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미국계신 매형이 귀국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귀국모임에는 사정에 의해 만날 수 없었지만,

지난 6일 어머니를 모신 일산 추모공원 하늘문에서 만난 것이다.

 

누님 조미희는 암에 걸려 8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누님 생전에,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모든 가산을 정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준비를 했으나,

출국장에서 제동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갔으나,

느닷없는 병마를 만나 오랜 세월 키워 온 행복의 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혼자 미국에 남게 된 매형은 지난 해 까지만 해도 직장에 나갔으나, 팔순을 맞은 올해부터 일손을 놓았단다.

 

누님께서 세상을 떠날 때와 3년 전 귀국 때 뵙고 처음인데, 건강은 여전하셨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도, 내가 더 늙어보였다.

매형과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를 추모공원에서 만나

납골당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며, 오랜만의 해후를 풀었다.

 

  인근에 있는 식당 강강수월래로 옮겨 회덮밥에 소주 한잔 했다.

5년 후에 살아 있다면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마지막인사가 될 것 같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빕니다.

 

사진, / 조문호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데, 지난 번 귀국 때 찍은 사진같다.

눈멂, Blinding Scenery

한상진/ HANSANGJIN / 韓相振 / mixed media

2023_1006 2023_1101 / 월요일 휴관

한상진 _ 검은 산 _ 종이에 수묵드로잉 _ 양구에서 _42×29.7cm_2023

 

초대일시 / 2023_1007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나무아트큐브

DOONAMOO ARTCUBE

경기도 안양시 예술공원로 131번길 49

@doonamoo_artcube/

www.youtube.com/@Doonamoo_Artcube

 

두나무아트큐브에서는 한상진 작가의 눈멂, Blinding Scenery을 기획하였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과 회화(painting) 그리고 버려진 사물을 채집하여 숨결을 불어 넣는 오브제(objet)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주로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낯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 담긴 삶의 모습들, 친근하면서도 낯선 언어들과의 만남, 접촉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의 되돌아 봄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그곳에는 이름 없는 풍경과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시간, 보잘것없는 사물들, 변화하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자연을 인위적인 환경으로 조성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사유에 있어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작가가 그려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작업 속에는 이러한 전통적 사유와 함께 우리가 성찰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한상진_적벽_종이에 수묵드로잉_금산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바람처럼_종이에 수묵드로잉_정독도서관에서_42×29.7cm_2023
한상진_묵상 Meditation_종이에 수묵드로잉_신도림 마로니에_42×29.7cm_2023
한상진_피어나다_종이에 수묵드로잉_반려식물, 옥상드로잉_42×29.7cm_2023

길 위에서, 멈춰서서,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순간을 작가는 '눈멂'이라고 말한다. 눈멂이란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중지'의 순간이 아닌가... 중지의 순간-이끌림, 의식과 의미가, 이성의 구조적 판단이 멈추는 응시의 순간, 수행자의 묵상처럼 찰나가 전해주는 울림을 그는 마음의 숨결, 몸의 감각을 통해 화면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2023년 전후, 풍경과 사물을 응시해온 수묵드로잉을 포함하여 페인팅 작업 그리고 채집된 오브제로 재구성된 가변설치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상진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2005년 전후 문명의 침실연작, 2008년 전후 FLASH GARDEN연작, 2011년 전후 응시와 명상연작, 2014년 전후 소요逍遙-흐르는 풍경, 무경계, NO BOUNDARY, 미명微明연작 등, 실험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20여 회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두나무아트큐브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5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6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7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8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20030909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3cm_2023

눈멂-Blinding Scenery 나는 이름 없는 풍경들이나 버려지고 오래되어 허름한 사물들에 이끌린다. 의미화되거나, 화석화되거나, 기호화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응시의 순간이 작동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여지는 것 이상의 바라봄이며 시선이 시선 속에 그 이상의 나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삶의 계기들은 거부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친밀하고도 낯선 모호함을 숨기고 있다. 문화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은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 기능하며 독자의 체계와 공명하겠지만, 이미지가 그 너머의 타자성을 품을 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밝은 방에서 제기한 개념 푼크툼(punctum, 푼크툼은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의미로, 이미지를 봤을 때 다가오는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말한다)처럼 숨겨진 틈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때로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분열의 시간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시간의 나눔과 선형적인 구분 사이에 있다. 동일성을 배제한 타자들의 목소리는 어두운 심연에 몸을 움츠리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 또 다른 소리의 형상이며 침묵 또한 온전하게 의미로 정립되는 것을 방해한다. 동행하던 내 안의 내가 길 건너 저편에서 손짓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겹침(overlapping)은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온전치 못한 불가능한 의미의 세계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풍경이 되어가는 순간들은 길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흐린 날의 기행, 목적 없이 떠나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은 변증법적으로 충족시켜가는 과정이 아니며, 다시는 고유성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실패하는 여행이다.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미 죽은 것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벗어남, 회의, 전락, 공포의 감정, 무의식... 존재는 언어적인 의미로 해석이 안 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유한성의 무한한 지속을 존재의 참을성(patience)이라고 한다. 의미는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어떤 것에 속하려고 하는 강박은 의미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연기는 나에게 종결되지 않는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는 의미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풍경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중지의 순간에도 흐르는 풍경은 고유한 자리가 없다. 죽음은 죽임으로 종결되지 않는 욕망이다. 흔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은 시간적인 차연으로 존재함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벌거벗은 풍경으로서, 재현 불가능한 풍경으로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1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2_양양-태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1003_양구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6×194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4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산수무진 山水無盡 -20230905_금산, 석천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2.8cm_2023
한상진_무경계. No BOUNDARY-사성암四聖庵_구례-지리산 가는길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
한상진_길 위에서, 20221008 경북-문경에서

기억할 수 없는 타자,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살아 숨 쉬는 죽음의 순간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가 육명심(陸明心) 선생은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이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겼듯이, 그런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진집 백민(白民)에 수록된 윤세영 선생의 글을 참조하자면 1970년대 말 시작된 백민(白民)연작은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고 있었던 기층민, 삼베나 모시옷을 입은 옛 삶의 원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템적인 분위기는 사진들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정면성에 나타나 있고 바라봄과 보여짐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 서로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관계의 형성은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육명심 선생의 작품집 백민은 시대의 풍경을 호명하는 것이고 오늘날 기층민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해준다. 나에게 존재란 그리고 그림이란 이름 없는 것들 속에서, 그 관계 속에서 삶-죽음을 호명하는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을 묵시해 왔다. 정치적인 형세,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적 풍경 속에서 자본의 흐름이 존재를 지배하는 방식은 우리의 삶을 서구의 그것보다도 더 비자연적으로 획일화시키고, 물질화된 환경 속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과 소비 속에서 남겨진 잉여, 의미로부터 버려진 사물과 풍경들은 일렁이는 시선의 동일성 속에서 나를 애착(affection)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 위에 떨어진 열매, 투박하게 마모된 조약돌, 빛바랜 플라스틱이나 유리 파편들, 녹슨 쇠붙이, 바닷가에 떠내려온 부유목, 수변 풍경, 적벽... 풍상이 담긴 나무들, 나타나고 사라지는 하늘의 구름, 하늘과 땅의 경계가 그려내는 모호한 풍경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거칠고, 아름답고, 숭고하고 강렬히 눈을 멀게 하고, 삶 속에서 헐벗은 파편으로 흐르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텅 빔을 나로 하여금 반복-공유하게 한다. 위와 같은 여정 속에서 작품으로 등장하는, 오브제(objet), 최소한의 재료나 물질의 옷을 입은 형과 상의 속삭임들, 미완의 흔적들은 손에 잡을 수 없는 형상들이 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무경계(no boundary)란 완결되지 않은, 종결될 수 없는 이미지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천천히, 목적 없이 걷는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과 사물들, 그러나 이러한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온다. 실패의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을 나서며 풍경을 소요(逍遙)하는 것은 아무런 구분도 가능하지 않은 어둠, 바깥으로 열리는 텅 빔을 환대하려는 태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상진

 

추석을 이틀 앞두고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에 계신 김덕순 여사를 뵈러 갔다.

명절과 기일만 되면 정동지 따라 소풍 가듯 들리던 용인 성당묘지도

이젠 몸이 편치 않아 정동지의 조카 심지윤씨 차에 편승해 갔다.

그러나 운전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남의 차에 실려 가는 것은 더 힘들었다.

운전할 때는 운전만 신경을 써서 졸리는 것은 물론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만,

뒷자리에 앉아가니 잠만 쏟아졌다. 졸다 깨기를 반복하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묘원에는 아직 성묘객이 많지 않아 한적했다.

운해가 자욱한 주변 풍경 속에 소나무 한 그루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한때 장모였던 김덕순 여사는 낙락장송처럼 지조가 곧고 너그러운 인품을 갖고 계셨기에,

마치 고인이 지켜 서서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묘원에는 정영신씨의 어머니 김덕순씨와 언니며 심지윤씨 어머니인 정정숙씨 유골함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를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날 24일 정오 무렵, 그랜드 하얏트 호텔 (2층 낙산홀)에서

박정숙씨 아들 최용석 군과 조정호, 김순화씨 딸 조은겸 양이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스러운 막내 조카 은겸이가 추석을 앞두고 시집을 간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너무 좋아 춤을 너울너울 추셨을 거다.

막내 손녀로 태어 나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많이 받아 그런지, 수많은 조카 중에 은겸이 처럼 인정 많고 착한 조카는 없다.

멀고도 먼 정선 만지산 할머니 묘소에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꽃을 사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전시회는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찾아온다.

 

지난달 인사동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에는

결혼할 최용석 군을 비롯하여 시어머니가 될 박정숙 여사도 모시고 왔었다.

결혼하기도 전에, 시어머니 될 분께서는 인정이 많다며 은겸이 칭찬을 한다.

 

지난 24일은 은겸이 시집가는 날이라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식장인 하얏트 호텔은 동자동에서 멀지 않지만,

정동지를 대동하려면 녹번동부터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맞추었으나, 호텔이라 낯설기 그지없었다.

어떤 연유로 호텔 식장을 잡았는지 모르지만 지나친 낭비였다.

돈 한 푼 내지 않으면서 탓할 처지는 아니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장에 들어가니, 반가운 이산가족이 다 모여 있었다.

결혼식 치루는 형님 댁 조카 조웅래, 조향, 조지향 가족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형님 딸 조봉숙도 와 있었다.

 

조영희 누님의 조카 박형준, 박홍전, 박유전 가족을 비롯하여

남동생 조창호의 딸 조아라와 여동생 조진옥과 김종성의 딸 김소원,

아들 조햇님을 비롯하여 귀여운 손녀 하랑이까지 와 있었다.

집안 대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가족 총 동원령이 발동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신랑 신부가 입장하여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은겸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혼식 주례도 따로 없이, 신부 아버지인 형님이 대신하여 서로 위해주며 잘 살라는 덕담을 했다.

축가에 이어 신랑 누님의 피아노 연주도 이어졌다.

 

예식이 끝난 후 기념사진을 찍는 중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먹기 바쁘게 다른 음식이 나왔다. 부담스럽지만 맛은 있었다.

결혼식장을 장식한 수많은 생화도 하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싸 주었다.

 

마침 고향의 형님 친구 네 분이 찾아와 반겼는데,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릴 때 본 형님들이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어찌 기억할 수 있겠는가?

저마다 손에 꽃을 든 할아버지 기념사진만 찍었다.

형님들께 죄송하지만, 내가 더 늙은 것 같다.

세월이 참 무정 타.

 

그런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접수대에 타고 온 차량번호를 적었는데, 치매 끼가 있어 번호를 잘 못 적은 것 같다.

주차장 출구 차단막이 올라가지 않고, 주차비가 45천원이나 나왔다.

차를 되돌리고 싶지만, 대기한 차들 때문에 돌릴 수도 없었다.

반세기 동안 운전한 중에 최고로 많이 낸 주차비가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없는 사람에게 보탠 것이 아니라 가진 놈 아가리에 털어 넣은 게 더 분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곱씹는다.

 

최서방, 그리고 은겸아!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단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진, / 조문호

 

 

 

 

지난 31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정선 만지산에 어머니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냈는데,

묘지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카의 만류도 만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없다는 가족들의 원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 유골을 일산 '하늘문 납골당에 모신 후, 제사마저 인천 형님 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인천 형님 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쪽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예배만 보아 발길을 끊은 것이다.

밥 한 그릇만 떠 놓아도 혼자 제사 지내는 게 속 편했다.

 

, 무신론자로 제사마저 부질없는 줄 알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로 어머니를 기리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융통성 없는 기독교 교리가 가족 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기일에는 어머니를 모셔 둔 하늘문납골당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누님 조영희를 비롯하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

그리고 정영신 동지를 비롯한 조카 박홍전, 조아라, 조은겸 등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들 사는 게 그렇게 바쁜지 집안에 길흉사가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모두 수도권에 살면서도 어찌 남보다 못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모처럼 집안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수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마저 퇴원을 앞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막네 조카 은겸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은겸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끔찍이도 끼고 돌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막내 여동생 진옥이가 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연히 매제 김종성씨가 집사람이 상을 받았다며, 휴대폰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수상작보다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일련의 그림 이미지에 더 놀란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자식을 키운 아낙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긴 세월동안 동생이 뭘 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기야! 나 역시 여태 사진집을 출판하거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한 번도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잠깐 문 닫았던 진주청국장 그만 두겠다는 조카 홍전의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옮겨가며 돈을 많이 벌었으나, 미련 없이 손을 털기로 했단다. 

누님은 자신이 만들어 온 독특한 경상도 음식 맛이 사라질까 아쉬워하지만,

조카 홍전의 쉽지 않은 결단에 존경심이 일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하려는 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벌면 벌수록 강해지는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무섭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지, 산다는 게 뭔 지 모르겠다.

고향도 가족도 잊은 채, 어찌 이리 비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진, / 조문호

 

 

 

최석태의 WHY YOU

일본 점령기에 신라와 고려의 그릇을 그려내

우리의 빛나는 고전문화를 드러내려 하다

 

병풍은 여러 장의 그림을 각기 바탕에 펴붙이고 접을 수도 있게 한 것이다. 보고 싶으면 세워서 열어본 뒤 접어서 보관하면 되므로 간단하고 편리하다. 병풍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 되기도 하지만, 각기이되 비슷한 성격의 주제나 소재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최소 2장부터 많게는 10장 이상을 이어붙인 것도 있다.

 

이도영, 나려기완, 전 12폭, 각 137. 3x32.3센티미터, 1930, 제10회 서화협회전 출품작, 경기도립박물관 소장.

이도영의 특별한 기명절지 그림 가운데에는, 12폭으로 이루어진 <나려기완>이 있다. 1930년에 그린 그림이다. 앞서 <고색찬연>이나 <아> 를 소개하면서도 말했지만, 이도영은 그림에 붙이는 이름도 남다르다.

 

이 병풍의 '나려'는, 신라의 '라'와 고려의 '려'를 연결한 말로, 대략 조선 왕조 이전의 고전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말 여초니, 여말 선초니 하는 말과 같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떠올리면 되겠다.

 

<나려기완>이라는 제목은, 신라의 토기와 고려의 청자 등을 통해 '우리의 빛나는 고전 문화를 보시라!'는 말을 하는 듯하다.

 

▲ 나려기완의 첫부분 6마디. 맨 오른쪽이 1폭으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본다.

병풍의 맨 오른쪽, 첫 번째 폭부터 보자. 다리가 높이 솟은 탁자 위에 소나무 분재가 그려져 있다. 가지를 넓게 벌려져 전체 화면을 거의 지배한다. 그 앞에는 기이한 모양의 돌이 세워져 있다. 화면 아래에는 영지와 연꽃 봉오리로 보이는 정물을 첨가했다. 하지만 사실 이 첫 번째 폭의 주인공은 그 사이에 있는 청자 향로다. 아래에 확대한 청자기린 향로를 보면, 기린 모양 뚜껑을 얹은 고려시기 그릇이다.

 

▲ 이도영, 나려기완, 전 12폭 중에서 제1폭, 청자 향로 부분)

고려의 청자는 보통 신비한 빛깔과 상감기법으로 알려졌지만, 그 모양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래서 그것이 만들어져 사용된 고려시기에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유행이 바뀌어, 청자는 조선 말기가 되면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을 집어먹으려던 일본이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이었던 청자를 대량으로 발굴하여 진기한 물건으로 선물하거나 팔고 사는 골동품이 되게 만들었다.

 

이 그림에서 청자기린 향로는 뒤에 있는 괴석과 한 덩어리로 보여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그림의 맨 아래에는, 이 그림을 그린 해에 47살이라고 밝힌 도장을 찍었다. 같은 도장이 7번째 그림에도 있다.

 

두 번째 폭에는 몸통에 구멍이 뚫리고, 어깨에는 두 마리의 뿔난 사슴을 얹은 질그릇이 등장한다.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그릇으로, 독특한 모양으로 발굴 당시부터 눈길을 모았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폭에서 시대 순서가 바뀌기는 했어도, 고려와 가야 흑은 옛신라의 대표 문물을 내세웠다. 물론 고고발굴에 의해 당시 사람들의 눈앞에 비로소 제시되는 것이다.

 

▲ 나려기완 두번째 폭에 등장하는 가야 혹은 옛신라의 특이한 토기, 고고발굴에 의한 것

세 번째 폭과 여섯 번째 그림에는 제목이 따로 적혀있다. 이 병풍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기획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시대 기명인지도 잘 모를 정도다. 네 번 째 폭은 구름 속을 날아가는 학이 상감된 청자 매병과 청동거울 그리고 손잡이 달린 굽높은 토기에 담긴 바나나를 그렸다. 한 화면에 토기와 고려의 대표 상징을 넣었다.

 

다섯 번째 그림에도 토기가 보인다. 이 병풍 보다 전전해에 잡지 <여시>에 게재한 그림 <아>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그릇이다. 가야 토기로 그 독특한 모양으로 인상에 남는 그릇이다. 여섯 번째 폭에 그려진 류의 그림은 장승업 이래 이도영의 앞뒤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흔히 그리던 방식의 그림이다. 이도영에게도 이런 그림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런 종류의 그림만 본 사람은 이도영이 그저 그런 별대수롭잖은 화가로 기억할 것이다.

 

이도영 나려기완 12폭 병풍의 뒷 마디 여섯폭, 종이에 채색, 각 32. 3X137. 3센티미터, 1930, 용인 경기도립박물관 소장

별도로 제목을 적지 않았지만, 이 병풍의 나머지 그림들도 비슷한 성격이다. 다만 두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아홉 번째와 마지막 폭에는 각각 토기가 그려져 있고, 아홉 번째 그림의 토기 뒤에 갈색으로 그려진 참외모양을 한 커다란 병은 청자 빛깔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 시기의 상감청자로 고려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열 번째 폭에도 푸른빛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고려를 대표하는 청자 표주박 모양 병이 그려져 있어 이채로운 모습을 뽑낸다.

 

마지막 폭에는 매화 가지를 꽂은 길다란 원통형 청동기가 화면을 지배하듯 하다. 이 청동기와 꽃그림이 압도하여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아래 쪽에 뚜껑 덮인 토기 합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릇은 발이 셋인데, 토기에 발이 셋 있는 것은 우리 문화권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 앞에 석류와 불수감 등을 배치해 마무리했다. 그림에 적힌 글귀는, 그림을 그린 연도를 간지명과 제10회 서화협회 전람회 출품작임을 밝히고 있다. 그림의 첫 폭과 일곱 번째 폭의 아래 오른쪽에,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화가의 나이를 새긴 도장이 찍혀있어서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 왼쪽은 제10회 서화협회 전람회에 출품작이라는 내용을 적은 나려기완의 마지막 폭.오른쪽 2폭은 그린해를 모르는 잡화병 전 10폭 중 제2폭과 5폭,

 

이 <나려기완>을 보고 쓴 글이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가이자 우리 옛문화, 특히 김정희의 글씨에 대한 수필을 여럿 남기기도 하고, 미술에 대한 글도 어지간히 남긴 이태준이 쓴 것이다. 그는 가난하여 일본 유학시절을 짧게 맛볼 수 없었지만, 이 기간을 길진섭 김용준과 함께 보내기도 하여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낯설지 않은 보기드문 문학가이기도 하다.

 

이도영 씨 <추동> 기타 (출품작) 3점 모두 병풍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만치 <나려기완>이 장내의 이채이며 재래식 기명절지에 비기어 또한 이채의 작품이다. 기명이 모두 조선 것을 참조하였음이 그렇고, 절지에 있어 현대 우리 일상생활의 것을 취하였음이 그렇다. 고아(高雅)한 작자의 개성적 반사를 느끼기에 족하였다. - 이태준, 제10회 서화협회전을 보고(4), 동아일보, 1930. 10, 26

이태준이 쓴 이 관람기는 5번에 걸쳐 실려있는데, 처음 연재분부터 그의 통찰력은 눈부신 바가 있다. 이른바 근대 시기 우리 전통 그림이 처한 상황을 이처럼 잘 정리한 글도 드물다고 여겨진다. 이 부분의 글도 정확하고도 탁월한 것이다. 수년 뒤에 이도영이 사망한 뒤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의 이도영 특별전에서 이도영의 그림을 본 시인이자 평론가 김기림도 남다른 평가를 남겼다. 미술에 밝기로 소문이 난 두 사람이기도 하지만,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만나서 문학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림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김기림의 글은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먼 훗날에 이태준과 김기림은 이른바 월북, 납북자로 금기시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오래 사라졌다가 돌아온, 어두운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문학은 물론, 귀하게 남긴 좋은 의견도 사라졌다가 이제 다시 돌아왔다. 이도영의 그림도 우리들에게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미술평론가 / 최석태]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며칠 전에는 정영신 동지의 세 자매가 어머니 계신 용인 성당묘지 간다기에 따라갔다.

갈 때마다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와 같이 갔는데,

이번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언니 정정자씨도 함께한 귀한 자리였다.

 

인천에 사는 정정자씨는 인천에 대궐 같은 집을 두고

딸이 사는 미국에서 감옥살이한 지도 오 년이 넘었다.

미국에는 병원비가 비싸 치료차 귀국하여 병원을 오간 지가 두어 달 되었는데,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인사라도 드린다며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다.

 

요즘은 멀리 떨어져 살면 가족도 남이나 마찬가지다.

인천 집에는 정정자씨 남편 김명구씨 혼자 살고 있는데,

오년 만에 내외가 만났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두 달이 넘도록 한집에 살며 밥 한 끼 같이 먹지 않았다는 걸 보니,

다들 돈이 너무 많아 탈인 것 같았다.

 

인천에서 만나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로 갔는데, 모처럼 세 자매가 모인 자리다.

성당 묘역 입구에 있는 꽃집에 잠시 내리기에, 다들 불러 세웠다.

세 자매의 마지막 기념사진이 될지도 모를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다.

명예와 돈은 남지 않지만, 사진은 남는다고 허풍을 떨어대며...

 

다들 시골에서 상경해 힘겹게 사느라,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한 번

돌아볼 겨를 없이 늙어 버린 것이다.

 

용인 성당 묘지를 돌고 돌아 정동지의 모친 고 김덕순여사와

둘째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진 묘역에 섰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으로 안부 전하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정영신씨는 이번에 만드는 장항성 장터여행 책 좀 팔리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언니 정정자씨의 간구에 배꼽을 잡았다.

애먹이는 영감 김명구 좀 빨리 데려가라고 부탁하더니,

동생 고 정정숙 유골에도 같은 부탁을 했다.

얼마나 미웠으면 그런 말을 할까? 늙으면 자식보다 내외가 더 좋은데...

 

뜨거운 햇살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는데, 마침 유골함 아래턱에

그늘이 생기면서 맞바람 까지 불어 엄청 시원했다.

모처럼 왔으니 빨리 가지 말라는 엄마의 배려라며 다들 입을 모았다.

세 자매가 나누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인천에서 잘한다는 사리원 냉면집을 찾아갔다.

모처럼 맛있는 함흥냉면에다 만두와 수육까지 나왔으나,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기사의 설움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밥 값낸 정정자씨 더러 고맙다는 인사 한다는 게,

정자씨 입술 라인이 죽이네요!“라며 알랑방귀 뀌었다.

 

사진, / 조문호

 

 

사월초파일부터 시작된 비가 이틀 동안 쉼 없이 추적추적 내렸다.

연휴를 맞아 녹번동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으나, 비 올때는 담배 피우기가 지랄 같다.

비 때문에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우산에 가리고 피워야하니, 쪽방 생각이 절로났다.

 

담배를 피우고 집에 들어가니, 정동지가 멋진 제안을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어제지만, 가까운 '흥국사'에 한 번 가보자”는 것이다.

 

흥국사는 녹번동에서 30분 내에 갈수 있는 절인데, 여태 한 번 밖에 못 간, 등잔 밑이 어두운 천년고찰이다.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절집 운치도 괜찮을 것 같아,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동부터 걸었다.

 

고양시 지축동, 한미산(노고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흥국사는 661년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아담하지만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 후기인 1707년에는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 묘가 있는 ‘소령원’에 다녀오는 길에

폭설에 갇혀 이 절에서 잠시 묵었는데, 그때 절 이름을 ‘흥성암’에서 지금의 '흥국사'로 바꾸었다.

'흥국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으며, 친필로 약사전 편액 글씨까지 내려주었다고 한다.

 

글의‘짜임새가 단정하고 중후한 멋을 풍기는 ’약사전’ 편액은 초파일 연등에 가려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흥국사'에서 ‘만일염불회’를 만들어 염불 불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주문을 지나면 불이문이요. 불이문으로 들어서서 뒤돌아보면, 해탈문으로 변한다.

경내에는 약사전과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미타전 등 여러 전각이 있으나,

약발 세다는 약사전 여래좌상께 기도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주변 사람을 잃은 자책이었다.

한 때는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 잘 못을 알고도 모른 체 했으나,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잘 못된 일을 공개적으로 지적함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찮았다.

주변부터 바꿔 보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짓이었다.

평생 사람이 좋아 사람 사진을 찍어 왔는데, 가족과 친구는 물론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심지어 쪽방 주민들마저 등 돌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기야! 자기 잘 못을 까발리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 올린 각종 리뷰도 말썽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인적 감상문에 불과하지만, 다들 비판은 듣기 싫어했다.

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앵무새 보다 말 못하는 벙어리가 나을 것 같아, 일체의 비판 글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일을 돌아보며, 한 분 한 분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기로 했다.

무슨 원한 맺힌 일은 아니니, 양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북한산 전망대 의자에 앉아 흥국사 지붕 위로 보이는 북한산 능선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는데,

나를 비웃 듯, 산봉우리마저 구름에 숨어버리네.

 

사진, 글 / 조문호

 

 

[출처] 작성자 인사동 이야기 202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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