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 노포기행

골동품점에서 뉴욕갤러리까지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골동품 가게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경영
이제는 우리 문화 알리는 문화메카로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에서 김완규 대표가 1층 공예품 판매점인 '통인가게'를 소개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안국동을 잇는 ‘인사동 거리’가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식민통치로 벼슬길이 끊긴 경복궁 일대 양반들이 생계를 위해 내놓은 세간살이 중 귀물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골동품 상점으로 몰려들었고, 때로는 양반들이 직접 가게를 열기도 했다.

 

오늘날 인사동길에서 가장 많은 골동품을 보유하고 있는 통인화랑의 전신인 통인가구점도 1924년 통인동에서 문을 열었다. 뼈대 있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 줄 알았던 12세 소년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작한 골동품 가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 외국인의 입소문을 타면서 한국 고미술을 알리는 문화공간이 됐다. 지금의 관훈동으로 옮겨 온 이후엔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이 됐다. 전문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통인화랑은 2019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1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를 지켜 온 통인화랑을 20일 찾았다.

 

1대 김정환 대표에 이어 아들 김완규 대표가 2대째 운영..한 세기 가까운 역사

2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통인화랑. 최주연 기자

통인화랑은 인사동길에서도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중심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1층의 ‘통인가게’에선 나전칠기를 비롯해 도자기와 장신구 등 각종 공예품이 방문객을 반긴다. 지하 1층과 지상 5층은 공예품과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로, 지상 4층은 골동품을 보관∙판매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계단을 이용하는 손님이 많지 않지만, 붓글씨 작품 등이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어 한 층 한 층 구경하며 걸어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이야 7층 건물이 흔하지만 건물을 새로 지어 올린 1973년만 해도 인사동 일대에서 홀로 우뚝 선 고층 빌딩이었다고 한다. 2대째 가업을 잇는 김완규 대표는 “1972년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이 가게를 방문했다가 급하게 화장실을 찾길래 하는 수 없이 동네 푸세식 변소를 알려줬는데 경악을 하던 상황이 두고두고 민망했다”면서 “우리나라 문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간부터 품격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고 설명했다.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 4층에 수집된 고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최주연 기자

한국 예술에 대한 김 대표의 강한 긍지와 책임감은 통인화랑을 세운 아버지 김정환씨 영향이 컸다. 미술 공부는커녕 마땅한 관련 서적도 없던 일제강점기에 가게를 차린 소년 김정환은 물건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행상을 하던 노인을 따라다녔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유물 출토 현장을 찾아 구경했다. 그렇게 습득한 기술로 손님들에게 항시 가장 좋은 물건만 내놓았고, 직접 수리까지 했다. 그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운 김 대표가 한국 문화 애호가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단골 가게...갤러리에선 신진 작가 발굴

 

20일 서울 종로구 통인화랑 5층 갤러리 공간에 전시 중인 작품들. 최주연 기자

정직을 모토로 삼은 통인화랑에는 사람이 몰렸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한국화학 설립자 김종희 회장, 중요무형문화재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선 언론인 예용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총재를 역임한 데이비드 록펠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한국의 대표 원로화가 권옥연은 하도 자주 가게를 드나든 탓에 “통인가게에 값을 치르려면 그림을 칠해 놓고 말릴 새도 없이 팔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1973년 가게를 물려받은 청년 김완규는 '잘나가는 골동품 가게'에 만족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소유로 그치는 골동품에 한계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우수한 공예품을 즐길 수 있어야 국가 전반의 문화예술 수준이 올라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악한 대량 생산품에 반기를 들고 영국에서 공예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모리스의 이론이 김 대표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1980년대 통인가게를 찾은 록펠러(오른쪽) 전 총재의 모습. 통인화랑 제공

1975년부턴 이름을 ‘통인화랑’으로 고치고 갤러리를 열었다. 초기엔 동양미술품을 주로 전시하다 유행이 서양화로 바뀌자 현대미술로 콘셉트를 바꿨다. 지금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박서보가 1976년 첫 개인전을 연 곳이 통인화랑이다. 윤광조와 허건, 피에스탁만 등 국내외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면서 공예∙회화 전문화랑으로 저변을 넓혔다. 김 대표는 “지금도 작가들의 문의가 쇄도해 한 달에 두어 번씩 전시 내용을 바꿔야 겨우 소화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세계로 진출하고 사업 영역도 확장...강화도 아트단지도 추진

더 많은 외국인을 화랑에 끌어들이기 위해 김 대표가 40년간 분기에 한 번씩은 개최한 게 판소리와 오페라 공연이다. 많은 외국인과 교류하며 한국문화의 저력을 체감한 김 대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한국 사람들에겐 인기 없는 작가라도 작품만 우수하다면 외국 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1980년대엔 홍콩에서, 2002년엔 뉴욕에서 갤러리를 열었다. 각각 15년과 8년간 운영하며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냈다. 그가 세웠던 갤러리가 이제는 ‘한국홍보대사’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통인화랑에서 열린 판소리 공연. 통인화랑 제공

미술품을 잘 다루기 위한 김 대표의 노력은 관련 사업으로까지 연결됐다. 국내 최초로 포장이사서비스를 도입한 ‘통인익스프레스’가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과거엔 신문지로 물건을 싸서 배송했는데, 록펠러가 ‘가게 수준에 비해 포장 서비스가 뒤떨어진다’며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종이로 포장해보라고 해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해외화물수출입 업체인 통인인터내셔날과 국내 최대 규모 문서 보관 회사인 통인안전보관도 미술품을 안전하게 배송하고 보관하기 위한 김 대표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백발이 성성해진 김 대표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부친이 사용하던 통인화랑 7층 작은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는 현재 인천 강화도에 아트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강화도에 변변찮은 문화체험 시설이 없다는 아쉬움에 10개 미술관을 새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화랑은 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좋은 전시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할 따름”이라며 "앞으로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우리 예술을 알리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인사동의 멋은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에 있다.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취객들의 웃음소리로 항상 왁자지껄하고,

천장 낮은 한옥의 거친 흙벽과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다들 인사동이 변했다고 탄식하지만, 아직은 골목문화가 살아있어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오래된 술집이나 찻집에 인사동의 풍류와 낭만이 꿈틀댄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북인사마당에서 남인사마당을 잇는 큰길 사이로 20여개의 골목과 샛길이 이어졌다.

 

도로명이 생겨나며 인사동 골목은 1길에서 30길까지 나름의 길 번지가 생겼는데,

인사동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골목은 아무래도 인사동16길이다.

 

그 골목은 안국역 6번 출구에서 관훈주차장 사이길인 벽치기길과 연결되었는데,

‘유목민’, ‘푸른별이야기’, 누룩나무, 사랑채 등의 많은 술집이 모여 있다.

한식집도 여럿 있고, 옛날의 사랑방모텔도 이 골목에 있다.

 

'이즈갤러리' 옆 골목인 인사동14길은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식집과 ‘여자만’도 있다.

‘귀천’, ‘소담’, ‘흐린 세상 건너기’등 찻집도 즐비해 식사와 차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이기도 하다.

 

쌈지 옆길인 인사동12길로 들어가면 ‘보릿고개추억’,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가 있고,

서인사주차장으로 가는 인사동11길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과 오래된 전통찻집 ‘초당’도 있다.

 

그리고 수도약국 옆에 있는 인사동10길로 가면 ‘경인미술관’ 입구에 ‘개성만두 궁’이 있다.

반대편의 인사동9길에는 ‘안동국시 소담’이 있다.

 

 옛날부터 인사동을 출입한 분이라면,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 자리 인사동8길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실비집 대신 만두전골로 유명한 ‘사동집’과 ‘인사동수제비’가 있고,

‘대감집’을 돌아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낭만(풍류사랑)’도 인사동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는 주막이다.

 

 

큰길인 인사동 사거리에는 낙원동 가는 인사동4길이 있고,

반대편의 낙원떡집 방향으로 가는 인사동5길에는 음식점 '경복궁'이 있다.

가는 도중에 베트남요리인 ‘하노이의 아침’과 ‘무교삼계탕’도 있다.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4길과 5길, 그리고 인사동10길 만이 차량통행이 가능한 넓은 길이다.

 

인사동4길 옆의 인사동6길로 들어서면 된장비빔밥으로 유명한 ‘툇마루’, 그리고 ‘나주곰탕’도 진국이다. 

 

맛있고 분위기 좋은 집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맛과  흥과 예술이 어우러진 인사동 골목문화는 인사동만의 자랑이다.

 

골목마다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인사동 골목 골목 자리잡은 풍류객들이 그리워 오늘도 인사동 간다.

 

'신촌부루스' 엄인호의  '골목길' 노래가 생각난다.

“골목길 접어들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은 뭐니 뭐니 해도 골목문화가 성행한 동네다.

큰 길을 가운데 두고 틈틈이 생겨 난 골목이 스무여 개나 되는데,

그 골목 축에도 못 끼어 문패도 없는 개구멍 같은 길이 벽치기 길이다.

 

안국역 6번 출구 전방의 담배 가게 맡은 편에 있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는 샛길인데, 옛날 늦은 밤에는 취객들의 화장실이었다.

지린내를 맡으며 개구멍 같은 통로를 오갔는데,

때로는 소변 보던 취객이 길을 막기도 하지만, 얼마나 급했으면 길에 싸겠는가?

 

통행이 잦은 요즘은 그리 간 큰 사람이 없지만.

그 골목에 ‘유목민’ 같은 업소가 생겨나며 샛길로 자리 잡은 것이다.

휠체어를 탄 최혁배씨를 비롯한 많은 인사동사람들이 불편을 겪어 와,

오가는 사람마다 벽을 한 번씩 쳐 허물자는 뜻에서

‘벽치기’로 불렀는데, 그게 골목이름이 되어버렸다.

 

그 문제는 주차장에서 조금만 양보하면 될 일이지만,

종로구청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자체를 살리며 통행에 불편이 없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물론 둘러 가는 ‘인사동16길’이 있으나, 지름길을 아는 이상 누가 둘러 가겠는가?

 

그 안에는 ‘유목민’ 외에도 ‘푸른별 이야기’, ‘누룩나무 등의 술집과

'유담'찻집이 있고, 마지막 코너에 있는 ‘보고사’를 돌면,

'사랑채'를 비롯한 많은 술집들과 호텔도 있다.

 

그리고 춥지만 않으면 담배 피울 곳 찾는 손님들로

골목자체가 술집이 되어버릴 정도로 통행이 많은 곳이다.

건너편에 사람이 들어오면 기다렸다 갈 수는 있으나

최소한 장애인이 탄 휠체어는 통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비좁은 골목 자체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니, 할 말이 없다.

 

사진,글 / 조문호

 

 

한 해를 떠나 보내는 지난 28일 저녁 무렵,

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을 모시는 자리가 인사동 '선천집'에서 마련되었다.

송년회와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겸한 자리였는데,

늦장 부리다 송년 인사하려다 새해 인사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푸른사상맹문재 주간이 방동규선생님을 모시고 저녁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장소만 결정되면 한번 뵙고 싶어 했는데, 친구 송년회 선약과 겹쳐버렸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선천집에는 방동규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이승철 시인도 보였고, 한 분은 방동규선생의 미수를 축하한다는 글을 붙이고 있었다.

 

송년회가 미수연으로 바뀐 셈인데, 지난 4월 은성식당에서 가진 방동규 선생 미수연이 떠올랐다.

그날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모신 자리기는 하지만, 방동규선생께서 그런 자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년 말이라 저녁 식사나 하자기에 나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신을 내세우는 자리 자체를 싫어하시지만, 일제의 잔재라며 미수란 글자도 못 마땅해 했다.

 

맹문재씨가 나타나서야 송년회 아닌 미수연이 시작되었다.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맹문재주간과 이승철시인 외는 모르는 분이었다.

맹주간이 강태승씨를 비롯하여 권순자, 고은진주, 유국환, 장우원, 조미희 시인과

고서적 수집가 김병호씨, 그리고 뉴스페이퍼이민우씨를 차례대로 소개했다.

 

맹문재씨는 오래전 선생께서 펴낸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1,2권을 챙겨 와 방동규선생을 소개했다.

방배추를 모르면 간첩이다는 말도 한 물간 옛말이었다.

 

방배추란 별명은 어떻게 생겼냐는 첫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하드라마에 버금가는 방배추선생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시대적 울분을 날린 낭만 주먹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방동규선생은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의 주먹도 좋고 구라도 좋지만, 무엇보다 의인이라는 것이다.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일손을 놓지 않는데,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까지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추운 날, 윤석열 정권 규탄하는 토요 집회에도 빠지지 않으신다.

다들 눈치나 살피는 어른들이라, 못 볼 것을 보아도 꿀 먹은 벙어리다.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라 방동규선생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고은시인이 만인보에 쓴 방동규선생에 대한 시를 한 번 들어보자.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새해에는 다들 웃고 삽시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건강하고 의롭게 삽시다.

방동규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 송년회라 여긴지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다.

 

올 해 따라 가까운 친구가 여럿 세상을 떠나, 더욱 슬픈 한 해를 보낸다.

모든 게 없을 땐 소중함을 깨닫지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나지 못했음이 가슴을 후벼 파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지금부터라도 주변 분들과 자주 소통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유래 없는 코로나 광풍은 아직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 피해도 막대하지만, 개인의 삶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차지하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싸울 일이 아닌데도 다투는 등,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의 이권에만 전전 긍긍하는 정치인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정당보다 정책과 인물을 보고 뽑는 그런 세상은 정말 요원한 것이던가?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49제 날,

크리스미스 트리 불을 밝히며 술잔을 치켜드는 대통령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

 

다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두 번 죽이는 망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도 여럿 보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인들은 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자 표를 노려 부자감세를 추진하거나,

노인 표를 의식해 선심형 노인복지예산을 올리는 모순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유권자에게 고무신 돌리던 자유당 시절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시급한 것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과 쪽방에서 죽어가는 고독사 부터 없애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이 더 살기 어려운 시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젊은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정책과 행정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16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송년회가 ‘유목민’에서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지만, 참석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조준영시인이 비용일부를 부담해가며 어렵사리 주선하지만, 매번 그 얼굴에 그 얼굴이다.

 

이번 모임은 날씨가 추워 그런지 송년회 모임치고 저조했으나,

백남이 시인은 정읍에서 상경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앉던 ‘유목민’ 좌석이 예약되어 떨어져 앉아야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깥 좌석에는 바람막이까지 설치해 두었으나, 날씨가 추워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골목이 대화의 자리고, 사진 찍는 장소였다.

불화가 이인섭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야외의자에 정답게 앉기에

두 분 결혼사진 찍는다고 떠벌렸더니,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결혼은 겁나지만 연애는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가 정복수씨는 지역문학총서인 ‘장소시학’ 2호 한권을 선물했다.

이번호의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인데, 의령은 정복수씨 고향이 아니던가.

문인들의 글만 아니라 화가와 미술평론가 글도 실려 있었다.

정복수씨의 회향기인 ‘내 존재의 비망록과 그림', 미술평론가 황인의  ‘병막의 주인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네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떴다.

‘한겨레신문’ 짬에 ‘즐겁게 놀며 배우는 인사동 대학 다시 살리고 싶다’는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풍류학교 교장선생으로 추천한다는 허풍도 떨어댔다.

 

이 날 ‘유목민’ 특선 안주로 사골건더기와 시루떡이 나왔다.

술만 홀짝이던 예전과 달리 푸짐한 안주 덕에 술이 덜 취했다.

 

이날 참석한 분으로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명희, 전강호, 조해인,

정복수, 이인섭,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노광래, 백남이, 정영신, 임경일,씨가 참석했고,

끝날 무렵에는 김수길, 최석태씨도 나타났다.

 

엊저녁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수길씨가 녹번동까지 쳐들어 와 술을 마셨는데,

술병 났는지 장경호씨는 나타나지 않고, 그 패잔병 둘이 뒤늦게 온 것이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그런지, 모든 일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사람이 좋아 사람만 찍어 왔는데, 사람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전시장 돌아다니며 써 온 전시리뷰는 물론,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적 만들기 싫어서다.

 

사람을 피해가며, 사람을 찍어야 하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까지 싫은 소리에 등 돌리는 판에 남이야 오죽할까.

심지어 내가 있는 쪽방 주민들 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다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 사람을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새해에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 살 맛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짬] 갤러리 씨네 노광래 대표

노광래 대표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인사동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의 서예 작품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천상병 시인 좋아 ‘귀천 껌딱지’ 인연

1985년부터 38년째 ‘인사동 연락책’

 

노광래(66) 갤러리 씨네 대표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거리인 인사동 사람들 사이에 연락책으로 통한다. 1985년 지금은 고인이 된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씨가 카페 귀천을 연 이래 ‘귀천 껌딱지’로 살았으니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 37년이다. 앞서 1983년 시인 천상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천상문학회’ 초대 총무를 지낸 그는 1988년 시인이 춘천의료원에 입원하자 8개월 동안 병실에서 숙식하며 간병을 했단다. ‘인사동 풍류객’이었던 고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 말년에도 1년6개월 동안 ‘비서 겸 운전사’ 노릇을 하며 함께 인사동을 누볐다.

 

15년째 화랑 주인으로 사는 그에게 그림을 맡기는 화가와 고객들도 대부분 인사동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한 달에 그림 200~300만원어치 팔아 세내고 남은 돈으로 라면 먹고 즐겁게 산다”는 노 대표는 지난해부터 인사동과 인사동 사람들을 알리는 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지난 9월 ‘인사동 산타클로스’로 불렸던 고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는 글을 모은 책 <건달할배 채현국과 친구들>을 기획 출간했고, 지난해는 절판된 지 오래인 조문호 사진작가의 인사동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개정판 발행에도 앞장서 성사시켰다. 최근엔 유홍준 미술평론가와 윤후명 작가, 황주리 화가, 안선재 번역가, 장광팔 만담가, 가수 남궁옥분 등 35명의 ‘인사동 애정담’을 모아 <인사동에서 만나자>(덕주)라는 책도 냈다.지난 9일 서울 경운동 갤러리 씨네에서 노 대표를 만났다.

 

인사동에서 만나자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2008년부터 인사동 수운회관에서 유카리 화랑을 했던 노 대표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고 2년 전 폐업한 뒤 지난해 지금의 자리에 다시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이번에 수십명 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원고 청탁을 해 인사동 책을 낸 것도 코로나로 인사동을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란다.1968년 대학 2학년 때부터 우현 고유섭 선생의 책을 사러 인사동을 찾았다는 유홍준 평론가는 1990년대 들어 인사동이 관광거리로 크게 변했지만 지금도 “마음의 고향”인 인사동을 일주일에 두어번 들른다고 책에서 털어놓았다. 가수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림을 인사동에 처음 올리던 날이 “티브이 프로그램 <가요 톱텐>에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1위 트로피를 받았을 때보다 몇 배의 기쁨이었다”고 적었다. 고교생 때부터 인사동을 드나들었다는 시인 이만주는 ‘인사동 성골은 목순옥씨의 카페 귀천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다 고인이 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채현국 선생을 알고, 지금도 가끔 인사동을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뒤 이런 “인사동의 문화 게릴라”는 50~100명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노 대표는 천상병 시인과 의형제를 맺기도 한 소설가 고 이외수 선생 부부가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인의 부인에게 거금(3천만원)을 건넸다는 일화도 전했다.

인사동이야기 / 250페이지 / 25,000원 / 눈빛출판사

“코로나로 망해 인사동을 뜬 자영업자들이 많아요. 인사동을 다시 살려 예전처럼 즐겁게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마음으로 책을 기획했어요. 인사동에서 우리를 가르쳐준 훌륭한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지만 지금도 구중서 신경림 구중관 염무웅 선생님 등이 계시죠.”이날도 인권운동가 서승 선생과 함께하는 모임 약속이 있다는 노 대표는 인사동을 두고 대학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한테 인사동은 대학이었어요. 1985년 귀천에서 채현국 선생님을 만난 이후 마지막까지 따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요. 끝까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분이죠.” 인사동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뭐냐고 하자 그는 “남과 함께 즐겁게 살자, 하나라도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실천하며 살자”라고 답했다.

 

 

건달할배채현국과 친구들/ 15x22cm 288면 14,400원 출판피플파워

인사동 사진집·채현국 추모집 이어최근 ‘인사동에서 만나자’ 기획출간

작가·만담가·가수 등 35명 글 모아“선생님들처럼 후배들 밥술 사야죠”

 

그의 공식 학력은 초등 3년 중퇴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검정고시 준비를 하던 10대 중반 때 학생잡지 <학원>에 실린 최인호 청춘 소설을 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 만 21살에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사상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고 그 뒤로 월간 <객석> 영업사원과 출판사 영업부장, 잡지사 광고부장 등을 거쳤다. “삼성출판사 전집 월부값을 갚으려고 그 전집 외판 일을 시작했죠.”그는 지금도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단다. “귀천에 붙어 있을 때 천상병 선생께서 저에게 ‘놀지 말고 시 몇 편 써 오면 <현대문학>에 실어주겠다는 말씀도 하셨죠. 하지만 그때 저는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었죠. 죽기 전에 서정인·윤후명 작가처럼 깊이가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 생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죠.”그는 천상병 시인 생전 10년 동안 제자로 살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분의 시처럼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인간적인 모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천 시인은 날카로운 통찰력도 있었어요. 제가 춘천에서 병간호를 하며 일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보니까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네가 우치무라를 아느냐고 하시더군요.”노 대표에게 인사동은 “자연스럽게 놀고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린 고 민병산 선생이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에서 80년대에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하신 말씀이 ‘인사동은 생산적이야’였죠. 여기는 전시 예술이 번성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재미나게 즐기고 배울 게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공부도 억지로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요즘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애정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하자 그는 카페 ‘귀촌’과 막걸리 주점 ‘유목민’, 한정식집 ‘여자만’과 만두 전문점 ‘사동면옥’, 강된장 전문점 ‘툇마루집된장예술’ 그리고 카페 겸 식당 ‘시가연’ 등을 꼽았다.‘인사동 터줏대감의 세대 교체’를 화제에 올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우리 60대가 죽은 뒤에는 이어질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40, 50대라도 많이 오면 좋겠어요. 전에는 선생님들이 공부 가르쳐주고 밥도 사고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해야죠. 돈이 많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이젠 우리가 해야죠.”

 

한겨레 /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80년대와 90년대에 인사동을 내 집마냥 드나들던, 35명의 작가가

인사동,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 낸 책 "인사동에서 만나자"가 '덕주'출판사에서 나왔다.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의사, 가수, 정치인, 인사동 가게 주인 등 여러 저자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지켜 본 인사동 만의 매력과 따뜻한 삶의 자락을 전해주고 있다

 

15X21cm / 275P / 20,000원 / 덕주출판사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인사동을 기록해 온 사진가 조문호와 김수길의 사진도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 책은 인사동에서 '갤러리 씨네'를 운영하는 노광래씨가 기획했다.

책이 출판된 지난 11월 17일 오후 4시무렵 저자들을 초대하여,

김수길씨의 '시간 지우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아래 사진은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김수길, 김이하, 박상희, 김진규, 이명희, 최일순,

김 구, 김종근, 이도윤, 기국서, 최정인, 안선재씨 등 그 날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다.

'풍류사랑'에서 '유목민'으로 옮겨가며  술을 마셨는데,

'유목민'에서 전태수, 최유진, 안원규씨를 만나기도 했다.

 

책에 실린 필자들의 글

지친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온기 가득한 거리_ 신소윤 ㅣ 우리들의 인사동 시대_ 이만주 ㅣ

삼류 시인 _ 조정은 | 알렉산드리아 _ 윤후명 | 뜨겁고, 아프고, 찬란했던 _ 신영란 |

〈천상시인의 노래〉와 인사동 _ 김진규 | 내가 만난 인사동 작가들 _ 노광래 |

사는 게 뭔지 _ 윤영준 | 인사동 in 서울 _ 장두이 | ,인사동 추억 _ 이정래 |

고서점, 화랑, 그리고 ‘그림마당 민’ _ 유홍준 | 나의 인사동 전시장 소요記 _ 김진하 |

인사동 ‘그림마당 민’ 이야기 _ 곽대원 l 고상한 미술관은 아니지만 지낼 만하니? _ 김구 |

인사동, 내 청춘의 고향 _ 김종근 | 수요일의 인사동 _ 최영남 |

천지에 쓴 낙서, 정신적 떠돌이가 된 사람들에게 _ 이도윤 | 새롭게 낡아가는 인사동을 그리며 _ 황주리 |

숨 쉬는 박물관 인사동 _ 김경업 | 1964년 인사동 _ 장광팔 |

먹 향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 인사동의 추억 _ 정문헌 | 시간의 노숙자들 _ 정병례 |

인사동을 추억하며 _ 서공임 | 숨어 있는 전시장을 찾는 즐거움 _ 남궁옥분 |

화선지를 홍두깨로 다듬어 쓰셨다고 _ 유필근 | 우리나라 고미술품의 위상을 높이려면 _ 홍선호 |

나를 길러준 요람, 인사동 _ 최일순 | 스무 살 청년의 세 친구-삼청동, 관훈동, 인사동 _ 박상희 |

회상 _ 유상동 | 인사동, 나의 놀이터 _ 최정인 | 인사동에서의 안선재 수사 _ 안선재 |

인사동에 가면 _ 장순향 | 인사동에는 귀천이 있다 _ 강애심 l

인사동 40년 문화 공간 ‘시가연(詩歌演)’을 지키며 _ 김영희 | 흐린세상건너기 _ 한세미 |

 

 

이생진시인 / 사진:오마이뉴스 방관식기자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을 걷고 또 걸으며 시를 써 온 ‘섬 시인’ 이생진씨가 뭍으로,

그것도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 인사동으로 창작의 무대를 옮겼다.

‘인사동’(우리글)은 미로 같은 골목마다 숨은 찻집, 술집, 밥집과 그곳을 드나드는

우리 시대 예술가들의 친근한 모습을 정감있게 그려낸 시인의 신작 시집.

지난해 5월 소설가 박인식씨가 인사동을 무대로 불꽃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실명소설 ‘인사동 블루스’를 낸 데 이어 인사동을 주제로 한 시집까지 출간된 것을 보면

예술인들에게 인사동이라는 장소가 갖는 의미는 역시 남다른 모양이다.

이씨는 시집 머리말에서 “시인은 섬과 같아 겉으로는 사람을 멀리하지만 속으로는 늘 사람을 그리워한다”면서

“인사동에 상혼(商魂)만 북적거리라는 법은 없다. 시혼(詩魂)도 끼어들어 시성(詩聲)을 높여야 한다”고 썼다.

 

실제 시인은 박희진 시인(65)과 함께 2000년부터 인사동 찻집 등에서 시 낭송회를 가져왔다.

‘아트사이드’와 ‘시인학교’를 거쳐 지금은 ‘보리수’에서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7시에 낭송회가 열린다.

‘시인학교’는 1983년 정태승 시인이 문을 연 찻집으로 2004년 리모델링을 이유로 헐렸다.

그때의 허전한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인사동/‘바람 부는 섬’ 옆에 ‘시인학교’가 있었다/그곳에서 김종삼의 ‘시인학교’를/브란덴브르그에 기대어 읽다가/

리모델링 바람에 내 마임이 헐리고 허전해서/바람 부는 섬에 와 있다/-이 섬도 헐리나요?/‘아뇨’/-

그럼 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마음에 없다는 소리/

그래서 나는 도시의 섬을 버리고/진짜 바람 부는 섬 마라도로 왔다/

/여기서 시를 읽어도 되나요?/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다.”(시인학교)

 

시는 이밖에 고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 여사’가 운영하는 찻집 ‘귀천(歸天)’,

인사동 뒷골목의 허술한 카페지만 송상욱 시인이 기타를 치고 화가들이 손뼉을 치며 어울리는 곳 ‘시인과 화가’,

벽과 방이 온통 낙서로 도배된 향수어린 토속음식점 ‘풍류사랑’ 등

인사동 곳곳의 사람냄새 물씬 나는 장소를 무대로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시인이 현장의 모습을 직접 그린 스케치화와 친절한 주석이 함께 실렸다.

 

 2006.01.05 경향신문 / 이상주기자 s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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