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태형을 처음 만난 건, 80년대 후반 인사동의 부산식당에서다.

인사동 '그림마당 민'의 관장으로 있을 때, 화가 박광호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나,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데면데면, 마음의 후원자로 술친구로 한 30년 같이 지낸 것이다.

 

친밀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인사동을 처갓집처럼 오가던 화가 이청운, 최울가, 이존수, 박광호씨와 더불어

부산서 올라 온 떨거지라는 공감대였다.

서로 의기투합해 만나지는 않았지만, 인사동 술집을 들락거리다 수시로 만났다.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분단풍경이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며 딱 한 번 있었다.

기획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에 존경감이 일었는데, 사진에 대한 생각들이 남보다 앞서고 있었다.

한 개인을 24시간 기록하고 싶다고도 했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미소가 매력적인 친구다.

선비 같이 어질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 성품을 가졌는데, 사진판의 김문호씨와 비견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1980년대에는 민중, 민족미술운동 기획자로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을

기획해 미술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90년도에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 때는 진보잡지에 우리 문화에 대한 독보적인 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글이 너무 좋았다.

 

팔방미인처럼 다 방면에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그림은 한 점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가 화가라는 사실조차 잊고 산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기억나는 건, '시대정신' 표지사진에 실렸던 심상석心像石이란 제목의 세밀하게 그린 연필화가 유일했다.

두상에 상처 난 형상의 돌을 그린 건데, 강력한 저항이 느껴지는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강원도 정선으로 흘러들었고, 그는 서해안 최북단인 김포에 자리 잡았으니,

쉽게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가끔 지인들 전시뒤풀이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김포에서 민예사랑이란 공간을 운영하며 지역문화에도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매사에 사심이 없었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 지며 조용한 스타일이지만 한 고집하는 사람이다.

언변이 자분자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의 핵심은 강건하고 논리적이다.

 

뒤늦게 그의 대표 작업인 심상석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졌다. 특히 주변 친구들의 작품 칭찬에 몸이 달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155월경 그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가 살고 있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오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전시를 하루 남기고 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내 장재순여사와 함께 사는 민예사랑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북한을 눈앞에 둔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걸린 그림이 문형의 신작이냐?'고 물었더니, 최선호씨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영태 전시로 알고 일정까지 바꾸어가며 달려왔는데, 허 탕 친 것이다.

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2인전을, 문영태 전시로 착각한 것이다.

 

함께 동행한 정영신씨에게 문형 작품이 좋은데, 보여주질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 놓았더니

작품도 보지 않았으면서 무슨 말이야. 전시 한 번 해볼까.”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날 문영태씨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럿 어울려 음악회를 즐기는 등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달 후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날 찍은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 때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니,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의 초청 전화도 우연이아니라 미리 계산된 듯한 의심마저 들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을 앞설 뿐이지만, 기어이 그는 작품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토록 널 내세우기 싫었던가? 이 고집불통 같은 친구야!”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전 작품은 물론 생각의 면면까지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3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유작전과 도록제작을 위한, 작품촬영을 부탁받은 것이다.

심상석에서부터 청년 시절의 스케치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작업노트는 물론 일기장까지 샅샅이 훔쳐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꼼꼼한 성격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일기장에서부터 그림대회 상장까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일기장에는 유난히 새에 대한 글이 많았다. 서재에서 보이는 북녘을 바라보며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었을까?

때로는 깊은 생각에 미처 잠들지 못했는지, 이런 글도 적혀있었다.

이 깊은 밤에 개는 왜 끊임없이 짖고 있는가? 무슨 일로 짖는가?”

 

일구구오년 유월 초하루라는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인철과 유은종이 들리다.

같이 마을을 돌며 구경하다

인철이 녹슨 칼 하나를 주워 나에게 주다.

칼을 받다,

이 칼은 무엇인가.

이 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칼이다.

 

우연히 마주친 사물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상흔을 형상화 하는 작가로서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반가움이 서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은 80년 광주의 상흔을 상징화시킨 심상석시리즈였다.

작업노트에 그려진 형상성의 스케치나 메모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했는지 고스란히 들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꼼꼼한 친구로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품보관이 엉망인 것이다.

쌓인 먼지는 차지하고라도 작품 곳곳에 곰팡이 자욱이 무성했다.

난 직감적으로 의도적인 방치라 생각되었다.

심상석의 세월의 풍화를 보여주고 싶었거나, 아니면 작품을 돈으로 여기는 현실을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민중문화운동가다웠다.

그만의 뚝심과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기 위해 미망인 장재순여사에게 이 것 저 것 물어보았다.

문영태씨와 맺어진 연은 녹번동 화실에 그림 배우러 다닌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사동에서 그림마당 민에서 일하며 호구지책으로 차린 게 민예사랑의 시작이었는데, 문영태씨의

우리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는 곧 바로 아내에게 직결되어 민예사랑이 인사동의 명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업가적 역량으로 가게를 일으켜 세운 아내에게 고마움도 컸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돈이란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요물이란 것을 잘 아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아내가 가게에 나간 후에는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가끔 있었던 두 내외간의 언쟁도 모두 술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민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고민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았던, 그가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이 고집스러운 민중문화운동가 문영태를 더 그립게 하는 것이다.

 

저승에 따라 가면 문화백을 만나 꼭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나 있다.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비평을 왜 중단했냐고? 왜 절필했냐고..”

 

/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출간한 "心象石 문영태"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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