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지만 잘못된 걸 눈감지 못해 많은 사람을 잃어버렸다.

나에게 사진을 알게 한 최민식 선생 말처럼 인간애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 이루지 못 하다 선생의 지난 사진들을 꺼내 보았는데,

그 사진들은 따뜻한 인간애에 의한 순간포착이 과히 독보적이다.

처절했던 시대적 아픔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선생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사진집 ‘인간가족’에 매료되어 사진을 시작하셨지만,

나는 68년 '동아일보사'에서 국내 최초로 펴낸 선생의 사진집 “인간”에 감명 받아 시작했으니,

인간이란 주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길을 가면서도 선생의 시선은 항상 주변사람 표정과 동작에 꽂혀 있었다.

다음동작을 예견이나 한 듯, 독수리가 매를 꽤 차듯 셔터 누르는 스냅솜씨는 대단했다.

 

내가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던 70년대 중반은 자갈치시장이 선생의 주 무대였다.

아침 일찍 어시장에서 시작된 일정은 정오 무렵에는 남포동 ‘전원다방’에 앉아 고전음악을 감상하였고,

오후에는 내가 운영한 ‘한마당’에서 지인 만나는 일이 대부분의 일정이셨다.

사진하는 분보다 화가나 문인과 자주 어울렸다.

 

허구한 날 사진에 미쳐 서울로 지방으로 떠돌아 다녀 가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라 곧 바로 상경하여 사진학원에 수강신청부터 하고,

민태영선생께서 운영한 낙원동 ‘한국사진학원’ 커리큘럼이나 운영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서울의 대표적 학원인 ‘한국사진학원’도 수강생이 적어 고전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사진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특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부푼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진으로 돈 벌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누구보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일에 대한 근성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음악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공통점은 다음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일치했다.

선생께서는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사람은 죽고 나면 끝이니, 열심히 일하고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고 나서 문상 가는 것조차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며,

내가 죽어도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오로지 사진만이 살아가는 목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은 정이 유달리 많으셨다.

내가 부산 가게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무렵이었는데,

한번은 고향에 취재차 내려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억장이 무너져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들을 적어 분실공고를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걸 본 최민식 선생께서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면서...

 

그런 인간미 넘치는 선생의 반세기 동안의 역사적 작업을 열쇠구멍 사진이라 폄하하던 자들이

선생의 사진상이 제정되니 달랑 꽤 차고 앉아 끼리끼리 나누어 먹은 것이다.

결국은 비리가 들통 나 상까지 없어지게 만들었지만...

 

사진가는 아무 말이 필요없다. 오로지 남아있는 사진이 말해주니까...

내년에는 주옥같은 선생의 '휴먼'사진전을 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1년전 노환으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최민식선생의 “휴먼선집”에는

그동안 발행된 열 세권의 '휴먼' 사진집을 집대성한 작품집으로,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인간의 희로애락이 보석처럼 담겨 있다.

 

글 / 조문호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 기록했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사진전이 지난13일부터 오는18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렸고, 19일부터는 “부산식당” 옆에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안터’에서 열린다.

 

전시된 사진들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일본의 화보 잡지인 태양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을 당시인 60년대 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을 찍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의 시위현장과 미군기지촌 여성 등 한국 사진가들이 방치한 우리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하여, 사십 여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제일 눈길을 끄는 사진은 한쪽 전시벽면을 가득 메운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속칭 양공주로 불리는 미군 위안부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본 지 오래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치욕의 역사다.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로,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는데, 그 말이 욕설로 쓰이는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미군위안부를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 불렀던 소싯적에는 허영에 들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을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라는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전시된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니,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자료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사창가였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지난 15일 보았지만, 충무로에서 따마스전시를 끝낸 이광수교수를 모시고 다시 보러갔다. 마침 전시장에는 구와바라 시세이선생 내외분과 눈빛이규상 대표,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갤러리인덱스에 이어 개관한 갤러리안터도 구경할 겸, 꼭 구와바라세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을 감상하시라.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와바라 시세이의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사진, / 조문호

새로 개관한 '갤러리 안터'

 

 

 

이광수의 "인간은 악이다"(따마스)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퍼포먼스와 특강이

지난 15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렸다.

 

시간이 임박해 정동지와 전시장을 들렸더니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이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장 분위기가 마치 신전에 온 느낌이었다. 여러 신도가 교주의 가르침을 기다리듯...

 

신전의 깃발처럼 어지럽게 늘린 이미지를 스쳐가며 벽에 붙은 사진들을 돌아보았는데,

이미 사진집에서 보았지만 묵직한 톤의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해진 순서가 없으니, 앞서 본 이미지와 연관되어 그 사진을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야릇한 사진이 옆 사진과 충돌하여 역류하듯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인간은 악이다’는 인간의 속성이 딱 들어맞았다.

 

첫 장은 '태초의 바다'로 시작되어, 총 12장으로 나누어진 사진집에는

각각 12 컷씩 총 144장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힌두교 세계관의 중요한 상징 숫자인 12로 구성했다는데,

각 장의 텍스트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었다.

 

이미지로 쓴 문학이라는 사진의 또 다른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전시에 참가한 분 중에 이광수씨의 부인 유재희씨도 오셨다.

남편의 전시를 보기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교수 말이 걸작이다.

쪽 팔리게 왜 왔냐며, 질의 시간에 손 들어 질문하는 것 까지 탓하는 촌티를 낸다.

 

전시 작가인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특강에 이어 참가자들 질의 응답이 끝난 후

충무로 ‘김삼보‘집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이교수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눈빛' 이규상대표, 사진가 김문호, 김영호, 성남훈, 정영신,

이윤기, 이세연, 최석태, 김태진씨 등 이십 여명이 모여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은 마시지 못할 처지지만, 이광수교수의 이런 저런 이야기 듣는 것 만으로 흡족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강의는 16일(토요일)오후 3시부터 시작된다.

사진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이광수 “따마스“사진집 (눈빛출판사 : 240면, 양장 : 가격 4만원)

 

시간이 되지 않는 분은 '눈빛'에서 출간된 “따마스”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전시가 끝나는 일요일까지 작가가 전시장을 지키니 많은 관람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아산 ‘백암길사람사진관’ 개관을 기념하며 입주 신고식으로 가진 

‘사람사는이야기’ 설치전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정해진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야외에 설치한 사진이라 현충사 둘레 길을 산책하는 분들이 쉽게 볼 수 있어, 

아산 현충사 둘레 길의 야외전시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돈 한 푼 없는 처지에 전시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금 덕이었다. 

 

3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그걸 바탕으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치루 게 되었다. 

 

그러나 지원금을 받기위한 난감한 일도 감수해야 했다. 

 

연노한 지원금 선정자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시켰는데, 

성기능이 사그라진 늙은이들에게 손자 같은 애들이 교육시켰다.

 

다들 지원금을 받기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두 시간 가까이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주입시킨 성 교육이란 프로그램이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없는 내용인데, 

딱 하나 수긍되는 말은 성을 예술로 위장한다는 말이었다. 

 

성을 예술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전시도 처음엔 미투의 폐해를 말하는 신체발언전인 ‘말하다’로 정했으나, 

이 또한 스스로의 실책에 발목 잡혀 ‘사람 사는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사람들에게 양면적인 면이 다소 있겠으나, 나는 유독 야누스 같은 두 얼굴을 가졌다. 

 

사람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지만, 

사적으로는 자유롭고 낙천적인 삶을 살아온 성개방주의자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여태 저축이란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지금이야 돈 벌 능력도 없지만, 돈을 잘 벌던 젊은 시절도 돈은 생기면 생기는 데로 썼다. 

 

영화, 음악, 사진 등 어느 한곳에 미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 늙어 가난하게 살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정선 화재로 아끼던 것을 모두 잃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홀가분함이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었다. 

8년 전 쪽방에 들어오고 부터 오히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산 김선우 덕에 ‘사람사진관’을 만들어 왔다 갔다 하지만, 죽을 준비 중이다. 

 

화가 장경호씨 말처럼, 김선우가 나를 요양하는 요양원 원장이나 마찬가지다. 

원장 말은 잘 들어야 하니, 순한 양처럼 길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겨울이 오면  쪽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겨울철은 농사일도 없는데다, 전시장도 누구나 오가며 쉽게 볼 수 있어 지킬 필요가 없다.

서울의 쪽방 두고 보일러 기름 태워가며 아산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등한시한 동자동 일이나 사람 사는 일을 기록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행여 아산을 지나친다면 ‘백암길사람사진관’에 들려 잠시 쉬어가시라.

 

전시된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들을 돌아보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갖기 바란다.

준비된 방명록에 추억의 말씀도 한마디 남기시고...

 

사진, 글 / 조문호

 

 

어쩔 수 없어 치룬 아산 백암 길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설치전이 많은 분의 도움으로 잘 마무리했다.

 

바쁜 중에도 어려운 걸음 해주신 분들과 멀리서 성원해 주신 많은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또 하나의 빚을 짊어졌지만, 백암 길에서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넘치면 안 되듯, 행복도 과하면 힘들었다.

 

엊저녁에는 모든 일을 마무리 하고 서울로 올라와 자고 또 잤다.

죽으면 끝없이 잘 텐데, 무슨 잠이 그리 많이 오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노닥거리던 컴퓨터조차 켜기 싫었지만,

일주일 동안 찍은 분들의 안부에 등 떠밀려 좌판기를 두드린다.

 

지난 화요일에는 늦게 사 일어나 아산 갈 준비를 서둘고 있었는데,

사진가 양시영씨가 넋전 춤 양혜경씨를 모시고 아산 백암길 전시장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야외에 걸린 사진 보러왔다면 양해를 구하겠으나,

사방에 길을 뚫는 굿을 하러 왔다는데, 어찌 그냥 보낼 수가 있겠나?

옆에 있는 현충사부터 구경하길 부탁해 놓고, 휴게소까지 마다하며 달려갔으나,

마음은 급한데 차까지 밀려 안절부절 하게 만들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양혜경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양시영, 박종진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혜경씨는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이며 한국전통넋전춤연구소소장으로

긴 세월동안 용미리 무연고자 묘역의 합동 위령제를 백번이 넘도록 치룬 의인이다.

 

불쌍한 원혼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었으니, 그 춤이 어찌 영험하지 않겠는가?

 

함께 온 박종진씨는 얼마 전 펴낸 숙명에서 고려를 보다사진집 한권을 선물 했다.

 

김선우가 준비해 둔 음식으로 식사부터 한 후, 이야기 나눌 틈도 없이 굿판을 벌였는데,

양혜경씨 어께에 앉은 앵무새가 길조를 예언하는 듯 했다.

 

양혜경씨가 직접 오려낸 종이각시를 들고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산자와 죽은 자의 길을 터는 넋전 춤으로 사방에 길을 터는 도리뱅뱅이 굿을 시작한 것이다.

 

길을 열어 백암길사람사진관으로 사람이 몰려오기를 바라는 기원 굿이었다.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 한 자락 가을바람에 휘날렸다.

 

굿이 끝난 후,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힘들여 굿을 해 주셨지만, 사례는커녕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저녁 무렵에는 스마트협동조합서인형 이사장과 전방위예술가 이익태선생께서 오셨다.

 

귀한 술까지 챙겨 먼 길을 오셨는데, 삼겹살을 구워 대마불사주를 대접했다.

 

장작 타는 소리를 음악 삼아 저물어가는 가을밤 정취에 빠져들었으나,

운전에 발목 잡혀 술 한 잔 마시지 못하는 서인형씨가 마음에 걸렸다.

 

마침 양평에 사는 사진가 정인숙씨가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왔는데,

그 역시 느닷없는 병마에 시달리다 술을 끊은 처지라 술도 한 잔 권할 수 없었다.

일전에 인사동에서 만날 때보다 훨씬 건강이 좋아진 것 같았다.

 

다 떠나고 난 후, 정동지와 단둘이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지나가던 마을버스 기사가 차를 세우고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고 손짓하니 시동을 켜둔 채 내렸는데,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대마불사주 한 잔 따라주었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술이 아까운 게 아니라 기사 술 먹이는 죄가 무서워 더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

 

그 다음 날은 소설가 임헌갑씨가 친구 홍선생을 모시고 왔다.

마땅한 안주가 없어 시장에서 전어를 사와 구워 먹으면 어떨까?” 했더니.

홍선생께서 대신 갔다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무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전어가 없어 시장을 헤매고 다닌 것 같았다.

돌고 돌아 전어를 구해 왔는데, 괜히 전어 이야기를 꺼내 홍선생만 고생시켰다.

 

그런데다 사진집까지 여러 권 구입해 주셨는데. 고맙다는 인사가 고작 성적 말장난이었다.

임헌갑씨는 해학으로 돌리지만, 죽기 전엔 고치지 못할 큰 병이다.

오래된 영화제목이 생각난다. “다정도 병이련가?”

 

자고 일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더니, 화가 류연복, 손기환, 김석환씨가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 온 손님이라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었는데,

어제 먹다 남은 전어 세 마리를 안주로 대마불사주 한 잔 했다.

 

부안에 갈 일이 있다며 일어서고 나니 성혜선씨가 다녀가셨다.

 

기아 노동자로 일하는 사진가 황상윤씨를 비롯하여 평택에 계신 임성일씨도 오셨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거리를 둔 채 지켜보던 마을 분들의 관심이었다.

단감을 선물하는 분도 있었고, 간간히 찾아와 사진을 유심히 지켜보는

모습에서 허튼 짓은 아니었다는 위안이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서울에서 정동지가 내려와 다 같이 쫑파티를 했다.

선우와 이현이가 준비해 온 돼지수육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으나, 다들 술은 마실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모닥불에 둘러앉아 김창복선생의 생명사상에 관한 강의를 듣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전시 때문에 여러 사람 고생시켰지만, 다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전시는 끝났으나 다음 전시가 이어질 봄까지 사진은 걸려 있으니, 지나치는 걸음에 보셔도 됩니다.

술이나 차 한 잔 하시려면 제가 상주하는 목요일부터 주말에 오시면 됩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설치전이 지난 24일 막을 올렸다.

전시를 여러 차례 해 보았지만, 이번 처럼 힘든 전시는 처음이다.

 

경비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지원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몸이 송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전시는 열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눅들어,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전시장 찾은 손님 받는 게, 상가 문상객 받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대마불사주라도 마음껏 대접할 수 있고,

손님도 두 번 걸음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여러 사람 고생만 시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이곳까지 오라는 말도 부담스럽지만, 오셔도 손님 맞을 일이 걱정되었다.

 

음식이야 김선우가 준비했지만, 술을 끊었으니 술 고문을 어떻게 당하느냐도 관건이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오는 교통편과 숙박이었다.

 

승용차로 오면 술을 마실 수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일만 없다면 역까지 마중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가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일을 벌였으니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으나, 식구들이 고생 많이 했다.

전 날밤은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온 식구가 동원되었는데,

힘들게 길 낸 가마솥에다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전시 날자는 기다려주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문 열자마자 세종시에 산다는 오세인씨가 오셨다.

 

이광수씨 페북을 보고 알았다는, 첫 손님의 진지한 관람에 기분이 좋았다.

커피 한 잔 드렸더니, ‘두메산골사람들사진집도 한 권 사주었다.

 

이어 홍유선, 김현아씨가 다녀가고 나니, 소설가 임헌갑씨가 심영태씨와 같이 오셨는데,

지리산 막걸리를 두 박스나 가져오셨다.

 

때맞추어 온 완주의 사진가 김종신씨는 오다 보니 안내 현수막이 없더라며

현수막 두 개를 주문해 주었다.

 

임헌갑씨 일행은 온천장에 숙소를 잡았으나,

김종신씨는 캠핑 카에서 지내기로 하고 술자리를 만들었는데,

모처럼 옛이야기를 안주 삼아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임헌갑씨는 지난번에 주지 못한 책이라며, 인도로 가는 동안이라는 연작 소설을 한 권 주었다.

 

초대일인 26일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마산 중리 막걸리를 가져왔다.

유목민전활철씨가 준 '느린마을' 막걸리와 '송명섭' 막걸리 두 박스에다

우리가 준비한 소주와 맥주를 비롯한 대마불사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명주가 다 준비되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전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주막 같은데, 아무래도 술은 남아돌 것 같았다.

 

이튿날은 화가 신상덕씨와 정복수씨, ‘사진바다곽명우씨,

사진비평가 이광수씨가 연이어 오셔서 전시장 분위기가 한결 무르익었다.

 

정복수씨는 나무화랑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인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화 작품집을 선물했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광수교수로 부터 받은 따끈따끈한 선물 '따마스' 사진집이었다.

 

무겁게 마음을 휘어잡는 사진에서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스토리의 연관성보다, 인간은 악이지만 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기존의 전시형식에서 벗어난 좋은 사진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늦게는 뮤아트김상현씨와 기타리스트 김병수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시작된 두 분의 협연은 가을밤의 정취를 무르익게 했다.

김상현씨의 아코디온 연주에 덧붙인 김병수의 기타 음율은 애간장을 녹였다.

 

그런데, 수술 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는 김상현씨가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예전보다 음색이 훨씬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이 딱 맞았다.

특히 하얀 목련은 듣는이의 심금을 울려 준 절창이라, 우리 식구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모닥불 앞에서 듣는 협연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새벽닭이 울어 시간을 보니, 새벽 네시가 훌쩍 넘었더라.

편치 않은 몸으로 먼 길까지 달려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너무 고생하셨다.

 

그들의 뜨거운 음악 사랑과 깊은 인정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그다음 일요일에는 일찍부터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술안주를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좀 있으니 사진가 고영준씨는 친구들을 데려 왔고,

우기곤씨 역시 사우 여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뒤이어 전통무예가 하태웅씨가 지리산에서 오셨고,

시인 이은정, 전태수, 홍대춘, 서정란씨 등의 문인들과 사진가 마동욱, 김영숙 내외,

화가 칡뫼 김구, 함상규, 고선애, 최보현, 박효링, 권현석, 노인자, 송춘애,

박귀옥, 엄근배, 성혜선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가셨다.

 

오는 1113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황무지, 우상의 벌판개인전을 여는

화가 칡뫼 김구는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며 어렵사리 오셨는데, 가제본 된 책을 가져왔다.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손님 접대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떠나고 나니 죄송스러운 마음만 남았다.

 

오죽하면 전시 시작한 지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는 커녕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그 뒤 이틀 동안 오신 분 사진 역시, 정리할 시간이 없어 주말까지 찍은 사진만 올리는 것이다.

끝나는 날까지 마무리하려면 두 번은 더 소개해야 할 것 같았다.

 

빚진 생각에 마음은 무겁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시간이 맞지 않은 분을 위해 주말인 113일까지 연장하기로 했으니,

가을 가기 전에 나들이 한 번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들 성원해 주셔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깊어가는 현충사의 가을을 오래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설치전이 10월 24부터 아산 백암길사람사진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긴 세월 작업해 온 사진에서 추려낸 사람 사진으로.

백암길사람사진관개관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맞는 신고식이나 마찬가지다.

 

대형 이미지를 자연 속에 설치한 것은 기존 전시장에서 야외로 끌어내려는 시도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기도 하지만, 입체적 현장감도 맛볼 수 있다.

 

청량리에서 몸 팔던 소녀의 이야기에서 부터 독재에 저항한 시민이나,

살기 어려운 산골 농민들이나 장터 사람들의 하소연,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인간애를 소환했다.

 

허리가 아파 누워 장사한다는 증평장의 정숙현 할머니,

죽도록 고생해도 빚만 남았다는 최덕남씨 등

대부분 힘든 서민들이 살아가는 애달픈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혼이 깃든 인사동 사람 등, 30여 점의 초상사진을 자연 속에 세웠다.

 

물질문명에 사람 사는 정이 매말라 가는 이 비정한 세상에,

그때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백암길사람사진관에 펼쳐 놓았다.

 

힘들었던 이야기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 사람 냄새 맡으며 자연 속에서 차 한 잔 나누자.

 

'사람 사는 이야기' 사진 설치전은  31일까지 열린다.

 

음식을 준비하는 초대일은 주말 (26, 27)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사진은 2025년 5월까지 걸려 있으니, 지나치는 걸음에 들려주시면 고맙겠다.

 

소재지는 아산시 염치읍 백암 길185’이며, 네비는 백암길185미술관으로 검색하면 된다.

 

사진, 글 / 조문호

 

 

 

전시 일자가 다가오나 준비작업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 잘 마무리했다.

 

지난 일요일 오전에는 기웅서씨가 앵글 작업을 마무리해주자,

오후에는 김창복씨와 양이현이는 물론 평이 까지 함께 도와 밤늦도록 일했다.

 

김창복씨는 감나무를 가리는 패널 제작 등 어려운 일을 맡아 주셨고,

이현이와 나는 현수막 사진 묶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어두워 머리에 전등을 달고 일했는데, 마무리하고 나니 자정이 가까웠다.

 

다들 24시 해장국집에서 자정 무렵이 되어 저녁 식사를 한 것이다.

이런 강행군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

 

나야 내가 벌인 일이라 감수해야 겠지만,

김창복씨와 이현이는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식사를 끝낸 후 정동지와 나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정동지도 아침 일찍 일이 있지만, 나역시 동자동에 볼일이 있었다.

늦게 먹은 저녁 탓에 졸음이 몰려오지만, 목숨 건 질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개 명세에 가깝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 만드는 천성은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진 놈 탓에 주변 사람들만 힘들게 한다.

 

다들 불평 없이 도와주어 고맙고 고맙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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