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문과 양기훈의 의기(義氣)

 
- 閔忠正公 血竹圖 / 양기훈 / 1906.7.17 / 대한매일신보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 원본. 125x54cm, 고려대박물관 소장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일본과 조선 간에 체결되었다. 일본의 강권과 무력으로 강제된 조약이었다. 조선의 주권과 국권은 상실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통치하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당시 시종무장관의 직에 있었는데 비분강개한 그는 을사조약의 파기를 고종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을사오적과 그 배후인 일본이 모든 권력을 가진 뒤라 그의 항소가 실행되지 않자 최후의 항거로써 유서 3장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런데 민영환의 의거가 일어난 지 250일 후 그가 거처하던 집 방에서 충절의 넋이 발현하듯이 붉은 피가 묻은 것처럼 푸른 대나무 네 줄기가 솟아오른 신비한 사건이 일어난다.
 
대한매일신보가 촬영한 혈죽. 사진을 인쇄할 기술이 부족하여 그대로 싣지 못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판화를 보면 혈죽은 전체적으로 왼쪽을 향해서 많지 않은 잎이 솟아있고, 그 잎은 열사의 기개처럼 날카롭게 묘사되었다. 이 혈죽도의 원본은 대나무 부분은 감청색 먹으로, 찬(贊)은 먹으로 쓴 판화였다. 물론 신문에는 다시 개작한 흑백 판화로 인쇄되었다. 그리고 혈죽 옆에는 남정철이 붙인 화제(畵題)가 있다. “우죽(右竹)은 본사원(本社員)이 한국 명화 양기훈씨에게 일 폭 화본을 청득(請得)하야, 본보란 내(內)에 인재(印載)하야 광포(廣佈)하노니 충절을 애모하시는 첨군자(僉君子)는 차(此)를 애상(愛賞)할지로다.” 즉 “오른쪽의 대나무는 본 신문의 사원이 화가 양기훈에게 청탁하여 제작한 작품을 인쇄하여 널리 알리니 민충정공의 충절을 애모하는 여러 군자들은 이를 슬프게 생각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민영환의 충의를 애도하는 권동수의 시가 있다.
 
양기훈의 혈죽도를 옮겨 판 목판화. 109x60cm
 
그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중식도 또 다른 혈죽도를 수묵으로 그렸는데, 이 두 화가의 혈죽도는 일본의 침략과 망국의 위기를 고발하고 국민들에게 구국 투쟁을 촉구한 뜨거운 지사적 격정에서 비롯된 것 이었다. 이 혈죽도를 삽화로 게재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의식은 작가인 양기훈의 작품만큼이나 뜨겁게 신문의 시대적 소명을 실천한 예라 볼 수 있다. 아마도 대한매일신보와 목판 혈죽도의 관계는 우리 근대사 최초의 매스미디어에 의한 선동적 그래픽이라 여겨진다.
 
 

한편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침략기 항일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중요한 언론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선각자들의 도움으로 7월에 창간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베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문에 게재된 양기훈의 혈죽도 목판화. 초본 목판화를 약간 수정했다.
 
양기훈의 혈죽도가 게재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영진과 편집진의 민족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서울신문>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여전히 정부의 기관지처럼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대한매일신보의 비극이다. 베델이나 양기훈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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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기 전의 민영환 모습. 민영환 유고에 실린 사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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