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케이 TOKEI

나카자토 카츠히토/ Katsuhito Nakazato / 中里和人 / photography

2023_0901 2023_0915 / 일요일 휴관

ⒸNakazato Katsuhito_TOKEI#0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초대일시 / 2023_09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요일 휴관

 

 

빈스서울 갤러리

Beansseoul gallery

서울 마포구 대흥로 108

Tel. +82.(0)2.706.7022

www.beansseoul.com

 

東亰 TOKEI 촬영 지역인 무코지마는 아사쿠사에 인접한 도쿄의 북동 지역으로, 현재는 도쿄 스카이 트리 마을로 유명해졌습니다. 지금도 무코지마에는 제2차 대전의 전재나 버블 경제의 시기를 스쳐 지나간 낡은 목조 주택, 연립 주택, 마을 공장 등 뒤엉킨 미로 같은 골목 경관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복잡한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방향감각을 잃고 길 잃은 듯 거리를 헤매게 됩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도시에 서식하면서 만들어 온 경치의 고층이 퇴적되어 있고, 도쿄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혼돈스러운 도시의 원풍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도쿄에 있어 무코지마에는 휴먼 스케일로 만질 수 있는 부드러운 풍경이나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 넘쳐났습니다. 대도시에서 휴먼 스케일의 원풍경을 짙게 간직한 무코지마는 도시의 미를 예견하는 Soft City였습니다. 에도시대가 끝나고 147년 전 메이지를 맞이한 에도는 도쿄로 개명되었는데, 그 시기에 도쿄를 도케이(TOKEI)라고 불렀던 환상의 도쿄가 존재했습니다. 저는 메이지 시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던 도시 도쿄에 오래된 도시의 풍경을 느끼고 무코지마에서 그 환영을 보게 되었습니다.

 

ⒸNakazato Katsuhito_TOKEI#0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09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3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38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스미다강(隅田川), 아라카와(荒川), 구 나카가와(旧中川), 기타쥬마강(北十間川)에 낀 삼각지대. 도쿄 무코지마(東京向島). 이곳은 도쿄 공습을 면한 낡은 목조주택과 연립주택, 작은 마을 공장이 지금도 기적적으로 남아 아사쿠사(浅草)에도 가깝고 변두리의 향기도 짙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옛날 그대로의 변두리 정서를 넘어 낡은 도쿄의 윤곽, 환상의 도시 東亰를 무코지마(向島)에서 본 작품집. ● 『東亰』…에도에서 메이지로 바뀌어, 정부가 붙인 기호적인 호명 東京에 반발한 에도 토박이가 자에 가로 막대 하나를 더해 로 바꾸어 東亰라고 불렀지만, 메이지 초기에는 환상처럼 소멸해 버렸다. 나카자토 카츠히토

 

ⒸNakazato Katsuhito_TOKEI#4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4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撮影エリアである向島浅草隣接した東京北東エリアで現在では東京スカイツリーのとして有名になっています向島には第二次大戦戦災やバブル経済時期をすり"けた木造住宅長屋町工場などんだ迷路のような路地景観奇跡的っていますその複雑路地っていくとぐに方向感覚くし迷子のように彷徨ってしまいますここには都市棲息しながらしてきた景色古層堆積していて東京からえてしまった混沌とした都市原風景たわっていました機能的合理的東京にあって向島にはヒューマンスケールでれることのできるソフトな風景管理されない自由空間があふれていました大都市でヒューマンスケールの原風景色濃くとどめた向島都市-予見するSoft Cityだったのです江戸時代わり147年前明治えた江戸東京改名されたがその時期東京東亰(TOKEIんだ東京存在していました明治中途姿ませた,東亰都市風景向島にその幻影てしまいました。 ● 隅田川荒川旧中川北十間川まれた三角地帯東京向島ここは東京空襲戦災をまぬがれた木造住宅長屋さな町工場奇跡的浅草にも下町りも色濃くとどめているしかしそこにあるながらの下町情緒えて東京輪郭都市東亰向島作品集。 『東亰』…江戸から明治政府けた記号的呼名東京反発した江戸横棒一本足して、『東亰んだが明治初期にはのように消滅してしまった。 ■ 中里和人

 

ⒸNakazato Katsuhito_TOKEI#4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50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The filming site, Mukozima, is located in the northeastern part of Tokyo near Asakusa. It is now famous for Tokyo Skytree Village. After escaping from the World War II disaster and bubble economy, Mukozima has a miraculous view of the maze of old wooden houses, row houses and village factories. ● And when you go into that complex alley, you lose your sense of direction right away, and you wander around the village like a lost child. This is an old layer of landscape that has been built by people living in cities. Here lies the scenery of the chaotic city that disappeared from the village of Tokyo. ● For Tokyo, which is functional and reasonable, Mukozima was awash with the gentle scenery and uncontrolled free space available at Human Scales. Muchojima, which left the human scale's original landscape in a big city, was Soft City, which foretells the future. ● 147 years ago, Edo was renamed Tokyo after the Edo era. At that time, there was a fantastic Tokyo called 東亰(TOKEI). I felt myself in the middle of Meiji, in the landscape of a brilliant city, Tokyo, and I saw that fantasy in Mukozima. ■ Katsuhito Nakazato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출판기념전은 많은 분의 성원에 힘 입어 잘 마쳤습니다.

 

장항선 장터 길에 함께해 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영신은 반평생을 장돌뱅이로 떠돌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코로나로 사람 접촉을 꺼리던 2년 전부터 혼자 열차를 타고

장항선 주변에 있는 충청도장을 떠돌았다.

 

무거운 카메라에 짓눌려 힘들게 장바닥을 휘젓고 다닌

그녀의 장터 순례길은 고향의 어머니 찾아가듯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사명감 인양, 아무리 쪼들려도 장터 떠나는 늦추지 않았는데,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장바닥을 떠돌며 사람 만나 정 나누는 것은 좋으나,

무거운 물건까지 사 들고 올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김치가 되어 오던 그 지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결국 그 일을 마무리하여 책까지 펴낸 것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저지르고 부딪히니 되긴 되더라.

 

사라져가는 오일장과 삭막해지는 인심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 같은 장터와 장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장터보다 장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깊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 같은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장터를 헤맨 것인지 모른다.

그가 펴낸 ‘어머니의 땅’에 실린 사진과 초창기 장터 사진의 연대나 접근 방식이 같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긴 이광수교수의 사진 비평도 궤를 같이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어떤 원형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게 기록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의 휴머니즘의 세계에 뿌리내린 사진 세계다. 사라져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변화한 모습,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을 기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려

것도 아니다. 변화에 방점이 있는 것보다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머니의 심성을 찾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원형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

원형은 있다, 가야 할 곳도 있다, 그곳은 꿈과 신화 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눈앞에 있다.

우리 마음의 고향, 뿌리 내리는 삶, 그 뿌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이것이 정영신의 사진 철학이다.”

 

개막식과 전시 이튿날까지 다녀가신 분은 지난 25일 소개한 적이 있으나,

그 뒤부터 끝날 때까지의 사진은 힘들어 그대로 모아 두었다.

전시가 끝나고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기억이 가물거려 미치겠더라.

다행히 사진에 찍힌 정보가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소식 또한 금방 나온 조간 신문이라 기 보다 늦은 주간지 정도로 알면 된다.

다녀가신 분이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하겠지만,

아니어도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술 마시며 노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부러워했던 술 상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셔 지쳐 있는 노숙인의 힘든 처지도 알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마셔도 쓰러진다.

 

연락부절로 화장실에 쫓겨 다니는데다, 속까지 뒤집혀 죽을 맛이었다.

걸어 다니는 송장에 가깝지만, 사람만 보면 반갑고 즐거웠다.

마치 저승에서 문상객 맞는 심정이라, 더 절절했다.

 

내가 만나지 못한 분만해도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박흥순, 양시영, 유준, 임동은, 박인식, 임홍택, 김홍성, 

김영진, 신길훈, 장종운, 백금옥, 이혜숙, 조시노, 음주애, 이완순, 최리나, 김효순, 이진홍, 한현주, 김애경,

김형배, 장석원, 곽숙경, 신혜선, 한선영, 홍경순, 김유나, 설인선, 이정숙, 김성은, 이용민, 김명점, 김혜영,

이영욱, 양한모, 한용길, 정태섭, 김지연, 김승준, 김혜원, 문 슬, 이기정, 전인경, 신영섭, 장소연, 임정희,

임연웅, 주강현, 이형순, 박범이, 채영임, 유형근, 박상희, 윤장섭, 김정락, 이수헌, 이홍순, 오리진, 김민형,

온세미, 송진욱, 유운선, 진 민, 김미숙, 박찬원, 김병구, 최상기, 송남양, 변성진, 권오창, 박재웅, 김형로,

장순향, 김영곤, 김용순, 고미정, 김백순, 김추윤, 이근정, 이우섭씨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26일 오후에는 전태수씨가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하던 일을 접어버렸다.

술시가 이르지만, ‘유목민’으로 옮겨 술 잔을 들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사진 했다는 오래된 이야기도 들었다.

 

27일엔 양재문, 남태영, 김녕만, 나종희, 이주영, 곽대원씨를 비롯하여

남기은씨 내외 분께서도 다녀 가셨다.

다음 달에 시집갈 조카 조은겸이는 남편과 시어머니 될 분까지 모셔 왔다.

 

뒤이어 김여옥 시인이 등장하자 인사동 건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승철 시인이 장경호, 양상용, 한상진, 최석태씨 등 화가를 대동하여 ‘시골해장국’으로 갔다.

 

김여옥시인이 인사동에서 ‘시인’이란 술집 차렸을 때는 인기 마담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미색은 여전했다.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만도 고마운데, 그 날 술값까지 그녀가 쏘았다.

 

그 다음 날은 김발렌티노를 비롯하여 정주영씨와 딸 김소연, 이성표 부부가 다녀갔다.

긴 세월 언론계에 몸 바친 윤상길씨는 ‘미술여행’ 편집위원들과 다녀가셨고,

사진가 이윤기, 임성호, 권양수, 김연지, 신영섭씨도 오셨다.

 

느지막에 손님 오셨다는 연락 받아 나가다, 길에서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연세에 아직도 기타를 메고 다녔다.

대폿집에 모셔가 선생의 십팔 번 ‘부용산’이라도 한 곡 듣고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손님 만나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운현선 기자가 다녀가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전어 몇 마리 사서 정동지와 오붓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매일 같이 술 마시다 하루 쯤 쉴 만도 한데, 술을 두고 그냥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술자리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오붓한 술자리가 더 좋다.

 

술 마시며, 정동지의 다음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장보다 장꾼을 찾아 다니려면, 늦었지만 운전을 배우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나면 시골 구석구석을 어떻게 찾아다닐 것인가?

 

걱정은 되지만, 억척같은 또순이라 충분히 해낼 것으로 믿는다.

31일은 손님 오셨다는 전화에 늦게 사 전시장에 갔다,

오랜만에 쓸쓸한 미소의 화백, 신학철선생을 만난 것이다.

 

장경호씨와 더불어 ‘부산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와 이선태씨도 있었다.

뒤따라 최석태씨까지 합류하여 오랜만에 동지애를 불태웠다.

 

헤어져 돌아가는 중에 ‘이모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가보니 좀 전에 헤어졌던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준영, 정희성, 박철, 박불똥, 조경연씨 등 일개 소대가 모여 있었다.

이미 취한 상태라 무슨 주접을 떨었는지,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 게 낫다.

 

9월1일은 부산의 이광수교주와 아산 ‘봄에실’ 농장 식구들이 온다 기에

일찍부터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가 차 문을 두드렸다.

농장 식구들이 주차하고 나오다 고물차를 알아본 것이다.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농장 식구들이 총출동했는데,

문단속은 잘했는지, 동물들 먹이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들 전시장으로 갔는데, 모처럼 서울 나들이한 평이가 제일 신났다.

 

좀 있으니, 이광수교수가 나타났고 뒤따라 사진가 김문호씨도 왔다.

다들 술이 인사라 ‘부산식당’에서 낮술부터 마신 것이다.

인사동 점쟁이 신단수씨도 농장 식구를 데리고 그곳으로 식사하러 왔다.

 

그날은 충무로에서 양승우씨 전시가 열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광수 교수는 ‘갤러리브레송’에 가려고, 옆자리 밥값까지 내 버렸다.

늦을 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갤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이교수가 김남진 관장에게 전화를 하니, 뒤풀이 집으로 오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은 늙은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김문호씨 와는 다음에 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이교수는 어쩌라고?

 

이건 갤러리를 운영하는 관장으로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지키게 해야지...

더구나 오랫동안 무보수로 이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뒤풀이 장소를 찾아갔는데,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이윤기, 이세연, 서준영, 나인석씨 등 일곱 명이 통닭집에 모여 있었다.

이교수의 호쾌한 구라에 마음을 다독였으나, 영 불편했다.

뒤늦게 ‘봄에실’ 농장 식구들과 함께 정동지도 도착했다.

이교수가 떠날 기차 시간까지 깨소금 안주로 독주를 마셨다.

 

9월3일은 전시장에 갔더니, 김명지, 서정란, 이은정, 전태수씨가 와 계셨다.

이은정, 전태수 내외분을 모시고 일찍부터 ‘유목민’에 술상 차렸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여동생 조진옥과 매제 김종성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전시장에 갔더니, 여동생 외에도 이대훈, 노인자 내외 분을 비롯하여

 최명철, 박종면씨 등 많은 분이 계셨다.

 

삶의 풍경을 그리는 동생에게 장터 풍경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매제는 동생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지만, 상은 작업에 독이라며 일축했다.

 

여동생과 매제를 보낸 후, 이대훈씨 내외분을 ‘유목민’으로 모셔왔다.

전태수 내외 분과 합석하게 되었는데, 최명철, 신단수씨 일행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술 잔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연극연출가 기국서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덱스갤러리’를 못 찾아 수도약국 앞에서 헤맨단다.

 

예전에 인사동을 들락거린 분이라면 옛 ‘수희제‘ 3층이라면 금방 찾을 텐데,

’수희제‘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달려가야 했다.

 

기국서씨를 만나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박진호씨가 나타났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정동지 더러 이혼 설득할 때, 들러리 서 준지가 7년이 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동안 그대로였다.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는 박진호씨를 보내고, 기국서씨를 ’유목민‘으로 안내했다.

9월5일부터 9일까지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 홀에서 열릴 ’관객모독‘ 공연 준비로 바쁘 단다.

바쁜 와중에도 들려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손님이 나뉘어 있으니,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 주신 분께는 송구스럽지만,

운전하려면 차에서 눈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시 마지막 날은 ’유목민‘ 전활철씨가 술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날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장어를 구워 몇 사람 초대했단다.

 생일이 페북에 뜨지 않도록 어렵사리 만들었고,

’봄에실‘농장에서 평이가 그토록 기다린다는 생일상도 한사코 거절했는데...

 

난, 내가 태어난 생일 자체가 싫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게 싫다.

지독히도 생일을 챙겼던 정동지마저 이젠 한풀 꺾였는데...

 

어쩔 수 없이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 외에도 방기식, 유 준씨 등 여러 명 와 있었다.

그날이 ’유목민‘ 휴일이라 오붓한 술자리가 되었는데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관장과 한지공예를 한다는 처음 보는 미녀도 있었다.

아무튼 불편한 생일상이지만, 배려해 주어 고맙다.

그 이튿날은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정오 무렵 나갔다.

철수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노인자씨도 와 계셨다.

서둘러 액자를 포장하여 차로 옮겼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동차 방전이 잦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

긴급출동은 왜 그리 오지 않는지, 가게 주인의 성화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렵사리 시동을 걸어 인사동을 빠져나왔으나, 차가 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광교사거리에서 벌인 노조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에 발목 잡힌 것이다.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데,

에어컨이 꺼지고 램프가 깜박이더니,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래도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견인차를 불렀다.

그렇지만 차가 밀려 꼼짝 하지 않는 판에 견인차는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종로 한복판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었으니,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뜨거운 길바닥으로 내몰린 정동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먼저 가라며 보내긴 했으나, 꼬리 문 차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는 일을

한 시간은 족히 하고서야 견인차가 나타났다.

 

견인차에 끌려 역촌역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가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한다는데, 발전기 교체 비용이 50만원이란다.

 

190만원짜리 고물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면 폐차가 답이다.

그러나 잔뜩 실은 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내 처지가 난감했다.

 

폐차할 고물차에 신품 발전기가 말이 되냐며 중고를 구해 달라고 하니,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라 정품만 써야 한 단다.

그렇다면 견인차를 불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고를 알아본 후 교체해 주었다.

 

28만원으로 내려간 중고발전기를 구해 어렵사리 고쳤는데,

마침 중고 발전기 값 만큼의 현금이 주머니에 있었다.

엊저녁 활철씨가 생일축하금으로 준 20만원과

그날 노인자씨가 점심 식사 하라며 준 10만원이었다.

 

같이 식사하러 왔다가 차가 말썽을 부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지만,

어쩌면 수리비 액수까지 딱 맞추어 주고 가셨다. 언제나 절실한 것 만큼만 주는 돈과의 인연이다.

돈이란 빨리 돌아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잠시도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분 덕분에 자동차를 고쳐 사진액자를 안전하게 옮겼는데,

정동지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금보성아트센터’로 가야 한 단다.

 

이번 전시에 금보성씨가 책을 40권 사 주었고, 창원의 조성제씨도 20권을 사 주었다.

덕분에 배당 받은 200권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책을 그날 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답례로 정영신의 ‘한국의장터’와 나의 ‘청량리588’ 사진집 두 권을 드렸는데,

오래전 588번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터’ 사진집은 여러 가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겠 단다.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 걸어 타진 해 주기도 했다.

금보성씨는 자신의 작업량도 엄청나지만,

힘들게 작업하는 주변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자기가 돕는 다른 작가들과 미팅이 있다며,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금보성씨 내외 분 따라 연희동 ‘고미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개인 그림전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사진가 이명호씨가 있었다.

 

‘고미정’ 음식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금보성씨로 부터 예술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죽는 것도 전시 끝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많은 분에게 신세만 져 어깨가 무겁다.

그 신세 갚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다.

 

정영신의 장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개막식 날 사진과 그 이튿날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93794923

 

 

 

 

밭으로 가는 길.. 

오늘은 김장 배추와 무를 심고 가을 내내 먹을 채소를 심는 날입니다. 밭고랑을 만들 쇠스랑과 괭이, 씨앗을 섬세하게 덮어줄 잔발쇠스랑을 챙겼습니다. 밭을 만들 땐 먼저 밭으로 쓸 경계를 잡고 가장자리 흙을 걷어 올려 주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작물에 따라 밭을 좁게 혹은 넓게 만드는데, 쇠스랑의 길이에 맞추어 곧게 흙을 걷어 올리면 밭둑과 골의 경계선이 만들어집니다.

 

 

 

농사는 자연이 해준다라는 말을 많은 분들이 하기도 합니다. 아마 농사는 꼭 사람이 한 것만으로는 다 되지 않는다는 말 일 겁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어도 그 식물의 조건에 맞추어 주는 노력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연에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올봄에 처음으로 해바라기 씨를 심었습니다. 밭과 길을 걸어 다니면서 해바라기를 보고 싶은 곳에 흙을 파고 씨를 뿌렸습니다. 싹이 났지만 얼마 못 가 시들고 말라버렸습니다. 장소도 적절치 못했지만 흙을 파서 씨만 뿌린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흙을 파고 씨를 뿌린 뒤, 흙을 덮어줄 때 약간 오목하게 해 줘야지만 씨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흙을 팠다가 다시 그 흙을 다 덮으면 수북하게 쌓이게 되는데 그러면 빗물이 씨앗이 있는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옆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해바라기는 대가 크고 키가 높게 자라는 식물이므로 주변의 자리가 넉넉해야 하고 모든 씨앗을 심을 때는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오목하게 만들어주어야 싹이 나와 뿌리가 튼튼해질 때까지 마르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씨앗을 뿌릴 밭을 만들 때는 이처럼 이랑을 타고 골을 만들어 씨앗을 뿌립니다. 처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밭 둑을 만들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심은 해바라기처럼 수분이 부족하여 시들고 말라버리게 됩니다. 이랑을 만들 때도 작은 씨앗은 작게 굵은 씨앗은 더 크게.... 사실 씨앗의 크기가 작거나 크다고 하여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작은 것들을 섬세하게 살피고 가려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몫입니다. 씨앗 크기의 2-3배 정도 깊이로 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거의 1mm 정도 크기의 씨앗이니 2-3mm 정도만 덮일 수 있게 골을 타고 씨앗을 넣는다는 말이 됩니다. 대략 아무렇게나 하는 듯이 보이는 농사지만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듯 세심하고 정밀함이 필요한 것이 농사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배추모종

 

배추와 아욱싹
김장 무와 가을채소( 상추, 시금치, 아욱)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곳을 올라오는 산길 옆으로는 논이 있습니다. 논둑에는 풀이 뒤덮히고 산자락 옆으로 칡이 엉켜 내려오기도 합니다. 풀 때문에 제초제를 뿌린 풍경은 푸른 벼와 그 옆자락에 있는 잡초는 노랗게 질려 시들어 있습니다.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는 농민들을 비난하거나 좋지 않게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 많은 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약을 뿌리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노력할 수 있을까,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농민 분이 혼자 오셔서 벼 사이 풀도 뽑고 논둑의 풀을 예초기로 깍지만 풀은 때마다 무성히 자라는데 그 넓고 많은 논자락을 그분 혼자서 손으로 다 뽑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안해룡씨의 '도쿄, 조선인 대학살의 거리' 展이

지난 22일부터 오는 9월 3일까지 종로 청운동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아 그 기억을 소환하는 자리에는

조선인 학살 지도와 학살 관련 사진들이 여기저기 흙 속에 묻혀 있거나 전시장에 걸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쪽 벽에는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 속 붉게 물든 학살 공간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넓게 퍼져 있었다.

 

안해룡씨는 그 지도 위의 지점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니며

100년 전에 파묻힌 사건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 낸 것이다.

 

우에노 공원, 고마쓰미야 동상 앞 파출소나 아사쿠사공원 부근의 파출소 등

증언과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명기된 지도의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기록했는데, ​

잿빛 사진들 속엔 위령비도 여럿 보였다.

 

도쿄 중심부를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을 중심으로 위치한 고층빌딩과 고가도로는

대지진의 상흔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없이 그날의 참상을 증언했다.

 

"빨갛게 된 영역은 이재민들이 거주하던 광장 같은 일종의 피난 지역이에요.

당시 도쿄의 44% 정도가 다 불탔다고 해요.

요코하마는 80% 이상이 다 이재민이 된 거고요.

강이나 모래에 돌아가신 분들의 넋이 있을 거잖아요.

자료 사진들을 가지고 그런 이미지를 구성해 본 거죠.

그래서 여기 향도 피우고 있고요."라며 안해룡씨가 말했다.

 

이번 작업은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일본 군대와 경찰이 적게는 재일조선인 6천 명에서 많게는 2만3천여 명을 학살한

제노사이드 간토대학살의 참상을 기억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는 첫 시작이다.

 

이 전시를 마련한 ​안해룡 감독은 긴 세월 일본을 드나들며 일제 만행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재일 위안부 재판을 조명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만드는 등,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아픔과 삶을 지속적으로 조명했다.

​특히 지난 2019년과 2022년 두 번에 걸쳐 일본인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와 함께

남과 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기록한 전시로 주목받기도 했다.

 

안해룡씨는 ‘다이빙벨’로 널리 알려져 대개 다큐 영화감독으로 알지만, 사실은 사진가였다.

80년대 중반 무렵, 최민식선생을 내세워 창립한 일명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 창립 회원이었다.

그 당시 나의 '전농동588' 도록 디자인도 해 주었는데, 만지산 화재에 씨를 말려버렸다.

 

이번에 열리는 안해룡씨 전시는 진즉 알았으나,

정영신의 ‘혼자 가 본 장항선 장터길’ 전시와 겹쳐 개막식에 가 보지 못했다.

차일피일하다 지난 30일 정영신씨와 함께 전시장에 들렸는데,

마침 안해룡씨가 작업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애써 온 공력도 대단하지만, 설치한 작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장의 흙을 가져와 흙 속에 찍은 사진을 묻어 놓았는데,

마치 산화된 넋이 사진에 모인 듯,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처럼 비참하게 살육하여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그치지 않고,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여 전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환경 범죄에 앞서 큰 재앙을 저지른 일본의 눈치를 보며,

선두에서 합리화 시켜주고 지지하는 자가 우리나라 대통령 맞는가?

 

더 웃기는 것은 일본의 근본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우리나라 언론이 입을 닫았다.

국민이 알아야 할 사회적 이슈인 일본 간토대학살 전시에 꿀 먹은 벙어리다.

오로지 ‘오마이뉴스’의 하성태 시민기자가 쓴 기사만 나와 있었다.

새 방통위원장 등극에 지레 겁먹은 걸까?

그 지긋지긋한 군부정권의 언론탄압이 연상되어 소름 끼친다.

 

오는 9월2일 오후 3시부터 전시장에서 열리는

안해룡 작가와의 대담에 많은 분의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정영신씨의 작가와의 대담도 같은 시간대에 예정되었으나,

한 곳으로 힘을 모으기 위해 취소하였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강(미술가)씨의 사회로 열리는 안해룡 작가와의 대담에는 이나바 마이(광운대부교수)도 참석한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 참석하지 못하거나, 이 전시에 공감하여 함께 하실 분들은 아래 계좌로 후원하면 된다.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관심과 정성을 모아 희생자를 위한 작은 진혼의 공간을 만든다고 한다.

[국민은행 001-01-1312-884 안해룡]

 

그리고 오는 10월 29일까지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리는 '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기획전도 추천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 간토대학살 100주년 기획전은 '도쿄, 조선인 대학살의 거리' 展보다 더 많은 사료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100년 전 조선인 대학살의 비극을 의미 있고 생생하게 복원해 놓았다.

 

"위령비로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려 했지만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추모의 기록, 추모의 공간이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러다 만난 조선인 학살 지도. 생생한 증언과 기록이 관련 자료를 명기하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머리 속 상상 이상으로 가해의 묘사는 절절하고 처참했다.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이 자행한 잔혹한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도쿄의 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안해룡-

 

 

사진, 글 / 조문호

 

 

참외씨

지금은 농사를 짓는 분들도 씨앗을 받아서 심지 않고 거의 종묘사나 농협에서 모종을 사고 씨앗을 사서 심으시겠지요.

그런데 그 종자는 다수확을 목표로 개량한 품종입니다. 그렇다보니, 자연에서의 적응력이 부족해서 병과 충해에 약한 것이 대부분이라 그 종자를 심으면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지 않고서는 길러내지 못합니다. 재래종 또는 토종이라고 하는 씨앗들과는 특히 이런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이곳에 와서 토종의 열매들과 채소들을 보고 먹게 되었을 때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가 생각되거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이곳에 계신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책이나 자료들을 더러 찾아보기도 하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은... 토종참외가 꼭 맛이 좋고 우리나라의 것이고..라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된 이 땅에서 살아남은 씨앗이지요. 그러니까 더 건강한 농사에 잘 맞는 씨앗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씨앗을 받아서 보관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듭니다. 지금은 이렇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호박. 고추, 참외, 오이, 상추 등, 무엇이든 심어 먹으면 그것들의 씨앗까지 받아야만 농사가 마무리 됩니다. 참외를 먹으며 참외씨를 받습니다. 조금 노란빛을 띈 하얗고 조그만 씨앗, 자세히 보면 예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생각하면 참 대단하기도 합니다.

 

08.07 참외밭

 

참외가 막 달렸을 때에는 초록색에서 익으면 노랗게 바뀔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짙은 초록에서 점점 색이 연해지면서 보송보송한 털이 벗겨지고 냄새를 맡으면 달콤한 참외냄새가 날 때 다 익은 것입니다. 지금은 노란 참외 밖에 없지만 옛날에 참외는 초록색이었다고 합니다. 이 참외는 우리나라의 재래종 참외 종류 중 하나로 오류골참외 또는 열 골 참외라고 불립니다. 옛 한양 근교의 오류리(현 서울 금천구 오류동)에서 재배가 많이 되어 오류골참외, 골이 열 개라서 열골 참외로 부른다고 전해집니다.

 

 

08.07참외밭
08.16 참외 

 

 

노란참외와는 전혀 맛이 다를 거라고 말씀하셔서 기대를 하고 먹어봤는데, 정말 웃음이 났습니다. 제가 알던 참외 맛이 아니었거든요.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감자칼로 깎는 게 편했습니다. 겉에 육질은 메론처럼 부드럽고 단맛이 강했습니다. 안에 있는 씨는 밭에다 심으면 싹이 나는 진짜 씨앗이기 때문에 약간 딱딱합니다. 꼭꼭 씹어먹으면 고소하고 아니면 발라내서 씻고 말려서 보관하면 참외씨앗이 됩니다.

그런데 왜 사라졌을까요? 이 참외는 부드러운 만큼 보관기간이 짧아 다 익었는데 따지 않으면 밭에서 골아버립니다. 냉장고에 보관하여도 2~3일 안에 다 먹어야 하기 때문에 현재 시장 구조에서는 팔 수 없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참외뿐만이 아니라 많은 농작물들이 이러한 유통구조에 맞추어 개량되면서 옛 우리나라의 재래종 작물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고추는 껍질이 두꺼워지고 토마토도 단단해지고... 즐겨 먹는 들깻잎조차 다수확을 목표로 향이 사라져 가고...

 

 

이렇게 배꼽있는 참외가 맛있다고 합니다.

 

 

 

참외는 마트에서 5~6월경에 나오고 끝납니다. 7월부터는 여름이니 제철과일이라고 수박이 나오지만, 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 심는 작물의 사정은 좀 다릅니다. 어떤 것이 제철일까요? 봄에 일찍 참외를 심어도 밭으로 나갈 때는 6월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6월에 심으면 넝쿨을 뻗어서 세력도 넓혀야 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달리려면 한 달은 꼬박 잘 자라야합니다. 장마가 끝난 8월이 되어야 비도 마르면서 참외를 먹을 수 있습니다. 마트에서는 한참 전에 참외는 끝났고 이제 수박을 먹을 때인데요 하하. 이 수박은 한 참 수박을 먹을 때 씨앗을 심었더니 아직 손바닥 만합니다. 

가을이면 먹을 수 있을까요?

 

 



길가의 이병호씨가 휠체어에 깔려 있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는데,

술 취해 휠체어 바퀴에 머리를 집어넣고 잠들었다.

 

세상에! 한때는 중령까지 지낸 장교 출신 꼴이 이게 뭔가?

그는 걸어 다니질 못해 얼마 전 새 휠체어 하나를 얻었는데,

그걸 잃어버릴까, 바퀴 틈에 머리를 끼고 자는 것 같았다.

 

누가 휠체어를 건드리면 다칠 것 같아 깨웠더니,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나를 보더니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감기에 일어나서 술 한 잔 하라고 말하니

그때야 휠체어에서 빠져나오려고 꼼지락거렸다.

 

부축해 일으켜 앉혔더니, 술 달라는 듯 마시는 시늉부터 했다.

물이나 우유를 갖다 줄까?”라고 물었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었지만, 정신만 차리면 술부터 찾았다.

 

구멍가게에서 우유 한 팩과 소주 한 병 사 와 우유부터 한 컵 따라주었더니,

한 모금 마시고는 토할 것처럼 불편해 했다.

그 대신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마약처럼 얼굴이 풀렸다.

술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이런 노숙자를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김밥천국' 앞에는 위수범씨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역시 알콜 중독 증세가 있지만, 술을 참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다들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새꿈공원' 입구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유정희씨를 만났다.

 

찍어 둔 초상사진을 전해주려고, 오래전부터 가방에 넣고 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아파 병원 간 줄 알았는데, 얼굴이 좋아져 한 달 만에 나타난 것이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벌금을 못내 감방 살다 왔단다.

술 마시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으니,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알콜 중독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요즘은 찍어 준 초상사진을 다시 찍는 경우가 더러 있다.

임백수씨를 비롯하여 이상준, 이기영씨를 다시 찍었다.

 

가능하면 본 모습을 부각하려고, 멋 부린 것들은 가급 적 내렸는데,

왜 사나 가오를 죽이냐?’는 임씨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안경이나 모자 하나라도 그 사람에게는 자존감이었다.

그 이후부터 찍힐 사람이 좋아하는 대로 사진을 찍는다.

 

그날은 연세가 많아 기력이 없는 김수안씨가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옆방에 살지만, 꼼짝하지 않으시고 하루에 한 번씩 식사하러 갈 때만 나오시는데,

늘 교회에서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을 기다린다.

아마 천국 가실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동자동에 살며 느낀 것은 다들 죽음을 겁내지 않는데 있다.

고통스러운 이승보단 저승이 편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 영화를 누리면 누릴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은 더해지고,

목숨에 대한 집착도 강해지는 법이다.

 

죽는 걸 겁내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가진 것 없는 빈자의 특권이다.

 

사진, / 조문호

 

오는 12월, 쪽방 건물 벽면에 '버려진 사람들의 초상'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정영신의 혼자 가 본 장항선 장터 길이 지난 23일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오후 무렵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찾아 주신 손님께는 죄송스럽지만, 술 마시긴 좋은 날이었다.

 

전시장에 올라갔더니, 안미숙관장과 이다 군이 전시 디피를 멋지게 해 놓았다.

 

마치 장터에 늘린 장돌뱅이 사진 난장 같았다.

 

 전시장에 올라가니, 화가 송창, 미술평론가 김진하, 사진가 하재은씨가 와 계셨다

 

많은 분의 성원에 힘입어 배당 받은 사진집 200부도 무난히 소진하였.

둘째 날에는 소품도 여섯 점 팔렸고, 몇몇 분의 후원도 따랐다.

 

그리고 정영신씨 조카 심지윤씨가 오프닝 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너무 깔끔하고 맛있었다.

 

봄에실농장에서 따온 불루베리도 등장했고, 안원규씨가 옥수수까지 삶아왔다.

다들 도와 주셔서 큰 걱정은 덜었으나, 이 원수를 생전에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날 장대비를 뚫고 참석하신 분으로는 갤러리인덱스안미숙관장을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공윤희, 김진하, 송 창, 김정업, 최유진, 하재은, 장종운, 박옥수,

신상덕, 박춘화, 김문호, 최연하, 곽명우, 김수길, 남 준, 정명식, 박순규, 김이하, 장경호, 윤범모,

조신호, 조경석, 김진열, 서인형, 김상현, 송일봉, 유진오, 안원규, 김 구, 김발렌티노, 임태종, 신단수,

정복수, 최석태, 노광래, 김정남, 조준영, 한상진, 양상용, 전인미, 이정선씨 등

많은 분이 오셔서 전시를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성함이 기억나지 않거나 미처 만나 뵙지 못한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시 길 바란다.

 

그날 준비한 술로는 와인 외에 몰래 숨겨 둔 대마불사주상황버섯주까지 꺼내 왔다.

술 고픈 축축한 날이라 개막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어, 맛본다며 홀짝홀짝 마신 술에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뒤풀이는 유목민으로 정해 두었는데, 두 패로 나뉘어 일부는 인사동16번가에 진을 쳤다.

이쪽저쪽 옮겨 다니느라 혼자 바빴는데, 숨이 차서 차에 들어가 자버렸다.

 

그 다음 날은 늦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는데,

실버넷뉴스운현선기자가 갤러리에 왔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아마 같이 식사하려고 일찍 온 것 같은데, 이미 늦어버렸다.

 

급히 전시장으로 달려갔더니, 운현선기자를 비롯하여 큰나무갤러리김문경대표,

실버넷뉴스앵커 김석출씨, 김유나씨 등 여러 명이 와 계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정영신씨 인터뷰하는 틈을 이용해 화장실부터 가야 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식사에 문제가 있었는지, 연이어 물 대포를 쏟아 댔다.

'쌈지길'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다 올라가니, 손님은 가버리고 안 계셨다.

 

결례가 걱정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그런데, 첫날 찍은 사진도 이제 사 올리는데, 운기자가 취재한 영상물은 벌써 방송을 타버렸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몸이 불편해 곧바로 동자동 쪽방에 가서 누워 버렸다, 완전 걸어 다니는 송장 수준이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정동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천 사는 사진가 김보섭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전시장에 왔다는데, 어찌 누워 있겠는가?

 

병문안도 못 가본 김보섭씨 내외를 전시장에서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는데,

수술 결과가 좋다는 말에 다소 안도할 수 있었다.

 

김보섭씨 외에도 김정헌, 김진하, 오현경, 김정명, 양성은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러 명 만나 뵐 수 있었다.

 

손님을 보낸 후 전시장 있기가 불편해 차에 드러누워 전시 끝날 시간만 기다렸다.

전시장 문 닫은 후 정동지를 대동하여, 어제 정산하지 못한 뒤풀이 비용 때문에 유목민에 갔다.

 

뒤풀이 비용은 임태종, 김상현, 신상덕씨가 조금씩 부담해 남은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전시 오프닝 때 책을 전해주지 못한 신단수씨를 만나 소주 몇 잔 얻어 마셨다.

안쪽에서 마시던 장의균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한 번 간첩은 영원한 간첩이었다.

 

내일은 누굴 만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전시가 끝날 때까지 술 상무로 살아남기 위해 동자동에서 대기 중이다.

 

눈빛출판사이규상씨가 쓴 정영신 소개 글 일부로 정영신 전시소식 1탄을 마무리한다.

 

‘40년 가까이 장을 돌고 돌았으니 사진계 보다는 장터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에게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마트가 아니라 정이 있는 고향이다.

난전에 앉아 있는 이름 없는 할매와 아짐들의 말동무요 장꾼들의 누이요 동생이다.

사라지는 것을 사진 찍는 일은 함께 울어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해 사진을 찍으니 누구 하나 거부하는 사람이 없다.

이생에서의 복은 박하지만 아주아주 먼 훗날,

후생에 그가 무엇이 되어 세상을 도와 나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 주신 분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의 ‘혼자가 본 장항선 장터길’ 사진전이 8월 23일부터 9월4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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