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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