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이 다가오면 노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작가들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 전람회를 개최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14주기(23일)를 맞는 올해 ‘사람 사는 세상’ 추모전은 지난 19일부터 오는 24일까지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참여작가는 전시를 주도한 수묵화가 유준을 비롯하여 고경일, 김광성, 김운성, 김종도, 김주표, 김태용,

레오다브, 아트만두, 양 영, 이구영, 유현병, 이선복, 이윤정, 이은희, 이 하, 임진순, 정찬민, 주홍수씨 등

열아홉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지난 20일 오후 4시에 열리는 개막식은 마음이 급해 차를 끌고 나오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녹번동에서 정영신씨를 태워 30분 전에 출발했으나, 차가 밀려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전시장에는 가수 문진오씨가 '껍데기는 가라'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유준 화백을 비롯하여 전활철, 방기식, 박미루,

임동은, 이한복, 김주표, 남기은 씨 등 성함이 잘 생각나지 않는 분도 여럿 보였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유준의 ‘동행’이나 아트만두의 ‘노무현과 친구들’ 등 눈길 끄는 작품들이 더러 있었는데,

다들 노무현 대통령을 대하는 것처럼 반갑고 그립게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란 글에 마음이 끌렸다.

글이 담긴 주홍수씨의 ‘마음속의 슈퍼맨 노무현’과 김주표씨의 전각에 유독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암울한 시국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족발집에서 열린 뒤풀이에 갔다가 전시장에서 뵙지 못한 주홍수씨를 만났다.

그 좋은 안주에 차 때문에 술 한잔 마실 수 없으니,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었다.

 

정치가 개판이라, 노무현 대통령이 더욱 그립습니다.

다 함께 응원합시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3작성]

 

며칠 전 예술인스마트협동조합서인형이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시를 철수하고 가까운 녹번동 응일식당’으로 화가 칡뫼 김구, 장경호씨가 왔으니, 오라는 것이다.

 

마침 동자동으로 가려고 나서던 중이라 식당부터 먼저 들렸는데.

칡뫼 김구, 장경호씨도 직원들과 함께 작품을 철수했다고 한다.

전시 마무리를 도운 두 분에게 저녁 식사 대접하는 자리에 끼어 앉은 것이다.

 

서인형씨는 씨앗페기금마련전에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잘 마무리했다고 한다.

작품을 구매하거나 계좌로 후원해주신 분들도 고맙지만,

공연을 진행해주신 뮤지션을 비롯한 참여한 모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나 역시 '씨앗페' 전시를 치루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더구나 이번 전시에 사진가도 아홉 명이나 들어가 전시 공간만 차지할 것 같았는데,

20여 점의 판매작 중 사진이 네 점이나 팔려 천만다행이었다.

두 점은 모르는 분이 샀지만, 나머지 두 점은 사진가가 사주어 더 고마웠다.

 

사진을 구입해 주신 황규태 선생은 몸이 불편해 전시장에 나올 수도 없었으나,

씨앗페” 전시 포스팅을 보시고 사진 두 점과 그림 한 점을 사겠다고 연락해 온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일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하셨다.

기금 마련전 덕에 모처럼 통화를 했는데, 마무리하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말씀하셨다. 

 

정영신사진

그래서 이튿날 선생이 계신 평창동으로 정동지와 찾아간 것이다.

약속한 식당에 먼저 나와 계셨는데, 요즘은 허리 협착증으로 외출도 할 수 없다며,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도 못 가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데, 픽셀 작업하느라 너무 오래 앉아 생긴 병 같았다.

하루속히 완쾌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활동하시길 바란다.

 

팔린 사진 / 정영신 / 전남, 강진 / 75x47.8cm / 1988

선생께서 작품을 구입해 주어 씨앗페기금 마련에도 보탬이 되었지만,

작가에게도 절반이 돌아가니 어려운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태 사진가가 사진가의 작품을 사준 일이 흔치 않은 일이라, 그 고마움을 깊이 새겼다.

 

팔린 사진 / 라인석 / 휘어진 세계로 부터 캠밸수프머시룸1 / 50X40cm / 2021

 

씨앗페에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4일 오후5시 무렵, 예술인상호부조대출 기금 마련을 위한 씨앗페오프닝 행사가

효자동 인디프레스에서 열렸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서 주관하는 씨드머니 조성을 위한 아티스트 페스티벌 씨앗페

예술인들이 겪는 고리대금 현실에 맞서 낮은 금리로 생활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기금 마련전이다.

가난한 예술가를 돕기 위한 씨앗페에 작은 힘이나마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이 요구된다.

 

가난한 늙은이가 도울 방법은 전시에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많은 분이 함께 하도록 나팔이라도 열심히 불어야겠다.

 

오프닝 행사가 있던 지난 24일, 기대 반 걱정 반 서둘러 전시장을 찾아 나섰는데,

전시장 입구에는 장경호화백과 김이하시인 등 반가운 모습이 여럿 보였다.

 

행사를 이끄는 서인형 이사장을 비롯하여 황경하 사무국장과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한쪽에선 퍼포머인 이익태, 배경애, 김희성씨를 비롯한 스탭들이  오프닝 퍼포먼스 피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수호, 강욱천, 안원규, 김태호, 김 구, 최석태, 김수길씨 등 반가운 분이 속속 모여 들었다.

 

 전시장에는 50명 작가가 출품한 70여점이 일 이층에 빼곡이 전시되어 예술의 정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신학철화백을 비롯하여 이인철, 김정헌, 주재환, 홍선웅, 손기환, 류연복, 김재홍, 이태호, 김 억,

김영진, 김진하, 김준권, 박흥순, 윤여걸, 이홍원, 최병수씨 등 기라성 같은 민중미술가 작품들이 즐비했고,

심지어 장경호화백의 88년도 작품 절벽까지 나와 눈길을 끌었다.

 

서인형이사장의 인사로 시작된 개막식에는 풀빵이수호 이사장과 민예총 강욱천 사무총장,

북서울신용협동조합 이사장등 여러 명의 격려사도 이어졌다.

 

서울민예총’ 손병휘 이사장의 노래 공연에 이은 퍼포먼스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절박한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는데, 얼마나 긴장의 연속인지 카메라 셔터마저 누를 수 없었다.

 

개막식에 이어 야외에서 펼쳐진 오프닝 퍼포먼스 피멍에는 이익태 작가와

배경애, 김희성씨가 나섰는데, 돈에 상처받은 군상들의 아픔을 먹물로 풀어냈다.

 

무용, 국악,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40여개 팀이 참여하는 씨앗페 공연은 28일까지 매일 열리고,

전시는 4월2일까지 이어진다. 공연 일정을 참조하여 많은 분들의 전람회장 방문을 부탁드린다.

 

'청하식당'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출품작가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김이하, 최석태, 정영신,

안원규, 김 구, 김정대, 김수길, 서인형, 황경하, 이명신씨등 많은 분이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서서 십시일반 술값을 걷기도 했는데, 본인 스스로 20만원을 내놓았다.

이처럼 씨앗페가 꽃 피우려면 작품 구입에 앞서 작은 돈이라도 기금에 보태야 한다.

 

예술인 상호부조대출상품 조성을 위한 '씨앗페'에 많은 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씨앗패 후원 계좌 : 기업은행 / 301-101031-04-024 / 한국스마트협동조합/ 02-764-3114)

 

 

사진, / 조문호

 

 

서울역사박물관, 총서 발간

덕수궁 정비 공사 풍경부터 ‘105인 사건’ 등 근대사 사료

서울역사박물관이 26일 발간한 학술총서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에 담겨 있는 1890년 이전 중구 정동 일대(왼쪽 사진)와 1923년 이전 광화문과 월대(오른쪽 위), 1912년 105인 사건공판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가운데), 1928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 교수진과 간호사들 모습(오른쪽 아래).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890년대 전후는 대한제국 수립과 맞물려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도시를 개조하면서 서울의 모습이 급변하던 시기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변화의 목격자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6일 발간한 학술총서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에는 조선 개항 후 가장 오래 거주한 외국인 집단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일상과 역사의 현장이 담겨 있다. 박물관 측이 확보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마펫 한국 컬렉션’ 4460건 가운데 163건을 추린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초기, 한국 선교를 위해 서울에 왔던 사무엘 A 마펫 선교사와 가족·동료들이 수집한 자료다.

 

사진 가운데는 선교사들이 초기에 정착한 현재 중구 정동 지역 풍경이 많다. 러시아공사관 전망탑에서 바라본 1892년 서울 전경은 정동~광화문~종로대로~동대문 일대를 파노라마로 조망한다. 원수부(元帥府)가 보이는 경운궁(덕수궁) 풍경이나 경운궁 남쪽(인화문 방향) 담장 공사 모습 등은 1896년 아관파천 후 고종이 궁궐을 정비하고 개혁을 도모하려는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종로 거리에는 도로 폭 개정 명령(내부령)에 따라 철거될 임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의 소공동 지역인 남별궁 일대 1894년 전후 모습이나 조선호텔에서 본 황궁우(원구단 부속 건물)는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1897년 건립된 원구단이 일제강점기 호텔 신축으로 다시 헐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성벽 철거 전 흥인지문, 궁장 훼철 전 경복궁 동십자각, 월대가 보이는 광화문 사진 등에서는 도시 개조 사업 전 서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궁궐 앞에는 가마가 서 있고, 인력거가 지금의 홍은동 옥천암의 보도각 백불(마애보살좌상)로 향하는 일상 사진도 남아 있다. 한강 부근 용산에서 운행 중인 인차(人車) 철도, 청국 상인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한국 근대사를 담은 사료도 주목된다.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로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해 기독교계 반일 세력을 제거하려던 1912년 공판 사진이다. 당시 3개월 동안 지속된 1심 과정에서 용수를 쓰고 결박돼 끌려가는 사람들이 사진에 찍혔다. 배후세력으로 지목돼 감시당했던 선교사들이 종로 경성지방법원 공판 참관을 위해 모여 뉴욕 헤럴드 특파원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선교사들이나 선교사 2세들의 사진도 소개됐다. 가부장 사회였던 조선에서 여성 대상 활동은 선교의 매우 중요한 목표였다. 제중원 간호사 안나 제이콥슨,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주축이었던 에스더 쉴즈 등의 의료·간호 선교사들과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메리 헤이든, 수잔 도티, 캐서린 웜볼드 등 교육 선교사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신마리아, 김마리아, 김필례 등 근대 한국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선교사들에게 서울은 믿음을 전하는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며 “당시 그들이 바라보았던 풍경과 삶을 통해 도시 서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느낄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엔 ‘뽀뽀’…어느 무연고자의 죽음

이중섭, 황소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통과. 가도 좋소."

1953년. 이중섭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입국심사 직원에게 가짜 선원증을 돌려받았다. "고맙습니다." 다행이다…. 중섭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짐가방을 꾸역꾸역 들었다. "아, 그런데 잠깐." 직원이 중섭을 다시 불렀다. 위조가 걸린 건가? 이대로 도망쳐야 할까? 중섭은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선원 양반, 혹시 괴혈병 아니야? 안색이 안 좋으니 병원부터 가보쇼. 아무리 일주일짜리 체류라고 해도…." 중섭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섭은 땀에 푹 젖은 채 바깥 공기를 맞았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코를 시큰하게 했다. 일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목숨보다 귀한 두 아들이 있는 히로시마였다.

"아고(あご)리!" "아빠!"

중섭이 여관방 문을 두드렸다. 아내 마사코와 아들 태현, 태성이 달려왔다. 중섭의 세상에 이제야 색채가 깃들었다. 꿈에서나 보던 이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그래, 건강은 어떻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소?" 중섭은 훌쩍대며 마사코의 두 볼을 감쌌다. "아고리, 당신은요.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마사코도 울먹였다. "어쩌다 살이 이렇게 빠졌어요. 나보다 더 아파 보여요." 마사코는 중섭의 얇은 뱃가죽을 안았다. "나는 괜찮소.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오." 중섭은 눈물을 쓱 닦고 활짝 웃었다. "너희들, 엄마 말은 잘 듣고 있었어?" 중섭이 묻자 아이들은 질세라 네, 라고 대답했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게요!" "저랑 자전거 구경하러 가요!" 중섭은 그런 아이들을 힘껏 껴안았다. 사랑한다, 정말 너무너무 사랑한다…. 중섭은 이 말만 계속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꿈 같은 일주일이었다.

중섭은 마사코와 종종 걸었다. 손을 잡고 강줄기를 산책했다. 함께 해와 달을 바라봤다. 꽃과 나무를 구경하고, 강과 바다를 감상했다. 두 아들과도 실컷 놀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술래잡기를 했다. 군것질거리도 잔뜩 먹었다. 중섭은 습관처럼 시계를 봤다. 이대로 초침이 고장 나길 바랐다. 온 세상이 멈췄으면 했다. 시간은 야속했다. 벌써 마지막 날 밤이었다. 중섭과 마사코, 마사코의 어머니(장모)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다. "그냥…. 그냥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을까 보오." 중섭은 고민을 털어놨다. "다시 갈 자신이 없소." 마사코도 중섭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젖은 두 눈만 깜빡였다.

"자네, 그건 안 될 일일세."

중섭의 무모한 결정을 막은 건 장모였다. "자네는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여기에 남으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야." 중섭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러니까 위대한 화가가 되고 나면, 그때 내 딸과 손자를 호강시켜주게. 모두 내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지금은 견딜 때야. 조금만 더 버텨주게." 불법체류자의 삶은 곧 도망자의 삶이었다. 중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중섭 가족은 눈물의 생이별을 했다. "아빠가 곧 돌아올게. 그때는 꼭 자전거를 사줄게." 중섭은 너무 울어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들과 약속했다. 배에 탄 중섭은 점점 멀어지는 가족을 봤다. 이들이 점보다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봤다. 마사코와 아이들은 끝없이 팔을 흔들었다. 중섭은 이후 죽을 때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아고리·아스파라거스의 첫 만남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오늘은 뭘 그려요?"

"네?" 1939년, 일본 문화학원(文化學院).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중섭의 등을 콕 누르며 물었다. 중섭이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을 때였다. "저는 야마모토 마사코예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중섭은 붓을 탈탈 털며 말했다. "제 이름은 이중섭입니다." "그런데요. 별명이 진짜 아고리에요?" 중섭은 눈을 동그랗게 뜬 마사코를 쳐다봤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제 턱(あご·아고)이 길어서요." 중섭은 자기 턱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마사코도 따라서 웃었다. 중섭은 마사코의 깔끔한 앞머리를 봤다. 곧게 뻗은 등, 장난스러운 미소에서 보이는 흰 앞니도 봤다. "같은 미술부라고요? 정말 몰랐네요." "아고리 상은 늘 친구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사실은요. 전 지금 굉장히 용기 내고 있는 거에요." 중섭은 마사코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 귀가 차츰 빨개지고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혹시 시간 되면…." 이번에는 중섭이 용기를 냈다. 중섭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 시절 중섭은 문화학원 내 인기 스타였다.

중섭은 훤칠했다.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그림도 잘 그렸고, 운동도 잘했다. 중섭은 귀공자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로도 중섭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1916년, 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 또한 100칸 넘는 집이 있는 재력가였다. 1930년, 열네 살의 중섭은 명문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때마침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대학을 수석 졸업한 임용련이 부임했는데, 중섭은 그의 스케치 수업에 빠져 미술에 진지하게 입문했다. 중섭은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며 재능을 보였다. 임용련은 중섭을 놓고 "미래에 거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섭 집안은 이 반짝이는 막내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안기기로 한다. 1936년, 중섭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중섭은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에 자리 잡았다. 부족함 없이 입고, 아쉬움 없이 먹고 배워왔던 덕에 금세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어느 햇살 좋은 날에 마사코와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이다. 조심스러운 중섭이 끝내 고백을 못하자 그의 친구가 두 사람만 초대한 뒤 "빨리 할 말 해!"라며 휙 떠났다는 말도 있다.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이중섭이 상처난 마사코의 발가락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아고리는 오늘도 를 그려요?"

"나는 우직한 소가 우리 민족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쭉 그릴 거예요." 중섭과 마사코는 나란히 누워 작업실 천장을 바라봤다. 중섭은 마사코의 앞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사코는 그런 중섭 쪽으로 몸을 돌려 더 바짝 붙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을 말할 사이까지 발전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단정함을 좋아했다. 마사코는 중섭의 진중함을 귀여워했다. 마사코 또한 아버지가 대기업 고위임원진에 속하는 등 집안이 좋았다. 이런 점도 서로에게 묘한 공감대를 줬을지도 모른다. 중섭은 마사코를 '아스파라거스'라고 불렀다. 둘은 바쁜 일정 탓에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으로 종종 끼니를 해결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발가락이 하얗고 긴 아스파라거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중섭을 늘 아고리라고 부른 마사코도 자신만의 애칭이 생긴 게 싫지 않았다

 

이중섭, 망월

2년 선배였던 중섭이 먼저 졸업했다.

중섭은 자주 볼 수 없게 된 마사코에게 1년에도 80통 넘게 엽서를 썼다. 사랑 편지이자 청혼 편지였다. 중섭은 그사이 화가 입지도 더 굳혔다. 중섭은 일본자유미술가협회 주최의 태양상을 받았다. 일본인도 타기 힘들다는 상이었다. 그가 낸 작품은 '망월'이다. 그림은 슬프다. 처절하다. 일제강점기에 있는 조국의 슬픔, 그런데도 희망을 기원하는 초월적 의지가 느껴진다.

세기의 결혼…‘꽃길’ 펼쳐지길 바랐지만

 

이중섭,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1943년 8월, 중섭은 다시 고향으로 왔다.

잠깐 전시 준비를 위해 들렀다가 일본으로 출국길이 막혔다는 말이 있다.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 전쟁이 절정이었는데, 징용을 피해 귀국했다는 말도 있다. 중섭은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그림을 그렸다. 소, 물고기, 달과 새, 연꽃 등 향토적 소재를 화폭에 담았다. 워낙 뚫어지게 관찰한 탓에 소도둑으로 몰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중섭은 저 멀리 있는 마사코에게 계속 사랑의 편지를 썼다. 마사코도 변함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중섭과 마사코는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결혼해버리기로 했다. 외려 떨어져 있었기에, 둘은 서로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1945년, 오직 중섭을 보기 위해 마사코는 목숨을 걸었다.

광복 직전 시기에 겨우 배를 얻어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해 5월, 둘은 원산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전쟁이 한창일 때 본토의 일본 여성이 사랑을 찾아 식민지 조선에 온 일, 그 땅에서 식민지의 전통 의상인 한복 차림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일 모두 이례적이었다. 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은 둘과 안면 없는 사람까지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란 뜻이었다. 마사코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 결혼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훗날 마사코는 "부모님은 '화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란 걱정만 했을 뿐, 중섭을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딸 바보'였다. 나를 믿어줬다.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만 했다"라는 말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이중섭, 부부 [국립현대미술관]

중섭과 마사코는 앞으로 꽃길이 펼쳐지길 바랐다.

부유한 두 집안의 결합이었으니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먼 훗날 둘의 삶 끝 지점에서 돌아보면, 이들 앞에는 긁히고 찢기는 가시밭길뿐이었다. 중섭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앞으로 약 7년에 불과하다. 중섭과 마사코가 결혼하고 3개월 뒤인 8월15일, 한반도는 광복했다. 기쁨도 잠시, 국토 한가운데 삼팔선이 그어졌다. 중섭이 있던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에 속했다. 자본가였던 중섭 집안은 곧장 반동으로 내몰렸다. 사업가 기질을 가진 형 중석은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다. 중섭은 강제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다. 감성적 표현을 중시한 중섭에게 공산당 특유의 직선적 화풍은 물과 기름이었다. "정말 맥없다…." 중섭은 공산당 회의를 다녀오면 마사코에게 늘 이렇게 호소했다.

 

이중섭, 가족과 비둘기

이런 불행마저 모두 집어삼킬 만한 더 큰 불행도 찾아왔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 1년 뒤 낳은 첫아들을 거의 바로 잃었다. 디프테리아였다. 중섭은 낙담했다. 이쯤부터 중섭은 소와 함께 '아이들'을 정성껏 그렸다. 예술 활동이자, 먼저 떠난 아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듬해, 그리고 2년 뒤 각각 태현, 태성을 낳아 두 형제를 품는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빨리 간 첫 아기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게 된다. "혼자서는 외로울 거다. 아빠, 엄마가 가기 전에는 '이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며 놀거라…." 중섭은 관속에 누운 첫째 아들 위에 그림 몇 장을 올려뒀다. 그가 아이들을 그린 초기작 중 제일 잘 그린 그림들이었다. 배를 깐 채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 천도복숭아를 양껏 따먹는 아이들 등이 담긴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6·25 발발에…가난에 허덕이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잣집 출신이라 요주의 인물로 취급받던 중섭은 중공군(中共軍)이 온다는 소식에 짐을 쌌다. 피란이 시급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 빨리 가야 해요! 여길 안 떠나면 정말 죽어요!" 중섭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네 형, 중석이가 아직 안 왔다." 어머니는 슬픈 눈으로 중섭을 쳐다봤다. "네 형이 돌아왔는데 다 없으면 얼마나 놀라겠어. 내가 여길 지키마…." 중석은 이미 완장꾼들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였다. 이 사실을 아는 중섭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중섭은 자기 그림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안겼다. 그렇게 막내아들이 곧 돌아올 테니 그림을 잘 부탁한다며 안심시켰다. 행여나 못 돌아오더라도, 나라가 잠잠해진 뒤 팔면 종잣돈은 될 것이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중섭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보지 못한다. 그는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UN군 수송선을 탔다.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이중섭, 밤과 까마귀

중섭은 막막했다.

이곳은 낯선 땅이었다. 늘 차고 넘친 돈이 없다. 몸을 기댈 친척도, 지인도 없다. 일단 밥벌이를 해야 했다. 생이 그림보다 먼저였다. 그날 밤 가족이 모여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이 시급했다. 도련님이 막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중섭은 종종 부둣가에 나갔으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가끔은 푼돈을 받고도 "얼마 전 폐를 끼친 아무개에게 고마움을 표한다고…"라며 텅 빈 주머니로 돌아왔다. 마사코는 속이 터졌다. 하지만 이 가엽고도 순진한 남편을 무턱대고 탓할 수 없었다.

마사코가 직접 팔을 걷었다.

광장에서 재봉질을 했다. 받은 푼돈으로 아이들 밥을 해 먹였다. 훗날, 중섭과 가까웠던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당시 마사코를 회상하며 "(그 시절)중섭은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분노노하기도 했다. 그만큼 마사코는 처절하게 바느질을 했다. 중섭의 가족이 몸을 둔 집은 비좁았다. 공기는 탁했고, 바닥은 차가웠다. 이들은 온갖 옷과 천을 다 껴입고 잤다. 그런데도 추워 신음했다. 중섭은 고향의 더운 방에서 온 가족이 홀딱 벗고 자던 그때를 떠올렸다. 어쩌면 마사코도, 어쩌면 두 아들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배고프고 비루했지만…행복했던 1년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서귀포로 가보셔. 서귀포 칠십 리에 물새가 운다는 노래도 있지 않소."

온 세상 피란민이 다 몰려드는 부산을 뒤로하고 제주도로 온 중섭 가족은 한 노인의 권유를 듣고 서귀포로 갔다. 그냥 몇 날 며칠을 걸었다. 도착했을 때는 거의 거지꼴이었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마을 반장인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이들을 딱하게 여겨 본인들의 집 곁방을 내어줬다. 1.4평짜리 방이었다. 중섭은 이들이 고마웠다. 중섭 가족은 1951년 봄부터 겨울까지 근 1년간 이 방에서 옹기종기 지낸다. 배고프고, 비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훗날 중섭은 이 시기가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때였다고 추억한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허나 아름답도다"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이중섭, 그리운 제주도 풍경

서귀포에 새롭게 둥지를 튼 중섭 가족은 한라산에서 뜯어온 부추를 씹어먹었다.

그것마저 떨어질 때는 바다로 갔다. 게를 잡았다. 아장대는 녀석들을 굽거나 찌면 한 끼 식사였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게를 잡고, 건지고, 쫓아갔다. 자빠지면 그대로 까르르 웃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순간만큼은 눈물겹게 행복했다. 중섭은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가까운 미래에 '그리운 제주도 풍경'을 그리게 된다. 삶이 휘청일 때마다 꺼내먹고, 또 꺼내먹은 추억을 화폭에 담았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게와 씨름하듯 놀고 있다. 이를 보는 중섭과 마사코는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하다. 중섭은 아이만큼 게도 정성껏 그렸다. 중섭은 종종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며 이들에게 미안함을 말하곤 했다. 서귀포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중섭은 가끔 마을 언덕에 올라 섶섬을 봤다. 섶섬은 포화에서 벗어나 거짓말처럼 평화롭게 두둥실 떠 있었다. 초연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미술관]

중섭은 밝은 미래를 꿈꿨다.

소일거리도 하나둘 들어왔다. 이제 전쟁만 사라지면 바랄 게 없었다. 이쯤 뭍에서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중섭은 부푼 꿈을 안았다. 마사코, 아들들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갔다. 중섭은 땅을 밟자마자 절망했다. 소문은 가짜였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였다. 나라는 여전히 불안했다. 도시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중섭 가족을 맞이한 건 한파와 빈곤뿐이었다. "여보, 괜찮소?" 중섭은 그쯤부터 마사코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마사코는 자꾸 기침을 했다. 입에 댄 손수건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아고리. 여긴 너무 추워요." 마사코는 폐결핵에 걸렸다. 요 며칠 풀죽만 먹인 아이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눈에 띄게 야위었다. 계속되는 피란, 끈질기게 따라붙는 가난이 모두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씌우는 중이었다. 1952년,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갔다. 요양을 위해서였다. 그쯤 장인도 사망했기에, 더더욱 가야했다. 그래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마사코에게 대고 중섭이 설득했다는 말이 있다.

세상은 끝내, 만만치 않았다

 

이중섭,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일부 [국립현대미술관]

단잠 같은 일주일을 보낸 뒤 돌아가는 중섭은 가족이 점이 돼 사라진 후에야 꺽꺽 울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억지를 쓰더라도 남아있을 것을 수백번 후회했다. 친구들도 "왜 바보같이 돌아왔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이제 중섭의 희망은 하나였다. 빨리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고, 돈을 잔뜩 벌어 가족과 다시 같이 사는 것이었다. 한국 땅을 밟은 중섭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았다. 막일을 하면서도 잡지에 실을 삽화 등 그림은 꼭 그렸다. 중섭은 소와 게, 가족 등을 소재로 삼았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 더욱 힘을 내 더욱 건강하게 지내주오. (…)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빠는 온종일 태현이와 태성이,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곧 만날 생각을 하니, 아빠는 너무 즐거워요." 그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편지도 많이 썼다. 내용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중섭은 글과 함께 그림도 곁들였다. 두 아들이 그림을 놓고 싸울까 봐 같은 그림을 두 장씩 그려줬다. 편지지 가장자리 사방팔방에 '뽀뽀'라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이중섭, 흰소
이중섭, 흰소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지인 도움으로 1954년까지 통영에 머문 중섭은 필생의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중섭은 '소' 연작과 '부부' 연작, '길 떠나는 가족' 등 그림을 내놓았다. 모두 한국 미술사의 대표작이 될 작품들이었다. 화구를 살 돈도 없던 중섭은 양담배 은박지를 모았다. 길거리를 나뒹구는 이 은박지를 모아 못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은지화(銀紙畵)다. 중섭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마사코와 아이들을 보며 그리움을 삼켰다. 하지만 중섭에게 세상은 끝까지 가혹했다. 중섭은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치렀다. 마지막 혼을 갈아 넣은 행사였다. 미술계의 평은 좋았다. 작품성이 넘실거린다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많은 이가 그의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곤 값을 보내지 않았다. 난리를 틈타 그림을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전시는 상처뿐인 영광만을 안겨줬다. 뒤이어 대구에서 연 전시는 반응마저 싸늘했다. 그의 은지화에는 싸구려 춘화(春)라는 딱지도 붙었다.

 

이중섭, 싸우는 소, 1954
이중섭, 싸우는 소, 1955

그 사이 마사코도 중섭을 위해 노력했다.

마사코는 중섭 모르게 사업을 벌였다. 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에게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사주고, 이를 팔아 이윤이 나면 일부를 받는 일이었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너무 단순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기였다. 그 후배는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횡령한 뒤 꿀꺽 삼켰다. 마사코는 거액의 빚을 졌다. 앞으로 20년 이상 삯바느질을 해야 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중섭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섭도, 마사코도 빈털터리였다. 희망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중섭의 1954년 작품 '싸우는 소'를 보면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맞서려는 투지의 소가 보인다. 1년 뒤 중섭이 다시 그린 '싸우는 소'는 힘없이 고꾸라지고 있는 소 뿐이다.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끝이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중섭은 무너졌다. "작업에 몰두하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라오"라던 편지를 쓰던 중섭은 모든 것을 내려놨다. 이젠 아내가 보낸 봉투를 뜯지도 않았다. 중섭은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한 남성이 남루한 집 창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에 광주리를 진 한 여성이 있다. 서 있는지, 다가오고 있는지, 멀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종이에 찍힌 얼룩은 눈물 자국 같다. 중섭이 그 시절 상영하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 포스터를 보고 제목에 영감을 받아 그린 절필 작이다. 제목은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지었다.

 

이중섭, 부부(은지화)

중섭은 조금씩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꿈에선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일본에 가 있는 마사코가 번갈아 나타났다. 중섭은 자신에 대해 실패한 가장이라고 했다. 자기가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며 가슴을 퍽퍽 쳤다. 중섭은 밥을 아예 끊었다. 거식증에 걸린 그는 물만 마셔도 토할 만큼 몸이 상했다. 중섭은 청량리정신병원 무료 입원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간염 진단을 받은 그는 곧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섭은 1956년 9월6일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중섭의 시신 곁에는 병원비 독촉장이 다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마사코, 정말 외롭구려.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안간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있소." 죽기 얼마 전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한 장이 유언이 됐다. 마사코는 중섭이 죽은 후 평생 수절(守節)하다 지난해 8월13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중섭
2012년 11월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서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연합]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흙-불 다뤄 물질 상상력 속 조형 시각화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초대전이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봉림씨는 '영원한 운동’ 작가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쓸 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예술이고 도예"라고 말했다.

도예는 늘 실용성과 관계지워져 왔기에 현대 도예는 ‘용도’를 벗어나 예술을 추구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작가는 1979년 공간예술대상전에서 현대 도예로 대상을 수상함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작품은 두터운 천이 주름잡힌 모양새의 조형성으로

자연스러운 굴곡을 형성하면서도 전통적인 색감과 미감을 곁들여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도는 한국 현대 도예의 새로운 장르를 여는 것으로 촉망을 받았다.

 

1974년 원광대학교에 도예과를 창설하면서 내려 온 그는

한국 최고의 도예과로 부상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자비로 1992년부터 개최했던 국제도예캠프는 96년도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과 동시에 국제적 방향으로

현대 도예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2015년 전북도립미술관 아시아현대미술전 당시 그는 높이 2m 쯤 되는 ‘장승’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것은 칼라풀하고 불규칙한 크기의 사각 형태를 2개의 수직 기둥으로 쌓아올린 작품이었다.

또한 매우 현대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영원한 운동>, 1986, 조합토, 망간유, 물레 성형, 62&times;130&times;9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작가 정신은 장르를 초월하는 성향을 갖는다.

그는 현대 도예의 성향을 도예라는 카테고리에 담아두기를 원치 않는다.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 원로작가전 때에는 20여 개의 대형 평면에

즉흥적으로 뿌린 단청 물감의 흔적을 내보여 흥미를 끌었다.

순간적인 물감의 튀김과 번짐, 흘러내림을 그는 자유로운 예술 행위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북의 미술을 각성시키자는 취지로 펼치는 AX 그룹 운동에도 참여하면서

젊은 작가들 못지 않게 새롭고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원한 운동-7>(1986), 47*48*45, 조합토, 판 성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영필 학예사는 “한 시대를 앞서 간 외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지역에 있고 전공에 따른 명문학과 역시 대체로 지역 도시에 존재한다. 한봉림의 열정은 일찍이 원광대에 부임해 도예 명문학과를 만들고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전문가로부터 도예과 하면 거론될 정도로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 도예과를 만들었다. 전라도에서 흙을 만지고 도예를 배웠다면 그의 손길을 안 거쳐 간 사람은 없다. 그는 끝없이 갈구하며 도예를 진화시켜 나갔다.”고 설명했다. 도예가 한봉림(韓鳳林)은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하고 공간대상 도예상(1979)을 받은바 있으며 원광대 미술대학 명예교수이자 한국현대도예 거장이다.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만의 예술적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전북과 한국 현대 도예에서 잘 평가되지 않은 작가의 도자 세계와 현대 도예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나아가 한국 도예의 동시대적 의미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기대한다”고 밝혔다.

 

<무제>(1979), 36*80*36, 조합토, 판 성형, 개인소장

전시 리뷰 대부분을 '전북도민일보'에 게재된 미술평론가 장석원씨의 글을 옮겼는데,

그는  전시 개막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전북 현대 도예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념비적 족적을 남기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한국 현대 도예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작가 정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전시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시도해 왔던 현대 도예로서의 창의적 정신은

예술이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도예가 한봉림

이 전시는 2023년 3월 5일까지 열린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금천뉴스, 시대일보, 뉴스1

 

수염이 풍부한 노인이 보이고 그 앞에 한 젊은이가 꿇어앉아 한 권의 책을 받들고 있다. 배경은 나무가 둘러있는 석굴인 듯 하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큰 한자 글씨가 세로로 “석굴수서”라고 적혀있다. 석굴을 배경으로, 한 노인이 젊은 남자에게 책을 주고 받는 광경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곁에 작은 글씨로 적힌 것은 그림의 내용인데,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이런 저런 책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국사기에서 따다 적으면서 약간의 변개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부분에서 해당하는 내용을 보자.

 

▲ 이도영 1883-1933, 석굴수서, 비단에 색칠, 85. 3x 182. 2센티미터, 1922,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 이홍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평왕 28년에 김유신의 나이 17살이 된 때이다. 옆 나라들이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해 맹세하였다. “적국들이 도의가 없어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니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개 미천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환란을 없애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하늘은 굽어 살피사 저를 도와주소서.”

나흘 후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나서 물었다. “이곳은 독벌레와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이 외진 곳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한 곳 없이 인연에 따라 오고 가며, 이름은 난승이라고 한다.” 유신은 그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을 알고, 다시 절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차서, 이곳에 와 무슨 계제를 만날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방술을 일러주소서.”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히 간청하기를 예닐곱 번이나 하였다. 그제야 노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아직 어린데도 삼국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데에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지니, 유신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빛만 찬연하였다.

 

               - 김부식 외,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앞머리에서, 이강래 옮김, 한길사,751~2쪽

 

이 열전은 조선 시대 말기에 내용이 더해져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이도영이 태어날 무렵이었다.이정균이란 분이 지었고, 그가 사망하는 해인 1899년에 간행하였다. 이 소설은 뒤에 나온 이런저런 김유신 전기소설의 원본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도영은 188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내내 고위 벼슬자리를 차지한 8대 권문세가의 하나인 연안 이씨 문중이다. 이도영은 신식 화폐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전환국의 분석과에서 공부하고 여러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화를 그리기도 한, 당대 미술가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남다른 행적을 보였다.

 

이 그림은 우리 근대 본격 역사화의 하나이다. 더욱이 일본 강점기에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분위기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근대 회화에서는, 이전에 소개한 이여성의 사례(최초 조선역사 회화가 이여성의 <격구>)를 제외하면 역사화라할 만한 것이 없다. 이순신, 논개의 단순한 인물초상화나, 최치원이나 을지문덕 같은 인물에 일본 옷을 입혀 그려서 오히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살피면, 일찌기 그려진 이도영의 이 그림은 더욱 돋보이는바가 있다.

 

▲ 석굴수서 부분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일화를 다루었다는 점 말고도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요소가 또 있다. 김유신 옆에 있는 좁고 높은 탁자 위에 있는 토기와 그 뒤의 질그릇들이다. 이 그림과 거의 동시에 그려진 <고색찬연>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물들과 같은 성격을 띠는 소재로, 이는 이도영의 남다른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토기는,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최초의 토기이다. 이도영의 그림은 그러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그림에 반영한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다. 일본 강점이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노력은 이도영을 넘어서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도영은 이후에 김정희가 글씨 쓰는 모습을 그리거나,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장면을 그려서 자신이 살아간 가까운 시기의 우리 문화영웅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는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하였다. 이 또한 당시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노력이다.

 

이도영은 젊은 시절에 시사만화와 신소설들의 표지 그림, 그리고 그 속에 든 삽화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중년무렵인 1920년대 들어서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신라나 가야의 질그릇이나 고려 청자를 비롯한 우리 특유의 종(뒤에 조선종 내지는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획득했음)을 그린 첫 화가다. 우리 눈앞에 수천년 전 조상들의 삶의 자취를 드러내며, 이민족 지배하일지라도 민족문화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듯한 민족적 역사화의 선구자였다.

 

이 그림은 일본 강점기부터 1970년대 사이에 손꼽는 미술품수집가였던 이동근의 소장품이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를 기려서 낸 소장품 도록에 단색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적이 없었다. 필자가 민족미술가로서의 이도영을 처음 소개하였고, 근래에 비로소 전시를 통해 잠시나마 우리 눈 앞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도영을 친일분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러할까?

 

지금은 고인이 된 재일 역사학자 강동진은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에서 이도영이 총독부의 부름에 20차례 가깝게 오간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병탄 전야에 벌인 그의 만평 활동(관련기사 <이것이 웬 세상이야>, 이도영의 미술행동), 앞으로 소개할 <고색찬연>을 비롯하여 간헐적으로 계속된 민족적인 그림들 등을 염두에 둔다면 그를 직업적 친일분자로 단언한 것이 과연 균형 잡힌 판단인지를 살피게 한다. 이도영에 관한 이런저런 행적을 살펴서 실체를 파악하기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최석태의 WHY YOU

젊은 나이에 알아챈, 식민지 사회의 운명을 그림으로 남기다

 

▲ 이쾌대; 1916-65, 운명, 천에 유채, 130 x 160센티미터, 1938. 일본의 손꼽는 공모전인 제25회 니까키이 공모전 입선작, 유족 소장

여자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다. 문지방에 팔꿈치를 얹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을 맨 앞에 배치하고, 바로 뒤로 두 손으로 무릎을 세워잡은 여인, 무릎 위로 팔을 겯고 그 위에 고개를 묻고 우는듯한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담담한 표정으로 곁에 앉은 여인 등, 여러 여자들의 모습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뒤로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발은 퍼렇게 색이 변해있고 흰 바지를 입은 듯 보인다. 가슴을 드러내고 문이 있는 벽으로 얼굴은 조금 가려진 상태다. 남자의 상태로  보아 이것은 죽음을 곧 앞둔 남자를 두고 슬픔에 빠진 여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이 입은 옷과 머리 매무새 그리고 누운 남자 뒤로 놓인 농으로 보아 당시 조선의 모습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알파벳으로 이름을 적은 옆에, 서기 연호 뒷자리 두 숫자, 38이라 적은 것으로 1938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쾌대 , 운명의 세부 . 슬픔에 잠기거나 망연자실안 여인들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려져 일본에서 손꼽히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받은 그림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기록이 담긴 인화사진이 남아있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 참석한 입선자들에게 인화사진을 만들라고 권유하여 제작해주는 업체들이 만든 것이다. 인화사진의 뒷면에는 엽서 형식으로 우표붙이는 곳과 받는 사람 주소 등이 인쇄되어 있다. 댓가에 따라 열장에서 수십장 이상을 만든다.
 
▲ 사진엽서로 만들어진 이쾌대 그림 운명

위 사진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던 형 이여성에게 이중섭이 보낸 인화사진엽서이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형은 동생에게 축하한다며 입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북에다 적어 선물했다. 이여성은 동생이 혼인했을 때도 손수 네 계절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병풍으로 꾸며서 주었는데, 그것은 아직 남아있다. 

 

▲ 형 이여성; 1901-58로 추정이 동생 이쾌대의 니카텐 입선을 축하하여 보낸 북. '축 이과전 입선'이라고 한자로 적었다. 유족 소장
이쾌대가 일본의 전람회에 출품한 이 그림의 이름은 운명. 그림을 담은 인화사진에 한자로 ‘運命’이라고 적혀 있다. 말모이(사전)에는 이 운명이란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명운, 숙명’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아무래도 소리는 같으나 뜻은 다른 ‘殞命’으로 여겨진다. 즉,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 죽음’ 이라고 생각된다. 뜻이 어쨌건 곧 죽는, 죽음이 확실한 상태의 한 남자를 두고 가족인듯한 여자들이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 유화 운명을 위한 준비 연필화, 유족 소장
이쾌대가 나고 자란 경상북도 칠곡은 지금은 대구광역시의 한 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곳 대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이쾌대. 이름도 시원시원한 느낌이다. 초등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보낸 중고시절에는 학교 야구반에 들어가 뛰어 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다가 일본에 유학한 유복한 인생.

얼마나 잘 살았으면, 유학지 도쿄에 집을 지었나 싶다. 직전에 결혼한 아내도 같이 갔다. 형에 이어 누나 둘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본처인 한 어머니 소생이고 이 밖에도 60명이 넘는 형제들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다.

 

1938년에 이렇게 유복한 환경에 있던 23살 청년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식민지나 식민지 같은 사회에서는 사연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이 늘 벌어진다. 이쾌대가 젊은 시절부터 이런 낌새를 알아 차리고 그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새파란 시절부터 집을 떠나 중국 상하이나 난징을 떠돌다가, 3.1혁명으로 유리한 정세가 만들어졌다고 판단하고 국내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이를 이쾌대는 철들자마자 알아차렸다고 보인다. 또한, 그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고 돌아온 형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효과있게 알 수 있으려면 역사화를 제대로 그려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화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쾌대에게 만만치 않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쾌대 자신이 화가 지망생이지 않던가.

 

우리는 이런 그림이 그려졌음을 1980년대 말에서야 처음 알았다. 월북자라는 이유로 작품은 물론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다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이런 족쇄를 풀었다. 이른바 월북작가 해금 조처였다.

 

이 그림은 전람회에 입선하고, 아마도 광복 직전에 열렸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가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시피 했을 것이다. 1998년 해금으로 거의 반세기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쾌대의 막내 아들이 오랫동안 다락에 쌓아 두었던 그림들을 손보아서 이듬 해에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비로소 처음 알고 듣고 보게 된 이름이 이쾌대다. 우리의 지난 미술 흐름에 이런 작품, 이런 화가가 있었다니! 

 

최석태  미술평론가 |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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