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나 인사동을 다시 찾은 것은 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전후에 발행된 선배 시인들의 귀한 시집이 전화에 휩쓸려서 인멸되거나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사동에는 그때 통문관을 비롯한 몇 군데의 고서점이 문을 열고 있었다. 모두가 예전에 지은 조선식 구옥에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타격으로 퇴락한 모습이었으나, 그 먼지 낀 서가를 유심히 돌아보면 뜻밖에 희귀본을 만날 때도 있었다.

1960년에 들어서자 이 예스러운 거리에도 다방과 술집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골동품 가게와 음식점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찻집이 들어섰으나, 한참 지나자 종로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오는 길 옆의 골목 안에 아주 번뜻한 음악다방이 모습을 나타냈다. 르네상스였다. 수많은 고전음악의 이름난 레코드 판을 소장한 그 다방은 금세 장안의 명물이 되었으며, 명동에 있는 돌체와 더불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젋은이들의 모임터가 되었다. 여기서 나는 후에 이름 난 시인의 반열에 오른 박희진, 구자운, 이제하 같은 이들을 만났다.

1970년에 들어서자 이 고풍한 거리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짓는 작업인데, 유독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림을 전시하는 화랑들이었다. 가나화랑과 학고재, 현대화랑 같은 규모가 큰 전시장이 나타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생긴 일인 듯한데, 이때부터 인사동이 조금은 어둡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밝고 활기찬 새로운 거리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화랑이 들어서자 자연히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도 종류가 다양해져서 문인 외에도 화가, 서예가, 대학교수들이 모습을 나타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도 나타났다.

이 무렵에 특기할 것은 60년대 중반에 이곳에다 문을 연 시인 김상옥 선생의 아자방(亞字房)이란 표구사 겸 골동품점이 서울에 사는 저명한 문인들이 들락거리는 이름난 쉼터가 되었다는 것과 종로에 있는 한국기원 근처, 정확하게 말하면 관철동에서 바둑 두고 술 마시던 젊은 시인 작가들이 큰길 건너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 현상에는 한 요인이 있는데, 그것이 당시에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던 민병산 선생의 일화다. 선생은 그 전까지 여러 잡지에 에세이적 산문을 쓰시며 남는 시간에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계셨는데, 그 온유하고 청빈한 인품과 동서양의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좌중을 매혹시키는 말씀이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이 민병산 선생이 80년대 초에 관철동이 번화한 상업지대로 변하자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길 건너 인사동으로 발길을 옮기셨고, 그 뒤를 따라 여러 명의 젋은 문인들이 유목의 길을 떠난 것이다.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그리고 한 걸음 뒤에 천상병 시인도 건너왔다.

그러자 인사동이 갑자기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풍요였지만 이 새로운 문인들이 모여든 것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담론이 벌어졌고, 인사동은 광주사태의 좌절 이후 슬픔에 잠겨 있던 젊은 지식인들이 전열을 가다듬는 후방기지가 되었다. 길거리 시위에서 쫓겨온 청년들은 인사동 술집에 모여 운동가를 부르며 울분을 삭혔고, 더러는 찻집에 앉아서 다음번 거사를 도모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문인뿐만 아니라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운동권 학생들과 화가들, 예컨대 임옥상, 신학철, 이철수, 강요배 같은 젊은 화가들도 모여들곤 했다.

그 이후 인사동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엉뚱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있던 서점, 음악감상실, 골동품 가게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아직은 낯익은 찻집과 까페, 화랑들이 남아 있고 여전히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이 거리의 균형이 보다 상업적인 데로 넘어가서 현대식 쇼핑몰이 들어섰으나 아직도 시 낭송회가 열리는 조촐한 찻집과 걸어 다닐만한 길이 남아 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이후 인사동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엉뚱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낯익은 찻집과 까페, 화랑들이 남아 있고, 시 낭송회가 열리는 조촐한 찻집과 걸어 다닐만한 길이 남아 있다.








민 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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