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잘못된 걸 눈감지 못해 많은 사람을 잃어버렸다.

나에게 사진을 알게 한 최민식 선생 말처럼 인간애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 이루지 못 하다 선생의 지난 사진들을 꺼내 보았는데,

그 사진들은 따뜻한 인간애에 의한 순간포착이 과히 독보적이다.

처절했던 시대적 아픔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선생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사진집 ‘인간가족’에 매료되어 사진을 시작하셨지만,

나는 68년 '동아일보사'에서 국내 최초로 펴낸 선생의 사진집 “인간”에 감명 받아 시작했으니,

인간이란 주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길을 가면서도 선생의 시선은 항상 주변사람 표정과 동작에 꽂혀 있었다.

다음동작을 예견이나 한 듯, 독수리가 매를 꽤 차듯 셔터 누르는 스냅솜씨는 대단했다.

 

내가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던 70년대 중반은 자갈치시장이 선생의 주 무대였다.

아침 일찍 어시장에서 시작된 일정은 정오 무렵에는 남포동 ‘전원다방’에 앉아 고전음악을 감상하였고,

오후에는 내가 운영한 ‘한마당’에서 지인 만나는 일이 대부분의 일정이셨다.

사진하는 분보다 화가나 문인과 자주 어울렸다.

 

허구한 날 사진에 미쳐 서울로 지방으로 떠돌아 다녀 가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라 곧 바로 상경하여 사진학원에 수강신청부터 하고,

민태영선생께서 운영한 낙원동 ‘한국사진학원’ 커리큘럼이나 운영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서울의 대표적 학원인 ‘한국사진학원’도 수강생이 적어 고전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사진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특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부푼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진으로 돈 벌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누구보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일에 대한 근성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음악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공통점은 다음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일치했다.

선생께서는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사람은 죽고 나면 끝이니, 열심히 일하고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고 나서 문상 가는 것조차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며,

내가 죽어도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오로지 사진만이 살아가는 목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은 정이 유달리 많으셨다.

내가 부산 가게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무렵이었는데,

한번은 고향에 취재차 내려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억장이 무너져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들을 적어 분실공고를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걸 본 최민식 선생께서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면서...

 

그런 인간미 넘치는 선생의 반세기 동안의 역사적 작업을 열쇠구멍 사진이라 폄하하던 자들이

선생의 사진상이 제정되니 달랑 꽤 차고 앉아 끼리끼리 나누어 먹은 것이다.

결국은 비리가 들통 나 상까지 없어지게 만들었지만...

 

사진가는 아무 말이 필요없다. 오로지 남아있는 사진이 말해주니까...

내년에는 주옥같은 선생의 '휴먼'사진전을 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1년전 노환으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최민식선생의 “휴먼선집”에는

그동안 발행된 열 세권의 '휴먼' 사진집을 집대성한 작품집으로,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인간의 희로애락이 보석처럼 담겨 있다.

 

글 / 조문호

 

 

사진으로 서술한 인간 속성에 관한 문학 “따마스”(인간은 악이다)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총 열두 챕터로 나누어진 첫 장의 제목은 '태초의 바다'이고 마지막 장의 제목은 '따마스‘ 인간은 악이다.

그 사이에 열 개의 장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을 통하지 않고는 각각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넓은 의미로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미지로 읽는 역사고 문학이다.

 

일단 그 책에 실린 사진들을 살펴보면 사진의 형상보다 색감이 갖는 운동성에서 강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 운동성을 지닌 이미지의 힘이 보는이로 하여금 사유의 늪으로 끌어들이게 만든다.

각자 나름의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 스토리텔링은 각 사진 한 장 한 장이 단편적으로 갖는 지시성과 그 위의 의식이 차지하는 바도 중요하지만,

옆 사진 혹은 다른 사진과 어우러져 메시지가 연결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전시형식으로 열린 특강에서 저자가 실제로 사진을 옮겨가며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특정 인간이 특정 사회에서 행한 행위를 산문으로 기록한 것이 역사라면 고대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신의 행적을 시로 노래했으니,

그건 역사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다.

그들은 시로 역사를 서술하고,신의 이야기로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했으니,사진에서 말하는 이미지 전유다.

 

사진집을 접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며 무작위로 이미지 끼리 연결하며 관찰하다 보니

어렴풋이 나만의 이야기가 정리되었으나, 객관성은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이미지를 여러 차례 살펴 보았지만, 신전처럼 사진을 늘어놓은 전시장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오래전 성행한바 있는 여러 장으로 엮는 연작사진이 단편이라면, '따마스'는 장편인 셈이다. 

 

어제는 책 리뷰를 쓰려고 '따마스'사진집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칙칙한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 주는 느낌에서 욕망으로 들 끓는 인간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정말 인간의 욕망이란 무서웠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자가 '따마스'처럼, 이미지로 스스로의 사유를 엮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작품집 제목 '따마스'처럼, 진짜 인간은 악이다.

 

사진으로 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신선한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인은 물론 사진에 관심 있는 모든 분이 보아야 할 사진문학이다.

 

'따마스(tamas)'는 산스끄리뜨 어휘다. 힌두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한 분파 철학인 상키야 (Sankhya)학파에서 말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질 속성 중 하나다. 그 고대의 현자라 불린 그 사람들은 인간은 따마스 즉 어둡고, 무기력하며, 무관심한 속성을 갖는데, 도를 닦고, 열심히 노력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이후 또 노력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세계 안에서 사회 안정에 이바지한 도덕 목적 담론이다. ,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일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속성은 따마스다. 그들이 보았듯, 나도 그렇게 본다. 그렇지만, 그 따마스, 악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과실이 열린 듯 보이지만, 뿌리는 여전히 따마스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밝음도 결국 어둠으로 가고, 삶도 결국 죽음으로 간다. 열정도 무기력으로 가고, 사랑은 미움으로 간다. 해탈이란 없다. 해탈로 보이지만, 마야()일 뿐, 본질이 아닌 이미지일 뿐이다. 해탈은 욕망이고, 욕망은 배신이며, 배신은 보복이고, 보복은 저주이다. 모든 것이 하나인 일원론의 세계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왜 이미지로 말하려 하는지, 그 열린 해석의 세계가 어떻게 따마스로, 그 따마스가 어떻게 '인간은 악이다'로 규정되는지, 사진의 세계에서 말하려 한다. -이광수(서문에서 발췌)-

 

사진,  / 조문호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 기록했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사진전이 지난13일부터 오는18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렸고, 19일부터는 “부산식당” 옆에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안터’에서 열린다.

 

전시된 사진들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일본의 화보 잡지인 태양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을 당시인 60년대 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을 찍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의 시위현장과 미군기지촌 여성 등 한국 사진가들이 방치한 우리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하여, 사십 여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제일 눈길을 끄는 사진은 한쪽 전시벽면을 가득 메운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속칭 양공주로 불리는 미군 위안부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본 지 오래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치욕의 역사다.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로,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는데, 그 말이 욕설로 쓰이는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미군위안부를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 불렀던 소싯적에는 허영에 들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을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라는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전시된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니,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자료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사창가였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지난 15일 보았지만, 충무로에서 따마스전시를 끝낸 이광수교수를 모시고 다시 보러갔다. 마침 전시장에는 구와바라 시세이선생 내외분과 눈빛이규상 대표,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갤러리인덱스에 이어 개관한 갤러리안터도 구경할 겸, 꼭 구와바라세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을 감상하시라.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와바라 시세이의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사진, / 조문호

새로 개관한 '갤러리 안터'

 

 

 

이광수의 "인간은 악이다"(따마스)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퍼포먼스와 특강이

지난 15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렸다.

 

시간이 임박해 정동지와 전시장을 들렸더니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이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장 분위기가 마치 신전에 온 느낌이었다. 여러 신도가 교주의 가르침을 기다리듯...

 

신전의 깃발처럼 어지럽게 늘린 이미지를 스쳐가며 벽에 붙은 사진들을 돌아보았는데,

이미 사진집에서 보았지만 묵직한 톤의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해진 순서가 없으니, 앞서 본 이미지와 연관되어 그 사진을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야릇한 사진이 옆 사진과 충돌하여 역류하듯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인간은 악이다’는 인간의 속성이 딱 들어맞았다.

 

첫 장은 '태초의 바다'로 시작되어, 총 12장으로 나누어진 사진집에는

각각 12 컷씩 총 144장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힌두교 세계관의 중요한 상징 숫자인 12로 구성했다는데,

각 장의 텍스트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었다.

 

이미지로 쓴 문학이라는 사진의 또 다른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전시에 참가한 분 중에 이광수씨의 부인 유재희씨도 오셨다.

남편의 전시를 보기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교수 말이 걸작이다.

쪽 팔리게 왜 왔냐며, 질의 시간에 손 들어 질문하는 것 까지 탓하는 촌티를 낸다.

 

전시 작가인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특강에 이어 참가자들 질의 응답이 끝난 후

충무로 ‘김삼보‘집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이교수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눈빛' 이규상대표, 사진가 김문호, 김영호, 성남훈, 정영신,

이윤기, 이세연, 최석태, 김태진씨 등 이십 여명이 모여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은 마시지 못할 처지지만, 이광수교수의 이런 저런 이야기 듣는 것 만으로 흡족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강의는 16일(토요일)오후 3시부터 시작된다.

사진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이광수 “따마스“사진집 (눈빛출판사 : 240면, 양장 : 가격 4만원)

 

시간이 되지 않는 분은 '눈빛'에서 출간된 “따마스”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전시가 끝나는 일요일까지 작가가 전시장을 지키니 많은 관람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쪽방촌의 조두선씨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감사와 이사, 이사장 직무대행 등의 직책을 두루 맡아

동자동 빈민들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셨던 조두선 고문께서

지난 8일 향년 60세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월계동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박소영씨가 뒤늦게 전해주었는데,

어제 장례를 치루어 떠나는 길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진을 꺼내 보며 지난날을 추억합니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모든 시름 내려놓고 편히 지내시기를 빕니다.

 

 

아산 ‘백암길사람사진관’ 개관을 기념하며 입주 신고식으로 가진 

‘사람사는이야기’ 설치전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정해진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야외에 설치한 사진이라 현충사 둘레 길을 산책하는 분들이 쉽게 볼 수 있어, 

아산 현충사 둘레 길의 야외전시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돈 한 푼 없는 처지에 전시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금 덕이었다. 

 

3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그걸 바탕으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치루 게 되었다. 

 

그러나 지원금을 받기위한 난감한 일도 감수해야 했다. 

 

연노한 지원금 선정자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시켰는데, 

성기능이 사그라진 늙은이들에게 손자 같은 애들이 교육시켰다.

 

다들 지원금을 받기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두 시간 가까이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주입시킨 성 교육이란 프로그램이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없는 내용인데, 

딱 하나 수긍되는 말은 성을 예술로 위장한다는 말이었다. 

 

성을 예술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전시도 처음엔 미투의 폐해를 말하는 신체발언전인 ‘말하다’로 정했으나, 

이 또한 스스로의 실책에 발목 잡혀 ‘사람 사는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사람들에게 양면적인 면이 다소 있겠으나, 나는 유독 야누스 같은 두 얼굴을 가졌다. 

 

사람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지만, 

사적으로는 자유롭고 낙천적인 삶을 살아온 성개방주의자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여태 저축이란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이야 돈 벌 능력도 없지만, 돈을 잘 벌던 젊은 시절도 돈은 생기면 생기는 데로 썼다. 

 

영화, 음악, 사진 등 어느 한곳에 미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 늙어 가난하게 살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정선 화재로 아끼던 것을 모두 잃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홀가분함이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었다. 

8년 전 쪽방에 들어오고 부터 오히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산 김선우 덕에 ‘사람사진관’을 만들어 왔다 갔다 하지만, 죽을 준비 중이다. 

 

화가 장경호씨 말처럼, 김선우가 나를 요양하는 요양원 원장이나 마찬가지다. 

원장 말은 잘 들어야 하니, 순한 양처럼 길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겨울이 오면  쪽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겨울철은 농사일도 없는데다, 전시장도 누구나 오가며 쉽게 볼 수 있어 지킬 필요가 없다.

서울의 쪽방 두고 보일러 기름 태워가며 아산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등한시한 동자동 일이나 사람 사는 일을 기록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행여 아산을 지나친다면 ‘백암길사람사진관’에 들려 잠시 쉬어가시라.

 

전시된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들을 돌아보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갖기 바란다.

준비된 방명록에 추억의 말씀도 한마디 남기시고...

 

사진, 글 / 조문호

쪽방 화재의 37.5%가 전력선 과부하· 전선 노후화

 

절기상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7,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에서 만난 김모(67) 씨는 추위도 문제지만 불이 날까 봐 더 무섭다고 말했다. 대다수 쪽방촌이 그렇듯 도로 폭이 좁고 주거지가 옹기종기 모여있어 화재가 날 경우 진화가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김씨가 추위보다 화재가 더 무섭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지난 3일 동자동의 한 쪽방촌에서는 원인 미상의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은 아직 구체적인 화인을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사안을 조사중이다. 화재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3일 발생한 화재 현장은 아직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동자동에서 만난 주민 이모(65) 씨도 추우면서도 견디고 살고 아쉬운 대로 살고는 있지만 엊그저께에도 불이 났었다집들이 붙어 있기에 불이 났다하면 대형 사고다. 무섭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김천기 씨 역시 작년 겨울엔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냉기를 막으려고 종이를 다섯 겹이나 붙였는데, 날씨가 추워질수록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추위도 문제지만 화재가 늘 걱정이다. 여긴 다리 아프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다고 걱정했다.

 

화재가 걱정이라지만 당장 다가올 추위 대비도 소홀할 순 없다. 문제는 방한을 위해 사용되는 대부분의 자재들은 불에 타기 쉬운 소재라는 점이다.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벽에 바르는 비닐이나, 한기를 막으려 설치하는 이불 등 역시 모두 불에 쉽게 타는 재질이다. 한 주민은 주방이 따로 없어 방 안에서 부탄가스를 써서 요리한다. 전기장판도 오래돼서 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쪽방촌의 구조 역시 화재에 취약하다. 골목길은 좁아 화재 발생 시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렵다. 집과 집 사이는 사람 한명 들어가기 어려울만큼 다닥다닥 붙어 지어져 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사용되는 대부분 용품 소재는 불이 한번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서울 쪽방촌들마다 사정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현황은 대동소이하다. 대규모 피해도 잇따른다.

 

지난해 1월에는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5시간만에 진화됐지만 그 사이 주택 60채가 불에 탔다. 주민 500여 명은 대피했다. 그보다 앞선 2018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는 한 주민이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이다 불이 나 사망하기도 했다.

 

서울시가 지난 10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쪽방촌에서 발생하는 화재의 37.5%는 전력선 과부하, 전선 노후화 등 전기적 원인으로 발생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쪽방촌 화재 대부분이 방에서 취사 도구를 사용하다 주변 물건에 불이 옮아 붙으며 일어난다” “전기장판 사용도 많은 데 이 역시 화재 원인인 경우도 잦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소방차량이 진입하기 어려운 쪽방촌에 비상소화장비함을 설치해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문제는 화재 진압에 사용되는 장비들을 제 때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느냐다. 동자동 주민 김모씨(81)는 소화기를 사용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용해본 적 없다. 소화기 사용법을 알려주러 누군가가 방문하거나 연습 삼아 소화기 분사를 해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노후화된 전기시설로 화재발생 위험이 높은 쪽방촌의 안전을 위해 ‘24시간 전기이상 감지 시스템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우선 12월까지 화재발생 우려가 큰 지역인 돈의동쪽방촌(돈의동 103번지 일대)IoT센서를 시범적으로 설치하고, 향후 화재예방 효과 등 시범사업 운영 결과에 따라 나머지 쪽방촌에도 쪽방촌 스마트 전기화재 예방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전라도 닷컴" 9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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