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던 지난 94, 정동지와 여수로 여행을 가기로 했으나,

때 마침 밀어닥친 태풍으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 한 달도 더 지난 지난 109일에서야 나서게 되었는데,

평소와 달리 일박이일이라 모처럼의 한가로운 여행이었다.

 

다녀 왔다는 이야기조차 미루고 미루다 두 달이 지나서야 올린다.

새삼 지난 이야기를 꺼내려니,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목적지 여수로 가기 전에 순천만부터 들렸다.

장돌뱅이는 여행을 떠나도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장터다.

 

그 날은 순천 웃장을 찾았지만, 웃장 뿐 아니라 아랫장도 있다.

웃장은 위쪽에 있는 장으로 순천의 북쪽에 있는 장이고,

아랫장은 순천 남쪽에 있는 장이다.

 

순천 웃장은 할머니들이 모인 좌판이 정겹지만, 국밥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때 마침, 국밥축제가 열려 광주식당’에 들어갔는데, 서비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국밥을 두 그릇 이상 주문하면 삶은 돼지머리 수육과

선지를 넣은 순대를 무료로 주었는데, 양도 넉넉하지만 맛이 일품이었다.

 

국밥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생선파는 할머니는 계속해서 돈만 세고 있었다.

손님 없는 무료함을 견디는 방법인지 모르지만, 센 돈을 반복해서 세었다.

벌기 힘든 돈이라 만지기만해도 기분 좋은 모양이다.

 

장터에서 나와 습지생태 체험관광지인 순천만국가정원으로 갔다.

순천 도사동 일대에 조성된 부지 34만 평엔 갖가지 수목들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주요 동선에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을 많이 심어, 자연 그늘 막도 만들어 놓았다.

 

한 쪽에는 홍학들이 노닐고, 한쪽에는 화려한 국화 조형물이 반기지만,

호수에 설치된 최병수씨와 최평곤씨 작품이 더 눈길을 끌었다.

 

순천만 정원과 순천문학관을 오가는 작은 무인궤도 열차도 다녔는데,

2023년에는 이곳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지방교육을 담당해 온 옥천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옥천서원1564년 순천부사 이정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발원으로,

1568옥천(玉川)’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1597년에 소실되었다가 1604년 허건, 심윤, 정지추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막 내려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김굉필의 위패를 모신 사우, 서원의 강당인 경현당,

유생들이 거처하는 지도재와 의인재가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져 있었고,

향례때 제수를 마련해 보관하는 전사청도 있었다.

 

그 외에도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는데,

주말인데도 문이 잠겨, 담 너머로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 옥천서원에는

선조가 내린 사서를 비롯하여 200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서원 옆에 자리 잡은 비각 임청대의 자태도 예사롭지 않았다.

옥개석과 비신, 대좌로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비석과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 불교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었다.

 

임청대는 무오사화 때 김굉필과 조위가 이 곳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중,

옥천서원 근방의 계곡을 벗 삼아 소일할 때 임청대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단다.

비석 뒷면에는 비를 세운 경위를 밝혀 놓았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목적지 여수로 갔다. 

넓은 바다를 오가는 선박과 섬이 어울어진 바다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수는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풍부한 관광자원을 지녔다.

그 중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유적 유물이 유달리 많다.

 

먼저 간 '오동도'의 이름은 오동나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섬에 오동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여수항 동쪽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길이 768m의 방파제가 생기며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오동도까지 가는 동백열차를 타지 않고 방파제 따라 걸었는데,

늙은이가 걷기로는 만만찮은 거리였다.

 

오동도에는 '여순사건기념관'도 있었다.

그곳에는 해방 이후 혼란기를 겪었던 우리나라 상황과 전개 과정,

특별법 제정을 위한 민·관 노력 등 6개의 아카이브와 포토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전동에 있는 망마산 서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선소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바다 위로 해가 넘어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온 몸과 생각까지 석양 빛에 물들 것 같은 나른함에 젖어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와 어시장을 찾아갔다.

 

생선 잡아오는 어선을 만나러 갔는데,

싸고 잘하는 횟집도 소개받아 오물오물 맛있게 먹었.

 

때 늦은 생일상이지만, 이런 생일상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갖가지 해산물을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웠더니, 늦가을에 봄바람이 일었다.

여지껏 일 끝나기가 무섭게 올라 왔으나, 모처럼 여행의 즐거움을 맛본 것이다.

 

이튿 날은 조선후기 전라좌수영 부속 관청이던 진남관’을 찾았으나

보수정비공사로 관람할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 진남관 아래 있는 임란유물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임란 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장군이 남긴 갖가지 유물과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7년간의 전란에서 겪은 모든 것을 기록한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해전사 출전도나 거북선을 만들고 무기를 시험해 보던 선소와

임진왜란의 유명전투들이 대부분 재현되어 있었다.

 

수군을 통제하고 지휘한 내용과 군영 내 일어난 사건 등, 폭넓은 내용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과 싸운 승려들의 근거지 향일암을 찾아 갔다.

화엄사 말사인 향일암은 수직 절벽위에 지어진 절인데, 경치가 끝내준다.

 

 해돋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과 맞닿은 봉황산의 지평선이 아스라하다.

 남해 금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상경관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자연 조망지다.

 

644년 원효가 창건하여 원통암이라 지었으며, 958년 윤필이 중창한 뒤 금오암이라 불렀다.

 

근대에 이르러 영구암이라 불렀다는데,

뒷산 바위가 거북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이름처럼 “신령한 거북이 팔만대장경을 싣고

용왕께 불법을 전하러 간다는 전설도 있다고 한다

 

해 뜨는 경관이 아름다워 붙여진 향일암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향일암’의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요사 등이 있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기도도량으로 꼽힌다.

 

향일암을 품은 금오산은 갖가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는 팔만대장경을 뜻한다고 한다.

 

절 뒷산의 정상 부근에는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거나,

그 흔들리는 폭이 일정한 흔들바위도 있다.

 

아찔한 절벽의 쉼터바위허우적대며 재롱 피우는 물개바위

곰 바위두꺼비바위 등 각양각색의 바위는 이곳만의 자랑이다.

 

절 마당에서 바닷가를 내려다보면 거북이가 입수하는 모습이 조각한 듯 뚜렷하고

이 산을 이루는 모든 바위의 단면이 신기하게도 거북이 등 문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표구 옆 일주문을 지나면 해탈문이 나온다

폭이 40~50cm밖에 되지 않는 틈새를 10미터 가량 들어가면 대웅전에 이른다.

 

좌측에 범종각 우측에 종무실요사채삼성전이 있고,

대웅전 앞을 지난 아래에 천수관음전이 있다.

 

다시 올라와 대웅전 옆의 동굴을 지나니, 관음전이 나왔다.

마당 아래 동전을 던지고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좌선대가 수평선을 향해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을 지나 대웅전을 뒤로하고 내려오니,

삼성각 앞 커다란 바위에 팔만대장겅을 상징하는 “경전바위“ 가 있었.

 

기암절벽 사이로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진 절경이 발길을 잡았다.

 

우리나라 주요 관음기도도량 중 하나로 알려진 향일암

원효대사가 수도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남해안 일출 명소인 향일암은 명승으로 지정된 국가지정문화재다.

 

마지막은 영취산 중턱에 자리잡은 흥국사를 찾아갔다.

이 절은 국가가 바로 되고,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며 보조국사가 세웠다.

 

고려 명종 25년에 창건한 이후 국찰로 번성하였으나,

155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법수대사가 중창했다.

임진왜란 때는 기암대사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승려들을 이끈 절이기도한데,

전란 중에 타버리고, 1624년 계특대사가 삼창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시 승병의 훈련소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승군들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지금의 당우로는 대웅전(보물)과 원통전, 불조전, 무사전,

적묵당, 심검당, 백련사, 법왕문, 봉황루, 영성문, 천왕문 등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후불탱화’, ‘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

흥국사수월관음도’, ‘흥국사십육나한도’, ‘흥국사삼장보살도’, ‘흥국사 동종‘,

홍교흥국사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일괄 및 복장유물 등이 있다.

 

그리고 흥국사제석도를 비롯하여 경판 236, 경전 93, 부도 13기도 있다.

 

흥국사의 가람배치는 법화경에 의한 구도라는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에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흥국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갑석이 있는 단층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높이보다 기둥 사이가 더 넓다.

이와 같은 평야적 요소는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앞면에는 모두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밑에는 2단의 궁창판을 두었으며,

위에는 문의 일부를 구획하여 교창처럼 꾸몄다.

 

공포는 다포계로 귀공포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포작의 안쪽에 연꽃과 서조를 새기는 등 장식적이면서도 견고한 면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한다.

 

 

흥국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흥국사백팔돌탑공원’이 나온다.

이 돌탑은 임진왜란 전장에서 산화한 의승군의 넋을 위로하고

여수산단 조성으로 희생된 산업역군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대신기공 김철희 대표가 조성하였단다.

 

흥국사 입구에 있는 홍교는 다리 길이가 40m, 너비 3.45m, 높이 5.5m로,

현재까지 알려진 홍예형 돌다리로서는 가장 높고 긴 다리다.

 

시냇가 암석 위에 편단석을 놓고 그 위에 같은 모양의 86개 석재를 중첩하여 

홍예를 구성하고, 앞뒤 양측 벽은 자연석을 쌓아 완만하고 긴 노면을 이루었다.

                                   꼭대기에는 행시의 무게를 대비해 장방형 석재를 덮어놓았다.                                                                                     

이 다리의 건립 유래는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흥국사'는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다.

흥국사란 이름처럼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염원이 담겼다.  

 

정영신 동지 덕분에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여수반도의 추억을 돌아 보았다.

여지껏 많은 촬영여행을 다녔지만, 생일기념이란 이름을 단 여행도 난생 처음이었다.

평생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나 정동지 등살에 생일 밥은 물론, 생일여행까지 간 것이다.

덕분에 기억마저 아득한 순천만과 여수반도를 두루 돌아볼 수 있었는데,

미루고 미루다 계절이 바뀌고서야 올리는 이 태생적인 게으름을 우짤꼬!

 

그동안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운영하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기록하여 올려왔으나, 밀려 난 기사도 제법 있었다.

미적거리다 날자 놓친 전시리뷰에서부터 행사 취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들이 타고 난 게으름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처음이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생일여행의 기록을 어찌 파묻을 수야 있겠는가?

 

이틀간의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많은 깨우침을 준 소중한 여행이었다.

그녀를 만난 지가 이십년을 눈앞에 두고서야, 새삼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낀 것이다.

말이 이십년이지 온 종일 붙어다니며 장터 촬영을 함께 다녔으니,

그 부딪힌 시간을 더한다면 다른 사람의 반평생 삶이나 다름없을 것으로 본다.

 

장거리 운전의 피곤함도 잊고 어디든 돌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여행지의 아름다움이나 유익함 보다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쪽팔려 삼가해 온 사랑이란 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

 

치매수준의 기억력이지만, 그 녀와 함께한 시간만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순천웃장

 

습지생태 체험관광지인 순천만국가정원

 

여수 오동도

 

어시장

 

향일암

 

흥국사

 

 

 

최석태의 WHY YOU

▲ 이도영;, 이것이 웬 세상이야, 시원도 하다, 개벽, 1921. 7; 창간 1주년 기념호. 그림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되었기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그리고, 웬 세상이야 라고 외치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무엇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도영. 1884년에 태어나 1933년에 돌아간 화가다. 다달이 나오는 정기간행물에 이 그림을 그렸으나, 이 한 장으로 끝나버렸다. 아마 검열로 더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쇄되어 나온 이런 그림은 그 동안 미술작품 혹은 예술작품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2019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창립 50년 기념 전시,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전>에 출품되었으니 비로소 미술작품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1909년부터 1년 조금 넘어 이어지다가 식민지가 되어 그만 두게 된 그의 만화 작업은, 대한제국의 흔적이라는 것 만으로도 소중한데 더하여 항일 미술 활동으로 거의 독보적인 활동이라고 할 것임에도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한국미술 100년전>에 출품되어 처음으로 미술관에 발을 잠시나마 디뎠다. 이제사 비로소 이도영의 만평이나 출판미술이라는 것이 미술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쿠텐베르그 혁명 이후, 대량복제의 시대에 순수미술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 때문이라고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근년 들어 많이 벗어나는 듯하다. 근대시기에 활판 인쇄에 의해 대량생산된 이미지도 문화사, 미술사의 고려대상으로 넣자는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이도영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그림'은 비록 단 한 번으로 끝난 만평이지만, 1919년 3·1혁명이 불러온 변화상을 보여주는 당대의 거의 유일한 시각문화 유산이다.


이도영은 이른바 계몽기에 국민교육회에 몸담아, 교과서의 삽화나 신채호가 서문을 쓴 유영표의 소설 <몽견제갈량>의 삽화를 그리거나 하면서 남다른 행보를 보였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1910년 한일병합 후 1년 여 동안, 하루하루 엄정한 시국을 맞아 국망 직전에 나라의 몰락을 막으려는 시도로 일간지에 최초로 만평을 연재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도영의 작품은 언론사 연구에서 시작되어 만화사 연구로 이어지다가 근래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평가되면서 전과는 조금 달리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만평은 세태 비판, 항일, 민족 반역자 실명 비판 등으로, 그 시절을 증언하는 미술행동이었다. 그러한 이도영의 행동은 시각문화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미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아다시피 나라는 망해버렸고, 만평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이도영은 일본 강점 아래에서는 요시찰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 상태의 이도영도 '무단정치'의 시기를 10년 거친 후 '문화통치'의 공간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허용되었다. 3.1혁명이 불러온,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던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웬 세상이야"라고 외치게 된 까닭이다. 

 

▲ 개벽 창간호 거죽.&nbsp;창간 1주년 기념호 거죽.

3·1혁명 이전과 그 뒤에 바꾸어진 분위기를 학교에 한정하여 살펴보자. 1910년 이후 초등과정부터, 워낙 소수였던 여학교를 제외하고, 학생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남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초등 입학생을 돌보는 교사도 군복을 입고 허리에 칼까지 가르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교과서는 모조리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바꾸었다. 수업도 일본어로만 하였다. 한국어를 사용하면 매질을 당했다. 그래서 이 시기 학령 아동들은 학교에 가기를 꺼렸다. 이런 것이 무단통치기를 살아가던 조선의 어린이들이 맞아야 했던 환경이었다. 

 

1919년 3월 혁명으로 이런 상태는 바뀌었다. 모든 교사가 군복과 칼을 벗고 평상 복장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또한 비록 초등 과정에 입학한 뒤 1년 뿐이긴 해도, 조선인 교사로 하여금 조선말로 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 결과 지난 10년간 학교를 꺼렸던 학령 아동들이 대거 학교로 몰려 정원을 넘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입학시험을 치루고, 몇 년 동안이나 기다리는 현상도 생겨났다.

 

▲ 노수현;1899-1978, 개척도, 개벽, 1920. 6, 창간호 권두화
 

1920년에 시작된 <개벽> 창간호의 권두화는 노수현이 그렸고 여기에 개척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번째호 권두화는 장발에게 그리게 하고 그림의 제목은 아예 붙이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개벽> 권두화에 실리는 그림들은 그림 안에 제목이나 문장을 쓰는 일을 꺼렸는데, 이러한 서양식 문화를 들여오다보니 제목 등의 게재 방식도 들쭉날쭉해졌다. 그렇게 창간 후 한동안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그림들이 애매하게 게재되었다. 

 

▲ 장발;1901-2001, 개벽, 1920. 7, 제2호 권두화.
 

그러던 <개벽>은 창간 1주년을 맞아 이도영의 그림을 실었다. 이도영은 그림에 화제를 쓰는 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림 안에 제목이 들어있는 셈이다. 게다가 화제 전체를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적었다. 그린이 자신의 이름도 전통 방식에 따라 그림 안에 '리도영'이라고 낙관처럼 적어넣었다. 

▲ '이것이 웬 세상이야' 좌상 화제 부분 확대
 

이도영이 그린 이 그림은 어떤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시 우리 사회에는 문맹자가 많았지만 한글을 읽고 쓰는 인구 비율은 상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가 아닌 한글로 화제를 적으면 그만큼 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 비록 일본 강점기임에도 문자혁명이라고 할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이도영이 한글로 화제를 적은 것은 그 의의가 크다. 그림을 보고 화제를 쉽게 읽을수 있으면, 누구나 이것이 무슨 그림인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웬 세상이야, 시원도 하다'는 그림은 다시 말하지만 3·1운동이라고 흔히 말하는 1919년 봄의 전민족 봉기가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그림이다. 당시에는 조선말로 내는 일간지, 월간지를 민간이 발간할 수 있었다. 비록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이나 개인이 주체가 되긴 했지만, 조선말 매체가 발행될 수 있었다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컸다.

 

이도영의 그림이 실린 <개벽>지는 일본 강점시기 내내 단연 최대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천도교 세력이 발행한 것으로, 당시 최대의 발행부수를 보이던 월간지였다. 그런 <개벽>이 창간 1년을 맞아, 10년 전 만평을 통해 일본과 친일파에 대항한 역전의 용사라고 할 수 있는 이도영에게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만평을 그리도록 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 환경을 맞아 나온 외침이 바로 "이것이 웬 세상이야!  시원도 하다"이다.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 민중들에게 용기를 내서 살아가자고 북돋우는 말이 포함된 이미지를 창출한 것이 이도영의 이 그림이다. 

 

최석태 미술평론가 |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최석태의 WHY YOU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는 왜 그렸나?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 눈물, 담배를 싸는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서 새기고 색칠, 10x15센티미터,&nbsp; 대구 인당박물관 소장. 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6. 6. 3-10. 3, 도판 125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 이중섭, 꼬리가 묶인 채 서로 해치려는 괴물들, 종이에 잉크와 수채, 그림만 26x26센티미터, 소장자 모름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6월 2일자 엽서에 그려 보낸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마리 짐승들의 꼬리는 서로 연결되어 그려져 있고 여인이 그것을 손잡이처럼 들어올리고 있다.

 

한 방향으로 달리는 세 마리 짐승 그림이 1941년에 그려진 반면, 이번에 소개하는 서로 해치려는 두 짐승의 그림은 1950년 이후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시기를 전후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의 꼬리는 확연하게 묶여 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풀기 어려운 옭매듭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 꼬리 부분이 옭매듭 직전으로 엉켜있다.
시간 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짐승의 꼬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해방 이전에는 평화로운 통일 조국에 대하여 희망을 가졌었는데, 해방 이후 엉켜버린 정국 속에서 걱정스럽고 실망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원래 그림을 다시 보자. 일견 잔인해보이는 설정 이면에 중섭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칼과 망치를 들고 서로 해하려 하는 장면이지만 둘의 얼굴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잔인한 짓을 할 때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든 괴물의 다른 손은 칼 든 상대편 팔을 잡으려는 듯 뻗어있으나 표정은 마뜩찮은 듯 찌푸려져 있다. 칼을 든 괴물은 상대방의 손을 피하려는 듯하다. 쌍방이 다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이 그림은 소재 말고 또 다른 점도 특이하다. 한글가로풀어쓰기로 이름을 그림의 맨 위, 그것도 가운데에 적었다. 그리고는 이름의 좌우로 네모난 종이 형태에 맞추어 테를 둘렀다.

그림에 곁들인 색칠도, 위아래 짐승들의 몸통 색은 상대방이 걸쳐입은 저고리 색과 같게 칠했다. 그런데 색칠한 방법은 다르다. 저고리는 세로로 몸통은 가로로 그려진 느낌이라서, 같은 색이지만 칠이 다르도록 구성했다. 배경은 차가운 색으로 선택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새끼가 서로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울림을 해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 8 (임헌영,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한길사, 2021, 98쪽에서 재인용)

 

6. 25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다고 절규하는 듯한 말이다. 함석헌의 이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어느 때에 화가인 이중섭은 이 처참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하는 이 처참함을 세계에 내놓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적어보내기도 한 이중섭이었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분명 전시나 책자로 발표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만 하고싶지는 않았던 이중섭이 주위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그림이 좋은 바탕재료 위에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더 좋은 이름을 궁리해 내기를...

 

최석태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친구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게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어려운 일에 득달같이 나서 줄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개인주의로 치달으며 친구 만나는 기회도 점차 줄어들고,

만나게 되어도 물질문명에 찌들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는 다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곰삭은 정이 있잖은가?

신경림시인은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말했다.

 

얼마 전 서울 사는 고향 친구 수만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고향 동창들이 12일 여정으로 서울관광 오는데, 함께 할 수 있냐?' 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했다.

 

월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지만, 이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가비가 20만 원이라며, 낼 수 있?고 묻기에

문디 코구멍에 마늘 빼 먹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부자 친구도 많은데, 이럴 때 기분 좋게 안 쓰면 어디다 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돈이 아까워 어떻게 죽을까? 

 

거지는 안 받기로 했다지만, 만찬 후 이차 술값은 내가 낼 생각이었다.

마침 인사동5길에 있는 '센트마크 호텔'에 방 다섯개를 예약해 두었다기에

유목민에서 술 한잔 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누가 기획했는지 궁금했다.

종석이 더러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냐고 물었더니, 자기란다.

돈은 죽고나면 아무 쓸모 없다며 즐겁게 살자는 취지였는데.

수식이와 의논했더니, 일사천리로 추진하더라는 것이다.

 가이드는 서울 수만이가 맡아, 책임지고 일정을 짰단다.

정말 잘 한 일이라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인사동에서 시작하여 경북궁, 청와대, 광화문, 청게천,

롯데월드, 한강유람선 등 시골 노인네들 관광코스야 뻔했다.

몇 년 전 정선 귤암리 노인들 관광왔을 때 다녔으나,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다르다.

 청와대가 새로 생긴 볼거리지만, 아무래도 친구들과의 마지막 상면일 것 같았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고향을 지키는 영산 친구를 비롯하여 서울, 인천, 부산,

그리고 광양 사는 친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지난 7일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서울역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은 바빴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만 점점 늘어났다.

기다릴 특정 장소를 지정하지 않아, 이산가족 찾기보다 더 힘들었다.

열차 탈선사고로 오가는 열차가 모두 연착이라는 안내방송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으면, 전화번호 아는 고향 친구가 이수만 뿐이었다.

그는 찾아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아, 다음 집결지인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종각역에 도착할 무렵에야 대합실 2층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길이 엇갈릴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막연하게 기다리다 다시 전화 걸었더니, 시간이 늦어 오찬 장소로 바로 가야 할 것 같단다.

 

시간이 남아 인사동에서 경복궁을 둘러 삼청동으로 갔는데,

오찬 장소로 정한 ‘삼청동 수제비집 앞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 줄을 서서 수제비를 다 먹어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다면 다시 서울역으로 갔어야 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죄 없는 담배만 연신 피우고 있으니, 그때 사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탈선하여 두 시간이나 연착되었다지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 그런지 더 반가웠다.

영산초등학교 45회 동창생 중 세상을 떠난 친구도 많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온 친구도 있었다.

 

영산에서는 신수식, 조대권, 김종석, 김공조, 이석중, 신규식씨가 왔고,

정대식, 김옥선은 부산에서, 조성호는 광양에서 왔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김이만, 김순남, 하금순, 김상현, 윤성관,

이수만, 구정희 등 다들 얼마 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 사진은 5년 전 영산에 모인 동문들 기념사진이다. 그동안 이렇게 늙다니...

무정한 세월 속에 나만 늙은 게 아니라, 모두 늙어 버렸다.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이라, 코끝이 찡하며 눈물까지 어른거렸다.

죽을 때가 되어 그런지, 작은 일에도 감동하며 눈물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수제비 먹을 동안 또 다시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며 피운 담배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아침에 산 담배인데...

 

다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청와대 관광부터 나선 것이다.

신수식이 잘 아는 국립고궁박물관장의 도움으로 청와대 입장도 비교적 수월했다.

북악산 아래 똬리 턴 청와대 자태는 웅장했다.

 

청와대 중심 건물인 본관은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을 위한 공간이다.

 

그곳에는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으나, 살인마나 사기꾼도 걸려 있었다.

당선만 되면 죄를 지어도 두고두고 대통령 대우를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정한 동선 따라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넓고 웅장한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 다음은 해외 국빈을 맞거나 대규모 공식행사가 열리던 영빈관을 들렸다.

1978년에 지어진 이곳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받드는 형식의 건물이었다.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과 만찬 등을 열던 곳으로

100명 이상의 대규모 회의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다.

 

조선 왕실의 불노장생을 기원하는 불로문을 거쳐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청와대 소정원에 있는 불로문은 16세기 말 조선 숙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가족이 사는 주거공간이다.

생활 공간인 본채와 접견장인 별채, 그리고 우리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등산로의 작은 연못 앞에 조성된 화단도 아기자기했다.

 

그 다음에 들린 '인왕실'은 소규모 연회와 기자회견장으로도 사용되던 장소였고,

'충무실'은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회의를 여는 장소였다.

 

그리고 '상춘재'는 국내외 귀빈에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또는 비공식 회의를 진행하던 곳이다.

 

'춘추관'은 기자 회견과 출입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된 공간인데,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역사기록을 맡은 관아였던 춘추관에서 비롯되었다.

 

가는 길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녹지원'도 보였다.

대정원에서 국빈 행사가 많았다면, 녹지원은 주로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 곳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침류각'도 둘러 보았다.

침류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본래 경복궁 후원에 있던 북궐의 부속 건물이란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석불좌상인 미남불도 있고,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

5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 '오운정' 등, 못 들린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건물보다는 넓은 주변 경관이 더 아름다웠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아름다운 북악산 일부를 독점하고 살았다는 건 너무하다.

때 마침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두 번째 행선지인 경복궁을 가기 위해 신무문을 통과하려니, 관람이 끝날 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도착시간이 지연되어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경복궁 대신, 만찬장인 경복궁으로 이동해야 했다.

 

경복궁은 인사동 센트마크호텔입구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음식이 정갈하다.

그곳 만찬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그 비용을 서울 김상현이 계산했다.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열렸는데, 옆자리에 김공조가 앉았다.

그 많은 친구 중에 담배 피우는 친구가 공조뿐이라 조가 맞았다.

 

김공조는 영산 구계목도 보존회회장이고, 김종석은 보존회 회원인데,

며칠 뒤 창녕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41회 민속예술축제

창녕군 대표 팀으로 출전하여 경연을 벌인단다.

 

신수식이 이끌어 가는 영산줄다리기

조대권의 영산쇠머리대기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구계목도만 지정되지 않아 서러운 것 같았다.

 

구계목도’가 민속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으나

이번에 열리는 도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야 경남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단다.

12일 경연대회 마지막 순서로 출전한다기에, 행사장에 찾아가 응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몸살로 드러누워 공수표를 날리고 말았다.

뒤늦게 '구계목도'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장한 일을 해냈다.

친구야! 다 같이 축배를 들자.

 

이차를 가기 위해 유목민의 전활철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그날이 쉬는 날이란다.

만찬장까지 찾아와 술값 보태라며 20만원을 줘, 고맙기 그지없었다.

신수식의 딸 정화와 사위까지 찾아와 만찬장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일이 생겨 함께 하지 못한 남이우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몸이 많이 불었더라.

한때는 대한항공중역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정년퇴직하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다들 손자 재롱이나 즐기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아니던가?

 

이석중은 마산 초등학교 선생으로 정년퇴직 했고,

김종석은 부산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하다 정년퇴직 했으니, 연금 받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김종석의 아내가 부산에서 살아, 혼자 구계리에 돌아와 '구계목도' 전승에 힘을 보탠다고 했다.

 

친구들이 조성국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문화 전승에 애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

이것이 영산의 자부심이다. 영산 사람이라면 그 자부심 다 안다.

 

그나저나 술자리가 파하니, 이차 보다 청계천에 가잖다.

술 취한 노인들의 청계천 나들이는 볼만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물 위에 비친 불빛이 아름다워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돌다리를 건너 다니며 낄낄거리는 등 신났다.

 

다들 호텔로 돌아와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호텔에서 잘 형편이 아니었다.

카메라 충전도 해야 하고 메모리 포맷도 해야 하는데, 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김공조와 함께 자기로 했으나, 몰래 빠져나와 동자동으로 갔다.

콧구멍 만한 쪽방이지만, 내 집이 호텔보다 훨씬 편했다.

가자마자 뻗었는데, 눈떠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충전할 시간이 없어 잘 쓰지 않는 라이카를 들고 간 것이다.

 

이미 친구들은 호텔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바삐 청진동 해장국으로 갔더니, 다들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장국에다 소주 몇 잔 들어가니, 어제 기분으로 바로 돌아갔다.

 

거지가 라이카를 메고 있으니, 사진 하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 카메라는 고향 후배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라고 자랑했으나,

 컴펙트 카메라인 니콘 coolpix P310’이 훨씬 편하다.

카메라는 장식이 아니라 손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만김상현도 사진을 찍지만, 각자 가는 길은 다르다. 나는 사람을 찍고 그들은 풍경을 찍는다.

처음엔 아마추어와 어울려 풍경이나 찍는다며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인지라, 사는 동안 즐기며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좋아하는 풍경에 취해 인생을 즐기는것 처럼, 작업은 놀이가 돼야 하는 것이다.

 

2-30년 전 이수만이 정선 만지산 집에 놀러와 하룻밤 묶은 적이 있다.

구들장 바닥에 틈이 생겨 벌건 장작불이 방에서 내려 보이는

 궁상맞은 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시장철 피어나고 온 국민이 다 찍는 꽃 풍경보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옛집을 찾아 찍으면 어떻겠냐? 고 권한 적이 있었다.

문화도 양반 문화가 판친 역사라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집들이 사려져

누군가 그 기록을 좀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 뒤로 일체의 친구사진을 보지 못했으니, 지금은 어떤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인사동 툇마루에서 우연히 만난 이수만

이 친구는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직했는데, 한번은 친구 덕을 본적도 있다.

오래 전 인사동 크라운베이크리 이층에 있던 민사협사무실에 갔더니

콧수염 김영수씨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 영보가 성균관대에서 등록금 거부운동을 주도해, 잘릴 처지라는 것이다.

수만이 에게 부탁하여 등록금 갖다주고 무마되었는데, 인연이란 묘하게 연결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롯데월드타워'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갔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이 지하철로 움직이기는 좀 소란스러웠다.

동화책에 나오는 돼지 새끼 소풍처럼, 줄로 엮어 다녀야 할 판이다.

 

종각역에서 타고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는데,

늙은이 들의 무임승차라 괜히 젊은이들 눈치 보이더라.

말은 안 하지만, ’노인네들이 집에서 티브이나 보지, 왜 몰려다니냐?‘는 듯 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다는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다.

123층에 555미터의 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지만, 롯데 신회장의 고집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높은 곳에서 느끼는 아찔함과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요기야 되지만,

아직도 적자에 시달려, 마천루의 저주를 답습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사무실 공실률이 너무 높아 계열사로 채워 겨우 땜빵을 한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쳐 호텔 사업까지 힘들기 때문이다.

워낙 손해가 크다 보니, 다른 초고층 빌딩 계획이 축소되거나 변경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롯데월드타워'가 그곳에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가?

긴 세월에 걸쳐 비행항로까지 바꾸어 가며 어거지로 이루어 낸 것이다.

신격호회장 숙원사업이라 살아 있을 때 완공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회전초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돌아가는 접시가 다 돈이라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은 김이만은 청주 한 병을 시켰는데, 거기다 소주까지 시킬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청주 마시고 혼 난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청주 청자만 들어도 취한다.

기어이 술 한잔 줄여주지 못하고 혼자 다 마시게 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음 행선지인 여의도나루로 가기 위해 네 사람씩 모여 택시를 탔는데, 김이만이 핸드폰을 흘린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핸드폰에 꽂힌 카드가 열 개나 된다는데,

왜 카드를 전부 갖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돈 자랑이 아니라 카드 자랑인가?

 

다급해진 이만이가 택시에서 내리자, 구정희도 따라 내린 것이다.

이만이가 술도 취했지만, 구정희는 군장교 출신이 아니던가?

치밀하게 일을 해결하는 대는 일가견이 있다.

 

시골 노인네들의 한양 나들이에 꼬이는 일도 많았다.

어제는 열차 빵구로 두 시간이나 헤매게 만들더니,

김이만에 이어 조성호도 사고를 쳤다.

할마시 셋을 뒤에 태우고 앞자리를 차지한 성호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도 다른 좌석에서 술을 한 병쯤 마신 모양인데,

왜 금실 좋은 부부처럼 금순이를 끼고 디니던 규식을 따돌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택시 기사 더러 여의도나루가 아니라 잠실나루로 가자고 한 것이다

 

잘 못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유람선 탑승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유람선이 돌아올 때 까지 여의도 나루에서 기다려야 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할마시들 한테 뒷머리가 다 뽑혔을 텐데,

다시 고문받아야 할 운명의 장난이었다.

 

광양에서 올라 온 조성호는 오래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릴 지경까지 갔으나.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예능에 다양한 재질이 있었다.

음악에 빠진 줄 알았는데, 한국화도 그렸다더라.

아직도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인의 길이나 다름없다.

 

지팡이가 있긴 하지만, 걸어서 서울 구경하기란 만만찮을 것이다.

거기다 하금순까지 성한 몸이 아니라 화장실을 연락부절로 다녀야 했다.

세상에! 친구 볼려고 그 아픈 몸을 끌고 먼 길을 왔다니, 어찌 눈물 겹지 않겠는가?

자판기 두드리다 눈물 흘리는 것도 난생 처음이다.

 

나는 신수식, 이수만과 같은 택시를 탔는데,

수식이가 두 곳의 사정을 일일이 연락 받아, 마치 우리 택시가 작전사령부 같았다.

그러나 택시 요금 올라가는 걸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 죽겠더라.

마침, 엊저녁에 유목민’ 전활철이가 주고 간 돈 봉투가 생각나 회비를 냈더니, 난색을 표했다.

회비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마지못해 받았지만, 자기 호주머니에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돈의 가치를 떠나 가슴이 따뜻해지더라. 이게 사람 사는 정이다.

 

한강 유람선 이랜드 크루즈엔 신수식을 비롯하여 조대권, 이석중, 이수만, 신규식,

김종석, 윤성관, 김상현, 정대식 등 아홉 명만 승선하여 한강 유람을 했다.

유람선을 타려면 밤에 탔어야 서울야경이라도 즐겼을 텐데,

승무원 잔소리 들어가며 갑판에 둘러앉아 캔맥주나 마시는 억지 춘향의 뱃놀이였다.

그것도 캔맥주 하나에 오천원이고 컵 하나에 오백원 하는 바가지를 쓰가며...

 

다행히 김이만과 구정희는 핸드폰을 찾아 다음 행선지인 광화문광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택시 세 대에 나누어 타고 광화문으로 이동했는데, 이제 서서히 막 내릴 준비를 했다.

바뀐 광화문광장을 둘러보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토속촌에 마지막 식사하러 간 것이다.

 

삼계탕에다 인삼주까지 마셨는데, 잘 먹어야 하루 두 끼 먹는 놈이 세끼를 먹었으니, 배가 놀랠 지경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인생 졸업사진을 찍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날 광양 사는 조성호가 전라도 여인 예찬론을 폈는데, 김상현이도 두 며느리가 모두 전라도 여자라네.

신랑은 물론 시댁에 그렇게 잘 한다며 며느리 칭찬에 입이 말랐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함평댁 정영신 동지를 보면 알지 않겠는가?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셈표간장이라 칭찬하다 더러 혼나기도 하지만...

 

사실, 경상도 사내들은 정나미 떨어진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경상도 사내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아내에게 하는 말은 세 마디 뿐이다.

"밥 뭇나?" 먹었어요. "아는?" 잡니다. 자자! ...

웃을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처럼, 그런 사람 많았다

말이 좋아 무뚝뚝이지, 요즘 여자들 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차례대로 일어나 그동안의 소회나 좋은 말을 한마디씩 했는데,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 자리에서는 고맙다는 인사밖에 못했지만, 우짜던지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

 

시골 내려갈 친구들과 구정희만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 조성호 누님도 나왔더라.

배웅나온 고향 선배와 잘 가세요. 잘 있어요손 흔들어가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끝으로 친구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 할 것이 아니라 축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된 삶을 끝낸 영혼이 승천하는데, 울긴 왜 울어? 박수 쳐야지...

 

가끔 아는 분이 돌아가셔도 차마 축복이란 말은 꺼내지 못하지만,

지난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다시 만나지 못할 그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십여 년 전에 남자 알몸을 찍어 실물 크기로 출력하여 세우는 영정 작업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신체발언이란 택도 아닌 제목을 붙였지만, 그 사진은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영정사진으로 내 걸기로 했다.

초상집에 온 문상객도 마음껏 웃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목욕탕에 가면 당연히 옷을 벗지만, 왜 다른 곳에서 벗어면 난리를 칠까?

영혼이 가볍게 날아가려는데, 뭐가 그리 보기 싫은가?

상갓집을 잔치집으로 바꾸려는 계산도 깔렸지만, 다 생각의 차이다.

 

초상집에서 꽹과리치고 춤추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의 풍습이나 법까지 통치자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 너무 많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정남규와 이종문의 장례는 너무 늦게 알거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제 신나는 잔치를 열게 될, 내 차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정선 있을 때부터 사후에 있을 일을 정동지에게 다짐에 다짐을 해 두었다.

농주 걸러 가마솥에 고깃국 끓이고, 술 마시고 노는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사물놀이가 체질에 안 맞으면, 노래방 기계라도 갖다 놓으라고 했다.

 

이제는 정선 집이 불 타버려, 내년에 옮기게 될 아산에서 치룰 작정이다.

시신은 화장하여 그 부근에 묻으면 그만이다.

 

친구야~ 내 죽었다는 소리 듣거들랑 꼭 놀러 오너라.

축의금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화끈하게 한 턱 쏠게...

나의 십팔번 '봄날은 간다'도 라이브는 안 되지만, 동영상으로 보여 줄 작정이다.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자주 만나자.

 

사진, / 조문호

 

(이틀에 걸쳐 찍은 사진이라 너무 많네요. 필요하신 분은 살펴보세요.)

 
 

 

 

대한매일신문과 양기훈의 의기(義氣)

 
- 閔忠正公 血竹圖 / 양기훈 / 1906.7.17 / 대한매일신보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 원본. 125x54cm, 고려대박물관 소장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일본과 조선 간에 체결되었다. 일본의 강권과 무력으로 강제된 조약이었다. 조선의 주권과 국권은 상실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통치하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당시 시종무장관의 직에 있었는데 비분강개한 그는 을사조약의 파기를 고종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을사오적과 그 배후인 일본이 모든 권력을 가진 뒤라 그의 항소가 실행되지 않자 최후의 항거로써 유서 3장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런데 민영환의 의거가 일어난 지 250일 후 그가 거처하던 집 방에서 충절의 넋이 발현하듯이 붉은 피가 묻은 것처럼 푸른 대나무 네 줄기가 솟아오른 신비한 사건이 일어난다.
 
대한매일신보가 촬영한 혈죽. 사진을 인쇄할 기술이 부족하여 그대로 싣지 못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판화를 보면 혈죽은 전체적으로 왼쪽을 향해서 많지 않은 잎이 솟아있고, 그 잎은 열사의 기개처럼 날카롭게 묘사되었다. 이 혈죽도의 원본은 대나무 부분은 감청색 먹으로, 찬(贊)은 먹으로 쓴 판화였다. 물론 신문에는 다시 개작한 흑백 판화로 인쇄되었다. 그리고 혈죽 옆에는 남정철이 붙인 화제(畵題)가 있다. “우죽(右竹)은 본사원(本社員)이 한국 명화 양기훈씨에게 일 폭 화본을 청득(請得)하야, 본보란 내(內)에 인재(印載)하야 광포(廣佈)하노니 충절을 애모하시는 첨군자(僉君子)는 차(此)를 애상(愛賞)할지로다.” 즉 “오른쪽의 대나무는 본 신문의 사원이 화가 양기훈에게 청탁하여 제작한 작품을 인쇄하여 널리 알리니 민충정공의 충절을 애모하는 여러 군자들은 이를 슬프게 생각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민영환의 충의를 애도하는 권동수의 시가 있다.
 
양기훈의 혈죽도를 옮겨 판 목판화. 109x60cm
 
그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중식도 또 다른 혈죽도를 수묵으로 그렸는데, 이 두 화가의 혈죽도는 일본의 침략과 망국의 위기를 고발하고 국민들에게 구국 투쟁을 촉구한 뜨거운 지사적 격정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이 혈죽도를 삽화로 게재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의식은 작가인 양기훈의 작품만큼이나 뜨겁게 신문의 시대적 소명을 실천한 예라 볼 수 있다. 아마도 대한매일신보와 목판 혈죽도의 관계는 우리 근대사 최초의 매스미디어에 의한 선동적 그래픽이라 여겨진다.
 
 

한편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침략기 항일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중요한 언론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선각자들의 도움으로 7월에 창간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베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문에 게재된 양기훈의 혈죽도 목판화. 초본 목판화를 약간 수정했다.
 
양기훈의 혈죽도가 게재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영진과 편집진의 민족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서울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여전히 정부의 기관지처럼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대한매일신보의 비극이다. 베델이나 양기훈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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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기 전의 민영환 모습. 민영환 유고에 실린 사진을 옮겼다
 
 
 
 

 

 

 

 
 
 

최석태의 WHY YOU

▲ 박수근,&nbsp; 벚꽃, 종이에 유채, 26x119센티미터, 1961년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기는 물론 물감이 칠해진 느낌도 박수근의 여늬 그림과는 다르다. 방금 흰색의 회를 바른 것 같은 화면이다. 화강암 같은 재질감과 색감이 아니라, 밝은 바탕 위에 이 바탕칠이 마르기도 전에 붓이 아니라, 분명 연필로 윤곽선 긋기를 감행했다.

 

그런 뒤 충분히 마르기를 기다려 꽃과 잎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기 어울리는 색깔을 발랐다. 그랬기에 색깔들은 반들반들한 바탕 위에 미끄러지는듯 발라졌다. 이 색깔들은 상당히 묽다.

 

이 그림은 1961년에 그려졌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꽃이,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 꽃인데 모양은 다르다. 서로 종류가 다른 벚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봄에 그려진 것이리라. 분홍 벚꽃을 그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던 화투패에 그려진 벚꽃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같기도 하다.

 

▲ 박수근,&nbsp;&nbsp;벛꽃의 부분화
 

박수근은 곧 있을 쿠데타를 모른 채, 지난 해 봄부터 펼쳐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4.19 공간이라고 하자. 1960년 봄, 이 벅찬 국면을 맞은 시인 김수영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밑씻개로 쓰자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이때로부터 10년 뒤인 1970년에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잊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인물로 그려낸 소설 <나목>을 써낸 박완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에서, 1960년 4월 이래 기쁨에 차 날마다 거리를 거닐며 쏘다녔다고 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태어난 나에게는 박정희가 죽은 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시기가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하였기는 해도, 1919년 3월 만세 혁명의 다음에도 이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한 시기, 전주성을 접수하여 해방했을 때도 그랬으리라.

 

일본의 강제 점령하에서 태어나 살았던 박수근의 삶에서는 광복의 시기에 잠시 그랬을 것이다. 10년도 더 지나 지긋지긋했던 이승만 독재의 그늘에서 살았던 박수근이기에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는 북한 치하에서 중학교 교사이면서 기초 단위 대의원이기도 했으므로, 초등학교만 나온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상을 내세워 침묵하고 지내왔다.

 

▲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생전의 박수근 화백.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1960년 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 봄의 분위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려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날이 갈수록 정갈해져 가는 화강암 같은 재질감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였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좀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이 빠른 이 기법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다른 면모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가 사망하는 1965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대략 20점 정도이다. 그런데 그 20점은 박수근의 그림들 가운데 꽤 소외되어 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화풍으로 인해 박수근의 그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못해 박수근의 작품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록에 제대로 싣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판로를 찾기 어려워 잘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에는 태작이 없다. 새로운 화풍의 20점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화법에 회화적 요소를 좀 더 많이 가미해 조화롭게 적용한 수작이다. 희망과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화풍의 박수근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지난주에는 줄초상으로 연이어 문상 가는 일이 생겼다.

조정순(91)씨는 연세가 많아 지병으로 돌아가신 호상이지만,

안애경(64)씨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안애경씨는 하는 일도 많은데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난세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더 안타깝다.

 

지난 8일 늦은 오후, 안애경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았다.

평소 아픈 적도 없는 건강한 분이라 믿기지 않지만, 다가온 현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정동지와 서둘러 시신이 안치된 이대목동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그녀는 독신이라 상주로는 자매 세 사람과 조카뿐이었다.

조카 이야기로는 뇌출혈로 쓰러져 두 차례나 수술받았지만,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안애경씨는 문화 전도사처럼 부지런한 삶을 살다 간 예술가다.

핀란드와 서울을 오가며 북유럽 문화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친환경적인 예술을 추구하며 우리네 삶을 개선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자유로운 삶을 누리거나 일을 놀이로 즐기는 행위를 비롯하여,

예술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 등 비슷한 생각을 가져 죽이 맞았다.

 

서서울호수공원에 만든 예술로 놀이터와 어린이 아트캠프 ‘TO BE FREE'

오산에 만든 어린이 놀이공간 나무처럼같은 어린이를 위한 일을 많이 했다.

'우리는 지금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린 워크숍에서도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한번은 동자동에서 어버이날을 맞아 빨래줄 사진전을 열었는데,

빨간 종이꽃 한 송이를 만들어 와, 숱한 사람 중 강씨 머리에 꽂아주었다.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는 강씨는 처음 보았다.

어린이와 가난한 약자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에 존경심이 일었다.

 

이제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누가 그의 일을 대신하겠는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사진이 위안했다.

부디 못다 이룬 꿈은 저승에서라도 이루길 바랍니다.

 

그 다음 날은 정동지의 고향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정영신, 정주영씨 자매를 태워 인천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따라갔는데,

마치 장례식장이 이산가족 만나는 자리같았다.

다들 얼마나 반가웠던지, 상을 당한 슬픔은 뒷전이었다.

돌아가신 분이 집안 어른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이웃에서 살아 남다른 관계였다고 한다.

옛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한 아낙은 반가워 눈물까지 훔쳤다.

 

장성하여 다들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마침 고인의 아들 정경갑씨가 정영신씨와 초등학교 동창이라 동창명부를 뒤져 알아 냈다고 한다.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시절이라

다들 시골에서 서울가야 사람답게 사는 줄 알았다.

노인만 남은 오늘의 시골이 잘 말해주지 않는가?

 

공부하여 돈 벌려면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리 아는 게 많고 돈이 많아도 인정이 메말라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핵가족화가 비정의 세상을 부추겼다.

이제부터라도 잊고 있었던 사람을 찾아내어 옛정도 되 찾자.

죽고 나면 지식이고 돈이고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튼, 세상을 떠나신 두 분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궁극의 자유는 죽음밖에 없다는 김용옥선생 말로 위안한다.

 

사진, / 조문호

 

 

 

귀로, 귀가, 고목과 세 여인 등 다양한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
배경, 구도, 서명 위치까지 어머니의 길을 향해 배치

▲ 박수근 귀로, 나무와 세 여인, 천에 유채, 41. 5x 79.5센티미터, 1962, 개인 소장. 흔히 '귀로'라고 하지만, '귀가' 혹은 '고목과 세 여인'이라고 붙인 곳도 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면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헐벗은 나무 뒤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땅도 하늘도 구분이 되지 않을뿐더러 온통 뿌옇다.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 달리 이 나무는 그림의 아랫변을 땅으로 삼아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아랫부분 밑둥과 가지의 윗부분은 박수근이 잡아낸 장면의 바깥으로 뻗어 있다.

 

나무 뒤로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세 여인이 걷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은 지쳐 보인다. 여인네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함지 같은 것을 머리에 얹었으나 위가 볼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 것을 다 팔아 거의 비어버린 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루가 저물 무렵, 눈이 약간 오는 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

 

▲ 부분화. 나무의 주기둥 한가운데 앞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모두 잘려 있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가지들이 나뉘어 뻗어간다. 그런데 앞부분에 가지들이 조금만 남은 상태로 잘려져 있다. 굵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잘려진 것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람 잦아지라고 위로 뻗는 가지 세 개만 남겼을까?

 

나무의 전체 모습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순탄하게 자랐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 곁을 지나가는 아낙네들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해를 맞으려 왼쪽으로 향한 가지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낙들은 해를 등지고 걷고 있다. 눈 내리는 흐린 날이 아니었다면 앞쪽으로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나무를 가운데 두고, 공간이 넓은 왼쪽에 두 사람 오른쪽에 한 사람을 배치했다. 왼쪽부터 각각 노랑, 빨강 그리고 검정 저고리를 입혔는데, 이 저고리 색들만이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색깔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부분화. 열 번쯤 덧그려 입체감을 만든 화면 사이로 다양한 색이 보인다
.

거의 회갈색인 전체 화면에서 검다시피 한 나무와 세 사람의 옷 빛깔 만이 조금 눈에 띄는 담담한 색조의 그림이다. 이를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배경을 색채의 장식으로 메꾸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보는 사람의 상상속에서 넓게넓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색을 볼 수 있다. 박수근은 이 많은 색이 전체 색조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수천 번 붓 작업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둡지만 밝고, 보일 듯 말듯 수많은 색깔만큼이나 많은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차분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수천 번의 붓 작업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있기 때문이다.

 

간격을 달리하였지만 세 사람을 마치 줄 세우듯 배치했고, 화면 아랫변에서는 약간 올려 그렸다. 수근의 다른 그림과 달리, 발이 닿는 부분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고 배경과 균질하게 처리하였다.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는 나무를 지나, 눈 내리는 으스름에 세 사람이 가는 길이 끝없이 적막해 보이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길은 이미 지나온 길을 포함하여 앞으로 더 멀리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균질하게 처리함으로써 생긴 심리적 공간이다.

 

▲ 부분화, 나무의 주 기둥 바로 왼쪽에 박수근 화백의 서명(흰색 화살표)이 보인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 그림에만 있는 특징이라 할 조처를 덧붙였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써넣는 이름은, 보통 그림의 아래이거나 어느 쪽이든 귀퉁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툭, 채일 수도 있는 위치에 적어놓았다. 아주 드문 예다. 이 그림의 전체 구도는 이 이름쓰기(서명)의 위치와 더불어 특이한 모습이다.

 

박수근은 1960년에 일어난 학생혁명 이후, 전에 없던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시기인 1962년에 그려졌다. 하지만 칠하고 말리고 그 위에 다시 칠하고 말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박수근 특유의 화법에서 나오는 질감과 색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결과는 흔히 화강암이라고 부르는 쑥돌의 느낌이다.

 

▲ 수석 전문가인 설화취선님의 탐석(探石) 블로그(m.blog.naver.com/wlstnddjs)에서 제공한 다양한 쑥돌 사진. 좌상단의 쑥돌은 이끼가 많이 낀 상태이다.
 

화가는 아들에게, 아비가 추구하는 색감과 질감은 이런 것이다 하며 쑥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근에게는 구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었고, 이를 한평생 추구했던 것이다.

 

박수근의  이 그림에 대한 평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 작품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 여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이 이제는 그쳤겠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하염없이 길게 이어졌을까! 아이들과 지아비를 먹여살리기 위해 그렇게 이어진 애씀이 그들의 일상을 위험에서 건져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80센티미터이다. 박수근의 작품들 가운데 꽤 큰 편이다.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려면 양손의 손바닥을 펴서 손목을 굽히지 않고 서로 붙여보자. 그 길이와 비슷하다. 수근은 길고 긴 어머니의 길을 작품의 크기, 색, 구도, 심지어 자신의 서명 위치까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 그림을 비롯해 박수근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인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광복 직전에 정신대를 피하려고 16살의 나이에 노총각이던 내 큰 외삼촌과 맺어졌다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폐해져 늘 아팠던 남편을 대신해 물고기를 사다 새벽부터 온 산중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렸던 키 크고 고우셨던 나의 큰 외숙모님이다. 내 주변 친지들 가운데 가장 많이 고생하신 그 분을 어찌 잊으랴.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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