사진에 담고, 이야기를 곁들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김경미씨는 원래 한문학자로 한문 관련 문화재 유적지 답사와 기록물, 번역 연구 사업을 오래 주도해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학교에서 전문 사진작가 수업을 받고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이 작품이라 보여지는 이유가 있었다.
- 책에는 인사동 역사문화의 푯돌과 표지판 소개가 많았습니다. 인사동에서 역사 관련 유적지가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책에 나와 있지만 관광객들에게 어디를 먼저 추천하고 싶으신지요?
"인사동은 대한민국 역사 중심입니다. 태조 때 한양의 지리적 정중앙임을 알리는 푯돌이 인사동에 세워졌지 않습니까? 도화서 등 조선 관청들이 있던 곳이고, 궁들이 지어졌습니다. 큰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살았고, 일제강점기부터 문화를 이끈 장소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초등학교도 개교했고요. 무엇보다도 인사동은 친일과 항일의 격랑이 공존했던 곳입니다. 탑골공원 외에도 여러 곳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헌종이 승하하자 후궁 경빈 김씨가 궁에서 나와 살았던 곳인 순화궁은 이완용이 살다가 요릿집 태화관이 되었고, 그곳에서 민족대표들이 삼일독립선언을 했습니다. 태화관 터에 놓인 푯돌에는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철거케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붙잡아 둔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한 바퀴 둘러보며 푯돌로나마 남아 있는 이야기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삼일운동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 자리에서 선 김경숙씨
찻집 인터뷰가 끝난 뒤 삼일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 자리를 함께 찾았다. 밤이라 그런지 푯돌 이야기를 설명하는 김경숙씨의 의미심장한 말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마치 태화관에서의 그날의 긴박했던 이야기들이 들리는 듯했다.
- 인사동을 자주 찾던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아무래도 인사동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회를 피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큰길에는 골동품상, 문방사우 판매점, 고서점, 화랑들이 있고, 골목에는 작은 한옥이 조용히 자리한 인사동은 한 정당의 당사가 들어온 무렵부터 바뀌어갔습니다. 시위하던 이들이 최루탄을 피해 골목으로 피신해 가정집에 숨고, 한옥은 하나씩 음식점이 되었고요. 묵향 그윽하고 문기 가득했던 곳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관광기념품점, 외국 물건과 외국 음식 판매점, 잡화점들이 늘어났습니다. 한복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옷을 대여하는 곳도 좀 있어서 외국 관광객들은 그것을 한국의 전통 복장으로 알고 입고 다닙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이곳의 문화적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 인사동 문화지구는 업종 제한에 대한 찬반양론도 있는데요.
"전통문화 보호를 위해 <서울시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 <인사동 지구단위계획>에서 업종을 제한한 구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사단법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금지업종 진입 확산을 막아달라며 제출한 민원과, 금지업종 폐지 주장을 인용한 기사가 동시에 떠 있습니다. 문화는 관의 개입 없이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전통문화의 거리는 700미터밖에 안 되고, 접해 있는 한옥 관리구역도 면적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규제가 폐지되어야만 상권 활성화가 가능한 건지,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인사동 지역도 있는데 굳이 규제지역 안에 입점해서 금지업종으로 영업을 해야만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유튜브 '인사동김교수'에 올리신 '몹시 안타까운 한남서림 터'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이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인사동 한남서림 터 표지판이 길바닥에 놓여 있어 오가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계속 밟고 지나다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무 관청이 표지판 위치 이동이나 설치방식 변경을 검토하도록 건의합니다. 1910년에 백두용 선생이 문을 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인수한 <한남서림>은 일제강점기에 주요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았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지켜진 문화재의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어학회 탄압이 극심했던 때, 전형필 선생이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을 주고 사서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UNESCO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입니다."
인사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자매의 인사동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인사동의 변화된 현실에 대해 아쉬움이 더 많은 듯했다. 특히 전통을 지키고자 만든 제한 업종이 알게 모르게 풀리면서 인사동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제일 크다고 했다.
결국 입주 업체와 주민들, 관리 당국 모두 함께 힘을 모으지 않는다면 인사동의 정겨운 풍경은 대기업의 상품화 물결에 휩쓸리고 말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새로 본 인사동>은 결국 인사동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오랜 시간을 애정으로 지켜 본 자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기록이다.
서울미술공동체(이하 서미공)은 1983년 10월 창립 관련 논의를 시작하여 1984년 9월 정식회의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 서미공의 첫 번째 활동은 『시와 판화』 달력(우리마당 발간, 1984.10) 제작이었다. 1985년 『을축년 미술대동잔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냈고, '취지문' 또한 이 시기에 발표했다. 1985~1986년 2년 동안 한국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1987년에 이르러 활동량이 줄어들다가 자연적으로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미공의 주요 인물들이 기획 개최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은 1980년대 예술 검열과 민중미술 탄압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건설의 계기를 마련한 전시로서 미술사적 의의를 가진다. 관훈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갑진년 미술대동잔치」는 서미공 창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2023년 초 구성된 서미공 연구팀은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 행사를 개최하여 서미공 창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대 주무 최민화, 손기환, 류연복, 박진화뿐만 아니라, 김방죽, 김억, 박성조 등 서미공 활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구술채록을 추진했다. 또 류연복, 손기환 등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1980년대 자료 등을 조사 발굴했다.
왼쪽부터 유연복 이인철 김방죽 손기환 박진화
관훈갤러리 1층은 서미공 관련 사료와 전시 포스터 등을 정리한 아카이브 전시로 구성되었다. 2023년 진행된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 또한 영상으로 관람 가능하도록 했다. 2층과 3층은 서미공 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1980년대 작품뿐만 아니라 최근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1980년대 서미공은 민중미술인들의 협의체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미 소집단에 소속이 있는 작가들도 중복으로 서미공 활동을 겸하곤 했다. 당대에는 참여 작가가 170여명에 이를 정도로 아주 큰 규모의 공동체였다. 하지만 올해 전시의 취지를 알리며 초대 공문을 발송했을 때 연락이 닿는 작가, 출품이 가능한 작가는 최종 19명으로 추려졌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 미술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활동으로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사례다. 하지만 현재 이와 관련한 조사와 연구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1980년대 한국미술사의 생동감과 풍부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시는 10월 16일 광대패 모두골의 열림굿 공연으로 개막하여 11월 5일까지 진행된다. / 서울미술공동체 연구팀
‘서울미술공동체’에 대하여
1983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경기도 가평의 대성리에서 '사흘 낮밤 토론회'가 있었다. 옥봉환의 주선으로 김봉준, 문영태, 장진영, 최민화, 최열, 홍선웅, 홍성담이 한자리에 모여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미술운동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대하면서 대중적 미술운동을 펼쳐나가기로 결의하고, 민중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지역별 '미술공동체'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최민화는 그달에 곧바로 류연복, 박진화와 함께 '미술공동체' 창립을 논의하고 각 매체별 담당을 지정했다. 만화 파트에 최민화, 벽화 파트에 류연복, 판화 파트에 이기정을 지정한 것이다. 1984년 1월부터 상반기 동안은 건강한 미술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를 계속했다. 토론회 자료를 묶어 현대미술연구소 이름으로 『현대미술』 2백 권을 펴냈다. 그해 6월 회원들은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에 참여하고, 9월에는 '미술공동체' 발족을 위한 정식회의를 개최하여 제1대 주무(기획실장)로 최민화를 선출하였다. 10월에는 판화 달력 「시와 판화」(우리마당 발간)를 펴냈다. 그리고 1985년 2월에 '서울미술공동체 (서미공)'가 공식적으로 발족한다. 서미공에 참여한 소집단은 '그림동인 실천', '횡단', '목판모임 나무', '에스파', '시대정신', '벽화기획 십장생', '억새' 등이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취지문을 살피면 "시각예술이 갖고 있는 풍부한 형식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발하"고, "자유로운 표현행위를 제약하는 어떠한 요소와도 투쟁"하며, "예술품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방안을 모색"한다고 적고 있다. 서미공은 발족과 동시에 대중을 위한 미술장터인 『을축년 미술대동잔치』(2월)를 기획했다. 잔치는 대성공을 거뒀고, 연이어『강남판매장개관전』(3월)을 열었다. 4월에는 서미공 기관지 『미술공동체』를 펴냈고, 5월엔 '5.3인천노동자대회'에 걸개그림을 제작하여 게시했다. 6월엔 제1차 총회를 거쳐 제2대 주무로 손기환을 선출했다. 7월엔 손기환, 박진화, 박불똥의 기획으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 열렸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작가들이 연행되고 작품은 압류되었다. 그에 따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8월엔 민족미술대토론회에 참석하고, 9월에는 서강대학교 신문사 연계 판화전, 외국어대학교와 문중문화협의회에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슬라이드 강연을 열었다. 12월에는 『미술공동체』3호를 펴냈는데, 1986년까지 총 다섯 권을 펴냈다. 1986년 2월에 『병인년 미술대동잔치』를 아랍미술관에서 개최했다. 3월에 제2차 총회에서 류연복을 제3대 주무로 선출했고, 1987년 제3차 총회에서는 박진화가 제4대 주무로 선출되었다.
2024 서울미술공동체 창립 40주년展 / 갑진년 미술대동잔치
1986년 6월 17일 신촌역 앞 건물에 '통일의 기쁨'이라는 벽화를 제작하고, 7월 26일에는 류영복 자택 담장에 '상생도' 벽화를 제작했는데, 두 벽화는 공권력에 의해 훼손된 바 있다. 또한 정릉벽화를 그린 작가들은 불구속 기소 되었다. 8월에는 『풍자와 해학展』을 기획하여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하였고, 1987년 11월에는 『전환기의 위대한 미술1 정치와 미술展』을 기획하였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민족미술협의회는 내부 노선 투쟁이 격화되었고, 그에 따라 소집단들의 경향성과 활동 방향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8년 1월,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서미공은 발전적 해체를 논의한 뒤 해산하였다. 서미공에 참여한 작가들은 최민화,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박기복, 최정현, 유은종, 김낙일, 임승택, 홍황기, 박성조, 김기현, 이기정, 김억, 장명규, 김방죽, 곽대원, 박영률, 김준권, 조인수, 황세준, 주완수, 전승보 등이다. / 김종길 (기획 및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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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들은 오래전 보아왔던 ’복서‘ 연작 말고도 환경 비판적인 작품이나 다른 작품도 있었다.
승자보다 패자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잔인한 말초성을 까발린 ’복서‘ 연작은 비애감이 감돌았다.
링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권투선수도 그렇지만, 맞아 쓰러지는 선수 보며
객석에서 환호하는 사람은 또 뭔가? 폭력의 관음증에 노출된 인간 심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승자를 대리 체험하는 자기도취가 결국 권력과 자본이 연출한 허구임을 까발린 것이다.
한편으로 쓰러진 복서의 비참한 모습은 80년대 군부독재에 핍박받은 민중의 모습이기도 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반체제 작가로 낙인찍혀 감시받아 가며 힘겹게 작업했다.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서나 마찬가지였다.
박흥순씨는 1982년 결성된 ’임술년‘ 창립 멤버로,
당대 현실을 소재로 비판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리얼리스트다.
한때 ’민미협‘ 대표를 지내기도 했는데,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데,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초상화 전시를 열며 나까지 그려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돈 없는 거지 그리는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전시가 끝난 후 작품을 싸 주는데, 벼룩은 낮짝이라도 있다지만 벼룩보다 못하다.
그냥 그림만 챙기고 다음에 술 한잔 산다는 게 십 년이 넘었다.
초상화 또한 얼마나 멋지게 잘 그렸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 솜씨라면 당연히 잘 그리겠지만,
여태 다른 화가가 그린 내 초상화도 보았으나 최고였다.
그리고 ’복서‘ 신작도 있었는데, 정치적 풍자로 대상이 바뀌었다.
김정은의 주먹에 쓰러지는 트럼프를 보며 왜 그리 속이 후련한지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트럼프는 주는 것 없이 밉다.
트럼프 뿐 아니라 때려잡을 놈이 어디 한두 놈이겠는가?
다시 불을 지핀 박흥순의 새로운 ’복서‘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서문 일부를 옮겼다.
“「고향의 불안, 1991」,「갈증, 1994」은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를 거론했고, 「이라크와 성조기, 2006」를 통해서 미국의 폭력적 전쟁을 고발하고, 「독도와 촛불, 2008」은 일본 정치인들의 독도 관련 망언을 규탄하는 장엄한 현장을 그리고, 「북에서 바라본 NLL, 2012」은 핑크 모노톤으로 NLL의 긴장을 경쾌하고도 모던한 팩러독스 문법으로 회화적 실험을 하고, 「만남, 2019」은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작가의 기대를, 「미완의 종지부, 2020」를 통해서는 여전히 5.18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는 전두환을 비판했다. 그리고 2021년에는 다시 복싱에 북·미 관계를 대입한 풍자화 「북미의 이벤트」를 그렸다. 복서로 링에 오른 김정은이 역시 복서인 트럼프를 다운시키는 장면이다. 그런데 둘 다 상처투성이다. 심한 밀당으로 상호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남은 북·미 간 협상 실패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한반도에서의 긴장 상황을 걱정해서인데, 결국 2024년 현재 그의 염려대로 한반도는 심각한 갈등상태에 처해 있다. 그의 염려가 예지였던 셈이다. 결국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우리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리얼리스트의 피가 흐른다는 게 반증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