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허물고 대중에 공개된 송현동 열린송현녹지광장
2027년 정식 개장까지 공간 활용 위한 대화 이뤄져야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기간 열린 송현녹지광장에 설치됐던 '하늘소' 전망대 ⓒ김지나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얼마 전 폐막했다. 2017년 처음 시작해 벌써 4회째를 맞이한 도시, 건축 분야의 전시축제다. 갈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또 복잡하게 변해가는 도시 문제들을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보는 장으로 기획됐다. 그동안 전시공간으로 활용된 장소들도 이색적이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운상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서울 도시개발의 여러 가지 실험을 이루어졌던 현장들이었다.

주로 실내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던 지난 행사들과 달리, 이번에는 메인 전시장이 야외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란 곳이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만큼 생경하게 느껴질 법한 이 공간은 서울 송현동에 생긴 넓은 녹지다. ‘생겼다보다는 공개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손대지 못했었던 땅, 부동산 시장에서는 나름 뜨거운 감자였던 송현동 땅이 바로 여기다.

 

하늘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녹지광장과 주변 풍경 ⓒ김지나
'페어 파빌리온'. 비엔날레 기간 열린 송현녹지광장에 설치된 파빌리온 중 하나다. ⓒ김지나

활기 채워가는 도심 속 녹지광장

작년 10월 처음 임시개방이 됐을 때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 드물게 남아 있던 금싸라기 땅이었지만 녹지광장이란 쓰임새는 낯설고 또 당황스러운 결정이었던 듯하다. 그러다 올해 도시건축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 결정된 후, 풍경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소라는 거대한 전망대가 가장 먼저 들어섰고 곧이어 다양한 형태와 색감의 설치작품들이 푸른 녹지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파빌리온이라 불리는 임시 건축물들로, 모두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만 전시됐다가 이후 해체돼 자재들만 재활용될 예정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두 달간은 평일 낮에도 찰나의 가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한 사람들로 녹지광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전시기간동안 광장에 전시된 작품들이 난해한 구조물로 보였을 법도 했지만,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늘소 전망대에서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품은 서울 도심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땅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지하철역과 가까운 데다 경복궁과 국립현대미술관, 북촌한옥마을, 인사동으로 둘러싸인 위치도 사람들을 불러들이기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비엔날레 관람객이 약 80만 명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열린송현녹지광장을 찾은 사람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현동은 관광객도, 업무 차 드나드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는 동네다. 하지만 이전에는 녹지광장 자리가 어떤 풍경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년 초까지만 해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일반 사람들은 들어가 볼 수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이토록 넓은 평지가 개발되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녹지광장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김지나

공간의 미래 위한 시민 토론 이어져야

지금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 되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기구하다는 표현 말고는 더 적합한 단어가 없을 정도다.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집안 소유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으로서 역할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 사택,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를 거쳐 개발을 노리고 삼성생명, 대한항공이 차례로 주인이 됐으나 별다른 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땅에 얽힌 각종 규제 때문이었다. 결국 서울시에서 이를 다시 매입하고 공원으로 개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에 가까웠다. 서울 한복판, 우리나라 역사 도심 속 남아 있는 빈 공간에, 공공 공간 말고 또 어떤 용도를 논할 수 있었을까.

이제 여기 새로운 녹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지난 두 달 동안 보고 느꼈다. 앞으로도 크고 작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송현동 땅이 앞으로 어떤 공간이 돼야 할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은 재고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충분한 시민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물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처럼 유휴공간이 생겼을 때 임시 개방기간을 가지고 시민들이 실제로 사용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사례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반환 미군기지인 원주 캠프 롱, 벽돌공장 건물이었던 연천 DMZ피스브릭하우스, 이번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 전시장인 옛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이슈도 다양했다. 이런 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들의 경험을 실제 개발계획에 반영할 수 있도록 고민이 필요하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 정식 개장하는 2027년까지 이 땅의 미래에 대한 많은 대화가 오고가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란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북인사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거리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57th갤러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 / ⓒ 조문호

[마이데일리 = 양유진 기자]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담긴 특별한 힐링 포인트를 전하는 토크 이벤트를 진행했다. 7일 오후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힐링 토크에는 이재규 감독과 박보영 배우,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따뜻한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입체적인 캐릭터와 정신질환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웃음과 위로를 통해 정신병동에 대한 편견을 따스한 온기로 녹인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백은하 소장은 "누구도 처음부터 그리고 끝까지 환자가 아니며, 퇴원을 하고 난 이후에도 현실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는 감상평으로 힐링 토크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규 감독은 "이번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습들을 통해 일상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경제지표가 올라갈수록 행복 지수도 동반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자책 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또 우리 일상 가까이에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번 시리즈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박보영 배우는 "다은이는 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참 많은 캐릭터라 그녀의 성장을 응원한 동시에, 칭찬 일기를 쓰면서 저 또한 새로운 발견과 힐링을 느꼈다. 매 회 등장하는 직장인, 취준생, 워킹맘 등처럼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전한다"는 따뜻한 소감을 전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차별점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편견을 직면하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스스럼없이 현실적으로 묘사해준 작품"이라는 관람평과 함께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전했다.

 

배우 박보영, 이재규 감독,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황과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구현했다. 이재규 감독은 "팔이 부러지거나 감기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지만, 정신질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픔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실제 병동에서 본 모습들을 반영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들이 느끼는 증상을 스크린에 담기 위해 다양한 촬영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김지용 선생님 역시 "사회불안장애로 힘들어하는 환자가 느낄 마음을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표현한 부분이 와닿았다. 환자들이 느끼는 증상을 단순화하고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힐링의 말을 묻는 백은하 소장의 질문에 이재규 감독은 "오늘 이 자리처럼 극을 놓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욱 늘어났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도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프라가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공개 직후 국내 넷플릭스 시리즈 1위에 오르며 정신질환과 정신병동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좋은 메시지를 파급력 있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정신건강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프라를 돌아보고, 더 많은 투자로 이어지는 사회의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유진 기자 youjinyang@mydaily.co.kr

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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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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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지난 1011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57th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들이 나서고 예술하라‘, ’네오룩이 후원한 이 전시는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김진하씨에게 드리는 상이자 짐이다.

 

30여 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바라는 전시다.

 

  사실나무아트'그림마당 민'을 이은 인사동의 자존심이었다.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아트'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현장성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작가가 동참한 것이다.

 

  원로급에 속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화백을 비롯하여 김보중, 김상구, 김억, 김재홍,

 김주호, 김준권, 김진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송창, 안창홍, 윤여걸,

이동환, 이인철, 이태호,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최경선, 최병민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민중미술가 24명이 작품을 내 놓았다.

 

  늦장 부리다 지난 14일에서야 정동지 만나 전시장에 들리게 되었는데,

주말을 맞은 인사동과 연결된 송현동 주변에는 가을 소풍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원조를 만난 듯 눈에 익은 작품이 늘렸다.

 

  송현동 꽃밭 가는 길은 북새통이라 사람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옆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에 사람이 없어니, 기분 더럽더라.

이건 모르는 국민들 잘못이 아니라 이끌고 알려야 하는 정치와 행정의 잘못이다.

 

  전시장은 홍성미씨가 지켰고, 옆 베란다에서 손기환, 김진하씨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는데, 몸이 불편해 끌고 나온 차가 발목을 잡았다.

딱 한 잔만 얻어 마셨는데, 그 맛에 끌려 인사동 벽치기 골목을 배회했다.

 

  사실은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이태호씨가 새긴 홍범도장군 벽화가 보고 싶었다.

마치 유목민상표처럼 유목민앞을 버티고 섰는데, 골목 분위기가 꽉 잡혔다.

이놈들! 어디 나타나기만 하라” 는듯 골목을 지켜주니, 어느 잡귀가 얼씬거리겠나?

 

  ’57th갤러리에서 열리는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오늘이 마지막이라 보실 분은 서둘러야 한다.

일단 좋은 작품이 많다.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함께하는 의미는 더 크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 볼만한 전시가 너무 많았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세계적 오염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을 비롯하여

나무화랑의 구경숙전 마킹스’, 그리고 김경서의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젖은 땅’,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등 보아야 할 전시가 한 둘이 아니었다.

 

연휴가 끝나는 지난 4일은 서둘러 인사동에 나갔다.

십여 년에 걸쳐 해왔던 일 중의 하나가 인사동 전시 안내하는 일인데,

월말에 나오던 서울아트가이드소식지가 나오지 않아 몇 번을 헛걸음친 것이다.

 

  연휴라 그런지 인사동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무슨 볼거리가 있는지, 북인사마당은 구경꾼들이 진을 쳤다.]

 

  '아르떼 숲'에서 열리는 '후쿠시마 조삼모사'전에도 관람객이 몰렸다.

방류하는 일본보다, 동조하는 윤정부 대응에 더 분노하는 분도 있었다.

 

  삼일이나 지나서야 서울아트가이드가 나왔는데,

인사동 간 김에 네오록에서 보았던 구경숙의 마킹스보러 나무화랑에 갔다.

 

  전시 보는데, 차 빼라는 전화가 걸려 와,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6일에서야 다시 인사동에 나갈 수 있었는데,

마침 전시 작가인 구경숙씨도 만날 수 있었다.

 

  마킹스는 건강을 잃은 작가가 긴 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신체적 반응과 살아야 하는 절박함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먼저 몸의 흔적을 판각하고 탁본 기법으로 찍은 뒤,

이를 한지로 릴리프 하여 육체와 정신의 이중성을 드러냈다.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노작이었다.

 

 전시장에서 내려와 정복수씨 전시가 열리는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를 가기 위해 인사동 11길로 들어서다

토포하우우스앞에 붙은 김경서의 젖은 땅전시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다.

 

  아는 분이기도 하지만, 한때 몰입했던 늪에 관한 전시라 눈이 번쩍 뜨였다.

90년대 환경사진가회에서 일할 때, 전국 늪지를 찾아다니며 우포늪 사진집을 발간한 적도 있었다.

더구나 우포늪은 고향에서 가까워 어릴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 아닌가.

 

  전시장에 올라가 보니 작가인 김경서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걸린 작품들은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사진처럼 재현했지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늪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장 재현에 머물지 않고, 늪이 숨 쉬는 표현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늪지를 탐사해 낸, 늪에 대한 내공이 대단했다.

 

  문제는 매달 인사동 전시 소개에 공을 들여 온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보지에 사진전문갤러리를 비롯한 많은 갤러리의 정보가 등제 되지 않아

레오록이나 페이스북 등 여기저기 뒤져 찾아내기도 하지만,

볼만한 전시를 추려 올리는 과정에서 '인사아트센터''경인미술관', '토포하우스'

대관 위주의 갤러리는 경력 작가들이 잘 찾지 않아 소홀했던 점이 문제였다.

 

  내가 인사동에 관한 기록을 하게 된 것도 어언 40여 년이 되었다.

변해가는 인사동이 안타까워 옛 풍류객을 찾아다니며,

인사동에 관한 전시나 행사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흐르는 물길은 되돌릴 수 없었다.

17년 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이 창립되어,

창예헌카페를 개설한 것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시작이었다.

 

  그 뒤 창예헌이 해체되어 이름을 유목민으로 바꾸었는데,

그마저 유목민이란 주점이 생기면서 유목민카페도 폐쇄되었다.

대신 인사동 사람들블로그를 개설하여 중요한 기록들은 옮겼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자료를 잃어버린 안타까움도 남는다.

 

  다음블로그 인사동 사람들을 운영하기 시작한 십 년전 부터 '인사동과 서울강북지역 전시안내'를

매월 초 올려가며 인사동에 관한 이야기와 전시리뷰를 포스팅해 왔는데,

특정 전시 리뷰를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해, 한 달 동안 로그인을 못 하게 하는 갑질에

네이브블로그인 인사동이야기를 새로 개설한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을 비롯하여 사진에 관한 포스팅이 무려 6,300건이 넘어 옮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곳의 블로그를 같이 운영하게 되었는데,

두 블로그에 매일 한 꼭지씩 올린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자료를 블로그에서 찾을 수 있으니, 내에게는 족보나 마찬가지다.

김경서씨 작품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전시 이야기를 하겠다.

 

  정복수씨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보기 위해, 조계사 아래 '올미아트스페이스'로 발길을 옮겼다.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였다.

 

  주인공인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 제목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자궁으로 간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니던가?

순간적으로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 사주 보는 점집에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부각 되었는데,

마치 너 자신을 알라는 듯, 묵시적 가르침의 뉘앙스도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어찌 보면 길 잃은 인간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겼더니,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손님의 술값이나 식사비를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황순미대표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뒤풀이 값 내는 곳은 흔치 않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돈을 쓰면 반드시 돌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미처 소개하지 못한 전시나 상세한 전시리뷰는 아래의 인사동사람들블로그를 참고하세요

인사동과 강북지역 갤러리, 202310월 전시 일정

https://mun6144.tistory.com/6866

33인이 불 지핀 후쿠시마 조삼모사핵 오염수 투기를 당장 중단하라!”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3369414

구경숙'마킹스 Markings'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25682853

김경서'스스로 살아 숨쉬는 젖은 땅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230335687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찾아가다.

https://mun6144.tistory.com/6868

 

서인사마당 주차장 가는 '인사11'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이 있다.

80년도 초반부터 출입했으니, 내가 들린 요식업종 중 가장 오래된 가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귀천이나 사동집도 남았지만, 술과 인연이 닿는 집은 부산식당이 유일하다.

 

지금은 사동집주인인 송점순씨만 살아계실 뿐,

부산식당조성민씨나 귀천의 목순옥씨는 세상을 떠나 아들이나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 전승되어, ‘부산식당생태탕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 온 술안주다.

 

그리고 밥도 언제나 새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내놓았다.

맛은 있어도 음식이 늦어 손님들의 불만과 독촉도 따랐지만,

아무리 빨리 달라고 난리를 쳐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밥이나 생태탕을 먹게 되면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어쩌랴!

 

지금은 인정 많던 부산식당주인장 조성민씨는 가고 없지만,

16년 전 인사동 사람들전시 때 찍은 초상사진만 남아 부산식당트레이드마크처럼 벽에 걸려있다.

 

지난 18일은 건축가 임태종씨로 부터 부산식당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오후 다섯 시 무렵, 정동지 따라 갔더니 임태종씨를 비롯하여 인천의 김광원씨도 와 계셨다.

김광원씨는 처음 만났으나, 정영신씨 장터 사진을 소장한 사업가란다.

모든 것이 작품을 꾸준히 소장해 준 임태종씨 덕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인사동 사진을 비롯하여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등 여러 점을 컬랙션 했는데,

그 날도 정영신의 장터 사진 두 점을 사겠다고 했다.

사진을 사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밥과 술까지 사주어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독지가가 있는 덕에 가난한 예술가가 어렵사리 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좀 있으니, 양산에서 일하는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한때 인사동 지킴이로 불린 그는 양산에 살지만, 틈만 있으면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요즘은 몸이 아파 약 먹는 처지라 술을 마실 수 없으나,

이런 반갑고 고마운 자리에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부산식당의 오래된 늦장 부림도 여전했다.

밥부터 주었으면 술보다 밥을 먹었을 텐데, 생태찌개를 반쯤 먹어서야 밥이 나왔다.

금방 지어낸 밥이라 맛있기는 하지만, 인내력 없는 사람은 열 받기 십상이다.

 

그 날은 김광원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땅값 비싼 인천 송도에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분은 공들인 것만큼 돌려주는 농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분으로,

주변에 몰려드는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단다.

공터만 보이면 갖다 버리는 못된 인간들의 습성은 어디나 똑 같았다.

 

그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섬에 들어가 번데기 장사를 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여태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주었는데,

진정성있는 처신으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차로 늘 마중으로 옮겼으나,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어 먼저 일어나야 했다.

인사동의 술자리는 늘 아쉽기만 하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이 잡상들이 난무한 남대문시장처럼 변해 버린 지도 꽤 오래되었다.

돈 따라 유행 따라 가는 물줄기를 되돌릴 수야 없겠지만,

종로구청이나 인사동전통보존회등 인사동을 지켜야 할

민관 조직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있다.

 

아니 대책이 없다는 것 보다 방관하며 조장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여러 차례 대안도 제시해 보았으나 시도는 커녕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세월만 지나면 월급이 나오는 공무원들의 안이한 관행도 문제지만,

돈이 먼저인 장사꾼들의 잇속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더 애석한 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풍미해 왔던 인사동 풍류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문화와 풍류가 좋아 수십 년에 걸쳐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인사동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젠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대폿집마저 젊은이들 술집으로 바뀌어 버렸다.

 

인사동을 찾던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뜸해져, 인사동을 기록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7년 전부터 병행해 온 동자동 쪽방이라도 제대로 기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몇 달 전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인사동에 나오지 않았다.

 

지난달 정영신씨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를 돕기 위해

보름 동안 인사동에 머물 기회가 생겼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오래된 영화제목처럼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가 된 것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인사동은 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옷가게야 예전부터 많았지만 대형 모자점도 두 군데나 생겼고

새로운 악세서리 전문매장도 여러 곳 들어섰다.

 

다행인 것은 새로 생긴 갤러리도 보인다는 것은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이 팔리는 상업 갤러리는 주로 강남이나 평창동에 있지만,

인사동은 대관 위주로 운영되는 전시장이 대부분이다.

무려 100여 개나 전시장이 몰린 인사동은 전시문화의 본산 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건물주가 직영하는 통인화랑, 선화랑 등은 초대전으로 끌어 가지만,

관훈미술관이나 동산방’ 등은 문 열 때보다 문 닫은 때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 외의 갤러리는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 대관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유명세 덜한 예술가들이 몰리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싼 점포세를 감당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난 전통문화 가게들은 되돌릴 수 없으나,

갤러리가 밀집한 인사동만의 장점을 활용하여 전시문화를 일으켜 세우면 어떨까?

 물 건너 간 인사동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사람은 있으나

인사동 전시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더 한심한 것은 인사동에 100여 개에 가까운 화랑이 몰려 있으나

종로구청문화과는 물론 인사전통문화보존회 등 어느 한 곳도

 인사동에 갤러리가 몇 개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종로구청 담당자의 궁색한 답변으로는 2년 전 기준으로 146개라는데,

그것도 골동 매장인지 화랑인지 구체적인 구분도 없었다.

 

그리고 인사동 홍보관을 비롯하여 인사동에 안내소가 두 군데나 있지만,

어디에도 어느 전시장에서 무슨 전시가 열리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안내할 사람도 없다.

인사동에 관광객이 그렇게 많이 몰려 오지만 전시를 소개할 사람조차 없으니,

전시 보러 오는 사람 없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인사동에서 보름 동안 전시장을 지켜보았으나, 대개 알고 찾아온 분이 대부분이고,

지나치는 관광객이 전시장을 찾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전시 포스터를 붙이려고 돌아다녔으나, 포스터 붙이는 벽보판이 없었다.

그나마 유리창을 벽보판으로 내준 부산식당이 유일했다.

 

겨우 다섯 장 갖고 나온 포스터를 아는 술집이나 식당에 넉 장 붙이고,

한 장 남은 포스터를 공사장 가림 막에 붙여 놓았더니,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참히 찢겨져 거리에 버려졌다.

 

늦었지만 인사동을 전시문화 중심지로 부흥시키는 일에 힘을 모아보자.

화랑 주인과 예술가들이 나서서 민관단체의 협력을 이끌어내면 가능하리라 본다. 

먼저 종로구청 문화과에 전시행정에 밝은 전문가 고용을 청원하자.

 

그리고 안내소마다 인사동에 열리는 전시목록을 비치하고,

미술평론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좋은 전시를 선별해 내도록 하자.

좋은 전시나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전시가 선정되면 집중적으로 홍보하자. 

 

 가로등마다 그날의 중요 전시를 알릴 수 있는 세로 광고 현수막을 내걸어,

홍보하는 일부터 한 번 힘을 쏟아 보자.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인사동이 살길이다.

 

사진, / 조문호

 

한국민예총을 후원하는 일일 맛집이 지난 25일 인사동 코트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강욱천씨가 운영을 총괄한 이번 후원 모임에는 류연복씨의 서예퍼포먼스를 비롯하여

김민정, 송희태, 이광석, 손현숙, 송병휘, 레드로우, 고이, 박인호, 라오니엘 등 많은 분의 공연이 이어졌다.

 

늦게 들려 류연복씨 서예 퍼포먼스는 보지 못했으나

장경호, 곽대원, 김이하, 임동은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술단체인 한국민예총이 아직도 보금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셋방살이를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 없이 가난한 예술인의 힘으로 단체를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자를 내건 단체지만,

최소한 일할 수 있는 공간은 정부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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