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무아트큐브에서는 한상진 작가의 『눈멂, Blinding Scenery』 展을 기획하였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과 회화(painting) 그리고 버려진 사물을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 넣는 오브제(objet)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 작가의 작업은 주로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낯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 담긴 삶의 모습들, 친근하면서도 낯선 언어들과의 만남,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 그의 되돌아 봄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곳에는 이름 없는 풍경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보잘것없는 사물들,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자연을 인위적인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사유에 있어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작가가 그려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작업 속에는 이러한 전통적 사유와 함께 우리가 성찰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길 위에서, 멈춰서서,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순간을 작가는 '눈멂'이라고 말한다. 눈멂이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중지'의 순간이 아닌가... 중지의 순간-이끌림, 의식과 의미가, 이성의 구조적 판단이 멈추는 응시의 순간, 수행자의 묵상처럼 찰나가 전해주는 울림을 그는 마음의 숨결, 몸의 감각을 통해 화면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는 2023년 전후, 풍경과 사물을 응시해온 수묵드로잉을 포함하여 페인팅 작업 그리고 채집된 오브제로 재구성된 가변설치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2005년 전후 「문명의 침실」 연작, 2008년 전후 「FLASH GARDEN」 연작, 2011년 전후 「응시와 명상」 연작, 2014년 전후 「소요逍遙-흐르는 풍경」, 「무경계, NO BOUNDARY」, 「미명微明」 연작 등, 실험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20여 회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두나무아트큐브
눈멂-Blinding Scenery ● 나는 이름 없는 풍경들이나 버려지고 오래되어 허름한 사물들에 이끌린다. 의미화되거나, 화석화되거나, 기호화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응시의 순간이 작동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상의 바라봄이며 시선이 시선 속에 그 이상의 나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삶의 계기들은 거부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친밀하고도 낯선 모호함을 숨기고 있다. ● 문화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은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 기능하며 독자의 체계와 공명하겠지만, 이미지가 그 너머의 타자성을 품을 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밝은 방』에서 제기한 개념 푼크툼(punctum, 푼크툼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의미로, 이미지를 봤을 때 다가오는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말한다)처럼 숨겨진 틈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때로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 분열의 시간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시간의 나눔과 선형적인 구분 사이에 있다. 동일성을 배제한 타자들의 목소리는 어두운 심연에 몸을 움츠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 또 다른 소리의 형상이며 침묵 또한 온전하게 의미로 정립되는 것을 방해한다. 동행하던 내 안의 내가 길 건너 저편에서 손짓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겹침(overlapping)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온전치 못한 불가능한 의미의 세계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어가는 순간들은 길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흐린 날의 기행, 목적 없이 떠나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은 변증법적으로 충족시켜가는 과정이 아니며, 다시는 고유성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실패하는 여행이다.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미 죽은 것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벗어남, 회의, 전락, 공포의 감정, 무의식... 존재는 언어적인 의미로 해석이 안 된다. ●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유한성의 무한한 지속을 존재의 참을성(patience)이라고 한다. 의미는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어떤 것에 속하려고 하는 강박은 의미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연기는 나에게 종결되지 않는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는 의미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풍경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중지의 순간에도 흐르는 풍경은 고유한 자리가 없다. 죽음은 죽임으로 종결되지 않는 욕망이다. 흔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은 시간적인 차연으로 존재함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벌거벗은 풍경으로서, 재현 불가능한 풍경으로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기억할 수 없는 타자,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살아 숨 쉬는 죽음의 순간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가 육명심(陸明心) 선생은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이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겼듯이, 그런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진집 『백민(白民)』에 수록된 윤세영 선생의 글을 참조하자면 1970년대 말 시작된 『백민(白民)』 연작은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고 있었던 기층민, 삼베나 모시옷을 입은 옛 삶의 원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템적인 분위기는 사진들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정면성에 나타나 있고 바라봄과 보여짐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 서로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관계의 형성은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육명심 선생의 작품집 『백민』은 시대의 풍경을 호명하는 것이고 오늘날 기층민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해준다. 나에게 존재란 그리고 그림이란 이름 없는 것들 속에서, 그 관계 속에서 삶-죽음을 호명하는 것이다. ●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을 묵시해 왔다. 정치적인 형세,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적 풍경 속에서 자본의 흐름이 존재를 지배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서구의 그것보다도 더 비자연적으로 획일화시키고, 물질화된 환경 속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과 소비 속에서 남겨진 잉여, 의미로부터 버려진 사물과 풍경들은 일렁이는 시선의 동일성 속에서 나를 애착(affection)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 위에 떨어진 열매, 투박하게 마모된 조약돌, 빛바랜 플라스틱이나 유리 파편들, 녹슨 쇠붙이, 바닷가에 떠내려온 부유목, 수변 풍경, 적벽... 풍상이 담긴 나무들, 나타나고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 하늘과 땅의 경계가 그려내는 모호한 풍경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거칠고, 아름답고, 숭고하고 강렬히 눈을 멀게 하고, 삶 속에서 헐벗은 파편으로 흐르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텅 빔을 나로 하여금 반복-공유하게 한다. ● 위와 같은 여정 속에서 작품으로 등장하는, 오브제(objet), 최소한의 재료나 물질의 옷을 입은 형과 상의 속삭임들, 미완의 흔적들은 손에 잡을 수 없는 형상들이 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무경계(no boundary)란 완결되지 않은, 종결될 수 없는 이미지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물들, 그러나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온다. 실패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나서며 풍경을 소요(逍遙)하는 것은 아무런 구분도 가능하지 않은 어둠, 바깥으로 열리는 텅 빔을 환대하려는 태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 한상진
병풍은 여러 장의 그림을 각기 바탕에 펴붙이고 접을 수도 있게 한 것이다. 보고 싶으면 세워서 열어본 뒤 접어서 보관하면 되므로 간단하고 편리하다. 병풍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각기이되 비슷한 성격의 주제나 소재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최소 2장부터 많게는 10장 이상을 이어붙인 것도 있다.
이도영의 특별한 기명절지 그림 가운데에는, 12폭으로 이루어진 <나려기완>이 있다. 1930년에 그린 그림이다. 앞서 <고색찬연>이나 <아> 를 소개하면서도 말했지만, 이도영은 그림에 붙이는 이름도 남다르다.
이 병풍의 '나려'는, 신라의 '라'와 고려의 '려'를 연결한 말로, 대략 조선 왕조 이전의 고전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말 여초니, 여말 선초니 하는 말과 같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떠올리면 되겠다.
<나려기완>이라는 제목은, 신라의 토기와 고려의 청자 등을 통해 '우리의 빛나는 고전 문화를 보시라!'는 말을 하는 듯하다.
병풍의 맨 오른쪽, 첫 번째 폭부터 보자. 다리가 높이 솟은 탁자 위에 소나무 분재가 그려져 있다. 가지를 넓게 벌려져 전체 화면을 거의 지배한다. 그 앞에는 기이한 모양의 돌이 세워져 있다. 화면 아래에는 영지와 연꽃 봉오리로 보이는 정물을 첨가했다. 하지만 사실 이 첫 번째 폭의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있는 청자 향로다. 아래에 확대한 청자기린 향로를 보면, 기린 모양 뚜껑을 얹은 고려시기 그릇이다.
고려의 청자는 보통 신비한 빛깔과 상감기법으로 알려졌지만, 그 모양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져 사용된 고려시기에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유행이 바뀌어, 청자는 조선 말기가 되면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을 집어먹으려던 일본이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이었던 청자를 대량으로 발굴하여 진기한 물건으로 선물하거나 팔고 사는 골동품이 되게 만들었다.
이 그림에서 청자기린 향로는 뒤에 있는 괴석과 한 덩어리로 보여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그림의 맨 아래에는, 이 그림을 그린 해에 47살이라고 밝힌 도장을 찍었다. 같은 도장이 7번째 그림에도 있다.
두 번째 폭에는 몸통에 구멍이 뚫리고, 어깨에는 두 마리의 뿔난 사슴을 얹은 질그릇이 등장한다.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그릇으로, 독특한 모양으로 발굴 당시부터 눈길을 모았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폭에서 시대 순서가 바뀌기는 했어도, 고려와 가야 흑은 옛신라의 대표 문물을 내세웠다. 물론 고고발굴에 의해 당시 사람들의 눈앞에 비로소 제시되는 것이다.
세 번째 폭과 여섯 번째 그림에는 제목이 따로 적혀있다. 이 병풍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기획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시대 기명인지도 잘 모를 정도다. 네 번 째 폭은 구름 속을 날아가는 학이 상감된 청자 매병과 청동거울 그리고 손잡이 달린 굽높은 토기에 담긴 바나나를 그렸다. 한 화면에 토기와 고려의 대표 상징을 넣었다.
다섯 번째 그림에도 토기가 보인다. 이 병풍 보다 전전해에 잡지 <여시>에 게재한 그림 <아>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그릇이다. 가야 토기로 그 독특한 모양으로 인상에 남는 그릇이다. 여섯 번째 폭에 그려진 류의 그림은 장승업 이래 이도영의 앞뒤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흔히 그리던 방식의 그림이다. 이도영에게도 이런 그림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만 본 사람은 이도영이 그저 그런 별대수롭잖은 화가로 기억할 것이다.
별도로 제목을 적지 않았지만, 이 병풍의 나머지 그림들도 비슷한 성격이다. 다만 두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와 마지막 폭에는 각각 토기가 그려져 있고, 아홉 번째 그림의 토기 뒤에 갈색으로 그려진 참외모양을 한 커다란 병은 청자 빛깔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 시기의 상감청자로 고려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열 번째 폭에도 푸른빛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고려를 대표하는 청자 표주박 모양 병이 그려져 있어 이채로운 모습을 뽑낸다.
마지막 폭에는 매화 가지를 꽂은 길다란 원통형 청동기가 화면을 지배하듯 하다. 이 청동기와 꽃그림이 압도하여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아래 쪽에 뚜껑 덮인 토기 합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릇은 발이 셋인데, 토기에 발이 셋 있는 것은 우리 문화권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 앞에 석류와 불수감 등을 배치해 마무리했다. 그림에 적힌 글귀는, 그림을 그린 연도를 간지명과 제10회 서화협회 전람회 출품작임을 밝히고 있다. 그림의 첫 폭과 일곱 번째 폭의 아래 오른쪽에,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화가의 나이를 새긴 도장이 찍혀있어서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나려기완>을 보고 쓴 글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가이자 우리 옛문화, 특히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수필을 여럿 남기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글도 어지간히 남긴 이태준이 쓴 것이다. 그는 가난하여 일본 유학시절을 짧게 맛볼 수 없었지만, 이 기간을 길진섭 김용준과 함께 보내기도 하여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낯설지 않은 보기드문 문학가이기도 하다.
이도영 씨 <추동> 기타 (출품작) 3점 모두 병풍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만치 <나려기완>이 장내의 이채이며 재래식 기명절지에 비기어 또한 이채의 작품이다. 기명이 모두 조선 것을 참조하였음이 그렇고, 절지에 있어 현대 우리 일상생활의 것을 취하였음이 그렇다. 고아(高雅)한 작자의 개성적 반사를 느끼기에 족하였다. - 이태준, 제10회 서화협회전을 보고(4), 동아일보, 1930. 10, 26
이태준이 쓴 이 관람기는 5번에 걸쳐 실려있는데, 처음 연재분부터 그의 통찰력은 눈부신 바가 있다. 이른바 근대 시기 우리 전통 그림이 처한 상황을 이처럼 잘 정리한 글도 드물다고 여겨진다. 이 부분의 글도 정확하고도 탁월한 것이다. 수년 뒤에 이도영이 사망한 뒤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의 이도영 특별전에서 이도영의 그림을 본 시인이자 평론가 김기림도 남다른 평가를 남겼다. 미술에 밝기로 소문이 난 두 사람이기도 하지만,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만나서 문학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림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김기림의 글은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먼 훗날에 이태준과 김기림은 이른바 월북, 납북자로 금기시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오래 사라졌다가 돌아온,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문학은 물론, 귀하게 남긴 좋은 의견도 사라졌다가 이제 다시 돌아왔다. 이도영의 그림도 우리들에게 돌아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