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 어떤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는 사회과학의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학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남기는 의미도 있지만,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고, 그 시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 작업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하였을까? 기록을 남긴 당시의 사회적 위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성장 과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글이 아닌 사진 이미지로 남겨졌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 의문은 사진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사진 이미지를 만들 때 사진가는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사진은 과학의 산물인데도 동영상과는 달리 그 맥락이 단절 혹은 소거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이 사이를 독자의 해석으로 메꿔야 한다. 결국, 사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진을 찍고, 독해하고, 감상하고, 전시하는 등의 여러 관련 행위의 중심에 인문학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닌, 기록 자체가 뭘 말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라는 하나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가? 그의 언어는 다변인가, 눌변인가, 웅변인가? 그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여지를 차단했는가? ● 사진은 모사에서 출발하지만, 재현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의성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림이나 글과 같이 창작의 가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느끼거나 읽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미술의 미학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재의 위치다. 그래서 사진은 여전히 미술에 대한 강박증을 앓는다. 그래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기준에 따라 한 장의 '잘' 찍은 사진 담론에 혹하는 것이고, 천편일률적으로 '빛이 좋은 시각'과 '좋은 포인트'에 매달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사진은 소재가 다를 뿐이지, 그 재현된 것은 다분히 천편일률적이고, 독창성이라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는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그 작업 중에서 김인재는 시각의 연속과 단절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사건을 염두에 둔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관(官)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김인재 작업의 소재인 '근대산업문화유산'은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란 이분법의 소산이다. 어떤 것이 문명이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 문명의 이면에는 야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게 보는 이의 시각이다. 김인재는 부지불식간에 이분법 혹은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과학적 혹은 진보적 시각에 관심을 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그 진보 담론에 비판적인지 우호적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문명과 문화유산의 변주에 관심이 많음을 알 뿐이다. 그 이분법에 따른 존재론적인 의미가 사진술과 닮았다. 정해진 프레임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지로 생성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존재 여부는 철저히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려 있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결국 배제되어 버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 결국 문명과 사진이란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이분법의 시각마저 벗어 던져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학문으로는 불가하다. 오로지 감성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감성이니 사진가들이 각자 보는 문명의 존재들을 한 곳에 묶어 놓고 보면 문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우와 열도 없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다.
김인재_예산 충남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인재, 춘천 육림연탄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그 시기의 공간이 재현된다.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지만 '굴뚝'이라는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의 표상으로서 '굴뚝'은 탁월하다. 그런데, '굴뚝'으로 단순화한 지표는 당시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여러 행위 속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는 못하게 한다. '굴뚝'이라는 지표가 너무 문화유산이라는 문명적 이미지가 강하고 그 굴뚝 주변의 여러 표상된 지표도 거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인재, 조치원 한림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이 담지 못하는 그 잡다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광주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목포 조선내화 벽돌공장, 문경 쌍용양회 공장, 서천 장항 제련소의 사택,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전곡공장, 예산 충남방직 공장, 오산 계성제지 공장, 의성 성광 성냥공장, 전주 쏘렉스 스폐공장, 조치원 한림제지 폐공장, 춘천 육림연탄 공장 ... 이미지에 달린 텍스트, 그 여러 고유명사가 이미지들 사이에서 단절된 역사의 기억을 메꿔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에는 텍스트가 들어가야 한다. 이 공장들이 지내온 영욕의 시간의 숫자도 기재해야 한다. 짧고 굵게. 그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그 '문명화'를 둘러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숫자로 된 캡션은 단지 역사적 기록성을 담보하는 것이라서 아니고, 그것이 얽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인재, 의성 성광성냥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기억이란,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像)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여러 공장 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진 피사체들은 무슨 의미로 기억되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像)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 이광수
왜 이렇게 비겁하게 작업을 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꿈에서나 미워하는 것을 향해 총을 쏠 줄 알지, 현실 세계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현장에서 사진만 찍고 빠질 뿐이었다. 카메라 대신 피켓을 들 때면 조용히, 튀지 않게 최대한 몸을 굽혔다. 그렇게 살게 된 이유는 뭘까. 앞서지 못하고 뒤에서 조용히 화를 삭히며 이런 글과 사진을 찍어온 이유가 있을까. 선조들 탓으로 그 핑계를 돌리며 잘도 살아왔다. 조용히 하라는 것.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것, 가족이, 어른들이 내게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살았다. 누군가는 내 이름이 온갖 '특권적인' 이름이 합류하는 곳이라 말했다. 증인, 당사자, 생존자, 활동가, 선주민…. 난 듣보잡 사진가로 살아도 좋으니 작업 소재로 이 지긋지긋한 비극을 그만 갖다 쓰고 싶다.
뭐가 그리 특권처럼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난 내가 도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제주도가 싫다. 그런데 정이 뚝뚝 떨어지는 그곳에 아직도 자꾸만 소설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얼마 전 우리 집 돌담을 공사 차량이 무너트렸다. 버틴다고 버텨지는 일이 아닌 이 난개발은 점점 나의 목을 졸라온다. 이제 곧 동부지역의 원형과 역사의 흔적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는,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닮았다. 내일이면 생이 끝나고, 기억이 끝나는 것처럼, 가장 힘이 센 눈앞의 펼쳐진 물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리 사진으로 그 풍경들을 남겨도 무기력을 남겨준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고 글을 다듬으며 이곳의 사람들이 내게 준 희망의 몸짓을 떠올렸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상상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기억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편집했다. 우리의 이러한 몸짓들은 무기도, 아름다움도 되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생을 멈추지 않는 것, 일상에서 보이는 평화의 몸짓들임은 분명하다.
두 번째 같은 제목으로 전시를 하고 소설을 쓰며 세 번째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의 변해가는 모습의 사진을 2011년부터 찍어왔지만, 더 긴 호흡으로 이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 싸움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 조마조마하게 있는 작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더 써 내려갈 것 같다. ■ 휘휘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2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손은영 홈페이지_soneunyoung.com
인스타그램_@_young_eye
주최,후원 /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초대일시/ 2023_0706_목요일_11:30a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4:00pm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Molecular Biology and Genetics
서울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105동 1층
imbg.snu.ac.kr
밤에 본 집 ● 손은영은 서울과 군산 등 한국의 도시 주변의 자리한 작고 납작한 집들을 촬영했다.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집의 외관을 인공의 빛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마치 인물을 촬영하듯 하나씩 집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로인해 집은 인격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어 자립한다. 누군가의 초상처럼 자리한 낮은 집들은 낡고 누추한 대로 기꺼이 사람의 보금자리를 기품 있게 만들어 보인다. ● 가능한 자신의 정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정직한 집은 가장 기본적인 집의 외관과 구조만을 뼈처럼 드러낸다. 지붕과 벽, 창문 이외의 다른 장식은 거의 없는 집이다. 도로나 길가와 인접한, 그렇게 무방비로 노출된 집들은 출입구를 숨긴 체 밋밋한 벽만을 창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만 몇 개의 창이 있고 외부의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 창문으로 붙어 일종의 방어벽을 만들고 있다. 이 어설프고 불안한 시설물은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편이다. 기이한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은 그만한 강도를 지닌 지붕 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너무 얇고 평면적으로 펼쳐져있다. 벽은 그 집에 사는 누군가의 등을 연상시킨다. 혹은 타자의 시선에 대책 없이 드러나 버린 살처럼 민망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빛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7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사진이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일 텐데 그렇게 자리한 대상 자체가 지닌 묘한 시각적인 힘을 작가는 날카롭게 찍어낸다. 비록 더없이 소박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구조와 형태, 매력적인 색채를 품고 있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이 건축물/집의 외관은 그 자체로 당당한 회화작품처럼 다가온다. 흡사 색채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진 색면 회화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의 조형적인 매력을 간직한 오브제를 선명하고 밀도 있게 건져 올리는 감각이 돋보인다. 이 사진은 그러한 작가의 안목이랄까, 미에 대한 묘한 감수성의 결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진에 들어와 박힌 대상보다도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안목, 조형감각이 우선하는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고층 건물 아래에 마지못해 끼여 있거나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 어딘가에 뜬금없이 박힌 이 작은 집들은 길옆에 바짝 붙어 서서 각박한 생애의 고단함을 스스로 방증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다소 생뚱맞은 색채와 기이한 형태가 역설적으로 빚어내는 조형도 정형화된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미감을 발화한다. 그것은 소외되고 주변부화된 것들의 간절한 반짝임이고 이는 집과 창문으로 발광하는 따스한 빛이 포개지면서 보다 강화된다. 지붕과 벽,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몇 개의 창문만이 집을 집이게 한다. 이 집들은 현재 번화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가옥구조이자 아파트와 고층 건물의 현란함 속에서 뒷걸음질 친, 지난 시간대의 집들이자 서서히 사라져가는 건축이다. 이상하고 키치적인 건물이자 주어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불가피하고 요령껏 만든 집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이 집들은 현실감이 줄어들고 마치 영화나 드라마세트장과도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거의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이다. 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기에 그러한 느낌은 보다 더 고양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3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동시에 이 사진은 평범한 주변의 일상 풍경이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 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실 안에서 어딘지 이상한 파열음을 내는 순간, 장면을 만났고 이를 관찰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공간 안에서 마주한 집의 외관에서 어떤 낮설음과 이상한 욕망과 충격을 건져 올려 찍는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해주는 순간을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찰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작가는 밤에 유독 특별한 순간, 장면이 되어버린 것을 건져 올리고 일상과 일상 너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느낌이 사진 속에서 공존하도록 배려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상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감춰진, 그것이 두르고 있는 독특한 순간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란 그것을 보게 하는 이들이고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일상속의 비일상, 현실 속의 비현실, 사물 속의 꿈, 풍경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이어져있는 것을 보는 일, 보게 하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 은밀하게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55_Ed.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0
도시 공간에 자리한 모든 사물들은 침묵하는 부동의 것들이다. 몸은 있지만 입을 가지지 못해 발화하는 음성은 없지만 그래서 고막에 와 닿는 소리는 없지만 분명 사물은 표면과 질감으로 인간의 말과는 다른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문법과 규칙이 소거된 그 상형문자 같기도 한 이상한 문자, 말은 차갑고 완고하게 사물의 피부에 문질러져있다. 낯선 집의 외벽은 다양한 흔적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잔뜩 서려있고 그것과 함께 했던 누군가의 체취와 지문이 저부조의 층을 만들며 눌려있다. 그래서 사물의 피부에 눈을 주면 사물의 생애는, 그 역사는 매개 없이 그대로 다가와 안긴다. 무수한 사물들로 채워진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텍스트이자 관능적인 몸들이다. 시선으로 읽고 마음으로 상상하는 텍스트로서의 풍경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사물들 속에서 사는 일이고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공간, 환경을 질문하는 일이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1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 도시의 내부로 잠입하면서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찾아낸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어둠 속에 박힌 작은 집들이다. 밀폐된 벽을 성처럼 두르고 소박한 불빛을 등댓불처럼 방출하는 그 집들의 벽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의 뒷면을 보여줄 뿐이다. 앞이 부재한, 따라서 표정이 지워진 뒷모습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져야 하는 정면보다 더 정직하다. 집이란 공간도 그 내부의 인테리어나 살림살이보다 그 모든 것을 보자기처럼 죄 감싸버린 벽에서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벽 앞에서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듣고 보이지 않는 집 안 사람들의 몸의 놀림을 보고 있다. 상상하고 있다. 침묵으로 절여진 집의 외벽이란 경계를 마주하면서 그 피부와 피부 너머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64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인간의 자취가 사라진 이 빈 풍경에는 이상한(?) 건물과 집의 내부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불빛을 전해주는 창문만이 무거운 침묵 속에 놓여있다. 풍경이라기보다는 차갑고 즉물적인 정물의 느낌을 받는다. 다만, 보는 이들은 밝은 창문으로 인해 살림살이의 흔적, 사람의 자리를 은연중 상상하게 한다. 햇빛이 모였던 창이 밤이 되면 다시 안의 빛을 밖으로 방사한다. 그것은 막막하고 절대 암흑의 공간에 고립된 집들이 외부에 보내는 구원의 신호와도 같다. ● 생각해보면 모든 집들은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완강하고 폐쇄적이다. 사람들의 최종 귀착점은 결국 각자의 집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만큼 내밀하고 고독하다. 그래서 타자의 집은 타자만큼, 그보다도 타자적이다. 더구나 전통사회와 같은 공공의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한 공동체가 무너진 이후 도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보이면서 이를 집의 구조를 통해 반영한다. 아파트 공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파트는 기계와 같은 기능 복합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0×120cm_2021
반면 손은영이 사진으로 담은 집은 단독주택이자 현재의 거주 공간에서 낙후되어 밀려나고 퇴락한 것들, 빈한했던 지난 시절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한 것들로서 가난하고 소박한 살림을 숨기지 않는다. 벽으로 감싸인 납작한 집들은 방이 있음을 암시하는 창문과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발신하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작가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저런 집들이 존재하고 그 집에 분명 사람이 살며 생을 영위하고 잠이 들고 꿈을 꾸고 내일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이 집들, 밤을 배경으로 고독하게 직립한 집의 외관을 통해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삶과 생애를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사진들이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위로"가 되고 싶다고 한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89_Ed.2/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1
사실 작가는 이 빈집들을 촬영한 다음 후보정을 통해 창에 조명을 기입했다. 그래서 흡사 실제 전기불빛이 퍼지는 듯한 허구를 만든다. 집들은 정면에서 빛을 받고 있다. 지붕과 벽이 어둠 속에서 돌출하듯 밀고 나온다. 이 집들은 주변 풍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거나 밀려나온 듯하다. 주변 풍경에 비해 이질적이고 생경한 외형을 간직하고 있는 어색하면서도 안쓰러운 이 집들은 또한 그런 사람의 초상, 생애를 대리한다. 반면 볼품없어 보이는 집의 외관과는 달리 작은 창문을 통해 나오는 조명의 불빛은 마냥 환해서 무척이나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가난에 기죽지 않는 자존심으로 견디고 있는 매 순간을 연장시킨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9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이처럼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도시의 풍경, 작은 집을 오브제 삼아 흥미로운 풍경, 정물을 구성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미학과 연루되면서 절묘한 구성과 기이한 형태, 매력적인 색채들의 조화로, 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미美이고 조형이다. 사진이 란 이미 존재하는 것의 피부에 달라붙어 이를 떠내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너무 낯설고 이상한 아름다움을 무의식적으로 건져 올리면서 사진/회화의 구분을 무의하게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미지를 선사한다.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길들여진 시선과는 다른 사진이라는 기계적 시선으로 인해 가능한 초현실적인적인 힘을 누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바로 '그것'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 박영택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33_Ed.3/1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현대인들을 일컬어 집 잃은 존재 homeless being 라고 한다. 집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집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건축물 등을 말한다. 단지 생명 유지가 집의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집이란 한 인간의 태어나고 성장하는 생물학적인 장소이자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배우고 세상을 알아가는 사회적 장소이다. 이와 더불어 집은 모든 개인적인 행위들이 일어나는 지극히 일상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주거 공간, 즉 집으로 불리는 건축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07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0
집은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개인의 경험과 정서가 결합하면서 가족 구성원과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꿈을 함께 하는 삶의 중요한 터전이다. 즉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을 집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았다. 집은 단순히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따라서 집은 외부와 나를 구분 지어주는 경계이기도 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75_Ed.2/10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110cm_2021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은 이런 정서적이고 정신적 의미보다는 경제적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젊은 세대는 삶의 목표를 집을 마련하는 것에 두었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대답한다. 점점 갈수록 생업에서 돌아와 내 몸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집의 가치가 인간 실존의 문제보다 상위에 군림해버렸다. 몇 평의 집에 사는지, 자가인지 월세인지, 아파트인지 연립인지, 강남인지 어느 동네인지 등에 따라 한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고,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집을 물려줄 수 있는지에 따라 능력의 지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손은영_밤의 집 The Houses at Night#46_Ed.3/15_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0
우리는 어떤 집을 욕망하는가. 비록 집이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건축물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족 구성원들의 필수적인 정서적인 교류 공간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면서 '밤의 집'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바슐라르가 지적한 대로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은 본질적으로 집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전형적인' 주거 공간과는 달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밤의 집'에서 일관되지 않는 거주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기억이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온전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자리를 잡은 집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사는 가족이 보이는 듯하다. 비록 화면에는 사람은 부재하지만,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족 간의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엄마의 뱃속과 같이 평온하면서 가장 사적이고 소중한 공간으로 보이도록 충만한 색감을 많이 사용하였다. 밤의 공간 속에서 찬연한 익명의 집들은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의 집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밤의 집'은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 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집 잃은 영혼을 위로하는 따뜻한 빛을 담아내고 싶었다. ■ 손은영
군대 사진으로는 이한구, 이규철, 조성기, 강재구 등 여러 명의 사진가가 발표한 바 있지만,
소대장이 부대에 암실을 차려놓고 찍은 사진도 처음이지만, 그중 오래된 또 다른 기록이라데 의미가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6월 14일 오후4시 무렵 갔더니, 작가 장종운씨를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인덱스' 안미숙 관장, 사진가 김문호, 정영신, 이 다,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이 많았다.
작가로부터 당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이런저런 군대 이야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진집에는 전시된 사진 외에도, 또 다른 추억을 떠올리는 사진이 많았다.
아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젊은 날의 초상’사진집 서문에서 발췌했다.
인연
이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을 나는 35년 전인 1989년에 본 적이 있다. 장종운 중위가 전역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인지 아니면 전방에서 잠시 외출을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그는 어느 날 우리 출판사를 방문해 이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1989년이면 막 출판사(1988년 창립)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한두 권 책을 냈을 때였는데 그가 어떻게 우리 출판사를 알고 찾아왔는지 몰라도 고마운 일이었다. 당시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향해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아직 군부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던 시기였다. 우리 출판사의 첫 책 크리스 마커의 북한 사진집 『북녘 사람들』마저도 억울하게 북쪽을 찬양하는 도서로 분류돼 마포경찰서 정보과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사무실을 이전해 짐을 풀고 나면 반갑지 않은 담당 요원이 제일 먼저 방문하곤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정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서슬 퍼런 공안정국도 이유였고, 군 관계 사진은 보안이 필수인데 찍힌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사진을 바로 출판하면 촬영자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갈 우려가 없지 않았다. 또 창업 초기라 출판사 경영도 녹록지 않아 원고를 반려하고 나중을 기약했다.
최근에 작가로부터 당시 사진집을 내고 보도사진계로 진출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사진이 절실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게 그런 힘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때 사진가로의 길을 터주지 못한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진가의 길은 가시밭길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 매체이니 사진의 길로 인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는 전역 후 고향에 내려가 한평생 보험업계에 투신하여 2023년 4월 정년퇴임을 했다. 비록 그때 사진집을 내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종종 전화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우리 출판사에서 나오는 사진집들을 사보며 취미 삼아 사진을 오랫동안 해올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 이제 고대하던 사진집을 내게 되었으나 원고를 돌려주며 그때 기약한 ‘나중’이 일제강점기와 맞먹는 35년이나 될 줄은 작가나 나도 몰랐던 일이다. -중략-
군에서 공식적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병사는 정훈병이다. 1970년대-80년대에는 고된 훈련과 근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사진병으로 군 복무를 하기 위하여 사진학원을 다니는 장정들이 많았다. 사진병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통을 따랐는지 통신병과에 소속되어 있다가 2014년 정훈병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진병은 주로 간부들을 따라다니며 군대내의 공식 행사 및 교육훈련 장면을 찍는다.
군에서 홍보용 화보집을 만들거나 보도기관에 배포하는 사진들은 신형 탱크나 자주포 등 현대화한 군 장비와 난관을 뚫고 용맹 무쌍하게 진격하는 부대의 훈련상황 등을 찍은 공식적인 홍보용 사진들이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사진이 유산지에 덮혀 맨 앞쪽에 배치하고 이어서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의 사진이 역시 유산지에 덮혀 머리말이나 격려사와 함께 나온다.
사진병은 아니지만 사진 전공자 가운데 군 복무를 하며 사진을 찍은 사진가로는 이규철, 이한구 등이 있다. 이들은 휴가 복귀 중 카메라를 몰래 영내에 반입하여 선임들의 묵인하에 내무 생활을 촬영해 전역 후 전시를 하거나 사진집 (이한구 ‘군용’)을 통해 공개하였다. 1990년대 초에 울산지역 해안초소에서 근무했던 이규철은 신병 군기 잡기, 얼차려 등 내무 생활 중 벌어지는 군대 폭력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고, 이한구는 군용품으로 다뤄지는 병사의 인권 문제를 사진으로 제시했다. 사진 전공자이며 부사관(중사)으로 복무한 특이한 이력의 사진가 조성기는 301특공여단의 교육훈련 과정을 다큐멘트해 1993년 군에서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여단장의 허락을 받아 촬영한 공식 사진이지만 고된 교육훈련에 지친 훈련생의 모습과 휴식, 장비 점검 등 훈련의 이면을 기록하였다.
장종운 소대장의 사진에는 용감하고 늠름한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대대장의 허락하에 카메라를 영내에 반입해 사진을 찍었다지만, 그의 앵글은 군의 공식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 동아리에서 사진을 익히고 임관 전 전시회를 했듯이 카메라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일반인들은 다루기 힘든 마미야 중형카메라를 사용하고 독신 장교 숙소인 BOQ에 필름을 현상 인화할 수 있는 암실을 마련했을 정도로 그는 사진에 빠져 있었다. 초상사진을 찍으며 군용담요를 배경막으로 사용한 것도 이채롭다. 특히 빼당(페치카 당번병), 이발병, 사역병 등 병사들의 사진은 독일의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가 독일인들을 직종별로 분류해 남긴 사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정종운 소대장은 소대원들을 찍되 훈련상황보다는 청춘을 반납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의 일상과 내면에 주목했다. 그는 전지적 서술자(Omniscient narrator)로서의 시점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한 뒤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는 소대장실에서 소대원들의 신상 명세서를 보았을 것이고, 또 전임자나 내무반장으로부터 소대원 개개인의 특성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앞의 이규철과 이한구가 내무 생활자로서 직접 보고 목격한 1인칭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데반해 장종운 소대장은 간부(장교)라는 3인칭 시점에서 1980년대 후반의 병영생활과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기록으로 남겼다.
군대라는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으나 비교적 자유롭게 촬영한 그의 사진은 대한민국 건군 사상 간부가 찍은 최초의 병사들에 관한 기록이라는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객관적 기록이라해도 사진은 촬영자의 주관을 거치게 된다. 징집된 젊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한 소대를 책임졌던 소대장의 연민과 안타까운 시각이 사진에 묻어난다. 계급을 떠나 카메라를 매개로 병사들의 불안과 상처를 감싸안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병사들이 그를 형이나 친구처럼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소대장일지라도 군림하려 들면 병사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진집 ‘젊은 날의 초상’은 지난날 병사들이 처해 있던 환경과 일상 그리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이 군을 폄훼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영생활의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개선의 필요성을 새롭게 유도한다. 실사구시와 진실은 망각과 환상만을 불러일으키는 경직된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제시할 때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지만 젊은 날의 병사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이를 잘 참고 견뎌냈다. 지금은 초로에 접어들었을 이 사진집에 등장하는 소대원이나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장종운 소대장의 사진은 추억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난의 군대였지만 그때는 그래도 청춘이었다. 청춘은 언제나 그립고 아쉬운 법이다.
이등병 월급이 3천원에서 60만원대에 이르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앞으로 군의 사정도 점차 나아질 것이다. 35년 전에 이 책이 나왔다면 아마 나는 상처 치유와 위안 그리고 생명 복원력이 있는 세월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이규상 (출판인)
1844년 탈보트에 의해 최초의 사진집인 「자연의 연필 Pencil of nature」이 발표되었다. 사진의 태동기에 만들어진 이 책은 탈보트가 촬영하고 인화하여 만든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자연의 연필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진은 순수한 자연의 개입으로 인해 완성된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진을 향한 탈보트와 많은 발명가의 보이지 않는 고뇌와 실패의 흔적들이 보배처럼 담겨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탐구 정신을 이어가는 작가들에 의해 사진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김승환_네모심장T_광택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85×120cm_2023김승환 네모심장F_광택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96×135cm_2023김정현_부활#052_카본 프린트_45×45cm_2019김정현_부활#069_카본 프린트_45×45cm_2019김지영_In the Beginning#31-Jeju_코튼지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_70×70cm_2017김지영_In the Beginning#38-Haeundae_코튼지에 피그먼트 잉_70×70cm_2020라인석_Pencil on paper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110×73cm_2012라인석_롯데월드타워로부터, 눈_touched paper에 피그먼트 잉크젯 _106×80cm_2018
그라포스는 사진 매체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듯 작품을 완성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각기 다른 형식과 방법으로 하늘, 나무, 과일, 꽃 등 일상적인 소재를 그들 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들에게 사진 매체는 사물을 재현하는 기능적 도구를 벗어나, 유희와 실험적 행위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결과 완성된 작품들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들고 있다. 또한 그들의 작품 속에는 작품을 위해 쏟은 여러 실험적 행위와 시간이 중첩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작품에 남겨진 작가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매년 열리는 정기전으로 김승환 「네모심장」, 김정현 「부활」, 김지영 「In the Beginning」, 라인석 「휘어진 세계로부터」, 박경태 「Methuselah」, 박세진 「내면의 표상」, 박정랑 「마음속의 우화」, 엄효용 「리틀 포레스트」, 최수정 「Millennium Flowers」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빠르고 쉬운 것을 탐닉하는 시대에 반하여, 천천히 그리고 깊게 호흡하며 실험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것은 사진의 태동기처럼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작가들의 염원이며, 이것이 그들의 작업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그들은 행동하는 작가들이다.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