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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작업의 의미 :

니체 예술론 위버멘쉬 개념을 중심으로

 

이광수

 

 

Meaning of the Photography of Moonho Cho in terms of

Nietzcche’s Ubermensch with the special reference to

Urban Poors of Dongjadong and Seoul Station Vicinity

Kwangsu Lee

 

 

 

목 차

 

Ⅰ. 머리말

                                                      Ⅱ. 니체의 예술론과 조문호 다큐멘터리 작업

                                                        Ⅲ. 《동자동 사람들 작업의 》 위버멘쉬적 성격

Ⅳ. 맺음말

        참고문헌

 

 

이 논문은 2023년도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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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약 ]

   사진을 전시를 위한 예술 작품으로서 보다는 기록 중심의 성격이 더 강한 작업을 하는 사진가의 작품은 근대 미학 밖에 있는 예술론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한 예술론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니체의 예술론을 둘 수 있다. 니체의 예술론은 결과가 아닌 과정, 특히 삶의 태도를 예술성의 생명으로 여긴다. 조문호의 동자동 쪽방 주민과 서울역 노숙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기저에는 니체 예술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 있다. 고통받는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육 당하지 않아야 하는 인간 실존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그들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의 삶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대면하고 부닥쳤으며,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재현할 때 조형미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과 최대한 가깝게 있는 그대로 재현하였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따라서 그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성을 평가하고자 하면,  단순히 근대 미학의 결과물 중심에서 형식주의의 창의성으로만 해서는 온당치 못하다. 이미지와 살아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대상 사진가 독자의 총체적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존재와 상황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고,  개체를 전체 속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조문호의 작업은 서사 안에서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인 예술작품이 아니고, 전체가 하나로서 통합하여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지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진가가 사진의 대상 내부로 들어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작업을 하였다는 의미가 강하다.

 

[Abstract]

    The work of photographers whose documentation-oriented practice contradicts photography's identity as an artwork for display should be evaluated by artistic theories outside of modern aesthetics. One such artistic theory is Nietzsche's, which is based on ancient Greek aesthetics. Nietzsche's aesthetics considers the process, especially the attitude of life, as the life of artistry, not the result. Nietzsche's aesthetic clearly underlies Cho Moonho's documentary work on the lives of the residents of Dongjadong and the homeless at Seoul Station. This is because he affirms the fate of suffering human beings, has a strong sense of human existence that should not be exploited, enters into their lives as a member of the community, confronts and encounters their lives without trying to avoid them, and reproduces their lives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facts without being biased toward artifice in the resulting photographs. Therefore, if we want to give meaning to his work and evaluate its artistry, we cannot simply focus on the output of modern aesthetics and formalist creativit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age and the living world must be understood dialectically, in the total relationship of subject-photographer-reader. Cho Moonho's work exists as a Dionysian art in which each image in the narrative is not an independent work of art, but the whole is unified as one, oriented toward 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

 

 

색인어 : 조문호 다큐멘터리 , 사진 니체 , 위버멘쉬 디오니소스 , 예술 도시 , 빈민

Keyword : Cho Moonho, documentary photography, Nietzsche‘s Ubermensch, Dionysian art, urban p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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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I. 머리말

사진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기록성과 심미성의 두 성격을 동시에 가졌다. 이질적인 두 성격이 공존하기 때문에, 어떤 사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진학자 박상우는 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미지 표면의 세계에만 머물지 말고, 이미지를 탄생시킨 이미지 이전의 세계 즉, ‘생산한 것과 생산된 것’, 혹은 '사진 생산’ 과 사진 수용을 분리하지 않고, 독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박상우, 2016. 61-2)  이는 존 태그(John Tagg)가 말한 바 사진은 정체성이 없고, 기술로서 지위는 그것에 부여되는 권력관계에 따라 변하면서 실제 행위로서의 성격은 그것을 작업하게 만드는 대행자와 기관에 의존하는 것이라서, 그 결과물은 그것들이 특정하게 통용되는 체계 안에서 독해하고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John Tagg, 1993. 118) 규정의 연장선 위에 있다. 사진은 스스로 말을 하지 않는 언어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불완전하고, 그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맥락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적어도 기록의 의미를 우선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라면, 사진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독해 되어야 하고, 리얼리티의 객관적인 기록이나 미적인 창조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적 산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 이기중, 2011, 130) 그렇지만 다큐멘터리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을 평가하는 일은 근대 미학이나 예술론 위에서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추세를 이끌어가는 데는 뉴욕현대미술관 같은 전시 권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단언하듯, 사진은 미학의 담론에서 기능하는데, 그것은 전시 공간을 중심으로 자신을 구축 해왔기 때문에, 그 공간이 공공 미술관이든, 공식 살롱이든, 세계박람회장이든, 또 사적인 전시회 든 간에 사진은 전시장이라는 연속된 벽의 표면 위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전시 공간을 재현하면서 예술작품을 구축해가는 것이라는 ( 크라우스, 2002. 332-3)  담론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평가의 주요 기준을 제시한 사람이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 전 뉴욕현대미술관장이다. 사코우스키는 《사진가의 눈》 (The Photographer’s Eye) 서문을 통해 사진의 표현력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 미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이후 사진에 있어서 형식성은 사진 평가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뉴욕현대미술관의 관장인 그가 규정한 바가 기준이 되면서, 설사 기록성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표현력의 형식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진은 아무리 ‘사실 (fact)을 기록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일지라도 사실을 그대로 재현 할 수는 없다. 특히 피사체가 사람일 경우, 사진가와 피사체 간의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피사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카메라가 자신 앞에 놓여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든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 사실을 과학적으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 재현의 성격 안에서 사회적 행위로서의 어떤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재현은 가능하다. 사진 재현이 갖는 그러한 본질적 의미 때문에 사진가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둘 수밖에 없고, 사진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긴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작품일지라도 ‘결정적 순간 이나 프레이밍의 시각적 긴장을 통해, 감성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품이 후하게 평가받는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일지라도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가 말하듯 ‘당신 사진이 좋지 않다면, 당신은 대상에 충분하게 가깝게 다가서지 못한 것이다 라는 말이 보여주는 사실성보다는 사실성을 미적으로 만드는, 그래서 그 위에서 스토리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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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주류의 위치에 선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 미학에 기초한 형식미를 거부하는 작품은 작품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주의의 예술성을 따르지 않고, 사실의 기록과 사진 행위의 도구적 가치에 따라 작업을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여전히 있다. 그러한 작품을 평가할 때, 전시를 위한 표현력의 형식성만이 어떤 예술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이 제기하는 문제의 출발점이다.

 

   1940년 뉴욕현대미술관이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두면서 인화가 작품평가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결과물이 아닌 사진가의 작업 의도와 과정은 평가에서 대부분 제외되었다. 사진은 전시 예술의 대상으로 지위가 변하면서, 고품질 인화와 영구 보존 및 소장을 위한 예술작품으로 평가하는 일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시를 위한 사진, 예술작품을 위한 사진으로의 성격에 동의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50년에 이미 현대 사진이란 무엇인가 라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심포지움에서 어빙 펜(Irving Penn)을 비롯한 몇몇 사진가가 현대 사진의 최종 작품 단계는 인화된 프린트가 아니라, 인쇄된 책의 페이지이며, 현대 사진가들은 사진을 예술로 생각지 않고, 사진이 예술적 대상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필립스, 2002,.54) 사진의 전시 예술품으로 서의 정체성에 반하는 기록 중심의 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은 여전히 전시 담론 밖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품은 무엇을 토대로 어떻게 그 예술성을 평가해야 하는가?

 

   그러한 근대 미학 밖에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미학에서는 작품의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행동을 가치 판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이 연장선 위에서 니체의 예술론도 결과가 아닌 과정 특히 삶의 태도를 예술성의 생명으로 여긴다. 니체의 예술은 그리스 미학을 구성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결합체로서 역동적인 것이 되는데, 그 안에서 형식보다는 의미가 주요 요소로 작동한다. 이글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의 작업을 니체 예술론으로 평가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Ⅱ. 니체의 예술론과 조문호 다큐멘터리 작업

  니체의 미학은 전체성, 형식성, 보편성이라는 근대 미학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평가한다.( 강영계, 1998.115)  미학의 전통에서 볼 때, 니체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어져 온 형식 중심을 넘어 작품이 존재하기까지의 행동의 의미를 중심으로 삼는 미학 전통에 속한다. 따라서 니체의 미학 안에서는 절대적 미(美) 그  자체 혹은 이해 관계없는 관조 혹은 순수 예술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예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원리인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1) 그 가운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 자체인 세계에서, 그 고통을 직시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고, 아폴론적인 것은 쉴 수 있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잠시일 뿐이고 결국 가상일 뿐이어서 그를 통해 고통의 무의미성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형식성이나 표현성을 벗어나는 것이라서 균형과 비례 혹은 조화 혹은 객관성에 

 

1) 니체의 예술론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에, 아폴론적인 것은 이미지에 근거한다. 거기에서 시각예술인 회화 조각과 건축 즉 미술은 아폴론적 예술, 청각예술로서 일체 형상을 초월하는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에 속한다. 아폴론적 본성은 형식과 틀을 중요시하고, 디오니소스적 본성은 형식과 틀의 경계를 파괴한다. 사진은 조형적 성격이 더 근본적이라서 굳이 구별한다면 아폴론적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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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신과 도덕의 당위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며, 광기나 도취를 통해 고통과 만나는 것이다. 그. 안에서 관객은 그 예술을 통해 삶의 문제와 고통을 대신 체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예술론에는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그 위에서 니체는 그동안의 미학이 미(美)를 정리할 때, 예술가는 빠지고, 예술을 감상하는 자를 중심으로 해왔다고 비판한다.(홍일희, 2014. 298)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서의 예술을 상정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치유하는 것과 같은 형식미에 치우친 예술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 예술론 위에서 조문호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일까?

   

    조문호는 2016년에 서울의 대표적인 도시 빈민 주거지인 서울역 앞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갔다. 그 스스로가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의 도시 빈민이라 그곳에 거주할 수 있어서 들어 간 것이고, 단지 사진 작업만을 위해 외부인으로 그곳에 들어간 건 아니다. 그는 그때부터 2021년까지의 5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동자동 쪽방촌과 서울역 앞의 도시 빈민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노숙인, 길에서 살다 -쪽방촌에서 보낸 5년의 기록- 을 냈고, 블로그《인사동 사람들》의 ‘동자동 쪽방 사람들’ 에 기록하였으며, 이 후 현재 블로그 '서울역전 사람들’에 서울역 앞 빈민들의 영정 사진 작업을 게재하고 있다. 사진가 조문호는 50mm 단일 렌즈가 달린 컴팩트 카메라 NIKON Coolpix P310으로 사진 작업을 한다. 노출, 셔터 스피드 등을 통한 다양한 표현을 빌리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감각적인 프레이밍을 하거나, 앵글이나 화각을 다양하게 하여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 후보정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일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표현에 치중하여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감성적으로 제시되고, 독자가 더 큰 자극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태도를 못 마땅해 한다. 따라서 그의 사진들은 형식미에 치우친 작품을 선호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판매하는 용도의 작품으로 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사진을 찍는 것은 그들 도시 빈민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건 그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살아가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그 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진이 소용이 있었으면 하여 기록하는 것이고, 특별한 표현력을 발휘하여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사실 그대로만 찍으면 그것 자체가 충격이기 때문이다. 결과물 로서의 사진에 대한 그의 태도도 마찬가지로 실체 중심적이다. 그는 동자동 주민들을 사진으로 찍어 인화한 후, 동네 놀이터에 빨랫줄을 걸고, 거기에 널어놓고 피사체가 되는 주인공에게 인화물을 돌려주는 행위를 한 것은 자신의 사진이 전시를 위한 이미지가 아니고, 그들의 주체적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되게 하는 걸 바라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영정 사진을 작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니, 단지 초상사진이 사진의 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고, 그들에게 자존감을 북돋워 패배 주의적 생각을 버리게 하고 싶어서다. 이는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형식미를 중시하는 다큐멘터리가 지닌 미적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진 존재 가치는 피사체가 사진을 통해 자기 삶을 존중하면서 인간으로서 대접받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니체가 세상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에게 온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자기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위버멘쉬(Ubermensch) 2)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과 통한다. 니체는 생명 있는 존재는 자신의 힘을 방출하고자 하는 의욕

 

2) ‘초인’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초인 이 갖는 슈퍼맨, 초월자 등으로 오해할 수 있어서, 원어로 그냥 쓰는 게, ‘ 낫다’, 는 니체 연구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라 '위버멘쉬'라 쓰기로 한다. 위버멘쉬는 도덕, 전통, 종교 등을 깨고 나와 인간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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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 위버멘쉬로 가는 과정에서 의욕의 성장으로부터 창조적 활동이 생기고, 거기에서  활동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 사진가 조문호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동자동과 서울역 주변의 도시 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과 서울역 앞 빈민들은 사회의 보편적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니체가 말하는 광기를 보이며 사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자연 본능의 무의식적인 힘에 최대한의 찬사를 보였고, 조문호는 그들 동자동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재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앵글이나 화각 등에서 자신만의 독특함을 보이지 않고, 가장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장면으로 재현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그 광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제에 대해 사진가가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재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조문호는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할 수 있는 한,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조명은 자연 채광만을 이용하고, 프레이밍을 통한 왜곡을 하지 않고, 결정적 순간이나 기하학적 패턴과 같은 형식 혹은 구도를 만들어내려 노력하지 않으며, 대상을 부담스럽게 혹은 낯설게 만듦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더 오래 잡기 위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조문호는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사진 이미지의 예술성보다, 사진 작업을 통해 피사체인 도시 빈민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에도 있지만,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로서의 성격에도 있다고 보는 사진가다. 그. 이유는 사진은 대중이 현실을 목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언어 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는 도시 빈민들이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데, 자신의 사진이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최대한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조문호, 2013).

 

   조문호의 이러한 태도는 피사체 세계의 외부자 혹은 산책자로서 그들을 관찰하지 않고, 내부자의 시선으로 작업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그 스스로 피사체 대상과 동질성을 가진 도시 빈민의 위치에서 사진 작업을 하였다. 그러면서 소위 결정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고, 사진 여러 장이 이루어 내는 전체적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50mm 표준렌즈로만 촬영했으니, 그 이유는 표준렌즈가 인간의 시선과 가장 비슷한 렌즈라고 생각해서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충격적으로 보이면, 그건 그의 사진이 그의 어떤 표현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가 재현한 피사체의 현실 자체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림1과 그림2 가 그 좋은 예다. 가상의 이미지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만든 이미지에 글을 보태서, 글과 사진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목적은 소위 말하는 예술성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도시 빈민들에게 인간으로 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제도와 문화를 고치도록 호소하는 것이다. 그1 이 실린 블로그에서 조문호는 ‘죽지 못해 산다.' 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말한다. "다들 가족과 즐겁게 지낸 정초에 무슨 놈의 천형의 죄를 지었는지, 지하도의 돌부처가 되어버렸다. 죽느냐? 사느냐? 아무 생각도 없다. 신 이시여! 이제 자리를 바꾸소서. (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5067). 니체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는 언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림2 와 관련하여 그는 "지하철 통풍구에서 몸 말리는 노숙인들"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내리면 다들 음습한 곳으로 숨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오들오들 떤다. 비가 그치고 나서야 노숙인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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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은 지하철 통풍구에 드러누워 젖은 몸을 말렸다. 이들도 한때는 교육, 근로, 납세, 국토방위 등 헌법이 정한 4대 의무를 다하던 국민인데, 왜 정부에서 최소한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까?”( 조문호, 2021. 66~7).

 

그림 1
그림 2

  조문호는 자신의 작업에서 작가 든 독자 든, 그 대상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조문호는 전작 《 청량리 588》에서도 그랬듯이,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 즉 집창촌 여성의 삶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일부러 부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의 실존적 가치를 드러낼 뿐이다. 형이상학이나 이념을 앞세워, 삶을 의미 있게 꾸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힘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진 행위는 소외 속에서 실존을 부인하는 현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문호 사진의 대상은 그것이 집창촌의 성(性) 노동자 든 동자동과 서울역 앞 도시 빈민이든, 현대성에서 벗어난 혹은 적응하지 못한 자유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조문호는 그들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면서 함께 살았다. 청량리 집창촌을 작업하면서, 그는 마음과 정 뿐 아니라 몸까지 바쳐가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 결과 성병에도 걸리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이념이나 관념이 아닌 몸으로 사는 삶을 살고,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사진가라면, 니체식으로 볼 때, 몸의 예술가 즉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에서 몸을 경멸하는 형이상학자를 비판하며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가치 전도를 실행하고, 몸을 사유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조문호가 특히 ‘창녀’ 와 ‘거지’ 와 같은 몸의 삶을 사는 소외계층의 삶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은 니체의 주류에 대한 저항으로 서의 위버멘쉬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예술과 삶이 본질적으로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춤의 예를 들면, 우리가 아름 답다고 규정한 외적인 기호에 따라 실행되는 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관객과의 일체감을 이끌지 못한다면 진정한 춤의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이루는 여러 외적 요소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몸의 운동과 결합하지 않은 음악은 결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니체의 예술론을 사진에 대입해보면, 몸과 함께 나온 삶의 사진이라 야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 결과물로서, 외형적 아름다움으로 서 사진이 아니고, 삶 속에서 삶을 작업하는 사진이라 야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일 뿐이라서, 그 자체로서는 니체가 말하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지만, 사진을 작업하는 조문호의 삶 자체로서 의 작업은 몸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내용으로 인해 작품으로서 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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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것이 기록적 의미의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든, 해석이나 예술을 지향하는 소위 작품성이 강한 사진이든 모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데, 이는 철저한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혹은 니체 말 대로 하면 ‘탈감각화’ 의 소산이다. 조문호는 이러한 이성 중심의 상징과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는  찍힌 분들이 좋아하는 사진이 더 우선이라고 분명히 한다. 그들의 “취향을 일일이 알 수가 없어, 모든 사진을 올릴 뿐이다. 또한 내가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방법이기도 하고...빨랫줄 사진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보다 그들이 좋아할 사진이나 영정 사진을 뽑는다. 사진의 작품성 운운하는 웃기는 소리 제발 하지 마라. 내 사진은 예술이나 작품이길 단연 거부한다.”( 조문호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4720). 기존의 근대 미학에서 형식 가치를 중심으로 작품성을 평가하는 이성적 행위에서 벗어나, 니체가 중요시하는 행위와 감각을 중심으로 보면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사진은 매우 니체가 평가하는 역동적 예술이라 할 만하다.

 

   니체가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사회 안의 소위 문명인들에게 어떤 초월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탈 사회적이고 탈규범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안일하게 벗어나는 일탈이나 정립된 도덕을 위반하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고, 주체적으로 도덕이나 규범을 어기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조문호가 .처음 사진에서 그러한 의미를 찾은 것은 소위 청량리 588 윤락녀를 통해서 였다. 그들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감각적 욕망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몸의 행위로 몸을 판 사람들이다. 그. 행위는 기존의 사회 도덕과 충돌하였으니, 사회에서는 그들을 윤리를 타락시키는 여자 즉 윤락녀라고 규정했다. 그들 소위 윤락녀와 마찬가지로 조문호가 현재 작업하는 도시 빈민도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의 규범과 충돌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행하는 탈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행위를 니체의 숭고 혹은 위버멘쉬 개념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예술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의 예술은 사회의 어떤 기준이 되는 통념을 위협하고, 그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문호는 그들의 몸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하였으니, 니체의 디오니소스 예술론 위에서 행한 예술 행위로 의미 를 부여할 수 있다.

 

Ⅲ. ≪ 동자동 사람들 ≫ 작업의 위버멘쉬적 성격

    조문호 사진의 제 성격은 1) 대상을 촬영할 때 자신의 주관적 시선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배제하는 것이다. 근대 미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주관성 혹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니체 예술론으로 말하자면, 아폴론적 예술성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대상을 주체로 전환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되, 독자가 모호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여, 주체가 자기 존재 의미를 분명 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러한 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로 자신이 소망하는 세상 즉 도시 빈민이 인간적으로 존중 받도록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그의 사진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결과물 이미지의 심미성 하나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그 이미지를 둘러싼 세 주체 즉 대상, 사진가, 독자가 맺는 총체적 관계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평가해야 한다.

 

3) 실제로 그는 2000년에 빚더미에 눌려 자살하는 동강 주민들의 이야기를 적은 편지와 포토 에세이집 《동강 백성들》을 김대중 대통령께 보내 농민들이 보상받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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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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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총체적 관계는 그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을 사용하는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조문호 사진의 총체적 관계는 노숙인이라는 도시 빈민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사진은 해석이 무한 허용되는 매체라 사진가가 대중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주도록 대상을 스트레이트로 찍고, 텍스트와 함께 제시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이에 대해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으로 말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적 기록만을 고집해 왔다. 사진 최고의 가치는 허상을 좇는 게 아니라 진실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447) 조문호는 사진 이미지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에 가깝게 찍으려 하기에, 대부분 대상을 구도 중앙에 위치한다. 일부만 도려내거나 일부를 강조함으로써 의미를 전유하는 촬영 방식은 취하지 않는다. 대상에게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다는 걸 피사체에게 알려주고 찍거나 ( 그림3)  그 이전에 이미 라뽀가 형성되어 있어서, 특별하게 말로 알릴 필요가 없이 찍고, 그 사실을 알린다. 서로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이라 공감 받고, 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사진가와 피사체 대상 사이에 신뢰의 관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그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촬영하는 것이, 그의 사진이 갖는 관계성이다.

 

그림3

   조문호는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가 도시 빈민을 작업한 6년 동안, 그 스스로 도시 빈민의 일원으로 그들과 함께 살았다. 따라서 그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대상에게 다가가서 찍어야 하니, 촬영 이전에 인간적 관계 형성을 먼저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는 상대의 양해 아래 연출 없이 촬영해야 하고, 찍히기 싫어 하는 사람은 찍지 않고, 대상 몰래 찍지도 않는 사진가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라뽀를 형성할 수 있었고, 항상 그가 사진의 생명이라 간주하는 눈을 마주 보면서 찍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진의 태도에서 그는 2022년에 새로운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새 작업은 서울역 앞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 작업은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하는 작업 이다. 사진은 그 대상이 원하는 것이 사진가가 원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정 작업을 시작한 연유는 이렇다. “얼마 전 찍은 사진을 당사자에게 주었더니, 이런 사진 말고 얼굴만 크게 나오도록 찍어 달라는 것이다. 아마 방에 걸어 두었다가 영정 사진으로 활용할 생각인 것 같은데, 그들 생각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개인적 목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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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 기록성보다 당사자의 필요성이 더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640). 그림4가 바로 그 영정 사진이다.

 

그림4

    조문호는 도시 빈민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미국의 저널리스트로서 뉴욕 슬럼가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삶을 작업한 제이콥 리스(Jacob A. Riss)와 비교할 수 있다. 리스와 조문호는 빈민들이 거주하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촬영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리스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가난, 범죄, 매춘, 질병 등 비도덕적이고, 사회의 악이라 치부되는 여러 현상을 고치고, 부자들이 자선을 베푸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자본주의를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기 위해 그들의 삶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으나, 조문호는 당사자로서 대상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조문호의 사진은 미적 감각보다는 사실 제시에 초점을 맞춰,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미지로 서의 성격이 우선이라는 점에서 리스의 사진과 다르다. 이는 리스가 사회운동가로서 대상을 사회 문제 해결 차원으로 다루었지만, 조문호는 그들의 휴머니즘을 우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궁극적인 차이는 리스는 뉴욕의 슬럼가에 들어가지 않고 외부인 저널리스트로서 봤고, 그 현상을 외부자적 시선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리스는 그들의 삶을 외부에 보이는 가난과 비참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조문호는 그들 내부에 들어가 공동체 일원으로 살았기 때문에 외부 모습보다는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조문호는 리스와는 달리 그들을 대상화 하지 않았다.

 

   조문호는 동자동과 서울역 부근의 도시 빈민을 사회운동의 대상이 아닌 휴머니즘으로서의 관계로 출발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선량한 시민으로만 본 건 아니다. 도시 빈민 연구에 의하면, 도시 빈민 쪽방 주민들이 쪽방촌에 길게는 수십 년을 거주하면서 쪽방 생활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데, 쪽방을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아니라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쪽방의 한계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 위안함으로써 떠나지 못한다. ( 김효진, 2009. 76).       

   사진가 조문호는 이러한 이중적 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따뜻한 정이 있는 관점에서 그들 삶의 사실을 기록하지만, 돈 때문에 자기 이익 때문에 여전히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모습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조문호 그 자신도 어느 쪽방 주민에게 카메라를 도둑질 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이 노동하지 않고 구걸 행각을 일삼는다는 비판에, 그들은 여러 원인으로 정신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아 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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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대변하지만, 그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진 그들의 모습을 애써 감추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서 라도 그들을 비참하게도 착하게도,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보지 않는 관점을 유지한다. 사진가의 .눈에 비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림 5 는 도시 빈민일지라도 여전히 뭔가를 더 갖고 싶어 하는 물질에 종속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버리지도 못하고, 더 이상 쌓아 놓을 수 없는 공간인 데도 어디선가 주워 와 방안에 짐이 쓰레기처럼 쌓인 쪽방촌 사람들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가는 도시 빈민이라고 해서 다 필요 없고,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유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장롱도 있고, 책도 있고, 옷도 수시로 바꿔 입고 싶은 마음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5

   조문호는 그곳 주민들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고 버림받아 사는 실패자임을 냉정하게 보여주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정을 가지고 산다고 말하는데, 더 무게를 둔다. 조문호는 그들의 삶이 대중의 편견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볼 때는 비참하지만, 실제로는 차라리 더 인간적이다. 그는 주민들이 쪽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이주했음에도 쪽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쪽방이 물리적 주거 공간으로 서의 의미를 넘어, 지역주민들과 상호교류를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주민들 간의 유대감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공간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그림 6은 정이 그리워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월세방에서 쫓겨난 노숙인의 집들이' 라는 ’글에서 그들의 정을 쌓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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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구성하는 것은 도취 주관성 자기 망각 등 반(反) 이성이다. 따라서 그 예술은 승화되고, 절제되고 정제된 것이 아니고, 도취 상태에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문호의 《노숙인, 길에서 살다.》 첫 페이지에 들어간 사진은 그림 7 이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널브러진 모습을 하나의 과장이나 자극없이, 할 수 있 는 한 있는 그대로 찍었다. 그리고 그들을 “모든 희망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됐다. 서울역 후미진 곳에서 천국 행 열차를 기다린다." .( 조문호, 2021. 22)고 글로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진가 조문호가 그들을 부랑아, 쓰레기 같은 사람들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천국’ 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를’ 통한 위버멘쉬의 개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사회가 정한 질서에서 일탈해, 사회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개념으로는 연결이 가능하다. 조문호의 작업은 노숙인의 원초적인 힘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술로서 하는 차원의 작업이라 고는 할 수 없고, 그가  하는 사진을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전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다만 니체의 예술론이 설파하는 위버멘쉬의 개념과 정신은 조문호가 하는 작업과 그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7

    조문호가 사회로부터 핍박 받으면서 고독과 소외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도시 빈민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정해 놓은 질서 안으로 들어와 복종하도록 강제하고, 그들은 그러한 강압에 쓰러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뿌리는 다름 아닌 고독과 소외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조문호는 요즘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고, 동물조차도 먹이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와 고독이라고 말한다. 사진가는 노숙인 최씨의 목소리를 글로 전한다.  “ 제발 우리를 괴물 보듯 피해 다니지 마라. 우리도 .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고 묻지도 마라. 그. 말은 네가 잘 못 살아 그렇게 됐다는 나무람일 뿐, 개인의 불행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잠자리와 일자리, 그리고 치료받을 권리다. 그건 모든 국민이 똑같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다." (조문호 , 2021. 38) 니체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철학자가 보는 당위성의 문제고, 실제 세상에는 쓸모없는 존재는 처절히 버림받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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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가가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 즉 휴머니즘이 사라진 세상은 니체가 가장 열성적으로 비판한 주제다. 니체가 말하는 그 사람이 사라진 세상은 곧 고독사의 세상이다. 동자동 도시 빈민이 고독사 하는 것이 한 해에 수백 명이 넘는데,  그림 8은 니체의 그 도시 빈민의 고독사를 나타낸 사진이다. 도시 빈민으로 죽은 사람을 위한 추모제를 매년 동짓날 지내는데, 연고를 찾지 못하는 가족과 모든 관계로부터 버림받은, 그래서 영정 사진 하나 가지지 못한 세태를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후 조문호는 지금 쪽방촌 주민 가운데 원하는 사람에게 영정 사진을 찍어주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진가의 이러한 태도는 예술이란 사랑이나 정신의 고양 차원에서 가 아닌, 몸으로 대할 때 비로소 예술성을 갖는다는 니체의 예술론에 부합하는 태도다. 조문호가 노숙인을 기존의 지배 담론에 대한 저항의 한 모습으로 해석한 것은 이러한 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긍정하는 맥락에서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미쳐야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미치지 못해 천국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347)

 

그림8

  사진가 조문호가 도시 빈민에 대한 각급 정부 당국이나 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의 자선 행위는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삼지만, 사실은 그들을 울타리에 가두고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조문호는 《노숙인, 길에서 살다》에 수록된 전체 177장의 사진에서 10퍼센트인 17. 9 장을 그림과 같은 줄 세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사용했다. 전체에서 가장 많은 장면은, 그 빈민들이 술 먹고 쓰러져 있는 장면으로 22장이 사용되었다. 책의 마지막 본문의 사진 또한 줄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진으로 썼고, 바닥에 나뒹구는 그림 7을 책의 첫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사진가는 노숙인의 삶을 버림받음과 줄 세우기라는 두 코드를 가장 중요한 구성 인자로 생각한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포기의 삶을 사는 그들의 모습은 사진가 조문호 아닌 일반인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줄 세우는 것을 사육 당하는 걸로 해석하여 그에 반대하는 것은 조문호가 니체의 세계관에 서서, 세상이 온정을 베풀면서 그들을 사육 시키려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조문호의 이러 한 관점은 공동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사람을 평준화를 통해 가축처럼 길들이는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니체의 입장과 같다.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쪽방촌에 살다 보니, 가끔은  '레이더스' 가 부른 '인디언 보호구역' 이 떠오른다. 쪽방촌이 마치 빈민 보호구역 같다는 생각 에서다. '보호한다' 는 긍정적인 뜻 이면에는 '길들인다' 는 측면도 깔려 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람을 사육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빈민들은 보호보다 자립할 수 있는 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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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어 주는 게 더 급하다. 수입만 생기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잘리니,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막은 것이다. 그러니 다들 . , 일하지 않고, 주는 것만 받아 간신히 연명하는 것이다. 난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죽어도 사육 당하기는 싫다.  ( 조문호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4151). 인간 삶의 자기 고양을 위해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독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는 태도가 니체의 세계관과 같다. 조문호가 인용한 노숙인 천씨가 뱉어 낸 말 "세상을 원망하랴! 마누라를 원망하랴.!’( 조문호 2021, 173)라고 말하는 건 전형적인 니체의 아모르 파티, 즉 삶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겪으면서 앞으로 가야 한다는 니체의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림 9

Ⅳ. 맺음말

   조문호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최대한 사실적인 사진으로 재현하여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절감할 수 있게 한다. 니체에게 예술은 실용적인 도구이듯, 조문호에게도 사진은 실용적 도구다. 고통의 사실을 극복해가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는 노숙인의 삶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정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사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찍어 사회에 호소하였고, 찍은 사진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고 책으로 제작하였을 뿐, 대상의 조형미를 강조하면서, 각각의 이미지를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작품으로 전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할 뿐, 리얼리티를 더 높이기 위한 표현력을 부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고, 달리 소비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문호에게 부랑자, 노숙인, 매춘녀 등은 니체 예술론에서의 광기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광기의 인간을 그들이 사는 내부로 들어가 내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조문호 작업이다.

 

    니체의 예술론 위에서 사진 이미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조문호의 사진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사진은 조형 이미지이니 아폴론적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재현적 모방이 관조나 절대적 아름다움이나 사실주의 등 아름다움과 예술을 설명해주던 기존의 기본 장치들을 토대로 할 때는 그 의미를 상실하겠지만( 백승영, 2014. 61),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에 드러나듯, 미적 체험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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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체험을 정신적 차원의 것에서, 인간의 총체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니체의 예술론 특히 위버멘쉬 개념과 부합되면서, 그 안에서 총합적 예술의 의미를 창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록 재현이지만, 관조나 순수의 개념으로 만드는 아름 다움의 재현이 아니고, 총체적 행위의 의미로서 행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니체의 디오니소스 예술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문호는 형식주의 미학을 따르지 않는다. 사진 이미지 그 자체보다는 사진을 찍는 행위와 그에 대한 접근 태도, 즉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도구적 성격으로 서의 행위를 중시한다. 이성 중심의 형식주의와 개념화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부터 탈피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시작된 니체의 철학은 예술과 삶의 전통적 분리를 지양하고, 예술이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삶 위에 군림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면서, 예술은 인간이 겪었던, 그리고 겪을 수 있는 고통과 같은 문제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진우2014.16). 조문호의 작품은 이러한 니체의 몸 중심의 예술 작업의 산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문호가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동자동 쪽방촌과 서울역 부근에 사는 도시 빈민은 세상의 경쟁에서 낙오되었으나,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 않고, 말년의 니체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나와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사진가 조문호 또한 한 가정에 정착하지 않고 자식과도 거리를 둔 채, 사진가로서 삶을 평생 살았다. 니체에게 외적 풍요는 내적 궁핍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 힘을 끄집어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전적으로 예술이 필요하다 했으니, 그에게 예술은 조형화 된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했다. 조문호는 노숙인의 원초적인 힘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술로서 하는 차원의 작업이라 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그가 하는 사진을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 작품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위버 멘쉬 를 통한 디오니소스 예술로 서의 행위에 따른 작업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가 말하듯 이제 사진은 의미를 미학화, 결과적으로 형식화 하고 배경이 되는 상황과 정치적 차원의 존재를 부정하는 궤적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지와 살아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면 (로슬러 , 2002. 367)  조문호의 도시 빈민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은 니체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형식주의와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파편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상황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고, 개체를 전체 속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이면서 사진을 심미적 결과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조문호의 작업은 서사 안에서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인 예술작품이 아니고 전체가 하나로서 통합하여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지향하는 작업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인간을 주체적으로 봐야 한다는 니체의 실존주의가 서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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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04)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민음사

[4] (2016) 니체 『비극의 탄생』 서울: 동서문화사.

[5] (2002) 니체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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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가 니체 대 바그너 』 서울 책세상,

[6]  (2007), 단토 아서 김지원 옮김, 「예술 세계란 무엇인가 」, 『예술과 미학 』 서울 , 종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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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서울: 눈빛

[8]  (2007) 머골리스 조셉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특성」 김지원 옮김, 『예술과 미학』 서울: 종문화사

[9]  (2016) 박상우 「롤랑 바르트의 사진 수용론 재고,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0  2호

[10] (2014) 백승영 「니체가 제시한 미적 정의, 예술생리학과 법철학의 융합을 통한 법 미학 가능성 제고' 니체연구제26집 

[11] (2011) 사코우스키 존,『사진가의 눈』 서문, 김우룡 엮음 『사진과 텍스트』 서울: 눈빛

[12] (2011) 이기중 「사진 인류학의 연구 방법론」, 『 비교문화연구 제 17집 』  2호

[13] (2014) 이진우 '니체 몸 그리고 춤추는 사유' 니체연구 제 25집 

[14] 조문호 '역사성으로 본 보도 사진' '월간 이미지' 2003년 4월 1일 ’ .

[15] (2015) 1984-1988 : 조문호 『청량리588』 서울: 눈빛

[16] (2021) , 조문호 『노숙인 길에서 살다』 서울: 이숲

[17] 조문호 블로그 '인사동 사람들' 동자동 쪽방 사람들 https://mun6144.tistory.com/category/%EC%A1%B0%EB%AC%B8%ED%98%B8 %EC%82%AC%EC%A7%84%ED%8C%90/%EB%8F%99%EC%9E%90%EB%8F %99 %20%EC%AA%BD%EB%B0%A9%EC%82%AC%EB%9E%8C%EB%93%A4

[18] (2002) 크라우스 로잘린드 「사진의 담론 공간들」 리차드 볼턴 엮음, 김우룡 역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울: 눈빛

[19] (2002) 필립스 크리스토퍼 「사진을 판결하는 자리 – 뉴욕현대미술관」, 리차드볼턴 엮음, 김우룡 역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서울: 눈빛

[20] (2015) FOUND 최인희 『조문호 인터뷰 그래도 사람』 ’, 2015. 4. 15.

[21] (2014) 홍일희 「니체 예술적 보편성과 철학적 독자성」, 『범한철학』제74 집

[22] Tagg, John (1993) The Burden of Representation; Essay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Essay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스크랩 / 샘터 2019년 7월호]


이 달에 만난 사람 : 조문호


                 가장 낮은 곳을 올려다보는 빈자(貧者)의 카메라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 언덕배기엔 낮게 엎드린 빈자(貧者)들의 쉼터가 있다. 서울 도심에 몇 남지 않은 쪽방촌 골목. 오랜만에 다시 만난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73) 작가는 그 사이 쪽방촌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한 듯 전보다 더 밝고 편안해 보였다. “보기는 이래도 생활하는 덴 불편하지 않아요. 매달 70여만 원 씩 나오는 기초수급비에서 방값 23만 원을 내고도 돈이 남으니 걱정할 게 없지요. 월세 걱정하는 이웃들한테 어쩌다 만 원씩, 이만 원씩 집어줘도 나 혼자 사니까 충분히 지낼만합니다.”


동자동 일대엔 이처럼 보증금 없이 20만원 남짓한 월세만 내고 사는 쪽방이 천여 개나 밀집돼 있다. 작가가 세 들어 있는 다세대주택 또한 50여 개의 쪽방 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층마다 복도 양편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방들, 바가지로 물을 퍼 뒤처리를 해야 하는 공동 화장실, 한겨울에 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없이 작가는 만 3년째 쪽방촌 이웃들과 어울렁 더울렁 살 부비며 즐겁게 사는 중이다. 가진 건 비록 1인용 침대 와 컴퓨터 책상만으로 꽉 차는 1.25평짜리 작은 방 하나뿐이지만 작가에게선 여전히, 가진 게 없어 행복한 삶의 역설을 수긍하게 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밖에서 볼 땐 초라하고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정이 더 많습니다. 먹을 게 생기면 자기보다 없이 사는 사람부터 챙겨주려는 인정이 살아 있는 곳이지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동네 풍경,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곤 합니다.”

 

작가의 동자동 생활은 서른 해 넘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진실의 순간을 탐닉해온 이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는 오래 전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인 전농동 588번지를 특유의 정감 어린 시선으로 담은 사진연작 홍등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청량리 홍등가의 일상을 기록한 작품들로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애초에 쪽방촌 사진 작업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을 거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형편에 맞춰 살 집을 구해온 것뿐이라는 말로 세간의 얄팍한 호기심을 일축해버린다. “이왕 여기 온 김에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같이 생활하다보니 그것조차 다 내 욕심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계획을 접었습니다.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가 꺼려하는 사진은 안 찍는 것만 못합니다.”

 

작가라면 구미가 당길 법한 소재 앞에서도 담담히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의는 선험(先驗)에서 나온다. 윤락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와 뒤늦게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다시 작업한 청량리588의 뒷얘기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월간 사진편집장을 거쳐 동아미술제, 86아시안게임 기록사진전 수상으로 사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도 그의 관심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현장 속으 로 뛰어들어 일체의 연출 없이 대상과의 유대감을 직관으로 포착하는 작업방식을 이해 못하는 동료들도 적진 않았다. 누군가는 소재주의라는 비난을 쏟아 냈고, 그에 편승한 언론에서는 매춘(賣春)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만 부각시켜 애써 기록한 사진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 소란통에서 급격한 산업화 시대의 민낯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가의 노력도 얼마쯤 빛이 바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도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 그 작업을 누가 할 거냐고 물으면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럴수록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는 대상을 찾아내 연출하지 않고 대상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찍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장면을 연출하거나 화려한 촬영기법과 렌즈를 이용해 현실을 포장하려 한다면 다큐멘터리와는 안 맞습니다.”


 

한때 그에게도 농협 직원, 부산 광복동 학사주점 사장으로 세속의 화려함을 좇던 시절이 있었다. 30대 후반, 주점 단골손님이던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 선물 받은 사진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도 가진 게 많아 불행한 삶에 허덕이고 있을지 모른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부산 자갈 치시장의 인간 군상을 포착한 선생의 흑백사진들은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태풍이었다. “휴먼이란 제목의 사진집인데 머리가 멍해집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길로 나도 사진 한번 해볼 거라고 결심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요. 뒤늦게 사진 공부 를 하게 됐지만 월간 사진에서 일하며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대상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던 시기였지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은 선생의 영향은 그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은 내 특징은 스냅숏 기법이다. 상대가 의식하기 전에 찍을 수 있는 그 기법이 있어야 연출을 안 하고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면서 요란한 기법만 늘고 머리와 가슴은 텅 비어가는 게 끔찍이 싫다. 혼이 쑥 빠져 버린 사진은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선생을 통해 연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눈뜨기 시작한 작가 또한 그 뒤론 발을 동동거리며 부지런히 삶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87민주화항쟁>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등이 누구보다 뜨겁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작가의 사진은 사진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존의 사진관을 간단히 묵살할 만큼 반골기질이 넘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이면에 눈길을 주고 누구라도 관심 둘만한 소재, 화려한 촬영기술이 필요한 주제엔 눈도 돌리지 않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고집도 여전하다. “옳지 않은 일엔 쓴소리를 참지 못하니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게 걱정이지요. 얼마 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제가 찍은 천상병 시인의 사진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인화해준 게 화가 나 일 년간 안 만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사과 한마디 했으면 풀어졌을 텐데 사진 한 장 가지고 뭐 그렇게까지하는 태도에 속이 상합디다. 사진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허락 없이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서글펐어요.”

 

그도 이젠 서서히 체력을 안배해가며 작업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동자동에 들어온 뒤에도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찰나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바닥만 한 콤팩트카메라를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찰칵 찰칵, 셔터부터 누르던 직업병 덕분에 작가의 카메라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천상병,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 선생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숱한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또한 수십 년 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성실하게 수행해온 기록의 힘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무시로 드나드는 인사동과의 행복한 추억은 인사동 사람들이란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다. “30여 년 넘게 쌓인 사진 자료들이 조금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동료 다큐멘터리 작가들과 함께할 수 있는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볼까 고민 중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작가가 죽고 나면 유족들이 그동안 모인 자료를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경우도 흔한데 이제라도 귀한 기록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요.”

 

비좁은 쪽방촌 골목을 빠져나오며 가난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살아온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객쩍은 소리를 건네자 작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며 웃는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은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문형태형을 처음 만난 건, 80년대 후반 인사동의 부산식당에서다.

인사동 '그림마당 민'의 관장으로 있을 때, 화가 박광호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나,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데면데면, 마음의 후원자로 술친구로 한 30년 같이 지낸 것이다.

 

친밀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인사동을 처갓집처럼 오가던 화가 이청운, 최울가, 이존수, 박광호씨와 더불어

부산서 올라 온 떨거지라는 공감대였다.

서로 의기투합해 만나지는 않았지만, 인사동 술집을 들락거리다 수시로 만났다.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분단풍경이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며 딱 한 번 있었다.

기획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에 존경감이 일었는데, 사진에 대한 생각들이 남보다 앞서고 있었다.

한 개인을 24시간 기록하고 싶다고도 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친구다.

선비 같이 어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 성품을 가졌는데, 사진판의 김문호씨와 비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1980년대에는 민중, 민족미술운동 기획자로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을

기획해 미술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90년도에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 때는 진보잡지에 우리 문화에 대한 독보적인 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글이 너무 좋았다.

 

팔방미인처럼 다 방면에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그림은 한 점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가 화가라는 사실조차 잊고 산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기억나는 건, '시대정신' 표지사진에 실렸던 심상석心像石이란 제목의 세밀하게 그린 연필화가 유일했다.

두상에 상처 난 형상의 돌을 그린 건데, 강력한 저항이 느껴지는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강원도 정선으로 흘러들었고, 그는 서해안 최북단인 김포에 자리 잡았으니,

쉽게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가끔 지인들 전시뒤풀이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김포에서 민예사랑이란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문화에도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매사에 사심이 없었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 지며 조용한 스타일이지만 한 고집하는 사람이다.

언변이 자분자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의 핵심은 강건하고 논리적이다.

 

뒤늦게 그의 대표 작업인 심상석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졌다. 특히 주변 친구들의 작품 칭찬에 몸이 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155월경 그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살고 있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오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를 하루 남기고 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내 장재순여사와 함께 사는 민예사랑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북한을 눈앞에 둔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문형의 신작이냐?'고 물었더니, 최선호씨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영태 전시로 알고 일정까지 바꾸어가며 달려왔는데, 허 탕 친 것이다.

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2인전을, 문영태 전시로 착각한 것이다.

 

함께 동행한 정영신씨에게 문형 작품이 좋은데, 보여주질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 놓았더니

작품도 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말이야. 전시 한 번 해볼까.”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날 문영태씨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럿 어울려 음악회를 즐기는 등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달 후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날 찍은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 때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니,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의 초청 전화도 우연이아니라 미리 계산된 듯한 의심마저 들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앞설 뿐이지만, 기어이 그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토록 널 내세우기 싫었던가? 이 고집불통 같은 친구야!”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전 작품은 물론 생각의 면면까지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3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유작전과 도록제작을 위한, 작품촬영을 부탁받은 것이다.

심상석에서부터 청년 시절의 스케치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작업노트는 물론 일기장까지 샅샅이 훔쳐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꼼꼼한 성격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일기장에서부터 그림대회 상장까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일기장에는 유난히 새에 대한 글이 많았다. 서재에서 보이는 북녘을 바라보며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때로는 깊은 생각에 미처 잠들지 못했는지, 이런 글도 적혀있었다.

이 깊은 밤에 개는 왜 끊임없이 짖고 있는가? 무슨 일로 짖는가?”

 

일구구오년 유월 초하루라는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인철과 유은종이 들리다.

같이 마을을 돌며 구경하다

인철이 녹슨 칼 하나를 주워 나에게 주다.

칼을 받다,

이 칼은 무엇인가.

이 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칼이다.

 

우연히 마주친 사물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상흔을 형상화 하는 작가로서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반가움이 서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은 80년 광주의 상흔을 상징화시킨 심상석시리즈였다.

작업노트에 그려진 형상성의 스케치나 메모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했는지 고스란히 들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꼼꼼한 친구로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품보관이 엉망인 것이다.

쌓인 먼지는 차지하고라도 작품 곳곳에 곰팡이 자욱이 무성했다.

난 직감적으로 의도적인 방치라 생각되었다.

심상석의 세월의 풍화를 보여주고 싶었거나, 아니면 작품을 돈으로 여기는 현실을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민중문화운동가다웠다.

그만의 뚝심과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기 위해 미망인 장재순여사에게 이 것 저 것 물어보았다.

문영태씨와 맺어진 연은 녹번동 화실에 그림 배우러 다닌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사동에서 그림마당 민에서 일하며 호구지책으로 차린 게 민예사랑의 시작이었는데, 문영태씨의

우리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는 곧 바로 아내에게 직결되어 민예사랑이 인사동의 명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업가적 역량으로 가게를 일으켜 세운 아내에게 고마움도 컸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돈이란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요물이란 것을 잘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아내가 가게에 나간 후에는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가끔 있었던 두 내외간의 언쟁도 모두 술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민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고민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던, 그가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이 고집스러운 민중문화운동가 문영태를 더 그립게 하는 것이다.

 

저승에 따라 가면 문화백을 만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나 있다.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비평을 왜 중단했냐고? 왜 절필했냐고..”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출간한 "心象石 문영태"에 게재한 글입니다.

 

 

 

 

 

 

 

 

 

 

 


 


3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 2018년 03월 19일 (월) 00:09:37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다큐사진가 조문호의 산골 사람들사진전이 지난 32일부터 31일까지 정선 그림바위 예술발전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사진들은 급속한 근대화에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가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네 것을 지키야 한다는 작가의 애착도 느낄 수 있다. , 사람, 생명에 대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어,

나이 드신 분에게는 옛 것에 대한 추억을, 젊은이에게는 옛 것의 소중함과 새로움을 안겨 준다.




 

이 사진들은 동강이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던 1990년도 무렵부터 촬영된 사진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생태환경을 기록하기 위해 귤암리 만지산 중턱에 캠프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동강의 생태환경과 동굴, 야생화, 조류, 어패류 등 각기 전문분야 사진가들로 구성되어 투입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던 그는 생태환경에 앞서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 온 주민들에 더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인본을 외치며 평생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다.

강보다 사람부터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타 환경단체와 다른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긴 세월의 땜 건설 논란으로 빚더미에 올라 선 농민들부터 살리자며 피해보상을 주장한 것이다.




 

그때 시작된 작업은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발행한 동강환경사진집, 그리고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집이 나오며 일단락되었으나,

다른 사진가와는 달리 그는 정선 만지산 캠프에 눌러 앉은 것이다.

주민들과 살아 온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이 전시가 주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200011월경 그는 현지주명 400여명과 함께 명동성당 부근 천막촌에서 농성에 들어 간 것이다.

그러나 추운 날씨의 야외 노숙이란 결코 만만찮았다고 한다.

당시 자신이 관리하던, 충무로의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과 강의실 탁자를 치우고,

나이 많은 분들을 모아 잠자리를 차린 것이다.

동시에 지하철 충무로역과 혜화역에서 동강 백성들사진전을 열며,

동강에 투신자살한 수동마을 김진수씨의 사연과 사진을 담은 유인물을 명동으로 오가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동강현실 알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각 언론사에 알리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보내며, 심지어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동강백성들사진에세이 집과 함께

현 실정을 알리는 글을 보낸 것이다.


그 이튿날 문화일보사회면 톱으로 동강 살렸으면 주민도 살려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로 크게 알려진 것이다.

자살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피폐한 현실과 명동성당 앞에서 투쟁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도된 것이다.

더 반가운 것은 청와대로부터 수몰지역대책위원장을 맡은 가수리의 이영석씨 등 주민대표를 부르는 연락이 왔고,

보상안으로 주택 건설비 보조, 비닐하우스 건설비 등 실질적인 지원약속을 받아 낸 것이다.


 

그 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좋았으나, 지금 생각하니 후회스러운 점도 많다고 한다.

순식간에 오래된 농가들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티브이 안테나가 들어서며 순박한 산골사람들의 인심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구옥이란 캠프로 사용하던 집만 남았고, 국적불명의 양옥집들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돈이 사람을 망치는 상황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만 힘든 원시의 삶을 살라고 할 수 있겠냐며 말꼬리를 감추었다.



 


동강 댐이 취소되고 보상이 이루어진 후, 4년 동안 기록한 농민들의 삶이 바로 이번에 선보이는 산골 사람들이다.

2004눈빛출판사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이 나오며 열린 서울 전시는 호응을 받았으나,

정작 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골분교를 찾아다닌 순회전은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14년의 세월의 먼지를 떨쳐내고 다시 전시되자, 주민들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겨운 산촌 풍경이 반가운데다, 그 때 찍힌 집은 물론 디딜방아, 쇠죽가마, 물지게에서 비롯하여

농기구까지 사라지거나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찍힌 가족이나 이웃들도 대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살아 온 삶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출판된 사진집 서문에 조문호-두메산골 사람들의 초상을 쓴 미술평론가 박영택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기록한 사진들은 뼈저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새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환영처럼 떠올리게 한다. (중략)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평생 살았을 장소에 앉아 있거나 우연히 산 속에서 만난 사람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초라한 의복에 대부분 무표정하고 무심한 자락을 온 몸에 드리우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의 초상이다. 작가는 감정과 과잉의 표현을 자제하고 즉물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가능한 유지한 채 인물에 근접했다. 그 인물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사진이다. 정면은 워낙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우리가 이 정면에 쓰여 있는 데이터를 제대로 읽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지한 독해가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희노애락과 감정의 표현이 물기를 잃어 바짝 말라버린 듯한, 그러나 모든 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일 표정이 얼굴에 충만하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의 표식이자 문화적, 사회적 징후이다. 얼굴은 세상의 끝이고 시작이다.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을 이 이름 없는 민중들의 삶과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그들이 땅을 경작하고 식량을 채집하며 강하고 질긴 목숨을 꿋꿋하게 이어온 그 내력이 우리네 전통이고 역사였음을 이들의 얼굴과 몸에서 다시 확인해보는 일은 새삼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로소 그들의 소멸과 망각 이후에 유일하게 남아 그들의 삶의 언어를 묘석처럼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전시는 31일까지 이어진다.














ㆍ사진상 부정 심사 등 권력놀음에 빠진 사진계 보란 듯…
ㆍ12인의 작가론 담은 책 출간

 

일본 최대 환락가인 신주쿠의 가부키초를 기록한 ‘가부키초’. 알렙 제공 ⓒ권철



이광수(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는 2015년 갤러리 브레송 관장 김남진에게 의뢰를 받는다. “사진을 한 지 30년 가까이 되는 50대 이상의 사진가로 장르를 불문하고, 아무런 연줄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지만 수준이 높은 사진가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김남진은 자신은 갤러리 공간을 내어줄 테니, 이광수에게는 작가론을 쓰라고 했다. 이광수는 2016년 1월부터 매달 200자 원고지 50장짜리 작가론을 써 ‘사진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그 결과물을 <카메라는 칼이다>(알렙)에 실었다.

‘사진인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는 2015년 제2회 최민식상 심사 부정 사건과도 이어진다. 이광수는 부정 심사 의혹을 앞장서 제기한 인물이다. 이광수는 “작품이라는 것을 만들어 출품하고, 그것을 심사하고, 상을 주고받고 하는 따위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임을 넘어 예술을 해치고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다. 그것은 다만 권력을 만드는 일일 뿐, 예술의 속성과 하등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꼭 그것을 전쟁 치르듯 생산해 내야 하고, 평가받아야 하고, 라벨을 붙여야 하고, 등급을 매겨야 하는가”라고도 했다.

 

노숙자103-1_1’ 알렙 제공 ⓒ조문호

 

 

이광수가 보기에 한국 사진계는 “한 줌도 안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남을 재단하고, 군림하고 나눠 주고 나눠 먹는 꼴”을 보이는 곳이다. ‘사진인을 찾아서’는 사진계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취지였다. 라벨과 등급을 뛰어넘으려는 이 프로젝트는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애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멋지게 놀고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라고 이광수는 말한다.

이런 취지와 정의에 따라 뽑은 사진작가는 12명이다. 이광수는 기록성을 중시하는 작가로 권철·신동필·최영진·강정효를, 예술성을 중시하는 작가로 고정남·이수철을 꼽는다. 그 사이, 즉 기록하되 예술적 표현력을 상당히 고려하는 작가로 조문호·김보섭·문진우·이재갑·이영욱을 들었다.

 
 


권철은 프로젝트 취지에 걸맞은 작가다. 일본 도쿄 최대 환락가인 신주쿠의 가부키초를 18년 동안 기록한 <가부키초>로 명성을 얻은 그는 느닷없이 귀국한 뒤 제주에 정착했다. “세상을 겪고, 기록하고, 전시하고, 행위하는” 사진가다. 권철은 트럭으로 풀빵 장사를 한다. 거리가 전시장이다. 이호테우 해변과 해녀를 담은 ‘이호테우’전을 해녀 탈의장에서 열었다. 일본에서 촬영한 야스쿠니 사진들은 길거리 전시를 한 후 모두 불태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다. 이광수는 “그는 이제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한 후 그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 가는 사진가”라고 말한다.

두메산골 사람, 노숙인, 성매매 종사자 등 여러 인물 사진을 찍은 조문호는 “오로지 사진과 대상과 소통하는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작가이고, 그의 작업은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라고 평한다. 이수철은 “사실의 재현이든, 허구의 표현이든 예술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하여 전할 것인가”를 잣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다.

이광수는 ‘카메라는 칼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칼은 조폭의 칼이기도, 조각가의 칼이기도 하다. 칼은 실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광수는 카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어떤 사진가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품기도 하고, 어떤 사진가는 예술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한다.”

한국 최초의 사진 작가론을 표방하는 책은 사진가가 자신의 칼을 어떤 예술 철학으로,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2018.3.5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상은 묵묵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줘야하는 것, 동자동은 을이 보여주는 일상”


[서울문화투데이] 2018년 02월 12일 (월) 10:55:23 임동현 기자, 정상원 인턴기자 press@sctoday.co.kr  

▲ 조문호 사진가 (사진=정영신 사진가)



“왜 나에게 상을 주나 짜증을 냈다. 상이라는 것이 양면성이 있다. 상을 받으면 자만에 빠질 수 있고, ‘상 받으려고 쪽방촌 간 거냐’라는 말이 나올 수 있고, 상을 놓고 여러 문제들이 있었던 것을 알기에 그렇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찍어온 조문호 사진가. 최근에는 동자동에서 생활하며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에게 본지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 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의 작품을 망칠 수 있는 ‘독’으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는 본지와의 만남 역시 조심스러워했다. 신문에 실리는 순간 ‘결국 유명해지려고 작업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람이 담긴, 사람 냄새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고 그 사진을 통해 ‘사람’을 전하기 위해 지금도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의 이야기다.


문화대상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상의 양면성’을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는데 수상소감 대신 선생이 생각하는 ‘상의 의미’를 듣고 싶다.

상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우쭐하고 자만하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자신에 대한 인식도, 예술에 대한 진정성도 없이 ‘재주꾼’이라고 각인되는 것 같다.

특히 지금 내가 동자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상을 받았다고 하면 ‘상 받으려고 동자동에 갔다’는 말이 분명 나오게 된다. 그 말이 정말 듣기 싫다. 동자동에 있으면서 인터뷰 요청이 계속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다. ‘유명해지려고 한거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이 인터뷰도 서울문화투데이가 식구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하는 거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 안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조심스럽다.

또 상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열심히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사기를 북돋는 차원에서 주어져야하는데 나같이 늙은 사람이 받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소감을 그렇게 말한 거다.

그래도 기왕 상을 받았으니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에게 채찍이 되어주는 좋은 상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


▲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한 조문호 사진가



동자동을 가게 된 배경은?

오래전부터 정선과 인사동을 오가며 새로운 작업을 찾고 있었는데, 최근모 시나리오 작가가 보여 준 동자동의 실상을 찍은 비디오에 결심했다. 거기서 자극받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재 작년 9월에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동자동에 더 애착이 간 이유는 갑의 입장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선한 사람이 못사는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없는 사람이 사는 일상을 기록하며 그들의 생활 환경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동자동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개의 사람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기 때문에 돈을 잘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은행에 저축을 할 수도 없다. 일정 이상 돈을 가지고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 기준에서 탈락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계속 수급자로 머물러야한다. 그러니 일을 하여 자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어떤 사람은 집에 돈을 계속 모아두고 숨겨놨는데 그 사람이 사망한 이후 이불 밑에서 돈다발이 발견됐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가족이 찾아왔는데, 시신은 그냥두고 돈만 가져가는 매정한 세상이다. 또 한 번은 가족이 연결되지 않아 돈의 행방을 두고 많은 의혹이 쏟아지기도 했다.


동자동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올 겨울 날씨가 유난히 춥다. 지내기는 어떤지

일단 방이 무척 좁다. 정말 누우면 관 속에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웃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겨울에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전기장판을 틀어놓으면 그래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데 여름에는 정말 더위를 피할 수 없다. 10분만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비오듯 나온다. 더위를 피할 방법이 없다. 한파가 왔다고 하는데 따뜻하게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웃음).



지난해 어버이날과 추석 무렵에 동자동 공원에서 ‘빨랫줄 사진전’을 열었다. 동자동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안다

사람을 찍으면 본인들이 사진을 달라고 부탁한다. 찍을 때마다 주려면 작업에 지장이 생기기도 해서 어버이날과 추석날 잔치 자리에 걸어놓고 찾아가게 하는데, 다들 좋아한다. 아직까지도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진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진으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들 중에 노숙자가 있는데 연초에 내 카메라가 마음에 든다고 가져갔다가 단속나온 경찰과 몸싸움을 하던 과정에서 그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아직 찾지도 못했다. 소중한 카메라였는데 배신감을 느꼈다(웃음).'



지금 우리가 동자동 사람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동자동 사람들은 노숙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생활이 나은 편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면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 욕심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동자동 쪽방촌만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이런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동자동이 곧 개발이 된다고 들었다

현재 조합이 구성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개발안은 나오지 않아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조금 있으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동자동 사람들을 위한 이주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방세내고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 생각보다 돈벌이에 급급하다.  최대한 동자동 사람들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진가가 작품 활동보다 빈민운동에 관심이 더 많다는 소리도 듣지만, 사회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면 갑보다 을의 입장에 서야하며, 사진보다 그들의 환경개선에 기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난 처음부터 사람만 찍어왔는데, 어찌 그들의 삶보다 사진이 먼저일 수 있겠는가?



▲ 동자동사람들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친해지는 과정’이 있어야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담아낸 과정이 궁금하다

사진을 찍으려면 그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밖에서 보는 시선과 대상과 동질성을 느낀 사람의 시선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사진도 결정적인 사진 한 장이 중요하다기보다 사진 여러 장이 이루어내는 전체적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진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풍경 하나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기록으로, 역사로 남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사진이다.


‘가장 좋은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람 냄새나는,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사진 작업하는 양승우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주로 가부키쵸에서 활동하는 야쿠자 사진을 찍는데, 사진을 보면 혐오감이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고 편안하다. 찍는 사람, 대상과 공감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사진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록사진의 가치를 높이 산다.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인간애가 드러 난 사람사진을 최고로 치며, 사람 찍힌 사진을 좋아한다.


사진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일까?

사진에서 제일 경계하는 점은 포즈를 취하거나 사물을 움직이는 등 인위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다. 그런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찍는 순간포착을 즐긴다.  연출되지 않고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 찍은 사진이 왜곡되지 않은 사진이고, 그것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한다.


최근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전시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주변의 지인 중에서도 아름다운 풍경만 고집하는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다. 꼭 기록해두어야 할 대상을 추천해 준 적이 있는데, 결국은 본인이 좋아하는 소재만 찍더라. 일로서 보다 취미생활로 즐기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그래도 사진으로 즐겁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다만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늘어나다보니 다양한 사진공모전들이 생겼는데 여기에도 비리가 많았다. 상이 남발되고, 돈이 개입되거나 자기가 친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최근 예술계의 상은 순기능보다는 상으로 장사한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남발돼서 그런 것 같다. 다 돈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본지에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는 칼럼을 연재하셨다. 예술계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셨는데(웃음) 지금의 예술계가 과연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걱정된다

현재 예술계에서는 ‘예술'이라는 간판을 내건 장사가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 열렸던 한 전시가 그 예다. 저명하신 분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아는 수십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와 판매를 하고 수익금은 가난한 화가를 돕겠다고 홍보를 했다. 취지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막상 판매를 하면 결국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팔리고 가난한 작가의 작품은 팔리지도 않는다. 거기다 수익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가난한 작가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없다. 유명 작가만 돈 버는 거다. 결국은 예술을 간판으로 내걸고 장사하고 그 돈을 자기들 멋대로 쓴 셈이다. 여기에 크게 분개한 적이 있었다. 이런 구조니 자연히 병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자선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는 전시회가 많다. 그렇지만 전부 예술계에서 서로 아는 관계이기 때문에 쉬쉬하고 있는데, 정말 이건 아니다.


조문호 사진가라면 아무래도 ‘청량리 588’ 사진이 연상된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동아미술제'라는 공모전이 2년에 한 번씩 열렸는데 공모주제가 ‘직장인’이었다. 평소 내가 관심가진 창녀촌에 다가 갔는데, 젊은 그 때도 가난하였기에 상금이 탐났다(웃음) 오며 가며 '청량리 588'을 찍어서 냈는데, 운 좋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이후 제대로 작업해야겠다는 자책이 들어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 것이다. 받은 상금으로 588에 셋방을 마련하고 같이 먹고 자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웃음) 그들의 일상을 찍었다. 그 때는 힘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니 잘 했다는 생각이 던다. 유일한 윤락녀들의 기록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이 ‘인사동 사람들’(조문호 사진가의 블로그)이다. 인사동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남기셨는데 인사동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왔을 때부터 인사동에서 계속 놀았으니까(웃음). 인사동에서 한창 놀던 때는 다들 직장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번듯한 직장이 있던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 친구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던 기억이 있다(웃음).

세월이 지나면 결국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건 아쉬움이지. 자꾸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옛 친구들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쉽지만, 또 만나면 반갑다. 그런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전 인터뷰에서 종로에서 몸을 파는 새터민 여성에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욕심은 많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당면한 동자동 빈민에 정신이 뺏겨 다른 곳에 마음 둘 여유가 없다. 그러나 동자동 빈민들의 이주대책이 마련되고 삶의 여건이 개선된다면 한 번 해보고 싶다(웃음).


컴팩트카메라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전에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지만 요즘에는 잘 나온다. 일반 카메라는 들고 다니기가 무거운데 컴팩트 카메라는 갖고 다니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큰 카메라를 들이밀면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에 좋은 사진이 안 나오는데, 이 카메라는 자연스런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주 애용한다.

내 손에 카메라가 없으면 술이 빨리 취한다(웃음). 카메라가 있으면 항상 찍어야한다는 생각에 긴장을 하게 되는데 카메라가 없으면 긴장이 없어진다. 그래서 빨리 취하는 것 같다.

카메라가 없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글쓰는 사람이 수첩이 없으면 답답한 것처럼 나는 카메라가 없으면 답답하다. 기록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카메라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앞으로의 각오가 있다면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사진을 찍을 것이고, 여태 찍어왔던 사진들이 활용될 수 있도록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찍은 사진을 정리할 시간도 없는 바쁜 사람이다. 아무튼 열심히 찍으며 기록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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