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그리움에 묻혀 떠오른다.

한국기원, 유전다방을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60년대 후반 관철동 시대가 지나, 하나 둘씩 자연스럽게 발길이 인사동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강민 등을 말한다. 물론 그 주변에는 신동문, 박재삼, 이시철, 천상병, 김심온, 강홍규, 방영웅, 박이엽 등의 선배, 동료, 후배들이 있었다.

인사동 하면 생각나는 세 사람이 있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그리움이 절로 솟구친다.
민병산 선생은 그 분 특유의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가방을 매고 황혼녘의 우리들 앞에 잘 나타나셨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별 말씀이 없으시다. 그리고 주섬주섬 그 허름한 가방 속에서 세로판지에 싼 붓글씨를 꺼내 주신다. 그 분만이 쓸 수 있는 천의무봉의 청구자(靑丘子) 민병산체의 자유분방한 서예작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그 작품을 몇 개씩 갖게 되고, 어느덧 웬만한 찻집, 음식점에도 그 서예작품이 내걸리게 되었다. 어쩌다 원고료가 생기시면 자연스레 몰려든 후배며 학생들을 상대로 술좌석을 마련하시고 사람 살아가는 얘기며 사회 정의, 동서양의 교양, 철학에 대해 강론을 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쁜 직장 일 때문에 한동안 인사동 출입을 못하고 있는데, 민영 시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민 선생의 회갑이 돌아오는데 우리끼리 약간의 모금을 해서 회갑연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다. 무조건 동참하기로 하고 일은 진행되었다. 평생 남에게 줄줄만 알고 철저한 무소유로 일관하고 결혼도 하지 않으신 그 분의 외로움을 조금은 위로해 드리자는 취지였다. 내일이면 ‘누님손국수집’에서 회갑연이 열리게 된 전날, 우리는 찻집에서 민병산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 환담을 나누었다. 거기서도 민선생은 듣기만 할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왜 쓸데없는 짓들을 하느냐는 듯 쓴웃음만 짓고 계셨다. 이튿날 잔치에 입을 한복을 그날 찾아드렸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날 당일,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게 전화가 왔다. 민병산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부음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회갑연이 아닌 그 분의 장례식을 치렀다. 그 한복을 수의(壽衣)로 쓰고---. 어쩌면 당신 입장에서 보면 번거로운 그 행사를 피하려고 서둘러 이승을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천상병 시인의 환갑잔치도 ‘누님손국수집’에서 있었다.
좀 늦게 간 내가 들어서자 이미 많은 하객들이 와 있었다. 주인공인 천상병 시인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인 목순옥 여사와 신동문 시인이 앉아 있고, 낯익은 얼굴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내가 들어서자,
“아, 민이 왔구나. 민아, 민아, 민아, 어서 와, 어서 와.”
쭈그러진 얼굴에 한껏 웃음을 띠고 그 특유의 외마디 소리로 나를 맞아 주었다.
그를 흔히 ‘기인(奇人)’ 운운한다. 분명히 그런 면도 있지만, 그는 천재다. 50년대초, 그는 이미 <주간문학예술>에 평론을 쓰고 얼마 후 <문예>지에 시를 쓰고 있다. 앞으로는 매스컴도 그의 천재성을 더 부각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도 이제는 그의 시처럼 귀천(歸天)하고 우리 곁에 없다.

50~60년대의 명동에서 김관식, 이현우, 백시걸 시인 등, 그야말로 모두 기인이라면 기인인 천재들과 어울려 우리들 속물들을 비웃던(?) 그가 새삼스럽게 그리워진다.
“민아, 너 요즘 뭐 하고 지내? 번역 일 좀 안 할래?”
직장을 떠난지 오래되어 어려워진 내게 박이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허나, 일의 내용이 나와 무관한 미술평론이고 내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내가 분명한 답변을 피하자 며칠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 집을 파주로 이사했다고 전화를 해 왔다. 전화번호와 주소를 가르쳐 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란다. 그리고 우리는 이따금 인사동 그의 단골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늘 조용하고 말수가 적었다. 언제나 영국신사풍의 멋쟁이, 늘 남을 배려하는 인정 넘치는 사나이, 그런데 그는 늘 병약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채현국, 황명걸, 김하중, 김승환 등과 친한 그는 그래서 늘 외로워 보이고, 어쩐지 그늘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군사정권 시절 방송작가협회의 일을 보다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후 제도권 방송사에서 일을 주지 않아 겨우 기독교방송국 일만으로 연명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 불쑥 부음이 날아들었다. 그의 집 주소며 전화번호는 지금도 내 수첩에 남아 있는데.....

전쟁 전에는 조계사 앞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인사동 끝에 있던 ‘종로도서관’에 드나들며 일어로 된 문학서적을 남독하며 공부를 하고, 이제는 인생의 황혼에서 여전히 인사동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벗들과 여인들과 찻집과 술청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민예총>, <민미협>의 김용태, 주재환, <작가회의>, 나 같이 인사동을 떠나지 못하는 문우, 화가, 사진작가, 그 밖의 젊고 나이든 그리운 얼굴들.....












강 민(시인)

나는 지금보다 20-30년 전(前)의 인사동에 향수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인사동을 전통의 거리라고 하는데 지난날의 인사동은 순수한 전통의 분위기가 짙게 감도는 거리였습니다.
전통은 문화이지 문명은 아닙니다. 문화는 오랜 역사에 씻기워저서 남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거리를 오가던 당시의 사람들은 이 풍토(風土)에 물들어 현실감에서 조금은 빗겨선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소한 것에 인색할 줄 모르는 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밥집이나 찻집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면 그 사람의 몫까지 말없이 치르고 나오는 일이 허다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이제는 유명(幽明)을 달리한 유연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유서 깊은 가문에 태어나 평생을 홀로 청빈한 지식인으로 구도자(求道者)와도 같은 삶을 살다간 민병산(閔丙山)선생, 어느 날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약속된 인사동의 찻집으로 가니, 선생이 전(前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놀라운 말에 할 말을 잃고 삼성병원 영안실로 조문을 가기위해 얼마 되지 않은 회갑 축의금 봉투를 부의금(賻儀金)으로 다시 쓰면서 마치 먼 객지에서 대낮의 달을 보듯 서글프고 쓸쓸한 마음이었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천상병(千祥炳)시인(詩人). 그토록 아름다워 해 마지않던 이 세상에서 천진한 심성(心性)으로 해맑은 시(詩)를 엮어 내던 시인(詩人)은 지금도 어느 천계(天界)에서 막걸리 한 잔에 행복하시겠지요.

또 밖으로는 내비치지 않으면서도 완만한 자부심(自負心)으로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며 자못 여유스럽던 문화인 박이엽(朴以燁)선생.

그리고 또 생각나는 얼굴 어느 날 갑자기 두 자식들과 정숙한 아내와 이별하고 새 사랑을 찾아가 멀지 않아 요절한 사진기자 김종구군(金 鍾九君), 지금쯤은 성적(性的)매력이 없어 싫다던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하고 있겠지.

또 한 사람 술 한잔 얼큰해지면 주위 사람의 짜증스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깐죽깐죽 이유 없는 주정을 부리던 서양화가(西洋畵家) 강용대군(姜容大君) 지금은 어느 별자리 가까운 곳에서 좋은 짝 만나 총각신세 면하고 아름다운 은하수(銀河水)를 열심히 그리고 있겠지요.

골목안 “실비집”에 누군가 먼저와 앉은 자리에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들이 너도 나도 모여와 제자리인양 끼어 앉아 주머니 사정은 염두에도 없이 그 곳이 마치 자신들의 향연장이라도 된 듯 호기를 부리는 취객을 향해 “이 화상들아 제발 술값 좀 갚으라”며 독기(毒氣)없는 소리를 지르던 “실비집” 주인아주머니는 어디서 부자 될 꿈을 꾸고 있을까요.

이제 지난날의 그리운 몇 얼굴들은 세월(歲月)속으로 사라지고, 인사동에는 관광객이라는 이름의 이방인들의 발길이 밀려왔다 밀려가며 전통의 그림자를 점차 희석 시켜가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이 거리를 걸어 면서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합니다.







김형숙(번역가)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나 인사동을 다시 찾은 것은 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전후에 발행된 선배 시인들의 귀한 시집이 전화에 휩쓸려서 인멸되거나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동에는 그때 통문관을 비롯한 몇 군데의 고서점이 문을 열고 있었다. 모두가 예전에 지은 조선식 구옥에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타격으로 퇴락한 모습이었으나, 그 먼지 낀 서가를 유심히 돌아보면 뜻밖에 희귀본을 만날 때도 있었다.

1960년에 들어서자 이 예스러운 거리에도 다방과 술집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골동품 가게와 음식점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찻집이 들어섰으나, 한참 지나자 종로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오는 길 옆의 골목 안에 아주 번뜻한 음악다방이 모습을 나타냈다. 르네상스였다. 수많은 고전음악의 이름난 레코드 판을 소장한 그 다방은 금세 장안의 명물이 되었으며, 명동에 있는 돌체와 더불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젋은이들의 모임터가 되었다. 여기서 나는 후에 이름 난 시인의 반열에 오른 박희진, 구자운, 이제하 같은 이들을 만났다.

1970년에 들어서자 이 고풍한 거리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짓는 작업인데, 유독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림을 전시하는 화랑들이었다. 가나화랑과 학고재, 현대화랑 같은 규모가 큰 전시장이 나타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생긴 일인 듯한데, 이때부터 인사동이 조금은 어둡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밝고 활기찬 새로운 거리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화랑이 들어서자 자연히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도 종류가 다양해져서 문인 외에도 화가, 서예가, 대학교수들이 모습을 나타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도 나타났다.

이 무렵에 특기할 것은 60년대 중반에 이곳에다 문을 연 시인 김상옥 선생의 아자방(亞字房)이란 표구사 겸 골동품점이 서울에 사는 저명한 문인들이 들락거리는 이름난 쉼터가 되었다는 것과 종로에 있는 한국기원 근처, 정확하게 말하면 관철동에서 바둑 두고 술 마시던 젊은 시인 작가들이 큰길 건너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 현상에는 한 요인이 있는데, 그것이 당시에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던 민병산 선생의 일화다. 선생은 그 전까지 여러 잡지에 에세이적 산문을 쓰시며 남는 시간에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계셨는데, 그 온유하고 청빈한 인품과 동서양의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좌중을 매혹시키는 말씀이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이 민병산 선생이 80년대 초에 관철동이 번화한 상업지대로 변하자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 건너 인사동으로 발길을 옮기셨고, 그 뒤를 따라 여러 명의 젋은 문인들이 유목의 길을 떠난 것이다.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그리고 한 걸음 뒤에 천상병 시인도 건너왔다.

그러자 인사동이 갑자기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풍요였지만 이 새로운 문인들이 모여든 것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담론이 벌어졌고, 인사동은 광주사태의 좌절 이후 슬픔에 잠겨 있던 젊은 지식인들이 전열을 가다듬는 후방기지가 되었다. 길거리 시위에서 쫓겨온 청년들은 인사동 술집에 모여 운동가를 부르며 울분을 삭혔고, 더러는 찻집에 앉아서 다음번 거사를 도모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문인뿐만 아니라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운동권 학생들과 화가들, 예컨대 임옥상, 신학철, 이철수, 강요배 같은 젊은 화가들도 모여들곤 했다.

그 이후 인사동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엉뚱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있던 서점, 음악감상실, 골동품 가게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아직은 낯익은 찻집과 까페, 화랑들이 남아 있고 여전히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이 거리의 균형이 보다 상업적인 데로 넘어가서 현대식 쇼핑몰이 들어섰으나 아직도 시 낭송회가 열리는 조촐한 찻집과 걸어 다닐만한 길이 남아 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이후 인사동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엉뚱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낯익은 찻집과 까페, 화랑들이 남아 있고, 시 낭송회가 열리는 조촐한 찻집과 걸어 다닐만한 길이 남아 있다.








민 영(시인)



인사동은 늪이었다.

콘크리트가 아스팔트로 다져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원시성을 지닌 늪이었다.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진화하기를 거부하는, 신술적인 삶의 셈법을 모르는, 아니 그마저도 거부하는 원형질의 건강한 생명체들이 공생하던 늪이었다.


1981년 겨울, 나는 내 생에서 신의 축복같은 환희의 순간을 그곳에서 맞았다. 관훈미술관 3층에 있던 월간 ‘한국문학’에서였다. 내가 글이라고는 처음 쓴 장편소설이 ‘한국문학 창간10주년기념 신인발굴작품’으로 선정되어 출판계약금으로 받은 10만원권 수표 석장, 그것은 동그라미 몇 개로 확인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것은 동굴 속같은 어두운 내 정신을 비추는 빛이었다. 사막을 걸어와 갈증에 허덕이던 내가 마신 샘물이었으며 희망을 보증하는 증표였다.

그날 이후, 한국문학과 맺은 인연으로 인사동을 찾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잦아졌다. 그 무렵 내가 만난 사람들은 창작을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삼은 진보적인 예술인들을 비롯해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꽃으로 피워내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 그 외에도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은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세속의 현실에서 비켜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사동은 늪의 건강한 원시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인사동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인사동이라는 늪의 원시성을 대변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천상병시인이다. 1982년 초봄, ‘한국문학’ 이근배 주간 방에서 내 소설 출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침입자처럼 문을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이주간, 이주간, 내 시 한편 써왔다. 시 한편 써왔다. 원고료 오천원만 도. 오천원만 도.’ 그가 바로 천상병 시인이었다. 내가 천상병 시인의 건강한 원시성을 확인한 것은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근배 주간이 예를 갖추어 만원을 드리자 ‘아이다. 아이다. 원고료 오천원이다. 오천원이다.’하면서 한사코 오천원을 고집했다. 이근배주간이 할 수 없이 편집질에 가서 오천원을 바꿔와서 드리자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진화하지 못한, 산술적인 삶의 셈법을 모르는, 아니 그마저도 거부하는 인간의 한 전형을 그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지 몇 년 후에 천상병시인의 부인 문순옥여사가 차린 찻집 ‘귀천’은 인사동이란 늪에서 중심이 되었다. 열평도 채 안되는 찻집 ‘귀천’은 늪에서 유일하게 맑은 물이 고여 있는 그런 곳이었다.

87년 한여름,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일보 사회부 사진기자였던 김종구씨가 온몸에서 최류가스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귀천’으로 들어설 때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시위현장에 취재를 가서 목격한 폭압적인 공권력에 대한 울분을 가득안고 들어선 그에게 목순옥여사는 아무 말 없이 얼음이 담긴 진토닉 잔을 내밀었다. 최루가스와 울분으로 갈증이 극심했던 그에게 그것은 달디 단 샘물이었으리라. 목순옥여사가 알콜 섞인 음료를 준 것은 그가 유일했었다고 기억된다. 진토닉 한잔 마실 수 있는 업소가 어디엔들 없었으랴만 그가 갈증을 참고 ‘귀천’까지 온데는 남다르게 지향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귀천’을 중심으로 실비대학이라 불렸던 ‘실비집’, 까페‘레테’,등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을 이제는 만나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더러는 고인이 되었고, 또 더러는 삶의 서식지를 바꾼 이들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요인은 인사동이라는 늪이 지니고 있던 그 건강한 원시성이 고갈된 탓일지도 모른다. 상업자본의 말발굽이 인사동 고유의 원시성을 가차 없이 유린해버렸기에.

늪에 가보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생하며 풍기는 독특한 체취가 있다. 인사동에도 그런 체취를 지닌 사람들이 공생했었다. 그러나 이제 인사동에서 그런 건강한 체취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을.

이제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같은 40대를 인사동이라는 늪에서 보냈다. 산술적인 삶의 셈법으로 치자면 그건 분명 허비였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산술적인 셈법으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그걸 굳이 말하자면 사람과의 관계일터이다.

인사동이라는 늪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 과밀한 도시 어디에선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랴만 인사동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인사동이 한국 골동거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막 뮐러와 연관이 있다. 그는 인사동을 통하여 팔자를 고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45년 점령군 정보장교로 이 땅에 도착한 그는 골동 수집에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조상이 물려 준 옛 것을 돈으로 바꾸지 않는 한국인들의 문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1.4 후퇴 이후 서울이 수복되자 한국인들의 인식이 달라졌더라는 것이다. 오래된 물건들을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든지 미군 장교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의 골동을 실었는데 그 중에는 임금 옥쇄도 실려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한 번의 골동거래는 이후 성북동 저택과 천리포수목원을 장만하는 원천이 되었다. 물론 임금 옥쇄는 이화여대에 기증되었지만 막 뮐러의 인사동은 그런 곳이었다.
60년대 어느 날 20세기 최고의 투자가 존 템플턴 경으로부터 달러가 가득 찬 007가방 두 개를 건네받은 곳도 인사동 어디였다 한다. 이 돈은 자본시장에서 수 십 년간 성공적으로 운용되어 외국인 자본투자가 허용된 1991년 템플턴 경의 바하마군도 집으로 거대한 자본이 되어 주인을 찾아 가게 되었다. 이는 필자가 해외에서 그의 부탁으로 이 트랜잭션 일부에 관여하게 되어 알게 된 일이다.
1960년대 인사동은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불법거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통시장의 자본유입을 왜 그렇게 정부에서 막았는지 궁금하다. 당시 템플턴 경은 미국인으로 국제 투자를 한 유일한 분으로 오늘날의 자유자본시대의 개척자다.







윤양섭(펀더매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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