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조 ’역사를 말하는 사진‘, 신복진 ’광주발사진종합‘, 권태균 ’노마드‘, 김운기 ’어머니, 그 고향의 실루엣‘,
정영신 ’어머니의 땅‘도 지난 시절을 새록새록 불러들일 추억 속의 사진집이다.
또한 오랜 병영 생활을 되 돌아 볼 수 있는 이한구의 ’군용‘과 장종운의 ’젊은 날의 초상’ 등을 추천한다.
진열대에 올린 사진집만도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꼼꼼히 살펴보면 더 좋은 사진집도 부지기수다.
이왕이면 오늘 11월 25일(토) 오후 4시에 들리면 오랫동안 묵언 잠적했던 이규상 대표의 강연회가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글이다.
“책은 오랫동안 지식의 전달과 영감(靈感)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정보의 전달과 저장이 종이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수천 년 이어온 책의 위상은 나날이 퇴색돼 가고 있다. 불과 2-30년 사이에 불현듯 가해진 이러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산업혁명이 인간 삶의 근본적 변혁을 몰고 왔듯이 디지털 문명의 출현은 또 다른 삶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수천 년의 습관을 순식간에 바꿔야 하는 가공할 디지털 혁명기에 살고 있다. 그에 따른 인문의 위기는 곧 출판의 위기다. 이번 행사는 사옥 짓기보다 사진으로 ‘사진집’을 지어온 눈빛출판사의 35년 발자취를 집약한 전시를 겸한 북페어다. 최근 전시를 통해 책의 확장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눈빛출판사는 급변하는 출판환경에 대응하고 인문과 예술의 위기 속에 다 각도로 출판의 방향과 역할을 모색해오고 있다.”
작품 소개 ●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태어나서 30년 넘게 생활해온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인이 오랫동안 생활해온, 고도의 자본주의 정신이 물질화 된(되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곳곳을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을 사용하여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현재, 대도시(=메트로폴리스)로 거듭나고 있는 서울에서는 재현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상품 세계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와, 상품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이는 서울을 단순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 초현실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상품 세계 그 자체 뿐 아니라, 상품이 전시되는 방식과 그 전시 공간, 그리고 전시 공간이 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품 세계 전반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펼쳐지는 것이다.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는 상품 세계를 바라보는 산책자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인 대중들에 대한 경험까지 확장시키는데, 결국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적 이미지는 도시의 건축물들, 도시를 배회하는 대중들, 그리고 상품들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도시 서울 곳곳의 장소들에서 환영적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들을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으로 제작해 보았다.
작가 및 기법 소개 ● 현대 도시의 풍경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판타스마고리아' 기법을 사용하여 '플라뇌르' 시리즈를 진행 중에 있는데, 플라뇌르(flaneur)란 '거리 산책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도시를 상상력과 직관을 지닌 채 누비고 다니는 예민하고 고독한 사람을 의미한다. '플라뇌르' 시리즈 작업은 대도시(=메트로폴리스)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이미지로 드러내 보이는 일로써, 항상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들의 반복일 뿐인 '반복 동일성'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고도화된 상품 자본주의의 공간으로서, 대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것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모종의 환영과 그로 인한 욕망으로 인하여 작동하는데, 그러한 환영과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이고 애매모호한 감정을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해보고자 한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는 환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판타스마(Phantasma)에서 유래한 단어로 환등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은 우리가 직접 발을 딯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단순히 사람의 눈(=망막)에 비치는 외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렌즈)을 빌려 인지적으로 작동하는 초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레디메이드'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작업 방식에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아우라를 상실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다시끔 아우라를 복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 본인은 작업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언뜻 보면 경계가 명확하고 확실해 보이나,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섞여있다. 경계라는 것은 모종의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이며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인 것으로, 그러한 경계가 불명확하고 모호한 세계,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소위 '포스트모던'한 디지털 세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세계 감정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 전강희
익명의 시간을 노정(路程)하는 찰나의 무늬 ● 여기, 도시를 유영하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도시 공간의 서사를 더듬는 차가운 시간이 있다. 1.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는 순간, 사진 프레임에는 시간의 영속성이 박제된 이미지로 탈각되어 갇힌다. 그것으로써 사진 이미지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다면 사진 이미지는 우리 세계에서 공진(共振)하지 못하고 화석화된 시간 속에 영원히 서식하게 될 것이다. 사진의 속성이 순간의 가시적 세계를 투명(transparent)하게 '기록'하는 소임으로만 수렴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 비평가이자 기획자이며, 그 역시 사진가였던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 1925~2007)는 그가 196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사진가의 눈>이라는 전시에서 '사진'이 과거에 머문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며, 멈춰 있는 현재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현재성'을 담지한 컨텍스트임을 설파 했다. 사진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말하고자 했던 그의 견해처럼 사진이 만들어 가는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의 생활세계에 관여하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생명력을 얻은 사진의 힘으로 하나의 장소에 귀착해 그 공간에 스며드는 사람과 풍경을 긴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포획해 겹쳐 가는 전강희의 작업은, 구체적 해명이 쉽지 않은 장소성에 얽힌 일상의 핍진성을 증폭하는 힘을 갖는다. 동시에 특정한 시공간에 깃든 인간 군상과 사물들의 움직임을 켜켜이 포갬으로써 얻어지는 '이미지의 불투명성'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체계에서 미약해져만 가는 인간 존재의 함량을 표징 하려고 한다.
2. 이번에 선보인 「플라뇌르(Flanuer) 서울」 연작에서도 그러했고 이전의 작업에서도 전강희는, '플라뇌르'의 사전적 의미처럼 한가롭게 공간을 배회하는 산책자의 가벼운 태도를 견지하며 피사체에 대한 감정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감정의 개입이 차단당한 채 무수히 겹쳐진 사진 이미지들은 멀리서 관조하면 덧칠의 덧칠을 거듭한 거친 마티에르로 이루어진 먹먹한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 이미지의 과잉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허용해 이미지의 선명성을 흐려 이미지의 형태를 소거하는 전강희의 독특한 방식은, 김아타(본명: 김석중, Atta Kim 1956~ )가 2005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8시간의 장노출을 이용해 뉴욕 타임스퀘어를 지나 간 수많은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형태를 먼지처럼 뭉개버린 사진 이미지와 겹쳐지곤 한다. 하나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 다른 하나는 이미지의 결핍이라는 상반된 방식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이른바 존재론적 숙명을 사진 이미지로 증명하려 한다. ● 전강희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수렴하는 방식으로, 김아타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탈락시켜 흔적만 남기는 상반된 방식으로 작업을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언명처럼 두 작가의 사진 이미지에는 공히 장엄한 시간의 흐름에서 그 곳에 있었으나 부재(不在)할 수밖에 없는 익명화 되어 가는 존재들의 불길함이 담긴다.
3. 이미지의 과잉에 가까운 중첩을 통해 그 공간을 혼돈의 세계로 만드는 전강희의 풍경은 늘 쓸쓸하다.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신체는 파편화 되어 있고, 공간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미분화 되어 있는 이미지로부터 이미지가 담고 있는 감정의 선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를 향한 이미지 외부로부터의 정서적 관여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전강희의가 구축한 이미지의 세계는 극적이기 보다 무심하다. ● 전강희가 자신 밖의 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개념으로 끌어들인 '플라뇌르' 즉 산책(자)의 본질은 공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사물과 사람을 관조하고 관찰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플라뇌르는 전강희의 작업에서 적정한 작업 기술(技術)이자 도시의 공간들을 편견 없는 공평한 감정의 무게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태도가 된다. ● 사진 프레임 속 일반적인 풍경 이미지들은 개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시선과 목적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거나 읽혀진다. 반면, 전강희의 작업에서는 좀처럼 풍경에 관여하는 화자의 시선을 마주하기 어렵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발화(發話)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강희의 풍경 이미지에서는 자기 억압처럼 이야기는 발화되지 않고 삼켜진다. 역설적으로, 다채로운 서울의 공간을 부유하는 전강희의 플라뇌르는 우리를 둘러싼 풍경과 공간을 자기 객관화라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비로소 균등하게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한다. ■ 김용진
미발표 작을 담은 ‘공(空)은 열려 있다’ 사진집은 신청한 분에 따른 한정본으로 발행된다.
전시가 끝나는 12월 14일까지 신청 받는다고 한다.
아래는 선생께서 남긴 글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 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벽이 생긴다면,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 페렉은 그의 산문집 『공간의 종류들』에서 "산다는 것, 그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공간이라 지칭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 발명된 공간이다. 명명함으로써 증식되는 일상의 공간에 대해,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행동에 대해 페렉의 끊임없이 질문하고 분류하며 기록하는 행위, 즉 그의 글쓰기는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천하게 한다. 마치 앙리 미쇼가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공간은 결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이는 기호로 시작되는 질문이고 의심이다.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 모든 공간은 같을 수 없으며 그 이동도 지루하지 않는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 페렉에게 산다는 것은 하나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최대한 명료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박부곤의 작업을 지켜본 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이 기간을 전, 후로 나누어 보면 먼저, 신도시 개발 현장의 땅을 기록한 "대지(The Land)" 연작과 그 현장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기록한 "트래킹(Tracking)" 연작이 있다. 이후는 현장에 세워지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찍은 사진과 기계장치를 결합해 도시화 과정을 보여주는 설치작품이 작업의 중심에 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 의해 완벽하게 탈바꿈되는 땅의 풍경을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열 번의 개인전에서 참으로 성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은 분명 자본과 결탁한 인간의 욕망이 축조하는 바벨의 탐색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감상자는 그의 사진 앞에서 땅의 권리를 혹은 인간 종 아닌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심지어 파괴된 땅의 미학적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아이러니한 경험도 가졌다. 특히 장 노출로 빛의 이동 경위를 보여주었던 사진은 구도적 풍경으로까지 다가왔다. ● 그렇다면 이러한 감성의 확장성을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을지 묻게 된다. 물론 일부 작업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지(The Land)"와 "트래킹(Tracking)" 연작 대부분은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해야 했던 작가의 일상이 반영된 것이다. 사진 속 촬영지는 그의 집에서 직장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신도시 건설 현장이고, 사진을 찍었던 시간은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이었다. ㅡ여기서도 그의 성실성은 드러난다.ㅡ 이러한 제약은 오히려 노골적인 풍경을 의미가 사라진 텅 빈 공간으로 만들었다.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꽤 큰 규모의 설치작품 또한 엔지니어란 그의 직업을 안다면 이해가 된다. 그는 기계장치에 연결된 램프의 점멸로 빛과 어둠을 표현했고, 이는 공간의 왜곡을 직접적으로 가시화했다. 연극에서 보이지 않던 공간을 보이게 하는 조명의 효과처럼 말이다. 이렇듯 빛의 강도는 빈 공간을 생성하였고 감상자는 하나로 뭉치지 않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사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 막(The Act)에서 새롭게 보여주는 사진 또한 그의 일상과 밀착된 작업이다. ㅡ집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 다수이다.ㅡ 그는 몇 해 전 자신이 기록하였던 현장 중 한 군데인 위례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의 첫 삽은 대단지 아파트 공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된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은 크고 작은 공사 현장에 매일 노출된다. 심지어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창밖 풍경이 그렇다고 그는 말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파트와 상가 빌딩이 들어서면서 주변 공사 현장에 어둠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적나라하게 현전하는 욕망의 장면만 크고 단단한 이미지로 남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빛의 강도로 사진적 공간을 발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놀랍게도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림막을 연극의 막(act)과 같은 개념으로 그는 해석한다. 연극에서 막(act)은 공간의 변화를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생성하는 작용을 한다. 공사장 가림막의 용도도 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가림막 뒤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가림막에 그려진 자연과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공사장에서 쏟아지는 소음과 먼지에 대한 생각을 차단하면서 그 이미지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유도한다. 그 효과는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단순히 경계를 지을 목적으로 치는 공사장 펜스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틈은 언제나 있다. 가림막 이미지 앞에 멈춰 선 시선 「위례 신도시-8」, 이미지를 뒤덮은 기이한 덩굴 「위례 신도시-23」, 이미지와 너무도 완벽한/어설픈 공조 「위례 신도시-20」/「위례 신도시-24」은 애초의 의도를 차단하고 다른 이야기를 생성하기 충분하다.
박부곤은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서 가림막들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가림막에 그려진 그 욕망의 공간에 그는 이미 살고 있다. 그에게 가림막이 새로운 사진적 공간으로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명된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 그에게 그 행위는 사진 작업이다. 그는 가림막 이미지 위에 생성된 공간에서 서성거린다 「위례 신도시-8」. 가림막을 뚫고 그 이면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위례 신도시-2」. 가림막이 무용지물이 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서울시-10」. 시간 단위로 공간을 분류하고 기록한다 「위례 신도시-10~15」. 그렇다, 막(act)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위(act) 하기 위한 것이다. 막의 뒷면에서 새로운 무대를 위해 연출자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보다 막을 마주한 관객들이 더 부산스럽다. 조금 전 무대를 잊는다. 다음 무대를 상상하거나 연극이 끝나면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생각한다. 혹은 극 중 인물들은 왜 그래야 했는지 묻는다. ㅡ이 글을 쓰는 순간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디 액트(The Act)가 떠 올랐다.ㅡ 박부곤의 사진 앞에 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진적 공간을 마주한 우리는 행위(act) 한다. 그가 질문하고 의심했던, 하지만 결코 정의할 수 없었던 그 공간들을 들락거린다. 그리고 우리 역시 무한한 공간/우주(space)를 발명하고 이동한다. 나를 돌아다니며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 오래전 그에게 그렇게 잠을 줄이면서까지 사진을 왜 찍냐고 물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요, 재미있어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 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