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술공동체(이하 서미공)은 1983년 10월 창립 관련 논의를 시작하여 1984년 9월 정식회의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 서미공의 첫 번째 활동은 『시와 판화』 달력(우리마당 발간, 1984.10) 제작이었다. 1985년 『을축년 미술대동잔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냈고, '취지문' 또한 이 시기에 발표했다. 1985~1986년 2년 동안 한국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1987년에 이르러 활동량이 줄어들다가 자연적으로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미공의 주요 인물들이 기획 개최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은 1980년대 예술 검열과 민중미술 탄압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건설의 계기를 마련한 전시로서 미술사적 의의를 가진다. 관훈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갑진년 미술대동잔치」는 서미공 창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2023년 초 구성된 서미공 연구팀은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 행사를 개최하여 서미공 창립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대 주무 최민화, 손기환, 류연복, 박진화뿐만 아니라, 김방죽, 김억, 박성조 등 서미공 활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구술채록을 추진했다. 또 류연복, 손기환 등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1980년대 자료 등을 조사 발굴했다.
관훈갤러리 1층은 서미공 관련 사료와 전시 포스터 등을 정리한 아카이브 전시로 구성되었다. 2023년 진행된 「계묘년 서미공 콜로키움 한마당」 또한 영상으로 관람 가능하도록 했다. 2층과 3층은 서미공 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1980년대 작품뿐만 아니라 최근 작품도 함께 전시했다. 1980년대 서미공은 민중미술인들의 협의체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미 소집단에 소속이 있는 작가들도 중복으로 서미공 활동을 겸하곤 했다. 당대에는 참여 작가가 170여명에 이를 정도로 아주 큰 규모의 공동체였다. 하지만 올해 전시의 취지를 알리며 초대 공문을 발송했을 때 연락이 닿는 작가, 출품이 가능한 작가는 최종 19명으로 추려졌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아래 미술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활동으로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사례다. 하지만 현재 이와 관련한 조사와 연구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1980년대 한국미술사의 생동감과 풍부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시는 10월 16일 광대패 모두골의 열림굿 공연으로 개막하여 11월 5일까지 진행된다. / 서울미술공동체 연구팀
‘서울미술공동체’에 대하여
1983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경기도 가평의 대성리에서 '사흘 낮밤 토론회'가 있었다. 옥봉환의 주선으로 김봉준, 문영태, 장진영, 최민화, 최열, 홍선웅, 홍성담이 한자리에 모여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미술운동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대하면서 대중적 미술운동을 펼쳐나가기로 결의하고, 민중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지역별 '미술공동체'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최민화는 그달에 곧바로 류연복, 박진화와 함께 '미술공동체' 창립을 논의하고 각 매체별 담당을 지정했다. 만화 파트에 최민화, 벽화 파트에 류연복, 판화 파트에 이기정을 지정한 것이다. 1984년 1월부터 상반기 동안은 건강한 미술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를 계속했다. 토론회 자료를 묶어 현대미술연구소 이름으로 『현대미술』 2백 권을 펴냈다. 그해 6월 회원들은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에 참여하고, 9월에는 '미술공동체' 발족을 위한 정식회의를 개최하여 제1대 주무(기획실장)로 최민화를 선출하였다. 10월에는 판화 달력 「시와 판화」(우리마당 발간)를 펴냈다. 그리고 1985년 2월에 '서울미술공동체 (서미공)'가 공식적으로 발족한다. 서미공에 참여한 소집단은 '그림동인 실천', '횡단', '목판모임 나무', '에스파', '시대정신', '벽화기획 십장생', '억새' 등이다.
취지문을 살피면 "시각예술이 갖고 있는 풍부한 형식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발하"고, "자유로운 표현행위를 제약하는 어떠한 요소와도 투쟁"하며, "예술품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방안을 모색"한다고 적고 있다. 서미공은 발족과 동시에 대중을 위한 미술장터인 『을축년 미술대동잔치』(2월)를 기획했다. 잔치는 대성공을 거뒀고, 연이어『강남판매장개관전』(3월)을 열었다. 4월에는 서미공 기관지 『미술공동체』를 펴냈고, 5월엔 '5.3인천노동자대회'에 걸개그림을 제작하여 게시했다. 6월엔 제1차 총회를 거쳐 제2대 주무로 손기환을 선출했다. 7월엔 손기환, 박진화, 박불똥의 기획으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 열렸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작가들이 연행되고 작품은 압류되었다. 그에 따라 민중미술탄압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8월엔 민족미술대토론회에 참석하고, 9월에는 서강대학교 신문사 연계 판화전, 외국어대학교와 문중문화협의회에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슬라이드 강연을 열었다. 12월에는 『미술공동체』3호를 펴냈는데, 1986년까지 총 다섯 권을 펴냈다. 1986년 2월에 『병인년 미술대동잔치』를 아랍미술관에서 개최했다. 3월에 제2차 총회에서 류연복을 제3대 주무로 선출했고, 1987년 제3차 총회에서는 박진화가 제4대 주무로 선출되었다.
1986년 6월 17일 신촌역 앞 건물에 '통일의 기쁨'이라는 벽화를 제작하고, 7월 26일에는 류영복 자택 담장에 '상생도' 벽화를 제작했는데, 두 벽화는 공권력에 의해 훼손된 바 있다. 또한 정릉벽화를 그린 작가들은 불구속 기소 되었다. 8월에는 『풍자와 해학展』을 기획하여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하였고, 1987년 11월에는 『전환기의 위대한 미술1 정치와 미술展』을 기획하였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민족미술협의회는 내부 노선 투쟁이 격화되었고, 그에 따라 소집단들의 경향성과 활동 방향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8년 1월,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서미공은 발전적 해체를 논의한 뒤 해산하였다. 서미공에 참여한 작가들은 최민화,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박기복, 최정현, 유은종, 김낙일, 임승택, 홍황기, 박성조, 김기현, 이기정, 김억, 장명규, 김방죽, 곽대원, 박영률, 김준권, 조인수, 황세준, 주완수, 전승보 등이다. / 김종길 (기획 및 감독)
전시작들은 오래전 보아왔던 ’복서‘ 연작 말고도 환경 비판적인 작품이나 다른 작품도 있었다.
승자보다 패자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잔인한 말초성을 까발린 ’복서‘ 연작은 비애감이 감돌았다.
링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권투선수도 그렇지만, 맞아 쓰러지는 선수 보며
객석에서 환호하는 사람은 또 뭔가? 폭력의 관음증에 노출된 인간 심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승자를 대리 체험하는 자기도취가 결국 권력과 자본이 연출한 허구임을 까발린 것이다.
한편으로 쓰러진 복서의 비참한 모습은 80년대 군부독재에 핍박받은 민중의 모습이기도 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반체제 작가로 낙인찍혀 감시받아 가며 힘겹게 작업했다.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서나 마찬가지였다.
박흥순씨는 1982년 결성된 ’임술년‘ 창립 멤버로,
당대 현실을 소재로 비판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리얼리스트다.
한때 ’민미협‘ 대표를 지내기도 했는데,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데,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초상화 전시를 열며 나까지 그려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돈 없는 거지 그리는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전시가 끝난 후 작품을 싸 주는데, 벼룩은 낮짝이라도 있다지만 벼룩보다 못하다.
그냥 그림만 챙기고 다음에 술 한잔 산다는 게 십 년이 넘었다.
초상화 또한 얼마나 멋지게 잘 그렸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 솜씨라면 당연히 잘 그리겠지만,
여태 다른 화가가 그린 내 초상화도 보았으나 최고였다.
그리고 ’복서‘ 신작도 있었는데, 정치적 풍자로 대상이 바뀌었다.
김정은의 주먹에 쓰러지는 트럼프를 보며 왜 그리 속이 후련한지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트럼프는 주는 것 없이 밉다.
트럼프 뿐 아니라 때려잡을 놈이 어디 한두 놈이겠는가?
다시 불을 지핀 박흥순의 새로운 ’복서‘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서문 일부를 옮겼다.
“「고향의 불안, 1991」,「갈증, 1994」은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를 거론했고, 「이라크와 성조기, 2006」를 통해서 미국의 폭력적 전쟁을 고발하고, 「독도와 촛불, 2008」은 일본 정치인들의 독도 관련 망언을 규탄하는 장엄한 현장을 그리고, 「북에서 바라본 NLL, 2012」은 핑크 모노톤으로 NLL의 긴장을 경쾌하고도 모던한 팩러독스 문법으로 회화적 실험을 하고, 「만남, 2019」은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작가의 기대를, 「미완의 종지부, 2020」를 통해서는 여전히 5.18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는 전두환을 비판했다. 그리고 2021년에는 다시 복싱에 북·미 관계를 대입한 풍자화 「북미의 이벤트」를 그렸다. 복서로 링에 오른 김정은이 역시 복서인 트럼프를 다운시키는 장면이다. 그런데 둘 다 상처투성이다. 심한 밀당으로 상호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남은 북·미 간 협상 실패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한반도에서의 긴장 상황을 걱정해서인데, 결국 2024년 현재 그의 염려대로 한반도는 심각한 갈등상태에 처해 있다. 그의 염려가 예지였던 셈이다. 결국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우리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리얼리스트의 피가 흐른다는 게 반증된 것이라고 하겠다”
담장 허물고 대중에 공개된 송현동 ‘열린송현녹지광장’ 2027년 정식 개장까지 공간 활용 위한 대화 이뤄져야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얼마 전 폐막했다. 2017년 처음 시작해 벌써 4회째를 맞이한 도시, 건축 분야의 전시축제다. 갈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또 복잡하게 변해가는 도시 문제들을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보는 장으로 기획됐다. 그동안 전시공간으로 활용된 장소들도 이색적이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운상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서울 도시개발의 여러 가지 실험을 이루어졌던 현장들이었다.
주로 실내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던 지난 행사들과 달리, 이번에는 메인 전시장이 야외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란 곳이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만큼 생경하게 느껴질 법한 이 공간은 서울 송현동에 생긴 넓은 녹지다. ‘생겼다’ 보다는 ‘공개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손대지 못했었던 땅, 부동산 시장에서는 나름 뜨거운 감자였던 ‘송현동 땅’이 바로 여기다.
활기 채워가는 도심 속 녹지광장
작년 10월 처음 임시개방이 됐을 때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 드물게 남아 있던 금싸라기 땅이었지만 ‘녹지광장’이란 쓰임새는 낯설고 또 당황스러운 결정이었던 듯하다. 그러다 올해 도시건축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 결정된 후, 풍경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소’라는 거대한 전망대가 가장 먼저 들어섰고 곧이어 다양한 형태와 색감의 설치작품들이 푸른 녹지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파빌리온’이라 불리는 임시 건축물들로, 모두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만 전시됐다가 이후 해체돼 자재들만 재활용될 예정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두 달간은 평일 낮에도 찰나의 가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한 사람들로 녹지광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전시기간동안 광장에 전시된 작품들이 난해한 구조물로 보였을 법도 했지만,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늘소 전망대에서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품은 서울 도심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땅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지하철역과 가까운 데다 경복궁과 국립현대미술관, 북촌한옥마을, 인사동으로 둘러싸인 위치도 사람들을 불러들이기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비엔날레 관람객이 약 80만 명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열린송현녹지광장을 찾은 사람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현동은 관광객도, 업무 차 드나드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는 동네다. 하지만 이전에는 녹지광장 자리가 어떤 풍경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년 초까지만 해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일반 사람들은 들어가 볼 수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이토록 넓은 평지가 개발되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공간의 미래 위한 시민 토론 이어져야
지금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 되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기구하다는 표현 말고는 더 적합한 단어가 없을 정도다.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집안 소유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숲’으로서 역할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 사택,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를 거쳐 개발을 노리고 삼성생명, 대한항공이 차례로 주인이 됐으나 별다른 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땅에 얽힌 각종 규제 때문이었다. 결국 서울시에서 이를 다시 매입하고 공원으로 개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에 가까웠다. 서울 한복판, 우리나라 역사 도심 속 남아 있는 빈 공간에, 공공 공간 말고 또 어떤 용도를 논할 수 있었을까.
이제 여기 새로운 녹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지난 두 달 동안 보고 느꼈다. 앞으로도 크고 작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송현동 땅’이 앞으로 어떤 공간이 돼야 할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은 재고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충분한 시민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물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처럼 유휴공간이 생겼을 때 임시 개방기간을 가지고 시민들이 실제로 사용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사례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반환 미군기지인 원주 캠프 롱, 벽돌공장 건물이었던 연천 DMZ피스브릭하우스, 이번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 전시장인 옛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이슈도 다양했다. 이런 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들의 경험을 실제 개발계획에 반영할 수 있도록 고민이 필요하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 정식 개장하는 2027년까지 이 땅의 미래에 대한 많은 대화가 오고가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란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담긴 특별한 힐링 포인트를 전하는 토크 이벤트를 진행했다. 7일 오후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힐링 토크에는 이재규 감독과 박보영 배우,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따뜻한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입체적인 캐릭터와 정신질환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웃음과 위로를 통해 정신병동에 대한 편견을 따스한 온기로 녹인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백은하 소장은 "누구도 처음부터 그리고 끝까지 환자가 아니며, 퇴원을 하고 난 이후에도 현실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는 감상평으로 힐링 토크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규 감독은 "이번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습들을 통해 일상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경제지표가 올라갈수록 행복 지수도 동반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자책 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또 우리 일상 가까이에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번 시리즈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박보영 배우는 "다은이는 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참 많은 캐릭터라 그녀의 성장을 응원한 동시에, 칭찬 일기를 쓰면서 저 또한 새로운 발견과 힐링을 느꼈다. 매 회 등장하는 직장인, 취준생, 워킹맘 등처럼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전한다"는 따뜻한 소감을 전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차별점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편견을 직면하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스스럼없이 현실적으로 묘사해준 작품"이라는 관람평과 함께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전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황과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구현했다. 이재규 감독은 "팔이 부러지거나 감기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지만, 정신질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픔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실제 병동에서 본 모습들을 반영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들이 느끼는 증상을 스크린에 담기 위해 다양한 촬영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김지용 선생님 역시 "사회불안장애로 힘들어하는 환자가 느낄 마음을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표현한 부분이 와닿았다. 환자들이 느끼는 증상을 단순화하고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힐링의 말을 묻는 백은하 소장의 질문에 이재규 감독은 "오늘 이 자리처럼 극을 놓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욱 늘어났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도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프라가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공개 직후 국내 넷플릭스 시리즈 1위에 오르며 정신질환과 정신병동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좋은 메시지를 파급력 있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정신건강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프라를 돌아보고, 더 많은 투자로 이어지는 사회의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
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와 『민족미술협회』 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공·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년 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 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記는 쓸 수 있으되 정착記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