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가까워 오면 정영신씨 따라 대목장 보러 다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올해도 설날을 며칠 남겨두고 김포장을 비롯하여 칠곡 동명장 등 몇몇 장을 돌아다녔다.

삼년 째 이어지는 전염병에 주눅들어 수도권의 장을 제외한 면소지 장들은

장사꾼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장보러 온 주민은 보이지도 않았다.

 

노인들만 지키는 시골 오일장들이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지는 오래되었으나,

거리두기로 노인들 발길마저 끊기니, 문 닫기 직전에 있다.

 

어디 세상 이치 따라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정겨운 시골오일장 풍정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다.

 

사람 없는 장보다 인근 사찰이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김포장에서는 덕포진에 들리고, 선산에서는 도리사와 구미 문화마을을 돌아보고,

칠곡에서는 동화사를 돌아보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직지사 말사인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절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8대 적멸보궁이다, 

가끔 선산에 오거나 이 지역을 경유할 때면 30년 전에 보았던 .도리사가 생각났는데,

절집의 구성이나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도리사 석탑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전석탑 처럼 돌을 쌓아 올린 탑의 조형이 특이해서일 것이다.

도리사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석탑의 높이는 4.5m인데, 얕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었다.

판석으로 갑석을 덮고 갑석 위에 방형의 작은 석재를 3층으로 쌓아 탑신을 세웠다.

맨 위층 정상에는 노반이 있고 연꽃이 조각된 보주가 있다.

 

태조선원 맞은 편 나무에는 색색의 작은 등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도리사에서 구미 일선리 문화재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1987년 안동 임하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들어갔던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인데,

이 곳 해평 일선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일선리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너르게 퍼진 구릉 산지였다.

‘밤이면 흙을 던지며 사람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고 한다.

 

일선리에 안동 전주 류씨 양반세거지가 옮겨오며 약 80여개의 집이 반듯하게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중 70여 채가 유씨 양반의 가옥이란다.

그 중에는 문화재급 고택도 10여 채나 있어, 기왓장과 기둥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왔다고 한다.

 

박실마을 전주 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과 용와종택, 침간정, 마령의 호고와 종택,

무실마을의 근암고택과 임하택, 그리고 만령초당, 삼간정, 동암정, 대야정 등의 누정들이 그것이다.

 

높다란 옹벽위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기다랗게 뻗어있다.

대개의 고택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으나 이 곳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칠곡의 동명장이었다.

오후라 그런지 좌판을 벌인 할머니 몇 분만 지키고 있었다.

 

텅빈 장터에는 ‘동명장터이야기’로 시작되는 벽화를 그려놓았다.

봇짐이나 등짐에서 손수레로 바뀌듯이 장터 풍정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머지않아 오래된 장터의 풍정은

정영신의 사진집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칠곡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화사를 찾아 나섰다.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는데,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금당암3층석탑,·비로암3층석탑,·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석조부도군 등 가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동화사 경내는 고요한 적막에 휩쌓여 있었다.

빵처럼 앙증맞게 생긴 꽃창살을 살펴보며 대웅전을 기웃거리는데,

저녁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라는 저녁종성을 뒤로하며 발길 돌렸다.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대목장을 보러 곳곳의 장터를 찾아다닌다.

지난 28일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경안시장을 찾아갔다.

 

광주 경안시장은 오일장과 상설시장이 함께 서는 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시장이 크게 번성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외국 물건들이 들어오고,

철도의 부설과 새로운 도로가 생겨나며 오래된 지리적 이점은 잃었으나,

1914년 광주 지역의 중심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옮겨지며

경안시장이 광주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경안시장은 경안천 천변에 있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데,

코로나에 주눅 들어 한산한 시골장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농산물을 비롯하여 수산물, 축산물, 의류, 잡화 등 거래품목은 여느 장터와 똑 같았다.

 

설날을 며칠 남긴 터라 인근에 있는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도 들리기로 했다.

미리 예정된 성묘가 아니라 시장 온 걸음에 들리다보니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신 음식을 장에서 사 가지고 찾아 나선 것이다.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는 찾아 온 성묘객이 없어 한적했다.

 

그 곳에는 정영신씨의 어머니 고 김덕순씨와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을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 포항 장기장 가는 길에 울산 태화장에 들렸다.

 

태화장은 30년 전까지 울산일대에서 가장 컸던 울산장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장이다.

 

옛 울산장은 상설시장인 중앙, 성남, 우정시장으로 쪼개졌다가 대형마트 출현으로 시들해졌다.

이 틈새를 파고들어 생겨난 것이 바로 태화 오일장이다.

 

10년 전에 생겨 점차 규모를 키워오다, 이제 근동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되었다.

큰 광장이 없는 태화장은 장날이면 찻길가와 골목 전부가 장터로 변한다.

대로나 이면 도로를 가리지 않고 빈터만 있으면 물건을 펼쳐놓았는데,

시장 중앙에서 300나 떨어진 동강병원까지 뻗쳐 있었다.

 

태화장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많아 다른 재래시장의 손님이 줄어드는 것과 대조적으로 갈수록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데. 가는 날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주차할 곳은 물론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체온을 체크하거나 손 소독하는 곳도 없었다.

더구나 비좁은 시장 길에 자리 잡은 음식점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러다 생사람 잡을까 걱정된다.

 

함께 간 정동지는 사람들에 떠밀려 비좁은 시장 길을 헤집고 다녔으나,

난 외곽을 맴돌며 정동지의 촬영이 끝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동지를 사지로 내몰고 망 보는 격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물산이 풍부했던 울산의 옛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옛 태화루를 끼고 있어 고풍스런 멋도 간직하고 있다.

 

좁은 길을 가다 부딪쳐도 시비 거는 사람 없고, 길이 막힌다고 재촉하는 이도 없었다.

 

아지매! 좀 팔았소? “밥은 뭇는기요?” 정감 깃든 인사들이 오 간다.

초짜로 보이는 오징어 장수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오징어요를 외친다.

허리 아픈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손님 맞는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오일장의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장이다.

태화장은 5일 10일에 선다. 

 

돌아오는 길에 태화 강변을 거니는 호젓한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사진, / 조문호

 

 

 

..

지난 주말은 정영신 동지의 생일이었다.

인사동 전시를 마무리한터라 어디든 여행이나 가자고 했더니, 작심한 듯 포항 장기장에 가잔다.

 

포항 장기장은 전국장터 목록에 빠져있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오일장이란다.

문화유적이 많은 장기면의 장터가 빠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는 장기읍성과 뇌성산성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원이 많은 곳이다. 

죽림서원, 삼명서원, 덕림서원, 서산서원이 있고, 

향교와 척화비, 석남사지, 고석사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 정오 무렵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텅 빈 장터가 반겼다.

마치 피난 간 마을처럼 사람이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장터였다.

 

어렵사리 만난 노인에게 “장이 왜 안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몇 사람 나왔으나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노인들만 남은 면소재지 장이라 장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장터 앞에는 장의사가 버티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은 오래된 고물차가 장터 곳곳에 있었고, 

점포들도 외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아마 문화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외관정비와 시설 보수는 했으나 

늙은이만 남아 장터 기능은 물론 살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옛날에는 유배지이기도 했으니, 외딴 곳에 젊은이들이 살고 싶겠는가?

장기장은 찍을 것이 없었으나, 지척에 있는 유적이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장기읍성은 둘레가 1,440미터고, 

옹성과 치성을 비롯하여 네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고, 

성 안쪽에는 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었다.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으로 현종 2년에 축성되었는데, 

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 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글 읽는 마을이 되었으나 

오로지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향교도 가까이 있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을 돌며 내부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맞배지붕 겹처마 5칸으로 된 대성전에는 18현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당우로는 팔작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다.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뇌성산성이나 고석사 석불좌상도 찾아 보고 싶었으나,

울산의 기와장인 오세필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갈 시간이 없었다.

 

지방 촬영 때는 일체 지인을 만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 오라는 연락에 정동지가 약속해 두었단다.

그래서 일박이일의 촬영일정을 잡은 것이다.

 

약속 장소인 울산 남창까지는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남창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오세필씨를 비롯하여 한양현씨와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세필씨 따라 그가 운영하는 기와공장을 거쳐 ‘송화정’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라고 했다.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 일할 분을 불러낸 모양인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송구스러운 것은 정동지가 좋아하는 감성돔까지 횟집에서 장만해 왔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정영신씨의 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최고의 생일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L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윤희씨가 숙소에 공수해 온 술과 안주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반가웠고 고마웠어요.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의문박물관마을작가갤러리에서 지난 16일 개막되었으나

전염병 때문에 별도의 개막식은 생략되었다.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 장경호, 곽명우, 최석태, 손귀현씨 등

몇몇 지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전시를 축하했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오붓한 뒤풀이를 마련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3일까지 열린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오늘부터 열립니다.

 

장날사진전은 년 말까지 열리기로 되어 있으나, 전시가 연기되어 한 달 더 연장 될 확률이 많아 볼 수 있는 시일은 넉넉합니다.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잘 아시겠지만,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는 장날전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장터의 다양한 장면들이 퍼즐처럼 벽면을 채웠는데, 오랜 추억을 슬슬 불러일으키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자녀분이나 손자들과 함께 가면 우리 정서를 일깨워 주는 유익한 자리가 되리라 여겨집니다.

 

장옥전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고,

옛날 장터에서나 볼 수 있던 손저울이나 됫박 등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은 아득한 추억이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온고지신의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곳에 가면 정영신의 장날전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전각전도 오늘 개막되고, 곳곳에 볼거리가 많습니다.

 

저 역시 이전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잘 몰랐습니다.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인 새문안 동네를 보존 또는 재현했는데, 백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도 정겹고 곳곳에 볼거리와 체험 공간도 많았습니다.

 

마을 구경은 물론 늦가을의 향취를 맛보는 시간도 됩니다.

 

주말에는 방문객이 많아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들리는 것이 꼼꼼하게 살펴보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장날전시 때문에 다른 일은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에 열릴 인사동이야기사진전은 아직 프린트도 못한 상태입니다.

마음은 편치 않아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전은 전국 각지에서 여러차례 전시를 한바 있으나 작품저장 창고나 마찬가지였던 정선집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돈화문박물관마을' 작가갤러리에 맞추어 새로 제작했는데, 요즘은 판넬제작을 액자집에서 만들어 주질 않더군요. 돈도 되지않으면서 일이 많아 그런 모양인데, 액자 값에 가까운 금액을 치루고서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위치는 정동길 따라 올라가면 '경향신문사'가 있고 그 건너편 대로 건너 강북삼성병원이 보입니다.
강북삼성병원 바로 옆, 행촌동으로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건너편이 돈의문박물관마을입니다.

 

시간 나시면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는 장날보러 가세요.


사진, / 조문호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내가 어릴 적에 장(場)이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은 잔칫날처럼 들썩거렸다. 안동 아재의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이르면 깨순이 엄마 보따리가 제일 먼저 실렸다. 뒤이어 마을 사람들 보따리가 하나둘 올라가면 사방이 초록으로 덮인 신작로 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봄이면 들판에 앉아 있던 자연도 덩달아 장에 나와 그 지역만의 삶의 이야기를 초록빛으로 품어냈다. 후미진 장 골목에서는 갈퀴와 도리깨, 체와 쟁기를 만들었고, 정월 보름을 앞두고 농악놀이에 쓸 짚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았다.

대장간 앞에는 날이 무뎌진 호미와 낫을 벼르려고 노부부가 앉아 있었고,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농로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가지고 나온 박씨 아짐은 생산자이면서 판매자였다. 또한 장터 끝 골목에는 엄마 따라온 삼식이가 새끼 돼지가 도망갈까 봐 새끼줄을 붙들고 동그마니 앉아 있었고, 털북숭이 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온 순덕이, 소금물에 우린 감을 베어 먹던 주근깨투성이 깨순이도 있었다.

이렇게 장은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이야기가 살아 있어 움직이는 박물관이 됐다. 지금 장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이 지역 농산물로 만들어가는 농민 장터가 살아야 한다. 장은 단순히 뭔가를 사고파는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과 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장을 통해 소통하는 백성의 삶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일장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34년째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장터답게 만들 계기는 무엇일까 숱하게 고민했다. 사진 한 컷 촬영하지 못하고 파장 무렵까지 장꾼들과 장에 나온 농민들과 이야기만 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자신이 사는 곳에 어떤 보물이 숨어 있는지 책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 말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중략)

이 책은 내가 이전 책들에서 다룬 적이 없었던 장터와 지역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한 장 말고도 지금 작업 중인 장이 열 곳이 넘는다. 30여년 전 흑백필름으로 작업했던 예전 장터 모습과 요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30년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으나 장에 오는 사람들이나 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더 크게 말하자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불과 55년 전인 1965년에는 버스비가 1원이었고, 쌀 한 말 값이 360원이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장터에 가면 고향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을 느끼고 싶어 구경하러 나온 사람처럼 장을 몇 바퀴나 돌며 헤집고 다닌다. 어떤 물건이 새로 나왔는지, 난전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고 싶다. 계절 따라 파는 물건이 다르기에 사계절 모두 장에 가봐야만 그 생리를 알 수 있다.

겨울철 구례 산동장에 가면 산수유 열매로 장 안이 온통 새빨갛다. 이처럼 장터는 그 지역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 한 폭의 풍속도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인정 넘치는 백성의 문화 공간이다. 내게 남은 숙제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장의 특색을 잘 살려낼 고유한 문화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네 시골장은 선조들의 역사이고 우리의 현재이자 아이들의 미래다. <5~7쪽>

『장에 가자』

정영신 지음│이숲 펴냄│248쪽│18,000원

출처 :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

정영신 작가의 철칙은 장터에서 절대 카메라를 안 꺼내고, 항상 반나절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고 사귀는 데 공들인다는 것이다. 사투리를 써서 외지사람이 아닌 것처럼 다가가는 것이 그 비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할머니 말씀을 귀담아 들어 배우러 온 아랫사람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렇게 다가가니 할머니들은 하나만 물어봐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고 했다.

 

 

오일장 600곳 농촌여성의 삶 사진에 담다

어르신 우울증·치매 예방하는 장터의 순기능

고령사회, 귀농귀촌인과 농촌공동체 되살려야

 

정영신

농촌 할머니 희로애락 카메라에 담다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영신 작가는 어려서부터 소설가를 꿈꿨다.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면서, 많은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토속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600여 개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카메라가방에 사탕과 담배만 넣어 다녔어요. 사탕과 담배만 있으면 장터 사람 모두와 친구가 됐죠. 장터에서 무슨 물건 팔고, 어디 구역 사람이 담배를 좋아하는지 사탕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정영신씨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말을 걸고, 점심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농장과 집에 놀러가면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했다.

“할머니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어요. 대화해보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식자랑, 동네자랑을 해주시죠.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말속에는 할머니들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장터사람들을 사귀어 놓고 나중에서야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니 정영신씨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자연스럽다. 지난 9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의 기록을 모아 ‘어머니의 땅’ 사진전을 개최하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그러면서 정영신씨는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지 말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여보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문학을 하기 위해 많은 할머니와 대화해본 결과, 책보다 더 많은 것을 할머니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할머니들도 자신을 아는 척 하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다가와 관심 가져주면 참 좋아하더라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장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

1980년대 장터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보다 구경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장 중에 장인 난장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마을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하루 팔아서 재밌을 양 만큼만, 버스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보따리에 갖고 온답니다. 욕심 없이 장에 오니까 한 번에 많이 파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그리워 장에 나왔는데 좌판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앉아 있냐고 그래요. 뭐라도 펴놔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당신도 사람 구경하지 않겠냐 하십니다.”

할머니들은 집에만 있으면 다른 생각 들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면 병나겠어서 적은 돈을 벌어도 장터에서 물건 파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장터는 농촌여성들이 왕이에요. 남자들은 차 안에만 들어가 있죠. 그래서 할머니들이 장에 나오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집에만 있으면 남편 군소리만 듣는데, 장터에 나오면 내 세상이 되니까요.”

'어머니의 땅' 사진집 표지/ 눈빛출판사/ 가격35,000원

 

농촌여성 이름 알려 성평등 의식 높여야

할머니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 마인드도 남성에 비해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손님들에게는 남성보다는 아직 여성에게 친절을 기대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여성이고, 농촌에서도 농사일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여성인데 어째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공평하지 않은지 정영신씨는 의문을 품었다.

농촌 현실이 바뀌려면 정영신씨는 농사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여성들이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물건을 자신 있게 판매할 때 구매하는 손님도 즐겁다고 했다.

“장터에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판매하는 자매 할머니를 만났어요. 가져오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나더라고요. 도토리묵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었다 말하고 끝이었어요. 맛이 좋으니까 인기리에 팔리는 건데, 두 사람의 이름 붙여서 도토리묵으로 팔면 손님들도 호칭 생겨서 더 애정을 가질 거라고 말했어요. 농사에 가치를 높이려면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어야 진정한 자신의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농산물 팔 때도 지역명, 농장이름 붙이지 말고, 꼭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더 즐겁게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방법을 소개했다.

귀농귀촌인과 소통해 농촌 고령화 극복해야

정영신씨는 앞으로는 과학이 농업에 접목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최고인 세상이 될 거라고 봤다.

“귀농하는 사람들은 더 여유 있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농촌으로 옵니다. 귀농인들은 농사지으면서도 사람들 불러서 팜파티 열고 세미나 갖고 시낭송을 해요. 기존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바깥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농촌의 변화를 버거워 해요. 여러 이유가 갈등이 돼 귀농귀촌인을 배척합니다.”

자연 속에 살면서 농산물을 가꾸는 농업인들이 왜 행복하다는 말 대신 농사가 힘들고 사는 게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농업인은 없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농업인의 목소리가 장터에서 자주 들려온다고 했다.

“옛날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농장에 가서 일손 보태며 두레로, 품앗이로 농사지으면서 시름을 잊었죠. 요즘은 할머니들이 혼자 농사짓고 혼자 논다고 말하세요. 농촌이 단절돼 갈수록 남편만 찾고, 자녀들에게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 환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영신씨는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전통시장이 위기라고 했다. 읍면에서 열리는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우리 죽으면 장도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고 했다.

대형마트 확산에 전통시장 지키려면…

농촌의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계속 이어져야한다고 정영신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마트만 이용해서 장터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마트가 생겨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장사를 못한다고 하소연하세요.”

1만 원 어치만 사도 배송을 해주는데 할머니들은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되나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지는 거래를 장터는 끝까지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1000원짜리 머리빗을 사도 장터에 단골집만 찾는 손님을 맞이할 때, 하나를 사더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할머니들은 어떻게 장을 안 나오겠냐며 말하세요. 자본주의 사회여도 장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정이 흐르는 장소로, 물건만 바뀔 뿐 장터를 이용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겁니다.”

 

농촌여성신문 / 민동주기자

 

'코리안 타임스' '어머니의 땅' 인터뷰 기사

[출처] 인터뷰 – 정영신 사진작가 “장터는 사람과 정이 흐르는 삶의 현장”|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