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잘못된 걸 눈감지 못해 많은 사람을 잃어버렸다.

나에게 사진을 알게 한 최민식 선생 말처럼 인간애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 이루지 못 하다 선생의 지난 사진들을 꺼내 보았는데,

그 사진들은 따뜻한 인간애에 의한 순간포착이 과히 독보적이다.

처절했던 시대적 아픔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선생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사진집 ‘인간가족’에 매료되어 사진을 시작하셨지만,

나는 68년 '동아일보사'에서 국내 최초로 펴낸 선생의 사진집 “인간”에 감명 받아 시작했으니,

인간이란 주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길을 가면서도 선생의 시선은 항상 주변사람 표정과 동작에 꽂혀 있었다.

다음동작을 예견이나 한 듯, 독수리가 매를 꽤 차듯 셔터 누르는 스냅솜씨는 대단했다.

 

내가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던 70년대 중반은 자갈치시장이 선생의 주 무대였다.

아침 일찍 어시장에서 시작된 일정은 정오 무렵에는 남포동 ‘전원다방’에 앉아 고전음악을 감상하였고,

오후에는 내가 운영한 ‘한마당’에서 지인 만나는 일이 대부분의 일정이셨다.

사진하는 분보다 화가나 문인과 자주 어울렸다.

 

허구한 날 사진에 미쳐 서울로 지방으로 떠돌아 다녀 가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라 곧 바로 상경하여 사진학원에 수강신청부터 하고,

민태영선생께서 운영한 낙원동 ‘한국사진학원’ 커리큘럼이나 운영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서울의 대표적 학원인 ‘한국사진학원’도 수강생이 적어 고전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사진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특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부푼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진으로 돈 벌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누구보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일에 대한 근성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음악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공통점은 다음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일치했다.

선생께서는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사람은 죽고 나면 끝이니, 열심히 일하고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고 나서 문상 가는 것조차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며,

내가 죽어도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오로지 사진만이 살아가는 목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은 정이 유달리 많으셨다.

내가 부산 가게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무렵이었는데,

한번은 고향에 취재차 내려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억장이 무너져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들을 적어 분실공고를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걸 본 최민식 선생께서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면서...

 

그런 인간미 넘치는 선생의 반세기 동안의 역사적 작업을 열쇠구멍 사진이라 폄하하던 자들이

선생의 사진상이 제정되니 달랑 꽤 차고 앉아 끼리끼리 나누어 먹은 것이다.

결국은 비리가 들통 나 상까지 없어지게 만들었지만...

 

사진가는 아무 말이 필요없다. 오로지 남아있는 사진이 말해주니까...

내년에는 주옥같은 선생의 '휴먼'사진전을 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1년전 노환으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최민식선생의 “휴먼선집”에는

그동안 발행된 열 세권의 '휴먼' 사진집을 집대성한 작품집으로,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인간의 희로애락이 보석처럼 담겨 있다.

 

글 / 조문호

 

 

 

국가무형유산 '영산줄다리기' 명예보유자인 신수식씨가 어제 저녁 운명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부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어차피 한 번은 떠나야 할 여정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먼저가고 뒤에 가는 것뿐인데, 이제 모든 것 잊고 편히 쉬시기 바란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조성국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가무형유산인 ‘영산줄다리기’를 반석위에 앉힌 공적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빈소 : 영산요양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 11월26일, 장지 : 도천선영

연락처 : 신용우 010-2881-1566 (농협 : 81312205030)

지난 사진들로 고인을 추억하며 편안한 안식을 빌어주세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목요일에는 가을걷이하러 내려갔다.

며칠 만에 아산 왔는데, 방명록에 수원의 김지식씨와 천명철씨가 다녀가셨다.

전시장을 비워 차도 한 잔 대접하지 못했으나,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수래야 배추와 무, 당근, 들깨 등 몇 가지 되지 않고 양도 얼마 되지 않지만,

서리맞아 언덕에 웅크린 대마는 행복을 전해 줄 신의 선물이 아니던가?

 

손이 많이 가기로는 무 잎 삶아 말리는 일이었다.

일단 땔감도 할 겸, 들깨와 시든 꽃대부터 수거했다.

 

들깻잎은 올여름 내 입을 즐겁게 해주었고, 꽃은 눈을 즐겁게 해주지 않았던가?

사람이나 식물이나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야속하지만 다 뽑았다.

 

코스모스는 말라 죽어 괜찮았으나, 시들어 고개 숙인 국화를 뽑으려니 마음이 영 켕겼다.

하는 김에 설치물 주변을 어지럽게 만드는 꽃대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때만 써먹고 활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인간 자체가 악인 걸 어쩌겠는가?

그래도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만 남아 있었다.

 

꽃을 태우면서도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화장해준다며, 생색까지 낸다.

 

가마솥에 물 끓이느라 숱한 꽃을 태웠으나 그래도 남았다.

한 번은 더 사용할 수 있는 양인데, 꽃대 무덤처럼 가마솥을 지키게 했다.

 

삶아 낸 무청을 빨랫줄에 늘었는데, 빨랫줄과는 인연이 많다.

동자동 사진 나누어 줄 때도 빨랫줄에 걸었으니까...

 

들깨를 정리하고 나니 서서히 어둠이 몰려왔다.

 

무청을 삶아 거무튀튀한 물로 세수하기는 꺼림직했으나,

날씨가 쌀쌀해 따뜻한 물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수확한 대마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마르기만 기다리는데,

김창복씨와 이현이 그리고 평이가 찾아왔다.

 

내일 농장에서 김장한다며 수확한 배추 가지러 온 것이다.

갖고 온 떡을 먹으며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이현이는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전체를 다운받기 위해 안달이다.

블로그에서 쫓겨난 지 일 년이 가까워서야 살려냈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고마움을 뭣으로 답해야 할지 고민이다.

 

하기야, 고맙기로는 어디 그뿐이랴!

인덕이 많다는 소리는 예전부터 들었는데, 그 많은 분에게 갚지도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다니... 죽어도 편하게 죽기는 글렀다.

 

사진,글 / 조문호

 

 

불광동에서 생선회와 복지리를 잘하는 싼 집을 만났다.

어제 예술활동지원금 결과 보고를 할 줄 몰라 불광동에 있는 스마트협동조합을 찾아갔다.

조합의 오피스아트를 빌려 쓰는 정동지도 그곳에 있었고, 장경호화백도 지원금 신청하러 와 있었다.

서인형이사장께서 자료를 찾아 잘 마무리해 주었는데, 주당 장경호씨를 만났으니 어찌 그냥 올수 있겠는가?

장화백이 알아 낸, 싸고 맛있다는 회집을 따라갔다.

손님 받는 테이블도 너 댓개 뿐인 조그만 횟집이었는데, 주방을 지키고 선 주방장의 포스가 예사롭지 않았다.

먼저 간 이사장이 모듬회와 초밥을 시켜놓았는데, 술상이 그득했다.

 

서이사장은 다른 약속이 있어 계산만 하고 먼저 일어났으나,

나중에 일을 끝낸 정동지도 왔고, 인사동에서 전시 중인 칡뫼 김구도 왔다.

술도 못 마실 놈이 술자리에 끼어 있기가 영 불편했으나, 안주로 시켜놓은 회나 축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회도 맛있지만 붙여 놓은 가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듬회 28,000, 복지리 12,000원 등 시중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일찍부터 마신 장화백은 안주는 손도대지 않고 술만 마셔 혼자 취해버렸다.

늦게 나타난 칡뫼김구 더러 타박 주기만 반복해 슬며시 일어났는데,

장화백이 정동지 먹으라고 복지리까지 포장해주었다.

 

이튿날 복지리를 조금 얻어 먹어보니 맛이 꽤 괜찮았다.

회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정동지가 좋아해 가끔 이용할 작정인데,

싸고 맛있는 집이라 우리만 알기는 너무 아까웠다.

소문나 자리가 없어 대기할 망정, 생선회를 좋아하는 분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주소는 은평구 진흥로1526-1, 상호는 진초밥이다.

 

그리고 개인사무실을 찾는 분은 스마트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오피스아트를 활용하시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인터뷰] <새로 본 인사동> 펴낸 김경숙, 김경미 자매

▲ 김경숙 글 ,  김경미 사진 , <Born in Insadong  새로 본 인사동  > 표지

 

"이 집이 바로 종로의 '주택 왕'이라 불리던 정세권씨가 세운 한옥입니다."

인사동 중앙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한옥 카페에 앉아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인사동 전문가답게 술술 이야기가 풀려나왔다. 최근에 출판한 <새로 본 인사동>의 글을 쓴 김경숙씨의 말이었다. 정세권씨는 그냥 주택사업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한 독립지사였음을 그는 누누이 강조했다.

필자도 1935년 무렵 빈곤하기 그지없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 터를 무상으로 제공한 사실을 알기에 정세권 동상을 인사동이나 북촌, 아니면 최근에 뜨고 있는 익선동에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사진을 찍은 동생 김경미씨는 사진작가답게 연신 사진에 담고 소리에 담느라 분주했다. 인터뷰를 지난 4일은 월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은 분주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늦가을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인사동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매가 낸 인사동 책이라 더욱 흥미가 갔다. 정세권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서 김경숙씨는 문화정책 전문가답게 인사동 문화정책에 대한 소견을 쏟아냈다.

"인사동과 인접해 있는 북촌, 안국동,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에 정세권 선생이 지은 한옥밀집지역이었습니다. 북촌은 개발규제 구역으로 묶였다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 재정비되면서 한옥들이 보존되어 대표 문화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북촌문화센터도 있고, 민간인들의 문화 활동도 활발합니다. 관광객들로 인한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해 구청이 '북촌 특별관리지역 지정'도 했습니다. 재개발계획에 묶여 낙후되었던 익선동은 재개발이 무산되자 젊은 개발자들이 들어와 특색 있는 실내장식의 음식점 밀집지라는 콘텐츠를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인사동은 상가로 개조된 한옥들을 북촌처럼 대표 콘텐츠로 내세울, 전통문화 관련 영업장은 줄었습니다. 역사문화예술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문화체육관광부도 참여하는 자문 팀을 구성해서 전통문화 콘텐츠를 보다 다각적으로 구축하고 활용할 방안으로 모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시작된 인사동지구단위계획 개정 용역의 마무리 시점이 다가오는데요. 이 용역 보고서는 개정안이지만 인사동의 미래를 결정할 기초 키잡이입니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청사진이 담기면 좋겠습니다.“

▲ < 새로 본 인사동 > 을 펴낸 자매 김경숙 ( 오른쪽 ),  김경미씨 ,  인사동 한옥 카페에서 .

 

- 저자분의 견해와 <새로 본 인사동> 내용이나 구성을 보면 이 책은 좀 더 심화된 인사동 길라잡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와 한국 문화지구 1호로 지정되면서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관광객들은 인사동길의 중심도로만 보고 가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한국인이 알아야 할, 그리고 외국인에게 소개하면 좋을 인사동 역사문화의 상당 부분은 중심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들에 대부분 푯돌과 표지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장소들을 일일이 검색하지 않아도 좀 더 깊이 있고 손쉽게 둘러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역사, 인물, 항일, 교육, 건축, 문화로 나누어 각각의 시간과 공간을 155장의 사진에 담고, 이야기를 곁들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김경미씨는 원래 한문학자로 한문 관련 문화재 유적지 답사와 기록물, 번역 연구 사업을 오래 주도해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학교에서 전문 사진작가 수업을 받고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이 작품이라 보여지는 이유가 있었다.

- 책에는 인사동 역사문화의 푯돌과 표지판 소개가 많았습니다. 인사동에서 역사 관련 유적지가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책에 나와 있지만 관광객들에게 어디를 먼저 추천하고 싶으신지요?

"인사동은 대한민국 역사 중심입니다. 태조 때 한양의 지리적 정중앙임을 알리는 푯돌이 인사동에 세워졌지 않습니까? 도화서 등 조선 관청들이 있던 곳이고, 궁들이 지어졌습니다. 큰 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살았고, 일제강점기부터 문화를 이끈 장소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초등학교도 개교했고요. 무엇보다도 인사동은 친일과 항일의 격랑이 공존했던 곳입니다. 탑골공원 외에도 여러 곳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헌종이 승하하자 후궁 경빈 김씨가 궁에서 나와 살았던 곳인 순화궁은 이완용이 살다가 요릿집 태화관이 되었고, 그곳에서 민족대표들이 삼일독립선언을 했습니다. 태화관 터에 놓인 푯돌에는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철거케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붙잡아 둔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한 바퀴 둘러보며 푯돌로나마 남아 있는 이야기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삼일운동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 자리에서 선 김경숙씨

 

찻집 인터뷰가 끝난 뒤 삼일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 자리를 함께 찾았다. 밤이라 그런지 푯돌 이야기를 설명하는 김경숙씨의 의미심장한 말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마치 태화관에서의 그날의 긴박했던 이야기들이 들리는 듯했다.

- 인사동을 자주 찾던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아무래도 인사동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회를 피력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큰길에는 골동품상, 문방사우 판매점, 고서점, 화랑들이 있고, 골목에는 작은 한옥이 조용히 자리한 인사동은 한 정당의 당사가 들어온 무렵부터 바뀌어갔습니다. 시위하던 이들이 최루탄을 피해 골목으로 피신해 가정집에 숨고, 한옥은 하나씩 음식점이 되었고요. 묵향 그윽하고 문기 가득했던 곳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관광기념품점, 외국 물건과 외국 음식 판매점, 잡화점들이 늘어났습니다. 한복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옷을 대여하는 곳도 좀 있어서 외국 관광객들은 그것을 한국의 전통 복장으로 알고 입고 다닙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이곳의 문화적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 인사동 문화지구는 업종 제한에 대한 찬반양론도 있는데요.

"전통문화 보호를 위해 <서울시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 <인사동 지구단위계획>에서 업종을 제한한 구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사단법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가 금지업종 진입 확산을 막아달라며 제출한 민원과, 금지업종 폐지 주장을 인용한 기사가 동시에 떠 있습니다. 문화는 관의 개입 없이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전통문화의 거리는 700미터밖에 안 되고, 접해 있는 한옥 관리구역도 면적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규제가 폐지되어야만 상권 활성화가 가능한 건지,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인사동 지역도 있는데 굳이 규제지역 안에 입점해서 금지업종으로 영업을 해야만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유튜브 '인사동김교수'에 올리신 '몹시 안타까운 한남서림 터'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이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인사동 한남서림 터 표지판이 길바닥에 놓여 있어 오가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계속 밟고 지나다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무 관청이 표지판 위치 이동이나 설치방식 변경을 검토하도록 건의합니다. 1910년에 백두용 선생이 문을 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인수한 <한남서림>은 일제강점기에 주요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았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지켜진 문화재의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어학회 탄압이 극심했던 때, 전형필 선생이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을 주고 사서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UNESCO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입니다."

인사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자매의 인사동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인사동의 변화된 현실에 대해 아쉬움이 더 많은 듯했다. 특히 전통을 지키고자 만든 제한 업종이 알게 모르게 풀리면서 인사동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제일 크다고 했다.

결국 입주 업체와 주민들, 관리 당국 모두 함께 힘을 모으지 않는다면 인사동의 정겨운 풍경은 대기업의 상품화 물결에 휩쓸리고 말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새로 본 인사동>은 결국 인사동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오랜 시간을 애정으로 지켜 본 자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한 기록이다.

 

오마이뉴스 / 김슬옹

 

 

사진으로 서술한 인간 속성에 관한 문학 “따마스”(인간은 악이다)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총 열두 챕터로 나누어진 첫 장의 제목은 '태초의 바다'이고 마지막 장의 제목은 '따마스‘ 인간은 악이다.

그 사이에 열 개의 장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을 통하지 않고는 각각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넓은 의미로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미지로 읽는 역사고 문학이다.

 

일단 그 책에 실린 사진들을 살펴보면 사진의 형상보다 색감이 갖는 운동성에서 강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 운동성을 지닌 이미지의 힘이 보는이로 하여금 사유의 늪으로 끌어들이게 만든다.

각자 나름의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 스토리텔링은 각 사진 한 장 한 장이 단편적으로 갖는 지시성과 그 위의 의식이 차지하는 바도 중요하지만,

옆 사진 혹은 다른 사진과 어우러져 메시지가 연결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전시형식으로 열린 특강에서 저자가 실제로 사진을 옮겨가며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특정 인간이 특정 사회에서 행한 행위를 산문으로 기록한 것이 역사라면 고대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신의 행적을 시로 노래했으니,

그건 역사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다.

그들은 시로 역사를 서술하고,신의 이야기로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했으니,사진에서 말하는 이미지 전유다.

 

사진집을 접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며 무작위로 이미지 끼리 연결하며 관찰하다 보니

어렴풋이 나만의 이야기가 정리되었으나, 객관성은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이미지를 여러 차례 살펴 보았지만, 신전처럼 사진을 늘어놓은 전시장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오래전 성행한바 있는 여러 장으로 엮는 연작사진이 단편이라면, '따마스'는 장편인 셈이다. 

 

어제는 책 리뷰를 쓰려고 '따마스'사진집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칙칙한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 주는 느낌에서 욕망으로 들 끓는 인간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정말 인간의 욕망이란 무서웠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자가 '따마스'처럼, 이미지로 스스로의 사유를 엮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작품집 제목 '따마스'처럼, 진짜 인간은 악이다.

 

사진으로 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신선한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인은 물론 사진에 관심 있는 모든 분이 보아야 할 사진문학이다.

 

'따마스(tamas)'는 산스끄리뜨 어휘다. 힌두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한 분파 철학인 상키야 (Sankhya)학파에서 말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질 속성 중 하나다. 그 고대의 현자라 불린 그 사람들은 인간은 따마스 즉 어둡고, 무기력하며, 무관심한 속성을 갖는데, 도를 닦고, 열심히 노력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이후 또 노력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세계 안에서 사회 안정에 이바지한 도덕 목적 담론이다. ,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일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속성은 따마스다. 그들이 보았듯, 나도 그렇게 본다. 그렇지만, 그 따마스, 악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과실이 열린 듯 보이지만, 뿌리는 여전히 따마스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밝음도 결국 어둠으로 가고, 삶도 결국 죽음으로 간다. 열정도 무기력으로 가고, 사랑은 미움으로 간다. 해탈이란 없다. 해탈로 보이지만, 마야()일 뿐, 본질이 아닌 이미지일 뿐이다. 해탈은 욕망이고, 욕망은 배신이며, 배신은 보복이고, 보복은 저주이다. 모든 것이 하나인 일원론의 세계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왜 이미지로 말하려 하는지, 그 열린 해석의 세계가 어떻게 따마스로, 그 따마스가 어떻게 '인간은 악이다'로 규정되는지, 사진의 세계에서 말하려 한다. -이광수(서문에서 발췌)-

 

사진,  / 조문호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 기록했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사진전이 지난13일부터 오는18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렸고, 19일부터는 “부산식당” 옆에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안터’에서 열린다.

 

전시된 사진들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일본의 화보 잡지인 태양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을 당시인 60년대 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을 찍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의 시위현장과 미군기지촌 여성 등 한국 사진가들이 방치한 우리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하여, 사십 여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제일 눈길을 끄는 사진은 한쪽 전시벽면을 가득 메운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속칭 양공주로 불리는 미군 위안부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본 지 오래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치욕의 역사다.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로,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는데, 그 말이 욕설로 쓰이는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미군위안부를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 불렀던 소싯적에는 허영에 들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을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라는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전시된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니,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자료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사창가였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지난 15일 보았지만, 충무로에서 따마스전시를 끝낸 이광수교수를 모시고 다시 보러갔다. 마침 전시장에는 구와바라 시세이선생 내외분과 눈빛이규상 대표,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갤러리인덱스에 이어 개관한 갤러리안터도 구경할 겸, 꼭 구와바라세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을 감상하시라.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와바라 시세이의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사진, / 조문호

새로 개관한 '갤러리 안터'

 

 

 

긴 세월 인사동을 넘나들며 그림을 그려 온 화가 칡뫼 김구의 황무지, 우상의 벌판

지난 13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식 날 다른 일로 보지 못하고 이틀 뒤 정동지와 전시장을 들렸더니,

전시작가와 김경일 신부가 함께하고 있었다.

 

전시된 황무지, 우상의 벌판작품들을 돌아보니,

정치검찰의 날선 칼이 공동묘지 묘석처럼 솟아나기도 하고,

사람 없는 법복만 그려 법관을 얼굴 없는 유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온 천지에 돈 쓰레기가 난무하고, 기레기 들의 나팔이 세상을 어지럽히며 십자가가 불탔다.

오늘의 비참한 정치, 사회현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이다.

 

한 때는 분단의 현실에 집착한 작업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항상 비판적 시선이 깔려있다.

 

동시대인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 하는 자라는 말처럼

김구는 작금 한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뒤틀린 현실에 기꺼이 발을 담그고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있는 셈이며, 그의 작업 역시 착종된 현실에서 다종의 폭력을 배태시키는

인자들에 대한 증오와 그로인해 황폐화된 시대의 암흑을 형상화 한다는 화가 장경호씨의 전시서문처럼,

정치검찰이나 기레기 같은 쓰레기 들이 판치는 현실을 풍자하며 날선 비판을 쏟아내 왔다. 

 

작가로서의 작품이 아무리 훌륭할지언정 정작 비틀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정치나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던 말던 자신의 일만 하면 된다는 그런 의식에서 무슨 작품이 되겠는가?

 

좀 있으니, 전시서문을 쓴 장경호씨가 막걸리 두병을 들고 나타났다.

술을 끊어 술자리를 피해 다니는 형편이라 모른 척 딴전을 피웠는데,

책상에는 이번에 펴낸 화문집 고양이처럼 출근하기가 쌓여 있었다.

 

 

전시와 때 맞추어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서 펴낸 화문집에는 열여섯 편의 글과 그림이 실렸는데,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자 삶을 향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있었다.

 

재치 있는 글 솜씨와 더불어 생각을 끌어내는 그림까지 곁들여, 사 볼만한 책이었다.

 

전시는 오는26일까지 열린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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