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한정식 선생의 미 발표작, ‘공(空)은 열려있다’ 전이
지난 10월 21일부터 12월 14일까지 후암동 ‘KP Gallery’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고인이 남긴 유작 중 공개되지 않은 미 발표작으로 구성되었다.
유작을 맡아 관리하는 제자 이일우씨가 찾아낸 작품으로,
그것도 한두 점이 아니라 전시와 사진집을 만들 정도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은 빈틈 없는 선생께서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정적인 고요의 세계에 너무 몰입해 놓친 것일까?
아니면 사후에 발표하려고 의도적으로 숨겨 둔 걸까?
사진가가 자기 작품을 고르는 데 눈이 어두울 수는 있으나,
남겨 둔 글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번 전시로 선생의 작품세계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전시된 사진은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선(禪)‘의 경지다.
긴 세월 동양 철학과 한국적 미학을 탐구해 온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길이 빛날 유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 한정식선생의 철학과 한국적 사진 미학의 정수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미발표 작을 담은 ‘공(空)은 열려 있다’ 사진집은 신청한 분에 따른 한정본으로 발행된다.
전시가 끝나는 12월 14일까지 신청 받는다고 한다.
아래는 선생께서 남긴 글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 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2009년 밝은 방에서, 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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