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 장흥에 살았고,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만언봉사'를 상소한 존재 위백규도 장흥사람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도 장흥사람이라 장흥을 '문향'이라 부른다.

 

지닌 토요일 정동지와 ‘정남진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흥에 갔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장마당이 식당 같았다.

할머니들이 장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정겨운 풍정이었다.

 

정동지는 밥 먹으라는 인사에 기다린 듯 달라붙어 쌈을 싸 먹었다.

장돌뱅이 수 십 년에 장꾼들에게 꼽사리 끼이는 게 몸에 베어버렸다.

더러 아는 장꾼을 만나면 죽은 사람 만난 것 처럼 반가워한다.

“아이구! 어찌까이~ 이리 와보랑께~ 뽀짝 와바야~ 한나도 안 늙었네”

가까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신세타령을 풀어놓는다.

 

장터에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되지 않는 손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매실이나 양파 등 집에서 키운 야채를 가져와 펼쳐놓았지만, 파리만 날렸다.

 

그 중 어물전에 손님이 많았다. “영감 밥상에 자반이라도 한 손 놓아야제!”

사람이 줄어들어 변해가는 오일장이지만, 아직은 노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 노인는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쉼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장흥의 마동욱씨 전화를 받고서야 장터에서 벗어났다.

가는 길에 교촌리 장흥천도교당부터 들리기 위해서다.

장흥천도교당은 목조전통한옥인데, 왠지 왜색 분위기가 풍겼다.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개축할 때 정면 입구에 포치형을 덧단 형태로 만든데 다

거무스름한 나무색갈이 주는 이질감인 것 같았다.

 

대청의 중앙후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네쪽 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는데,

‘성화회실’, ‘사무실’, ‘응접실’이라 쓴 글씨체가 둔탁했다.

 

장흥천도교당은 교당 건물로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과 연계된 공간구조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양식의 변형은 전통한옥이 개화기 여러 문화와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 과정의 대표적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옥당리 효자송을 찾아갔다.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나무 높이가 12m로 가슴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넓게 퍼져있었다.

나무 나이는 150년이란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위씨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뙤약볕에 앉아 아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 스러워

그 곳에 곰솔을 심어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당리 효자송 맞은편을 바라보니 궁전 같은 이상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보니,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세트장으로 사용한 ‘전관대’라고 적혀 있었다.

인적 끊긴 천관대는 잡초만 무성했다.

 

한 때 ‘사상의학 체험랜드’로 바뀌어 한방의학이 필요하거나 농촌 숙박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는데,

찾는 이가 없어 점차 폐허화 되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는데,

풀숲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자연은 살아있었다,

 

다음에는 장동면 만수리 천관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해동사`를 찾아갔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이면 제향을 지낸다.

 

장흥 죽산안씨가 안중근 의사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55년 만수사 부지에 안중근의사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해동사로 이름하게 되었단다.

장흥의 죽산 안씨들이 장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순흥 안 씨의 안중근 의사 사당을 세운 것은

민족과 대의를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높은 정신을 볼 수있는 대목이다.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숭모와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해동사를 찾는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느라 주변일대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장흥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사찰은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다.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온 체징이 터를 잡아 860년에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이 절을 소굴로 사용하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 남았다고 한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활달한 율동감이 탁월한데,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오른쪽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쓴 동방 지국천왕이 성난 표정으로 있다,

갑옷과 천의를 입은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

발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팔뚝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낸다.

 

그 외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동부도와 서부도,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해 하층기단은 좁게 구성되었다.

탑신부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가늘고 옥개석 낙수면도 얇아 가냘픈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남 탑의 보륜은 삼륜, 북 탑은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라고 한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이다.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높은 받침과 복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의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이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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