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출판사' 창립 35주년 기념 북페어 우리 마음속의 사진과 책 한 권

지난 22일부터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35년 동안 눈빛에서 출판해 온 사진 책 600여 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책에 따라 10%에서 50%까지 할인하여 판매하니, 좋은 사진들을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된다.

 

더구나 중견과 신예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중점적으로 엮어온 눈빛사진가선시리즈

71권을 통해 한국사진의 흐름도 가늠해볼 수 있다.

눈빛 아카이브로 나온 사진집은 지금 발행하면 도저히 그 가격으로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싸게 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눈빛이 소장하고 있는 책 속의 사진들도 관람할 수 있다.

구와바라 시세이, 이경모, 김한용, 김기찬, 힌정식, 김영수, 이창성, 전민조,

김문호, 엄상빈, 김보섭, 우명률, 조숙진, 정영신, 이정희, 임재천, 이규철 씨 등

작고 및 원로 현역 사진가들의 주옥같은 사진들도 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비록 사진을 하지 않는 분이라도 곁에 두고 틈틈이 볼 수 있는 추억의 사진집이 많다.

작품성을 강조한 난해한 사진보다 갓구워낸 군고구마처럼 한 장의 사진이 따스한 추억을

모락모락 불러들여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 줄 좋은 사진집이다.

 

예를 들면 최민식의 인간이나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은 모르는 분이 없겠지만,

작고 작가인 이해선, 이형록, 이경모 사진집과 김한용 희망연대기‘, 정도선 회령에서 남긴 사진집도 있다.

 

그리고 눈빛에서 엮은 한국사진의 작은 역사 지금까지의 사진에서부터 크리스 마커의 북녁 사람들’,

구와바라 시세이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박옥수 시간여행‘, 안장헌 소소한 일상‘,

전민조 역사를 말하는 사진‘, 신복진 광주발사진종합‘, 권태균 노마드‘, 김운기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

정영신 어머니의 땅도 지난 시절을 새록새록 불러들일 추억 속의 사진집이다.

또한 오랜 병영 생활을 되 돌아 볼 수 있는 이한구의 군용과 장종운의 젊은 날의 초상등을 추천한다.

 

진열대에 올린 사진집만도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꼼꼼히 살펴보면 더 좋은 사진집도 부지기수다.

 

이왕이면 오늘 1125() 오후 4시에 들리면 오랫동안 묵언 잠적했던 이규상 대표의 강연회가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래는 눈빛출판사이규상 대표 글이다.

 

책은 오랫동안 지식의 전달과 영감(靈感)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정보의 전달과 저장이 종이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수천 년 이어온 책의 위상은 나날이 퇴색돼 가고 있다. 불과 2-30년 사이에 불현듯 가해진 이러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산업혁명이 인간 삶의 근본적 변혁을 몰고 왔듯이 디지털 문명의 출현은 또 다른 삶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수천 년의 습관을 순식간에 바꿔야 하는 가공할 디지털 혁명기에 살고 있다. 그에 따른 인문의 위기는 곧 출판의 위기다. 이번 행사는 사옥 짓기보다 사진으로 사진집을 지어온 눈빛출판사의 35년 발자취를 집약한 전시를 겸한 북페어다. 최근 전시를 통해 책의 확장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눈빛출판사는 급변하는 출판환경에 대응하고 인문과 예술의 위기 속에 다 각도로 출판의 방향과 역할을 모색해오고 있다.”

 

북페어는 오는 124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들리시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플라뇌르 서울 Flaneur Seoul

전강희/ JEONKANGHEE / 全堈熙 / photography

2023_1107 2023_1120

전강희 _ 건대입구  #02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전강희 인스타그램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전강희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37 2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작품 소개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태어나서 30년 넘게 생활해온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인이 오랫동안 생활해온, 고도의 자본주의 정신이 물질화 된(되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곳곳을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을 사용하여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현재, 대도시(=메트로폴리스)로 거듭나고 있는 서울에서는 재현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상품 세계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 상품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이는 서울을 단순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 초현실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상품 세계 그 자체 뿐 아니라, 상품이 전시되는 방식과 그 전시 공간, 그리고 전시 공간이 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품 세계 전반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펼쳐지는 것이다.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는 상품 세계를 바라보는 산책자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인 대중들에 대한 경험까지 확장시키는데, 결국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적 이미지는 도시의 건축물들, 도시를 배회하는 대중들, 그리고 상품들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도시 서울 곳곳의 장소들에서 환영적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들을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으로 제작해 보았다.

 

전강희_고속버스터미널 지하 아케이드 #0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23
전강희 _ 대학로 골목  #01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전강희 _ 명동 거리  #0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작가 및 기법 소개 현대 도시의 풍경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판타스마고리아' 기법을 사용하여 '플라뇌르' 시리즈를 진행 중에 있는데, 플라뇌르(flaneur)'거리 산책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도시를 상상력과 직관을 지닌 채 누비고 다니는 예민하고 고독한 사람을 의미한다. '플라뇌르' 시리즈 작업은 대도시(=메트로폴리스)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이미지로 드러내 보이는 일로써, 항상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들의 반복일 뿐인 '반복 동일성'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고도화된 상품 자본주의의 공간으로서, 대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것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모종의 환영과 그로 인한 욕망으로 인하여 작동하는데, 그러한 환영과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이고 애매모호한 감정을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해보고자 한다.

 

전강희_석촌호수 #0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23
전강희_신림역 사거리 #0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23
전강희 _ 신사동 가로수길  #01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는 환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판타스마(Phantasma)에서 유래한 단어로 환등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은 우리가 직접 발을 딯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단순히 사람의 눈(=망막)에 비치는 외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렌즈)을 빌려 인지적으로 작동하는 초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레디메이드'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작업 방식에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아우라를 상실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다시끔 아우라를 복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본인은 작업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언뜻 보면 경계가 명확하고 확실해 보이나,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섞여있다. 경계라는 것은 모종의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이며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인 것으로, 그러한 경계가 불명확하고 모호한 세계,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소위 '포스트모던'한 디지털 세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세계 감정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전강희

 

전강희_여의도 지하 아케이드 #0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23
전강희 _ 여의도 한강공원 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전강희 _ 잠수교  #01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90cm_2023

익명의 시간을 노정(路程)하는 찰나의 무늬 여기, 도시를 유영하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도시 공간의 서사를 더듬는 차가운 시간이 있다. 1.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는 순간, 사진 프레임에는 시간의 영속성이 박제된 이미지로 탈각되어 갇힌다. 그것으로써 사진 이미지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다면 사진 이미지는 우리 세계에서 공진(共振)하지 못하고 화석화된 시간 속에 영원히 서식하게 될 것이다. 사진의 속성이 순간의 가시적 세계를 투명(transparent)하게 '기록'하는 소임으로만 수렴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비평가이자 기획자이며, 그 역시 사진가였던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 1925~2007)는 그가 196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사진가의 눈>이라는 전시에서 '사진'이 과거에 머문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며, 멈춰 있는 현재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현재성'을 담지한 컨텍스트임을 설파 했다. 사진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말하고자 했던 그의 견해처럼 사진이 만들어 가는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의 생활세계에 관여하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생명력을 얻은 사진의 힘으로 하나의 장소에 귀착해 그 공간에 스며드는 사람과 풍경을 긴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포획해 겹쳐 가는 전강희의 작업은, 구체적 해명이 쉽지 않은 장소성에 얽힌 일상의 핍진성을 증폭하는 힘을 갖는다. 동시에 특정한 시공간에 깃든 인간 군상과 사물들의 움직임을 켜켜이 포갬으로써 얻어지는 '이미지의 불투명성'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체계에서 미약해져만 가는 인간 존재의 함량을 표징 하려고 한다.

 

전강희_청량리 시장 아케이드&nbsp;#0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times;90cm_2023
전강희 _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 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times;90cm_2023
전강희 _ 홍대 거리&nbsp; #04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_60&times;90cm_2023

2. 이번에 선보인 플라뇌르(Flanuer) 서울연작에서도 그러했고 이전의 작업에서도 전강희는, '플라뇌르'의 사전적 의미처럼 한가롭게 공간을 배회하는 산책자의 가벼운 태도를 견지하며 피사체에 대한 감정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감정의 개입이 차단당한 채 무수히 겹쳐진 사진 이미지들은 멀리서 관조하면 덧칠의 덧칠을 거듭한 거친 마티에르로 이루어진 먹먹한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이미지의 과잉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허용해 이미지의 선명성을 흐려 이미지의 형태를 소거하는 전강희의 독특한 방식은, 김아타(본명: 김석중, Atta Kim 1956~ )2005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8시간의 장노출을 이용해 뉴욕 타임스퀘어를 지나 간 수많은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형태를 먼지처럼 뭉개버린 사진 이미지와 겹쳐지곤 한다. 하나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 다른 하나는 이미지의 결핍이라는 상반된 방식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이른바 존재론적 숙명을 사진 이미지로 증명하려 한다. 전강희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수렴하는 방식으로, 김아타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탈락시켜 흔적만 남기는 상반된 방식으로 작업을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언명처럼 두 작가의 사진 이미지에는 공히 장엄한 시간의 흐름에서 그 곳에 있었으나 부재(不在)할 수밖에 없는 익명화 되어 가는 존재들의 불길함이 담긴다.

 

3. 이미지의 과잉에 가까운 중첩을 통해 그 공간을 혼돈의 세계로 만드는 전강희의 풍경은 늘 쓸쓸하다.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신체는 파편화 되어 있고, 공간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미분화 되어 있는 이미지로부터 이미지가 담고 있는 감정의 선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를 향한 이미지 외부로부터의 정서적 관여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전강희의가 구축한 이미지의 세계는 극적이기 보다 무심하다. 전강희가 자신 밖의 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개념으로 끌어들인 '플라뇌르' 즉 산책()의 본질은 공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사물과 사람을 관조하고 관찰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플라뇌르는 전강희의 작업에서 적정한 작업 기술(技術)이자 도시의 공간들을 편견 없는 공평한 감정의 무게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태도가 된다. 사진 프레임 속 일반적인 풍경 이미지들은 개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시선과 목적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거나 읽혀진다. 반면, 전강희의 작업에서는 좀처럼 풍경에 관여하는 화자의 시선을 마주하기 어렵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발화(發話)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강희의 풍경 이미지에서는 자기 억압처럼 이야기는 발화되지 않고 삼켜진다. 역설적으로, 다채로운 서울의 공간을 부유하는 전강희의 플라뇌르는 우리를 둘러싼 풍경과 공간을 자기 객관화라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비로소 균등하게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한다. 김용진

 

 

) 한정식 선생의 미 발표작, ‘()은 열려있다전이

지난 1021일부터 1214일까지 후암동 ‘KP Gallery’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고인이 남긴 유작 중 공개되지 않은 미 발표작으로 구성되었다.

유작을 맡아 관리하는 제자 이일우씨가 찾아낸 작품으로,

그것도 한두 점이 아니라 전시와 사진집을 만들 정도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은 빈틈 없는 선생께서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정적인 고요의 세계에 너무 몰입해 놓친 것일까?

아니면 사후에 발표하려고 의도적으로 숨겨 둔 걸까?

사진가가 자기 작품을 고르는 데 눈이 어두울 수는 있으나,

남겨 둔 글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번 전시로 선생의 작품세계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전시된 사진은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선(禪)의 경지다.

긴 세월 동양 철학과 한국적 미학을 탐구해 온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길이 빛날 유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 한정식선생의 철학과 한국적 사진 미학의 정수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미발표 작을 담은 ()은 열려 있다사진집은 신청한 분에 따른 한정본으로 발행된다.

전시가 끝나는 1214일까지 신청 받는다고 한다.

 

아래는 선생께서 남긴 글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은 열려 있다.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 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2009년 밝은 방에서, 한정식

 

 

이리저리 살다 보니 잊어버린 지가 한 참된 고향에 들리게 되었다.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최민식 선생 10주기 심포지엄 가야 하는데,

열차표가 매진되어 부득이 고물차를 끌고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차도 불안하지만, 나 역시 걸어 다니는 송장이지만 어쩌겠는가!

 꼭 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호텔 방까지 잡아 두었다는데...

평생을 천운에 맡기고 살아온 내가 새삼 걱정할 게 무언가?

걷는다면 오백 미터도 못 가지만, 차만 있다면 다음날 죽더라도 어디엔 들 못 가겠는가?

정동지 더러 ‘지루하지만 멋진 드라이브가 시작 된다는 안내맨트를 날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알처럼 차고 다니던 카메라 주머니를 두고 와 버렸다.

이미 시가지를 벗어났으나, 그냥 갈수는 없었다.

 

되돌아가 다시 네비를 보니, 도착시간이 심포지엄 시작 시간보다 15분 늦었다.

연료 넣으러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뿐, 도착시간 줄어들기만 바라며 냅다 밟았다.

단속 카메라 피해 다니느라 졸음 올 겨를도 없었다.

통행료 계산할 시간마저 아끼려고 하이패스로 빠져버렸는데, 정확하게 15분 늦었다.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타이틀로 열린 심포지엄은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발제로 열리고 있었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와 있었다.

오기 전에 발제문을 보아 내용은 알고 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정동지 메모 글을 넘겨보며 짐작할 뿐 자리만 지킨 것이다.

끝날 무렵에는 나 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데, 귀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입도 벙어리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관중공포증이 있어 사람의 눈만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벙어리 가슴 앓는 소리 몇 마디 지껄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아구찜 집에서 술 마시는 시간은 좋았다.

이차로 하숙집이란 술집까지 갔는데, 술 맛나는 이교수 구라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에 들어가니, 그때 사 누적된 피로가 덮쳐 정신없이 뻗어버렸다.

다음 날은 이 교수 안내로 해운대 달맞이 명물 대구탕 집에 가서 해장하는 호강도 누렸다.

 

행사를 주관한 김정근 감독과의 인터뷰 약속이 있어 김 감독 스튜디오도 갔다.

걱정되는지 이교수까지 옆에 지켜 섰는데, 김감독이 다른 방으로 가시란다.

아마 김감독이 나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동지는 있어도 괜찮다는 걸 보니, 보호자로 여기는 모양이다.

말은 잘 못 하지만, 김감독 묻는 대로 답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놓친 말이 있어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래도 할말이 남았다.

언젠가 하늘나라 계시는 선생님께 못다한 편지를 쓰고 싶다.

 

일은 마쳤지만 길바닥에 기름 쏟으며 부산까지 왔는데, 반 본전이라도 뽑아야 하지 않겠나!

인근에 있는 경상도 장을 찾아 가려는데, 하필이면 밀양 무안장에 가 잔다.

어린 시절에도 가본 기억이 있는 무안장은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이라고 안 바뀔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사람들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차에 자빠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안까지 와서 고향 산소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장터 마겥에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부곡 온천을 거쳐 고향 영산으로 들어오니, 초입의 만년교가 반겼다.

만년교 풍경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 김형권씨가 생각났다.

김형권씨는 쇠머리대기기능 보유자로 사진을 하셨는데, 주로 민속놀이를 찍으셨다.

삼일문화제를 찾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위해

한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나 농부가 만년교를 건너가는 모습을 연출해주기도 했다.

  만년교 위에서 쥐불 돌리는 사진들은 대개 김형권씨 도움을 받아 찍은 사진일 게다.

 

그리고 박만영씨가 운영했던 '녹지사진관'의 진열장에는 항상 가족사진 대신 흑백풍경이 걸려 있었다.

나도 60년대 중반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텅스텐  전구를 터트리는 텅스텐 스트로보가 멋 있었다. 

친구들 기념사진이나 찍으며 폼 잡고 다닌 것이다.

찍은 흑백필름을 박만영씨 사진관에 맡겼는데, 그 때 암실을 살펴 본 기억이 난다. 

 서정적인 농촌풍경을 많이 찍으셨는데, 그 사진 원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60년대 초반 창녕경찰서장으로 계셨던 이봉하씨도 사진을 찍었다.

이봉화씨는 주로 백로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한 번은 관용차 타고 늪에 사진 찍으러 가다 엠비시 기자한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으나, 

정년 퇴임하여 '사협' 이사장까지 하셨다. 

 

영축산 아래턱의 대암골이라 불리는 산소는 본래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감나무는 고목이 되어 다 넘어졌으나, 지팡이 짚고 버티던 제실마저 넘어지고 없었다.

 

몇 년 만에 왔는지 기억조차 아련하니, 조상님께 어찌 고개 들 수 있겠는가?

언제나 감싸주시던 할머니부터 술 한 잔 올렸다.

마음으로 빌었으나,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힘들게는 살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잘 산다고 말씀드리고.

산소에서 뵙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양상현교수가 미국 뉴저지주 럿거스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 낸

그리피스 컬렉션 사진전이 지난 18일부터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140년이란 긴 세월의 실타래를 되돌려 놓은 장면 장면들은

하나같이 낯설고도 친숙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풍경이 담긴 진귀한 모습이었다.

 

  지게에 걸터앉아 농가의 정겨움을 담은 사진에서부터

종로 대로에 우마차가 다니는 부감사진, 옹기를 가득 짊어진 옹기장수,

거울 앞에서 선 기녀 등 하나같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말로만 듣던 우리 선조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이 사료들은 그리피스 교수에 의해 수집되어 도서관에 잠든 것을 2008년 양상현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일주일에 걸쳐 찾았다는 500여장의 사진 속 장면 장면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여 주제별로 분류한 후 몇 편의 학술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양 교수의 갑작스런 타계로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을

그의 부인 손현수 교수가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절감케 하는 소중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78년 동아일보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나

86년 서문당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등 몇몇 사진집에서

흐릿한 당시 풍경을 보긴 했으나, 확대 프린트된 사진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그리피스 컬렉션전은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재현과 표현을 한 자리에 모은 김혜원과 문슬의 사진통섭전이

지난 9월20일부터 102일까지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김혜원 '용담댐 시리즈' 사진집 / 128면 /가격15,000원

눈빛사진가선’ 70호인 김헤원의 사진집 용담댐시리즈-수몰 이전

71호인 문슬의 사진집 두꺼운 현재가 연이어 나온 출판기념전이다.

 

문슬 '두꺼운 현재' 사진집 / 127면 / 가격 15,000원

표현재현이 어떻게 하나의 사진으로 수렴되는가 하는 사진통섭전으로 이름 붙였지만,

 객관적이야 하는 기록과 주관적인 예술은 태생적으로 가는 길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척을 지고 따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문슬의 두꺼운 현재

어찌 보면 객관적인 기록도 사진가의 시각과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사진가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다.

 

김혜원의 '용담댐'

둘 다 같은 사진이지만, 말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재현의 창으로 본 김혜원의 용담댐

표현의 거울에 비친 문슬의 두꺼운 현재가깝지만 먼 당신이다.

 

문슬의 두꺼운 현재는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만나는 사물을 통해

작가 내면을 표출한 사진으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사물을 읽어내는 작가의 감성이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문슬 '두꺼운 현재']

김혜원의 용담댐 시리즈-수몰 이전

1990년대 우리나라 국토개발 현실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다목적 댐이 건설되기 전의 진안군 용담마을의 소중한 기록이다.

 

[김혜원의 ‘용담댐 시리즈-수몰 이전’]

국토개발의 이름 아래 많은 농민이 실향민이 되어버린,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이었다.

 

 '사진통섭' 전시를 보기 전에 두 사람의 사진집부터 먼저 보았는데,

지방에 이렇게 훌륭한 사진가들이 숨어 있다는데, 새삼 놀랐다.

 

그동안 눈빛사진가선을 통해 작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골고루 볼 수 있었기에.

아무리 돈이 없어도 눈빛사진가선만은 빠지지 않고 사 보았다.

 

결코 사진집이 크고 비싸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양한 사진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 값싼 시리즈가 팔리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눈빛사진가선71호까지 나왔으나, 재판 찍은 사진집은 두 종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사진작가만도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사볼까?

 

사진가 문슬

비싼 외국 사진집으로 책장을 도배한 사진가는 종종 볼 수 있는데,

안타깝고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좌로부터 안미숙관장, 사진가 정영신과 문슬

더 훌륭한 사진가를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소개하려면, 책이 팔려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사진가 문슬이 관객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구독자가 늘어나, 70호가 아니라 700호가 되었으면 좋겠다. 

‘눈빛사진가선’에 많은 관심과 구독을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작가와의 대화 뒤풀이에서

 

 

 

(The Act)

박부곤/ PARKBOOKON / 朴富坤 / photography

2023_0912 2023_0924 / 월요일 휴관

박부곤_위례신도시-8_C 프린트_152&times;190cm_2020

박부곤 홈페이지_www.bookonpark.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공간 미끌

gallery gong-gan Miccle

서울 종로구 종로 74 B1

Tel. +82.(0)10.3117.0697

www.micggle.com

 

벽이 생긴다면,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페렉은 그의 산문집 공간의 종류들에서 "산다는 것, 그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공간이라 지칭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 발명된 공간이다. 명명함으로써 증식되는 일상의 공간에 대해,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행동에 대해 페렉의 끊임없이 질문하고 분류하며 기록하는 행위, 즉 그의 글쓰기는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천하게 한다. 마치 앙리 미쇼가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공간은 결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이는 기호로 시작되는 질문이고 의심이다.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 모든 공간은 같을 수 없으며 그 이동도 지루하지 않는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 페렉에게 산다는 것은 하나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최대한 명료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박부곤_위례신도시-23_C 프린트_96&times;120cm_2020

박부곤의 작업을 지켜본 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이 기간을 전, 후로 나누어 보면 먼저, 신도시 개발 현장의 땅을 기록한 "대지(The Land)" 연작과 그 현장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기록한 "트래킹(Tracking)" 연작이 있다. 이후는 현장에 세워지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찍은 사진과 기계장치를 결합해 도시화 과정을 보여주는 설치작품이 작업의 중심에 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 의해 완벽하게 탈바꿈되는 땅의 풍경을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열 번의 개인전에서 참으로 성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은 분명 자본과 결탁한 인간의 욕망이 축조하는 바벨의 탐색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감상자는 그의 사진 앞에서 땅의 권리를 혹은 인간 종 아닌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심지어 파괴된 땅의 미학적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아이러니한 경험도 가졌다. 특히 장 노출로 빛의 이동 경위를 보여주었던 사진은 구도적 풍경으로까지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감성의 확장성을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을지 묻게 된다. 물론 일부 작업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지(The Land)""트래킹(Tracking)" 연작 대부분은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해야 했던 작가의 일상이 반영된 것이다. 사진 속 촬영지는 그의 집에서 직장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신도시 건설 현장이고, 사진을 찍었던 시간은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이었다. ㅡ여기서도 그의 성실성은 드러난다.ㅡ 이러한 제약은 오히려 노골적인 풍경을 의미가 사라진 텅 빈 공간으로 만들었다.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꽤 큰 규모의 설치작품 또한 엔지니어란 그의 직업을 안다면 이해가 된다. 그는 기계장치에 연결된 램프의 점멸로 빛과 어둠을 표현했고, 이는 공간의 왜곡을 직접적으로 가시화했다. 연극에서 보이지 않던 공간을 보이게 하는 조명의 효과처럼 말이다. 이렇듯 빛의 강도는 빈 공간을 생성하였고 감상자는 하나로 뭉치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사유를 경험하게 된다.

 

박부곤_위례신도시-20_C 프린트_64&times;80cm_2016
박부곤_위례신도시-24_C 프린트_64&times;80cm_2021

이번 전시, (The Act)에서 새롭게 보여주는 사진 또한 그의 일상과 밀착된 작업이다. ㅡ집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 다수이다.ㅡ 그는 몇 해 전 자신이 기록하였던 현장 중 한 군데인 위례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의 첫 삽은 대단지 아파트 공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된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은 크고 작은 공사 현장에 매일 노출된다. 심지어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창밖 풍경이 그렇다고 그는 말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파트와 상가 빌딩이 들어서면서 주변 공사 현장에 어둠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적나라하게 현전하는 욕망의 장면만 크고 단단한 이미지로 남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빛의 강도로 사진적 공간을 발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림막을 연극의 막(act)과 같은 개념으로 그는 해석한다. 연극에서 막(act)은 공간의 변화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생성하는 작용을 한다. 공사장 가림막의 용도도 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가림막 뒤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가림막에 그려진 자연과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공사장에서 쏟아지는 소음과 먼지에 대한 생각을 차단하면서 그 이미지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유도한다. 그 효과는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단순히 경계를 지을 목적으로 치는 공사장 펜스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틈은 언제나 있다. 가림막 이미지 앞에 멈춰 선 시선 위례 신도시-8, 이미지를 뒤덮은 기이한 덩굴 위례 신도시-23, 이미지와 너무도 완벽한/어설픈 공조 위례 신도시-20/위례 신도시-24은 애초의 의도를 차단하고 다른 이야기를 생성하기 충분하다.

 

박부곤_서울시-10_C 프린트_150&times;120cm_2022
박부곤_위례신도시-2_C 프린트_64&times;80cm_2020
박부곤_위례신도-10~15_C 프린트_20&times;25cm_2021~2

박부곤은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서 가림막들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가림막에 그려진 그 욕망의 공간에 그는 이미 살고 있다. 그에게 가림막이 새로운 사진적 공간으로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명된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 그에게 그 행위는 사진 작업이다. 그는 가림막 이미지 위에 생성된 공간에서 서성거린다 위례 신도시-8. 가림막을 뚫고 그 이면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위례 신도시-2. 가림막이 무용지물이 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서울시-10. 시간 단위로 공간을 분류하고 기록한다 위례 신도시-10~15. 그렇다, (act)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위(act) 하기 위한 것이다. 막의 뒷면에서 새로운 무대를 위해 연출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보다 막을 마주한 관객들이 더 부산스럽다. 조금 전 무대를 잊는다. 다음 무대를 상상하거나 연극이 끝나면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생각한다. 혹은 극 중 인물들은 왜 그래야 했는지 묻는다. ㅡ이 글을 쓰는 순간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디 액트(The Act)가 떠 올랐다.ㅡ 박부곤의 사진 앞에 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진적 공간을 마주한 우리는 행위(act) 한다. 그가 질문하고 의심했던, 하지만 결코 정의할 수 없었던 그 공간들을 들락거린다. 그리고 우리 역시 무한한 공간/우주(space)를 발명하고 이동한다. 나를 돌아다니며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오래전 그에게 그렇게 잠을 줄이면서까지 사진을 왜 찍냐고 물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요, 재미있어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이혜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