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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스스로를 내세우는 보여주기식 전시나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
며칠 전에는 온 식구가 동원되어 전시 준비 작업에 나섰다.
선우만 가게 일 하느라 동참하지 못했지, 다들 솥을 걸거나 칠을 하는 등 정신없이 바빴다.
김창복씨는 목공 일을, 기웅서씨는 용접일을, 이현이는 조경 일로 다들 고생했다.
용접할 자제가 부족해 마무리는 못했지만, 대략의 가닥은 잡혔다.
거지 처지에 남의 돈 까먹는 이 힘든 일을 왜 하는지, 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어 댔다.
발단은 김선우가 만들어 준 아산 ‘백암길 사람사진관’의 개관식을 겸한 전시도
한번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선 집 화재 때 도움 주신 많은 분에게 드리는
보고 형식의 자리도 필요했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마침 ‘스마트협동조합’에서 신청해 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2024 예술활동준비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진행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원금 삼백만원으로 준비하기도 부족하지만,
동자동에서 아산 백암길을 드나들며 준비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보다 무슨 사진으로 무슨 말을 할지가 관건이었다.
전시 기획안부터 마련되어 추진하는 것이 순서겠으나.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래서 삼십 년 전에 찍었으나 제대로 발표하지 못한 ‘신체발언’사진을 꺼내
사회적 문제로 꼽히는 미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는데,
시골인 것도 걸리지만, 사진관을 만들어 준 선우의 입장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긴 세월 작업해 온 전체 사진에서 주요 사진만 추려내어 그때 말을 되새기는
“말한다“ 사진 설치전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단지 ‘신체발언’ 사진은 내 사진 한 점만 숲속에 내걸어 당사자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진안 ‘계남정미소’에서 열린 정영신의 ‘진안 그 다정한 풍경’전
작가와의 대화에 따라갔는데, 그날 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오래된 사우 김종신씨를 만나 완주 자택에서 자기로 하고 술을 마셨는데,
술만 마시면 발동하는 성적 발언이나 장난 끼가 도진 것이다.
그것도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딸 같은 선우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 당시는 심각한 상황도 인식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났는데,
뒤늦게 선우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을 받아 보며 화들짝 놀란 것이다.
선우에게 사죄하고, 앞으로 술을 완전히 끊기로 하고 덮었으나,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난, 성 개방주의자로 성 문제를 경직시키는 현실에 늘 불만을 가진 사람이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고 가끔 성 문제를 거론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래된 술버릇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는 샌님처럼 말도 잘 하지 않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 백팔십도로 바뀌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술 취해 돼지 목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성을 안주 삼아 별 지랄을 다 한다.
다행히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어 살아남았지,
아니었다면 벌써 미투에 걸려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크게 깨달은, 뒤늦은 반성으로 평생 즐겨온 술마저 끊었지만,
미력하지만 그 문제를 개선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
사회적 문제가 된 ‘미투’가 성 의식을 바로잡아 성차별을 없애는 데는 이바지했으나,
정치적이거나 개인적 목적에 의해 생사람 잡는 경우도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아름다운 성 문제를 경직시켜 남녀 간의 큰 벽을 만들었다.
사람답게 살자는 바람직한 운동이 남녀 간의 애정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낸 것이다.
일단 이번 전시에 내 걸기로 한 사내 알몸 사진은 걸지 않기로 했지만,
언젠가 다시 보충 사진을 찍어 제대로 된 전시와 심포지움을 열어,
페미니즘 문제의 가해자로 낱낱이 고백하는 단두대에 서겠다는 것이다.
바라건대, 다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
경직된 남녀 문제에 봄바람을 일으키고 싶다.
건강이 그때까지 지탱해 줄지 모르겠으나 돌팔매는 나중에 맞기로 하고,
이번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전시를 치루게 되었다.
평생 작업해 온 사진에서 추려 내 자연 속에 설치하는 전시인데,
전시장에 갇힌 사진에서 야외로 끌어내는 전시다.
동자동 빨래 줄 사진전에서 인사동 담벼락 전시에 이은 야외 전 행보다.
청량리에서 몸 팔던 소녀의 이야기에서부터 독재에 저항한 시민이나
살기 어려운 산골 농민이나 장터 사람들의 하소연,
거리에 내몰린 노숙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의 인간애를 소환하는 전시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김세진 어머니의 울부짖음도 있고,
”돈 벌어 가족 먹여 살렸다“는 ‘오팔팔’ 김정숙씨의 하소연,
”춥고 배 고프다“는 노숙인 이덕영씨의 절규도 있다.
”허리가 아파 누워 장사한다“는 증평장의 정숙현 할머니,
”죽도록 고생해도 빚만 남았다“는 최덕남씨, ”세상에 믿을 건 두 손 뿐이다“는
정선의 최종대씨 등 대부분 힘든 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은 오기, 무기, 놀기다“는 화가 박건씨의 사진이나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고 싶다“는 도예가 김용문씨 등
인사동 사람들의 투지가 포함된 30여 점의 사람사진이 자연 속에 설치된다.
사람 사는 정이 메말라가는 이 ‘에이아이’ 유령 세상에,
힘든 이야기지만 사람 사는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지나치는 걸음에 들려 차 한잔 드시며 사람 사는 정이나 나누자.
가을이 무르익는 24일부터 31일까지 ‘백암길 사람사진관’에 술상 차린다.
사진, 글 / 조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