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 잡상들이 난무한 남대문시장처럼 변해 버린 지도 꽤 오래되었다.

돈 따라 유행 따라 가는 물줄기를 되돌릴 수야 없겠지만,

종로구청이나 인사동전통보존회등 인사동을 지켜야 할

민관 조직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있다.

 

아니 대책이 없다는 것 보다 방관하며 조장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여러 차례 대안도 제시해 보았으나 시도는 커녕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세월만 지나면 월급이 나오는 공무원들의 안이한 관행도 문제지만,

돈이 먼저인 장사꾼들의 잇속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더 애석한 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풍미해 왔던 인사동 풍류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사동 문화와 풍류가 좋아 수십 년에 걸쳐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인사동을 지켜보는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젠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대폿집마저 젊은이들 술집으로 바뀌어 버렸다.

 

인사동을 찾던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뜸해져, 인사동을 기록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7년 전부터 병행해 온 동자동 쪽방이라도 제대로 기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몇 달 전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인사동에 나오지 않았다.

 

지난달 정영신씨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를 돕기 위해

보름 동안 인사동에 머물 기회가 생겼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오래된 영화제목처럼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가 된 것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인사동은 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옷가게야 예전부터 많았지만 대형 모자점도 두 군데나 생겼고

새로운 악세서리 전문매장도 여러 곳 들어섰다.

 

다행인 것은 새로 생긴 갤러리도 보인다는 것은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이 팔리는 상업 갤러리는 주로 강남이나 평창동에 있지만,

인사동은 대관 위주로 운영되는 전시장이 대부분이다.

무려 100여 개나 전시장이 몰린 인사동은 전시문화의 본산 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건물주가 직영하는 통인화랑, 선화랑 등은 초대전으로 끌어 가지만,

관훈미술관이나 동산방’ 등은 문 열 때보다 문 닫은 때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 외의 갤러리는 현상 유지라도 하기 위해 대관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유명세 덜한 예술가들이 몰리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싼 점포세를 감당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난 전통문화 가게들은 되돌릴 수 없으나,

갤러리가 밀집한 인사동만의 장점을 활용하여 전시문화를 일으켜 세우면 어떨까?

 물 건너 간 인사동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사람은 있으나

인사동 전시문화를 부흥시키자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더 한심한 것은 인사동에 100여 개에 가까운 화랑이 몰려 있으나

종로구청문화과는 물론 인사전통문화보존회 등 어느 한 곳도

 인사동에 갤러리가 몇 개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종로구청 담당자의 궁색한 답변으로는 2년 전 기준으로 146개라는데,

그것도 골동 매장인지 화랑인지 구체적인 구분도 없었다.

 

그리고 인사동 홍보관을 비롯하여 인사동에 안내소가 두 군데나 있지만,

어디에도 어느 전시장에서 무슨 전시가 열리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안내할 사람도 없다.

인사동에 관광객이 그렇게 많이 몰려 오지만 전시를 소개할 사람조차 없으니,

전시 보러 오는 사람 없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인사동에서 보름 동안 전시장을 지켜보았으나, 대개 알고 찾아온 분이 대부분이고,

지나치는 관광객이 전시장을 찾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전시 포스터를 붙이려고 돌아다녔으나, 포스터 붙이는 벽보판이 없었다.

그나마 유리창을 벽보판으로 내준 부산식당이 유일했다.

 

겨우 다섯 장 갖고 나온 포스터를 아는 술집이나 식당에 넉 장 붙이고,

한 장 남은 포스터를 공사장 가림 막에 붙여 놓았더니,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참히 찢겨져 거리에 버려졌다.

 

늦었지만 인사동을 전시문화 중심지로 부흥시키는 일에 힘을 모아보자.

화랑 주인과 예술가들이 나서서 민관단체의 협력을 이끌어내면 가능하리라 본다. 

먼저 종로구청 문화과에 전시행정에 밝은 전문가 고용을 청원하자.

 

그리고 안내소마다 인사동에 열리는 전시목록을 비치하고,

미술평론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좋은 전시를 선별해 내도록 하자.

좋은 전시나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전시가 선정되면 집중적으로 홍보하자. 

 

 가로등마다 그날의 중요 전시를 알릴 수 있는 세로 광고 현수막을 내걸어,

홍보하는 일부터 한 번 힘을 쏟아 보자.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인사동이 살길이다.

 

사진, / 조문호

 

한국민예총을 후원하는 일일 맛집이 지난 25일 인사동 코트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강욱천씨가 운영을 총괄한 이번 후원 모임에는 류연복씨의 서예퍼포먼스를 비롯하여

김민정, 송희태, 이광석, 손현숙, 송병휘, 레드로우, 고이, 박인호, 라오니엘 등 많은 분의 공연이 이어졌다.

 

늦게 들려 류연복씨 서예 퍼포먼스는 보지 못했으나

장경호, 곽대원, 김이하, 임동은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술단체인 한국민예총이 아직도 보금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셋방살이를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 없이 가난한 예술인의 힘으로 단체를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자를 내건 단체지만,

최소한 일할 수 있는 공간은 정부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인터넷에서 스크랩한 사진

 

 

인사동거리는 항상 사람들이 붐비지만 전시장은 대부분 비어 있다.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겠으나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래전부터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소식을 인사동관광안내소에 비치하라는 등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했으나, 담당 공무원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종로구청문화관광과 담당 공무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사동 상인들 모임인 인사전통보존연구회만 믿는지 모르지만,

서로의 돈벌이를 먼저 생각하는 상인들 모임에서 무슨 전통문화를 보존한단 말인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사거리에 있던 전통 한지 가게가 ‘BLING BOX’로 변신해 있었고,

곳곳에 대규모 모자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인사동에서 기존 전통 가게가 살아남기는 힘들어졌다.

거리는 대부분 관광객인데, 그날따라 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대원들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인사동이 한국의 대표적 관광코스는 되었으나, 인사동 고유의 특색은 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버스킹 나선 연주자들이 삭막한 분위기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데,

젊은 퍼포머들을 끌어들여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복잡한 거리에서 탈 사람도 없는 관광용 아띠인력거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옛날 약장수나 극장 포스터를 붙여 등짐 북을 치고 다니던 것처럼, 등짐 북을 재연하면 어떨까?

 

오랜 향수를 끌어들이는 재미도 있지만,

그날 열리는 인사동의 중요한 전시 포스터를 붙여 거리에서 등짐 북을 치고 다닌다면,

유독 전시장이 많이 몰린 인사동 홍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뿐 아니라 거리에 전시 현수막이나 다양한 홍보물을 설치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문제는 그 많은 전시 중에 볼만한 전시 한두 개를 선택하는 방법에 있다.

그 전시 광고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들려면,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

절대 특정 개인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미술평론가 몇 분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를 만들면 될 것이다.

홍보하는 전시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사동 고유의 전통문화나 전시문화를 소개하는데, 전문가 개입 없이는 빛 좋은 개살구다.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그때그때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좋은 전시를 알려준다면,

이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인사동에서 전시를 보려고 해도 어디에서 좋은 전시가 열리는지 몰라 방황할 때가 많다.

 

인사동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를 알릴 수 있는 선정위원회를 잘만 운영한다면,

인사동 전시문화도 살릴 수 있고관광객에게 좋은 정보까지 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복잡한 거리에 트럭이 들어와 수박을 팔고 있었다.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인사동 거리에 몰래 비집고 들어왔으나, 큰 착각이었다.

 

사람이 많아 잘 팔릴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인사동 관광 나와 누가 그 큰 수박을 들고 가겠는가?

차라리 변두리 주택가를 도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머리가 안 돌아가면 돈도 못 벌고 몸만 고생시킨다.

그 수박 장사꾼만이 아니라 종로구청 담당자도 마찬가지다.

 

/ 조문호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했던 영국, 호주, 노르웨이 스카우트 대원들이

지난 9일 인사동을 둘러보며 관광을 즐겼는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갔는지가 궁금하다.

종로구시설관리공단 임직원들이 인사동 일대에서 잼버리 대원들을 환영하며 나눔 활동도 가졌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우리나라에서 고미술이 아닌 동시대 미술품을 다루는 화랑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베트남 전쟁 특수, 중동 건설 붐 등으로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새로운 주거 형태로 아파트가 확산하면서다. 고급화한 취향에 어울리는 장식품이나, 수집 대상으로서의 미술품 수요가 급증했다. 1970년 현대화랑·명동화랑을 시작으로 인사동·관훈동 일대에는 30여 개 화랑이 들어서게 됐다.

 

한국화 현장 지킨 동산방 화랑

국공립 미술관들의 빈틈채워

이용우 ,  산수 ( 山水 ), 1930 년대 ,  종이에 먹 , 86.5x152 ㎝ .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

1961년부터 동산방표구사를 운영해 오던 박주환(1929~2020) 대표가 한국화(동양화) 전문화랑 동산방을 개관한 것은 1974년이었다.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 문화 정책으로 한국화가 주목받던 시기이자, 변관식·박노수·허백련 등 동양화 6대가들이 세상을 뜨면서 세대교체가 모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명동화랑의 ‘30대 오늘의 얼굴들전’(1971), 그로리치 화랑의 동양화가 7인전’(1974) 등 화랑들은 화단의 공백을 메울 젊은 작가들을 발 빠르게 물색했다.

 

동산방화랑은 1976년 개관전으로 30·40대 작가들 위주로 동양화가 중견작가 21인전을 기획했다. 현대적 진경산수를 구현한 이열모·김동수·이영찬, 도시 풍경을 세련된 수묵에 담아낸 송수남·이철주, 수묵의 추상성을 실험했던 송영방·이규선, 문인화의 신경지를 개척한 홍석창 등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다양한 경향을 아울렀다. 작가에게 10호 크기 (53×45.5) 두 점씩을 출품할 것과 이 중 한 점은 화랑이 매입할 것을 알렸다. 당시 한 점당 50만원 정도였던 작품들이 매진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9년 오일 파동으로 경제가 요동치자 사람들의 관심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른 동양화에서 서양화로 옮겨갔다. 이후 1980년 동산방에서 현실과 발언창립전이 열렸다. 민중미술을 탄압한 군사 정부 때문에 전시가 취소되자 동산방이 기꺼이 전시 공간을 내줬다.

 

1980년대 이후 동산방은 서양화·판화로 영역을 확장해갔지만, 그 중심은 한국화였다. 1985년 현대화랑과 합작으로 기획한 청전과 소정전은 이상범·변관식 두 대가의 작품을 망라해 비교한 첫 전시로,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미술시장에서 한국화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오늘까지도 동산방은 한국화 작가들을 변함없이 소개해 왔다.

 

화상이자 수장가였던 고() 박주환은 그가 평생 모은 미술품이 공공재로 쓰이길 희망했다. 그 뜻을 이어 아들 박우홍 현 동산방화랑 대표는 한국화 154점을 포함한 총 209점을 2021, 202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이 가운데 57인 작가의 작품 90여 점을 선별해 동녘에서 거닐다: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을 열고 있다.(내년 212일까지)

 

근대기 작품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이용우의 산수’(1930년대). 전통화법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동연사를 조직했던 이용우는 먹의 농담을 통해 사실적 깊이 감을 더하는 한편, 지게에 땔감을 짊어진 농부와 삽살개를 그려 넣어 친근한 한국의 산야를 사생풍으로 구현했다. 현대작 가운데 이종상의 남해즉흥’(1977), 이철주의 세종로 풍경’(1979), 이열모의 팔현리’(1983), 이영찬의 구미정’(1992)은 실험정신이 잘 드러난 현대의 실경산수화다. 박주환 컬렉션의 또 다른 백미다.

 

동산방화랑 외에도, 2000년 가나아트센터가 서울시립미술관에 민중미술을 포함한 200점을, 2004년 갤러리 현대가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박수근 작품을 포함해 55점을 기증하는 등 화랑 기증품이 국공립미술관 수장고를 채우는 전통은 과거에도 있었다.

 

화랑은 동시대 미술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사적 공간임에도 때로는 지나친 상업성과 폐쇄성으로 부정적 측면이 부각됐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 국공립박물관의 전시공간이 미비하던 시절 동산방을 필두로 한 화랑들은 미술 현장에서 터득한 안목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함으로써 미술시장만이 아니라 현대미술사의 형성에도 역할을 했다. 전시와 발굴, 수집과 판매를 넘어 좋은 작품이 대중과 함께 향유되고 보존되기를 희망하는 보통 사람들의 바람이 화랑의 미술품 기증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이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중앙일보 / 스크랩

 

문학뉴스

[방민호 칼럼]

(서울 인사동 찻집 '흐린세상 건너기'. 사진=방민호 위원)

 

'뉘조' 쯤에서 발길을 돌려 새로 이사간 '여자만'집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골목의 남은 한쪽편을 마저 살펴보기로 한다.

'흐린세상 건너기'는 이 골목 동네의 깊은 연조로 보면 연륜이 가장 짧은 축에 들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자만'도 그러기는 마찬가지, '흐린세상'보다 더 늦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흐린세상 건너기'에서는 커피나 술을 마실 수 있는데, 막걸리 대신에 약주에 가까운 술을 내놓는다. 뭣보다 주인 분이 직접 선곡해서 들려주는 음악이 좋고, 그쪽에서는 이 골목에서 그중 나은 곳이라 할 것이다. 가게 이름도 좋고, 출입문에 서양문학인인지 배우인지 흑백 사진을 붙여놓은 분위기 덕분에 한동안 자주 들러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만'과 '흐린세상' 사이 막다른 짧은 골목에는 '산유화'라고, 가보지 못한 음식점이 있고. 다음은 작은 전시회도 여는 전통 찻집 '삼화령'이다. '삼화령'은 미륵삼존불이 출토된 경주 남산의 한 지명이란다. 자기, 도기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이 찻집을 나는 고작 두어 번쯤 들어가 보았을 뿐이다.

 

그다음은 한정식집 '옥정'. 나는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고등학교 9년 후배 이창호 친구가 이 집 단골이라는 말을 들었다. 문인들 사이에서는 이 집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삶의 영역이 다른 사람들이 애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옥정'을 끼고 좁은 골목 안이라고 보면 제법 골목다운 골목 하나가 가지를 쳤다. 이 골목은 다른 골목들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그런지 갑자기 익선동에서나 볼 법한 고깃집과 신식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853'과 '코튼서울'. 둘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풍경과는 다르지만 이렇게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카페 '소담'. 사진=방민호 위원)

 

오늘 춘원연구학회 실무자 모임이 12시 30분부터 '선천'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 나는 이 모임에 책임이 있어서 한 시간은 족히 일찍 인사동에 나왔다. 원래는 인사동 큰 골목의 종로 쪽 끄트머리 '스타벅스'에서 뭐라도 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양식에 한식 뼈대를 접합한 이 '코튼서울'이 떠올랐다. 일종의 '조양절충식'이다.

 

앉아서 짧은 시간 동안 책을 읽어볼까 한다. 요즘 들고 다니는 책은 중국 작가 샤오홍의 단편집 "생사의 마당"과 라오서의 장편소설 "낙타 샹즈". 요즘 중국소설 읽을 일이 있다. '뜨아'를 시켜놓고 앉았으려니,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잠시 후 흰옷 입은 젊은 사람 하나가 반대편 끝에 들어와 앉고, 또 조금 더 있으려니 그보다 나이가 약간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그 젊은 사람한테 온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워낙 나밖에 다른 손님이 없어 대화 내용이 명료하게 전달된다.

 

옛날 같으면 '알바생' 쓸 자리가 지금은 어엿한 정식 직업임을 실감한다. 고용인도 진지하게 묻고, 또 업장의 특성과 업무내용을 설명한다. 일을 찾아 온 사람도 자신의 조건과 할 수 있는 일을 침착하게 밝힌다. 상세한 협의 이후 연봉에 관한 이야기도 오가고, 두 사람은 추후에 채용 여부를 정확히 알려주기로 하고 일어선다. 평화로운 카페건만 이면에 이런 긴장이 놓여 있었다니. 살아간다는 것은 정녕 쉽지 않은 과업이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옥정 다음은 카페 소담. 건물 2층에 있고, 화가들과 문인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곳이다. 내가 농반 진반으로 '난타'(蘭陀)라고 호를 붙여준 시인 박현수가 이 집 주인과 아주 각별하다. 무슨 '염문'이 난 것은 아니고, 어떤 '사연' 으로 두고두고 빚을 갚는 중이리고나 해야할까. 한번의 일도 잊지 않는 이 친구의 염결함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같은 건물 아랫층에는 더 이름난 찻집 '귀천'이다. 천상병 시인이 쓰신 시 '귀천'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투명한 가벼움에 반비례하여 귀하고도 무겁게만 느껴진다.

 

(서울 인사동 찻집 '귀천'. 사진=방민호 위원)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무욕'의 삶과 생의 완전한 긍정이 잘 나타난,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해야겠다. 천 시인은 삶의 과정을 "아름다운" "소풍"이라 했는데,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어느 누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극히 드물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삶,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도 먼저 싸우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은 이 골목 안의 몇 개 폐가(廢家)와 같은 곳으로 숨어버리기 쉬울 것이다.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행복')라고 한 천상병 시인의, 그 완전한 긍정을 되새기며 '한옥찻집'과 한정식집 '가회'까지 이르면 바로 '선천'의 맞은편이 된다. '한옥찻집'에 들어가 나는 요즈음 쓰기 시작한 무슨 여행기에 대해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참, '귀천' 지나 한옥찻집과 '가회' 사이에 막다른 작은 골목이 있고, 거기에 지금은 '인사동 그집'이 있다. 글을 쓰는 도중에 깜박 잊었다. 이 집 자리가 원래의 '이모집'이었다.

 

'가회' 다음에는 '선천'의 주차장이고, 그다음은 아무튼 '시가연'(詩歌演)이다. 왜 "아무튼"이냐고 물으신다면 잘 몰라서라고, 궁색한답변밖에 드리지 못하겠다. 카페이면서 갤러리와 소극장을 겸한 곳이다. 생맥주나 마시러 한밤에 들러본 게 전부여서 미안하다는 느낌이다. 이제부터 무슨 행사라도 여기서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인사동14길 골목안 걷기는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이 골목에서 30년도 안되었다면 '오래'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하리라. 그러나 국수를 말아먹듯 후루룩 흘러버린 세월이었다.

 

며칠 전 '선천' 주차장에서 대리운전 해주실 분을 기다리는데, 너무 일찍 인적 끊긴 이 골목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뭐라도, 사람이라도 30년쯤이라면 쓸쓸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1994년 『창작과 비평』 제 1회 신인 평론상수상하면서 비평 활동 시작.문학 평론집으로『이광수 문학의 심층적 독해』,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문명의 감각』등이 있다.2001년 『현대시』로 등단,시집으로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2012년 『문학의 오늘』에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소설창작을 시작해장편소설『대전스토리, 겨울』, 『연인 심청』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 있다. 산문집으로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서울문학기행』, 『명주』 등이있다.

 

출처 : 문학뉴스(http://www.munhaknews.com)

지난 18, 운현선 기자가 마련한 오찬 모임에 정영신 동지와 함께 갔다.

운기자가 김문경씨와 인사동에서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지하철한성대역부근에 있는 일식집 스시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며칠 전 받은 것이다.

 

운기자 만나 뵌 지도 오래되었지만, 김문경씨의 근황이 궁금했던 터라 기다려졌다.

약속한 18일에는 정동지 부터 만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

 

지난 주말 헤어질 때,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에 마음이 걸렸던 터다.

 

쪽방보다 지하철이 더 시원해 30분이나 먼저 나와 지공도사 행세를 했다.

충무로역에서 기다리다 4호선으로 갈아타려는 정동지를 만났는데,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정확히 시간을 맞추어 약속 장소로 갔더니, 운현선기자를 비롯하여

큰 나무갤러리김문경대표, '실버넷 뉴스' 앵커 김석철기자 등 세 분이 와 계셨다.

 

운현선 기자는 실버넷 뉴스‘Btn news’ 등 여러 매체에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분이다.

다들 인사동 전시장에서 뵙기도 했지만,

운기자와 김문경씨는 촬영하러 동자동 쪽방까지 방문해 준 고마운 인연이었다.

 

무슨 일로 바쁜 분들이 한자리에 뭉쳤는지 모르겠으나, 과분한 일식집이라 부담스러웠다.

운기자 이야기로는 지난 년 말 노숙인 길 위에 살다라는 영상물을 시청자미디어재단지원으로 제작했는데,

3‘KBS 열린채널에서 방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연료를 전해 줄 겸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축하해 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뒤늦게 운현선기자가 기획, 연출한 노숙인 길 위에 살다를 보았는데, 어눌한 내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국적으로 쪽팔린 일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랴!

 

운현선 기자는 기획과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 나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전 제작과정을 혼자서 해내는 팔방미인이.

 

지난 2월에는 성균관대와 실버넷뉴스의 영상 아이디어 경진대회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뻥튀기 아줌마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작년 10월에는 ’95세 마술사 할아버지' 영상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과분한 오찬 모임을 만들어 준 것만도 고마운데, 출연료까지 주어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출연료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정동지 팁으로 주는 호기까지 부렸다.

 

나중에 정동지로 부터 적잖은 돈이 들었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사진찍는 것보다 광대 짓 하는 것이 훨씬 낫겠더라.

 

덕분에 반가운 분들 만나 기분 좋게 마셨는데, 술이 너무 과한 것 같았다.

낮술에 취한 꼬락서니야 보나 마나다.

 

술 취해 커피숍까지 들렸는데, 여태 사업에 매달려 두문불출한 김문경대표가

내년부터 다른 분에게 맡기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달마 도사 같은 호쾌한 그의 웃음에 온갖 시름이 사라졌다.

 

아무튼, 반갑고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 줘 고맙습니다.

사회의 아름다운 일을 많이 발굴해, 좋은 일 많기를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사람도 풍정도 다 바뀐 삭막한 인사동을 아직도 미련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실 날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인사동을 기록해 왔지만,

마지막 끈이었던 아지트마저 막혀, 더 이상 인사동에 대한 기록을 접기로 했다.

 

  간혹 봐야 할 전시가 있거나 볼 일이 있으면 들리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인사동 거리를 스냅하여 포스팅 하는 일을 그만 둔지는 제법 되었다.

 

  그렇다고 인사동을 좋아했던 오랜 정마저 어찌 끊을 수가 있겠는가?

마치 마음 변한 연인을 못 잊듯,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든다.

 

  며칠 전에는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는 인사동을 무작정 찾아 나섰다.

인사동 정취가 사라져 낯설기 그지없는 인사동 거리를 하릴없이 거닐었다.

 

  외국 관광객만 보일 뿐 반가운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궁녀가 꽃이 되었다는 쌈지 담벼락의 능소화가 그나마 눈 익은 풍경이었다.

 

  강민 시인을 비롯한 많은 풍류객들이 변해가는 인사동을 한탄했으나,

세월 따라가는 것을 누가 붙잡을 수 있겠나?

 

  또 다른 젊은이들이 새로운 인사동 문화를 만들어 갈 테지만,

인사동이 미술의 중심지인 이상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전시개막식에서 반가운 인사동 풍류객을 만날 수도 있고,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만도 인사동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 날도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볼만한 전시를 찾아나섰다.

마침 갤러리밈에서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이 열리고 있었다.

 

텅빈 전시장에 들어서니 천장에서 바닥으로 늘어뜨린 긴 설치작이 눈길을 끌었다.

광목천을 캔버스 삼은 그림에는 크기도 생김새도 제각각인 수많은 벌레가 그려져 있었다.

 

  여성·생태주의 대표작가인 정정엽의 모욕을 당한 자이며 위대한전에는

벌레외에도 그녀의 대표작인 팥과 콩 시리즈 등 23점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구상이자 추상이었다.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렸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이었다.

 

  콩과 팥은 때론 거대한 파도가 되기도 하고, 때론 빤짝이는 별이 되었다.

사소한 것에 담긴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콩이지만, 작은 한 알의 콩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는 소중한 생명의 씨앗임을 말했다.

 

  그 한 알 한 알에 녹아든 농부의 땀은 노동의 가치를 말했고,

주변에 널린 평범한 것과 약한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특히 새로 선보인 벌레에 대한 재발견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편견의 껍질을 벗은 벌레의 모습은 흉한 미물이 아니라 신비롭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승화되었다.

 

  미술평론가 심은록은 정정엽의 작품은 생명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낸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818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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