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는 시골에서 어칠비칠 놀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배 형으로부터 장 뉴네의 “도둑일기”를 얻어듣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하여 나는 서울로 튀어 남대문 시장 마늘 가게에 간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마늘 가게 창고에는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야 다다미 두 장이 깔린 다락방이 있었는데 어둡고 습기에 젖은 마늘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네 사람과 합숙을 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이들과 함께 마늘 100접을 엮어 리어카에 싣고 떠돌이 마늘 장사를 나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낙원 시장과 가회동 한옥마을, 그리고 인사동 골목을 떠돌아다니며 마늘을 팔아야 했다. 그러다 두어 시간 만에 좁장한 골목 식당에서 겨우 마늘 한 접을 팔고나서 나는 인사동 4거리쯤의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길 건너편에서는 아까부터 허름한 점포 쪽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경상도 특유의 목청으로 꾀죄죄한 한 늙은이와 물건 값을 치르느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길이 무심코 쏠린 것은 점포 밀창문에 쓰인 “亞字房”이란 세 글자였다.

오, 아자방, 그 주인이 시인 김상옥 아니던가싶은 호기심에 마늘 한 접을 들고 아자방 밀창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사요, 안사요, 나가소, 나가소 하더니 아까 그 꾀죄죄한 늙은이까지 몰아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래서 늙은이는 나가고 나는 안나가고 진드기처럼 붙어서 선생님, 선생님, 초정 김상옥 선생님 했더니, 누고? 누고?, 했다가 엉뚱하게, 당신 내 물건 하나 사소, 했다.

기회다 싶어, 선생님, 저는 일찍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다 떼려치우고 이렇게 떠돌이 마늘 장사 신세가 되어 유명한 시인 선생님을 뵙게 되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했고 나는 곧 바로 선생의 시 “봉선화”를 낭송했다. 그랬더니 나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 시와 청자와 백자에 대하여 벼루에 대하여 민족예술과 민예품에 대하여 열변을 거듭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쁨으로 몹시 흥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메모를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심수관, 이참평, 그리고 조선의 산세와 민예품을 사랑한 나머지 끝내 망우리 묘지에 묻혀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사카와 다쿠미, 등등. 나는 메모가 된 것들을 무슨 천만금의 재산목록인양 호주머니에 챙겨 넣고 아자방을 나왔다. 그리고 초정선생이 소개해 준 “통문관”을 찿아가서 얄팍하고 푸르스름한 4X6판 책 한 권을 샀다. 고유섭 저자로 “고려청자”였는데 이 때가 1962년 초가을 오후였던가? 이후 나는 군대를 가게 됐고 제대를 한 뒤 노가다도 뛰고 절간 공부도 하다가 드디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친지 소설가 김승옥의 천거로 동화출판공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이 회사가 1973년 한국출판사상 처음으로 초대형 원색판 “한국미술대전집” 15권을 출간하게 되고 일본으로 까지 수출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 때 인쇄와 제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막중한 자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일과를 온통 현장에서 마쳐야 했다.

특히 나의 거래처가 되는 인쇄소는 인사동 건너 조계사 옆에 있는 평화당인쇄소였는데, 나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청, 백자나 분청을 원색으로 인쇄하자면 실물 때깔과 인쇄된 때깔이 같아야 하는데 그것을 비교하는 감식안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큰 낭패를 보게 되고 아주 버려지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앞서 말한바 1962년 마늘 장사 때 만난 아자방을 인연으로 하여 골동가게를 드나들면서 안목을 넓혀 두었던바, 이런 것들이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미술대전집 3만권을 일본으로 수출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나는 많은 사람들과 시간을 인사동에서 함께 보내오고 있지만 점점 인사동의 풍물과 정서는 다들 어디로 가버리고 있다.

“통문관”과 “문우사”만 남아 있지만


서정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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