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동지 따라 지리산 권역의 산청으로 갔다.

 

산청하면 지리산이 생각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지만, 5월에는 산청한방약초축제나 황매산 철쭉제도 열린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곳은 장터 아니면 유적지 뿐이다.

 

정동지의 취재 일정이 어떻게 짜였는지 모르지만, 일단 산청 장부터 들렸다.

 

읍내 산청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시골장답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산청장 역시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기존장옥에는 사람이 없고 골목에만 행상들과 손님이 몰려 있었다.

 

점포를 지닌 기존상인만 힘들게 하는 이러한 전국적인 현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박근혜정부의 문화관광형시장 정책 때문이다.

전통시장의 특성을 무시한 채, 장옥현대화에만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토목 업자 배 불리는 일에 올인 한 것은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아서 일까?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어울리는 우리네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었다.

이에 따른 또 하나의 문제는 장터 박물관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에

수십 년 된 기존의 장옥을 모두 철거해 오래된 장옥의 씨를 말렸다는 점이다.

 

나랏돈 쏟아 부어 장터 기능 망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안한 정책 책임자를 찾아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골목 장터에는 한 할머니가 집에서 따온 딸기를 팔고 있었는데, 뼈마디 마디 앙상한 거친 손이 딸기에 물들어 있었다.

정동지는 할머니 손을 어루만지며 안 서러워 하다, 딸기 한 바구니를 사 드렸다.

긴 시간동안 차에 실려 다니다 뭉개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옆에서는 한 아낙의 손님 부르는 호객소리가 구수하다.

“산에서 금방 따온 드릅 입니더. 한 소쿠리 만원만 주이소“

 

장터에서 나와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덕천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숲이 많아 산그늘이 진다고 해서 산음(山陰)이라고도 불린 산청은 온통 갈맷빛이었다.

물기 머금은 산은 영롱한 초록빛으로 눈부셨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으로 1576년 선조 때 세워졌다.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의 중심건물인 ‘경의당“과 함께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제와 서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경의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敬’과 ‘義’를 중요시한 남명선생의 학문정신을 담은 곳이다.

 

뒤편에 자리한 승덕사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낸다.

 

덕천서원은 1600년 임진왜란과 1870년 고종 때 불탄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된 서원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과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편에 있는 전학 후묘의 배치로,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다.

 

고즈넉한 고건축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아 옛 서원의 풍모를 자랑했는데,

서원 맞은 편 물가에 ‘洗心亭’이란 편액이 걸린 정자 하나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에 앉아 마음을 씻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 마냥 아쉽다.

 

그 다음에는 삼국시대 창건된 지리산 동쪽 기슭의 ‘대원사‘로 갔는데, 절 앞에는 지리산 계곡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이 절은 1685년(숙종)에 ‘대원암’으로 창건하였으나, 1890년(고종)에 중건하며 대원사로 격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1955년에 중창하여 비구니 선원을 개설하였다. 선원은 석남사, 견성암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 도량으로 꼽힌다.

 

해인사 말사인 대원사 당우로는 대웅전, 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 ·봉상루, 천왕문,·범종각, 등이 있으며 절 뒤쪽에는‘사리전’이란 암자가 있어 수도하러 온 여승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절 입구에는 부도와 방광비가 있고, 선비들의 수학처인 거연정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은 사리전 앞에 우뚝 서있다.

646년 자장이 세웠다는 이 탑은 돌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탓으로 붉은 물이 스며 나와 탑신의 전체형상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드물게 남은 조선 전기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웠다. 전체적인 체감비율이 뛰어나고 조각은 소박하다.

 

이 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기단 위층 모서리다.

기둥 모양을 새기는 대신 인물상을 두었고, 4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처마가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약간 들렸는데, 8층 지붕돌에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탑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근처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산청 도전리에 있는 마애불상군을 찾아 나서다 ‘남사예담촌’에 잠시 차를 세웠다.

담장 너머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펴보며 잠깐 쉴 작정이었는데, 부부회회나무를 비롯하여 18~20세기에 지은 전통 한옥 40여 채가 남아 있었다. ‘예담’이란 이름은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마굿간 갤러리’에 들어가 보았다.

고가를 활용한 창작공간이라 참고할 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대문에 ‘색과 서에 빠지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누구의 작업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천연염색을 한 천이 빨랫줄에 널려 있었고, 다양한 글귀가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즈넉한 예향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고 싶은 집이었다.

저만한 고택을 구할 수야 없겠지만, 정선 만지산에도 저런 집을 짓고 싶었다.

 

한옥에서 다시 도전리로 향했는데, 마애불상군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사이로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니, ‘부처덤’으로도 부른다는 자연석 암벽이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자연암벽에 29구의 불상들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4단으로 새겨놓은 불상은 1층에 14구, 2층에 9구, 3층에 3구, 4층에 3구가 있었는데, 크기는 30cm 안팎이었다.

 

대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아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강했다. 대개 비슷비슷하게 새겨졌으나 옷 모양이나 손모양 등의 세부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찾아다닌 유적지 외에도 산성이나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등 가 볼 곳이 많았지만, 당일치기로는 무리였다.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지만, 그래도 정동지 와의 유적 여행이 유일한 낙이고 행복이다.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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