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호, 왕인숙씨의 아들 태영군과 강찬모, 정영임씨의 딸 현인양이

지난 5281230아펠가모 반포'에서 화촉을 밝혔다.

 

이번 결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십 년 전인

초등학생 시절부터 가까웠던 친구 사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살다 보면 어린 시절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늘 친구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축원한다.

 

예전에는 딸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딸을 잃은 듯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이젠 세상이 역전되었다.

아들 장가보내는 부모 마음과 뒤바뀐 것이다.

 

딸을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 같은 사위를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결혼식에는 많은 지인이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했다.

 

이성 구로구청장을 비롯하여 조준영, 오세필, 전활철,

이만주, 서길헌, 조해인, 김수길씨 등 많은 분을 만났는데,

김명성씨는 부인 지혜숙씨와 아들 한성군까지 대동했다.

 

강 화백께 다시 한번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5일, 정 동지와 함께 서산의 불교 유적을 찾아 갔다.

삼십여 년 전 불교 유적 답사 때, 문화재급은 대부분 촬영했으나 대부분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그러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생김새나 표정이 이웃 아저씨처럼 친근해 가끔 생각났다.

요즘이야 내비 따라가면 쉽게 찾아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물어물어 찾아 간 곳이었다.

 

백제 후기 서산은 고구려나 중국과의 해상 무역 요충지였다.

중국 불교문화도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당연히 융성했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부터 찾아갔다.

마애불이란 암벽에 새긴 불상이고, 여래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의,

부처를 뜻하는 열가지 이름 중 하나다.

 

화강암에 조각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 말기 불상이다.

본존 여래 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반가 사유형의 보살 좌상이, 오른쪽에 보살 입상이 안치되었다.

마애불 중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지만, 가야산 수정봉 기슭에 숨어있어 1959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께서 보원사지유물조사 나왔다가 발견한 국보다.

 

이곳에 가려면 운산면 저수지와 터널을 지나 용현계곡을 끼고 조금 가면 

마애불을 알리는 표지가 있고, 용현계곡 다리를 건너 초입에서 650m 지점에 있다.

관리소 옆의 불이문을 통과하여 돌계단 따라 가면 거대한 절벽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침 스님께서 마애여래삼존상 앞에서 예불을 올려, 함께 평안을 빌었다.

대좌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는 삼존상의 자태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초생달 모양의 눈썹에다 얕고 넓은 코, 미소 띤 여래입상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제화갈라보살 입상과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자비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입상의 편안한 조각과는 달리, 광배 부분은 섬세했다.

광배 중심에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법의는 가슴 띠 매듭이 있고, U자형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릎 아래까지 드리운 옷 주름이 사실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발밑에는 연꽃이 조각되었다.

 

머리에 관을 쓴 오른쪽 보살 입상은 눈과 입을 통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 장식만 있고, 아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반가상의 두 팔은 떨어져 나갔으나, 왼쪽 다리에 오른쪽 다리를 걸쳤다.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오른 손가락으로 턱을 받친 세련된 솜씨다.

 

삼존불은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새겨진 삼존불은 햇빛의 방향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르게 보인다.

약간 기울어진 암벽에 새겨 비바람에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만든 미적, 과학적 재치도 돋보였다.

 

다음에는 그 곳에서 약 1,2km 지점에 있는 보원사지’를 찾아갔다.

 

백제 양식의 '보원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천년을 세월을 뛰어넘었다.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4m 높이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석조,

법인국사 보승탑과 보승비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그 가치가 높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이르는 불교 유물이 다수 발견된 곳이다.

 

한 때는 사찰에 머문 승려가 천 명에 이르렀다는데,

이 넓은 절터에 전각이 가득 들어 찼다면, 분명 대 사찰임이 틀림없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유적과 발굴된 유물들이

보물이나 국보급이라 조선시대 이전부터 융성한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절터 곳곳에 천년 고찰의 위용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오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절터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두고, 개울 쪽에는 당간지주와 돌물확이,

개울 너머에는 오층석탑과 금당터, 사리탑이 남아 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앞쪽 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가 새겨져 있다.

지주의 마주 보는 안쪽 면의 위, 아래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게 만들었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각 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알려졌다.

당간지주 오른편 절터 끝부분에 보원사지 석조도 있었다.

 

아마 그 부근에 요사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건물의 흔적은 없었다.

이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커다란 직사각형의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안쪽과 윗쪽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보아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윗쪽에는 크다란 멧돌도 남아 있었다.

 

드넓은 절터 중앙에 오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석탑은 중후한 안정감과 경쾌한 상승감이 돋보이는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로 꼽힌다.

높이가 9m나 되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고, 위층 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새겼다.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었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백제계 석탑의 특색이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긴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 있다.

 

오층석탑 뒤에는 금당터가 자리 잡고 있다.

주춧돌만 드문드문 남아 있으나, 그 위에 웅장하고 정교하게 쌓은 돌 축대가 있었다.

그 돌 계단 부근에 불이문이나 금강문이 있었을 것 같다.

금당터 뒤에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는 법인국사탑을 모셨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법인국사 탄문은 신라 말과 고려 초의 고승으로, 고려 광종 19년에 왕사, 광종 25년에 국사가 되었다.

말년에 보원사에 머물렀다는데, 이곳에 사리탑을 세운 걸 보면 아마 어렸을 때 수도한 것 같다. 

법인국사 탄문은 광종 26년에 보원사에 입적했다.

당시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임금인 광종이 슬퍼하며 부도를 세우라고 명했단다.

 

자연석을 입체적으로 쌓은 부도의 석축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정연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는 8각의 아래 받침돌을 2단으로 쌓은 뒤 8각 기둥을 세우고, 윗 받침돌을 올렸다.

아랫단에는 8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아래는 사자를,

윗단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윗 받침돌 아랫면에는 연꽃무늬, 윗면에는 난간 형태로 만들었다.

​팔각의 몸돌은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과 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이었다.

그 양쪽에는 사천왕과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면에는 목조건축 같은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상륜부에는 연꽃이 조각된 복발 위로, 세개의 보륜이 차례로 놓여 있다.

 

사리탑 옆에는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가 있다.

높이 2.3m, 1.15m로 글자 수가 5,000여자나 되는 크기로

법인국사의 일생과 비를 세운 경위를 기록해 두었다.

비석 받침인 귀부는 거북 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이 밖에도 보원사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말하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대형 철불도 출토되었다.

철조여래좌상, 철불좌상외에도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도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 / 국립중앙박물관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제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8~9세기의 철제불상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 수려한 얼굴 생김에 완벽한 신체 비례로 보아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목에는 신라 불상 특유의 삼도가 뚜렷하며,

 오른팔과 어깨 및 가슴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의 주름도 철로 주조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주는데,

신라 미술을 대표하는 아름답고 완벽한 불상으로 알려졌다.

파손된 손 부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훼손한 후,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한다.

 

보원사지 출토 철불좌상 / 국립중앙박물관

이 철불좌상은 '못난이 철불'로도 불리며, 크기에 비해 전체적인 조형미는 떨어진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데다가, 하체에 비해 상체가 작고 어깨는 좁다.

법의도 몸통에 대충 선을 그어 주름만 표현한 느낌이다.

추상화되어 가는 네모꼴의 얼굴과 직선으로 표현된 눈과 입의 형태는

고려시대 들어 개성적으로 변해 가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시주자의 얼굴을 본 따 만들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보원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 국립중앙박물관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 은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19684월 보원사지를 발굴 정비하는 과정에서,

보원사지에서 약 200m 거리에 있는 경작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도금 상태가 양호하여 아직도 금빛 찬란하다.

약간 앞으로 숙인 얼굴은 갸름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며,

근엄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띄고 있다.

온몸을 감싼 법의 한쪽 자락은 왼쪽 팔뚝에 걸쳐 넘겨져 있으며,

끝자락이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두 손과 두 발은 손상이 심하고,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보원사지에서 나와 '개심사'로 가기 전에 해미장터부터 들렸다.

그날이 해미 장날이기도 하지만, 시장기가 돌아서다.

2년 만에 들린 해미장터였는데, 그사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더라.

난장은 오간 데 없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장돌뱅이도 별로 없는 데다, 난장을 지키는 할머니도 몇 명 없었다.

전통시장이 사라지고 변해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장터풍경이었다.

장터 현대화가 장터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당국자들은 정말 모를까?

해미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번듯한 현대식 장옥을 좋아할 리가 없다.

이제 해미만의 장터 추억은 사진 속에서나 남아 있을 뿐이다.

 

해미읍성 앞 종합상가에 있는 부여식당’으로 들어갔다

해미의 향토 음식이라는 호박게국지를 시켰는데, 묵은김치와 호박을 넣고 끓인 찌개였다.

호박의 단맛이 좀 거슬렸으나, 국물은 시원했다.

게가 없으니, ‘호박김치국지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에 자리 잡은 수덕사 말사 개심사를 찾아갔다.

마음을 열라는 개심사의 멋은 절집의 작은 아름다움에 있다.

한국의 미는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다.

명산에 자리 잡은 아담한 건축이야말로 한국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해강 김규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현판이 붙은 안양루가 버티고 있었다.

안양루를 돌아 해탈문을 들어서니 개심사 대웅보전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심검당과 무량수전이 안양루를 에워싸고,

그 옆으로 명부전, 해우소, 종각, 산신각과 연못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자연을 경영한 조선 정원 미학의 본보기다.

 

절의 진입 방식이 경상도 부석사나 불국사처럼 누각 아래를 거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내소사나 선암사 같이 누각을 끼고 진입하는 백제계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안양루 옆에 해탈문을 두어 대웅전의 측면을 보면서 들어가,

대웅전과 중정의 아름다운 어울림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웅보전은 단정한 장대석 기단에 자연석을 주초로

정면 3, 측면 3칸의 앞뒤로 조금 긴 장방형 9칸 다포 건물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혜감이 창건하여 개원사라 불렀다는데,

1350년 처능이 중창하며 개심사로 바꾸었다.

 

1710년에 개수한, 몇 채 남지 않은 조선 초기 건축물이다,

절집의 공포는 다포계지만, 건물 안쪽으로 다시 주심포식 천장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 준다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옮겨 가는 과정의 절충 형식에 가치를 둔다.

 

대웅전의 불상은 여느 불상과 사뭇 다른 푸근하고 인간적인 면모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소를 머금은 불상의 풍모에서 조각가의 장인적 심미안을 엿볼 수 있다.

 

불단 장엄의 대표적 방식은 화려한 닫집을 만들고, 그 안에 청룡과 운학으로 장식하는 것이지만,

개심사 대웅보전 삼존불 위에는 화려한 닫집 대신 운궁형의 소박한 보개를 만들었다.

정교한 목조 조각이 생기를 불어넣으며, 고색창연한 단청이 세월의 멋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개심사 전각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지만,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과 부재로 삼아

조선 건축의 멋인 자연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

 

개심사문화재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그 앞의 오층석탑’, 그리고 ‘청동 향로가 있다.

불가의 큰 행사나 대중 법회 때만 볼 수 있는 괘불도 있다.

옥 외 걸개그림인 개심사 괘불은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에 그려진 불화다.

 

1772년에 제작된 이 괘불은 삼베에다 석채와 당채로 채색한

길이 10.1미터에 폭 5.87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화다.

석가모니 영산회상 장면을 그린 것인데, 화면을 꽉 채운 석가모니 상에 견주어

주변의 보살과 시중들은 매우 작게 묘사되었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녹색과 청색, 붉은빛이 어우러져, 밝고 장엄한 맛이 일품이다.

 

조선의 전통 건축에서 민가나 서원, 사찰 마당에는 꽃과 나무를 심지 않고 불필요한 석물도 놓지 않았다.

조선 사대부는 내면에 흐르는 금욕의 절제미를 마당에 표현하는 것이다.

담 너머 수목을 감상하며 시야를 넓혔으며, 내당 후원에 화단을 두어 답답한 여인네 마음을 풀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심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심은 꽃나무는

모두 걷어내 반듯하고 정갈한 절집 풍경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대중 법회 때 사용되는 철재 괘불 지지대도 철거해

원래대로 돌로 된 지지대만 두어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심사에서 내려와 아산의 김선우씨를 만나야 했다.

선우씨가 정선 불난 집 대신 자신의 땅에 작업실을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지난 달에도 가봤지만,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야산이었다.

 

김선우씨를 비롯한 지역활동가들이 오래전부터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해 산을 사들였으나,

건축법 등 여러 가지 제약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젠 모든 규제가 풀렸으나, 세월이 흘러 대안학교 건립이 무산된 것 같았다.

더러는 자신의 지분을 팔거나 찾아갔다고 했다.

이제 김선우씨와 김창복씨 등 몇 명만 남았는데,

선우씨가 소유한 부지가 4,000평에 이른다고 했다.

 

오후 4시 무렵에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선우씨 외에도

김창복씨와 김 온, 양햇살 양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과 한 달여 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래전에 지은 기존 기와집 외에도 대형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여러 용도의 작업실로 개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할 주택 자리는, 포크레인으로 언덕을 평지로 만들어 놓았더라.

당장 이동식 주택을 구입할 형편은 안 되지만, 이제 한시름 놓은 것이다.

 

주말이라 상행선 차 밀릴 것이 걱정되어 저녁 식사후 급히 돌아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할 일도 많아졌지만, 도움만 받는 마음의 빚이 무거워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거대 양당이 독점하는 우리나라 정치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두 당의 공천만 받으면 사기꾼이나 도둑놈도 의원이 될 수 있다.

 

국회의원이야 어느 정도 검정 되어 자질이라도 가늠할 수 있으나

기초의원은 공보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대개 정당을 보고 투표한다.

 

어제 와이티엔 방송에 기초의원들의 문제점이 보도되었다.

건설업자들이 지자체의 예산을 따내기 위해 그 자리에 목을 맨다는 이야기에 귀가 막혔다.

 

나 역시 기초의원 투표는 공보물에 의존할 경우가 많았다

아들이 은평구의회 후보로 나선 지난번부터 꼼꼼히 살피게 되었는데,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거대 양당의 1, 2번 후보만 줄줄이 당선되는 잘못된 구조가 2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양당의 싹쓸이에 맞서 진보 4당이 후보 단일화를 결정했겠는가?

이번 은평구 기초의원 선거에는 정의당과 녹색당, 진보당, 노동당이 연합한 것이다.

 

진보 4당은 거대 양당만 존재하는 은평 지역 정치는 갈등만 있을 뿐

주민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단일화된 진보정당 후보를 선택해 달라고 호소했다.

노동자, 장애인, 기후 위기 취약계층 등 다양한 주민들의 목소리를 구의회에 반영하기 위해

지역 정치의 지형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8회 은평구의회 여덟 개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 면면을 살펴보니, 여야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세 지역에서는 각각 여야 1명씩 공천하여 여섯 명이 무투표 당선되었고,

네 지역에서는 각각 세 명씩 출마했는데, 그곳도 양당이 독점한 가운데

정의당, 녹색당, 무소속 후보가 각각 한 명씩 얼굴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지역에 세 사람을 선출하는 은평 라선거구에서는 여덟 명이 출사표를 던지는 이변이 벌어졌다.

 

라선거구(역촌동, 신사1동)는 오랫동안 조햇님이 활동한 지역이 아니던가.

민주당에서 2, ‘국민의 힘에서 2, 정의당에서 1,

공천에서 밀린 후보까지 합해 3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다.

 

어쩌면 정의당의 구의회 입성이 유리한지도 모르겠다.

거대 양당의 지지표가 분산되는 데다, 전과자까지 출마한 오합지졸에 불과하니까...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9, 조햇님의 응암역 합동 유세장을 찾아 나섰다.

 

오후 630분경 응암역에 도착하니, 퇴근 시간대라 그런지 지하철에서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3번 출구에 판을 벌인 유세차에서는 정의당 후보 조햇님을 비롯하여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권수정후보와 정재민 시당위원장이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심상정의원까지 휠체어를 타고 나왔더라.

또 하나 기특한 것은 손녀 하랑이까지 아빠를 지원하러 따라온 것이다.

 

권수정 서울시장 후보는 걱정 많은 도시를 적정 도시로

자신의 이름처럼 전면 수정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에 있는 23만 명의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 보장을 제1공약으로 내세우며,

잿빛 구린 도시를 숨쉬기 편한 그린 도시로, 함께 살아가는 도시로 전면 수정하겠다.”고 했다.

 

권수정 후보가 내세운 공약 중 내 마음을 끄는 것은 공공주택을 늘려

세입자의 주거 안정을 돕는 구조를 마련할 것이라는데,

특히 홈리스들의 주거지원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대목에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온 한 젊은이는 조햇님 후보를 아는 듯했다.

! 오늘은 햇님 부대가 총 출동 했네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자리에서 피켓 들고 일인시위 하는 모습을 숱하게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불화가 장 춘씨도 유세장에 나와 조햇님을 지지해 주었다.

장 춘씨가 강아지를 안고 나온 할머니에게 조햇님 지지를 부탁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조햇님은 정의당 동물복지위원장이라며 우리 복실이도 투표권만 있다면 찍어 줄 거라는 농담을 하셨다.

 

불편한 몸으로 유세차에 오른 심상정의원은 이 지역구가 자신이 성장한 지역구라며,

어두운 구석구석 마다 조햇님의 이름처럼 골고루 햇빛을 비쳐 줄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조햇님 후보는 기득권을 위한 거대 정당들의

정쟁을 멈추게 하여 시민의 삶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출마 포부를 밝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은평, 어르신들의 삶이 존중받고

아이들이 안전한 은평, 차별 없는 은평을 꼭 만들어 내겠다."며 약속했다.

 

이제 투표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투표에 앞서 자기 지역구의 기초의원 후보부터 면밀히 살펴보자.

찍을 후보가 정해진다면 최소한 인터넷에 검색해서라도 한 번 알아보자.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보고 찍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신의 한 표가 지역을 살리고, 잘못된 선거풍토를 바꿀 수 있음을 명심하여

현명한 투표권을 행사하시기 부탁드린다.

 

사진, / 조문호

 

 

글 /  최석태 (미술평론가)

 

▲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 후반, 캔버스에 유채.&nbsp;72x60cm, 개인소장.
 

1948년 11월, 이쾌대는 조선미술문화협회의 제3회 정기전에 야심적인 크기의 그림을 발표한다. 150호 크기는 높이가 170센티를 좀 넘고, 가로는 2미터가 넘는 크기다. 그림의 제목은 <조난(遭難)>이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발표된 때는 1945년 8월에 광복이 된 때로부터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잘 알다시피 남과 북에는 따로 각기의 정부가 세워진 때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투어 한마디씩 했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담긴 내용과 화법이 남달랐다.

 

화가 박고석은 “문제작”이라 했고, 해방공간에서 이쾌대의 처신을 격렬히 비난해 오던 비평가 박문원은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또 벽화나 대작을 꾸미기에 우선 적당한 하나의 양식을 창조한 사람”, “인민미술에 대한 열정은 (그가 속한 조선미술문화협회 회원 중에서) 오직 이쾌대씨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화가 겸 미술문필가 김용준은 “그 기법이 현대적인 사실이 아니요, 16, 7세기적인 사실의 인상을 주는 위험성이 있었다.”고 했고,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이쾌대의 <조난> 이전에 발표된 <해방고지>를 겨냥한 듯, 이쾌대의의 작품 방향에 대하여 “라파엘의 인물에다 조선옷을 입혀놓은 것 같았다.”라고 평했다.

 

이 그림은 우리 역사 중에서도 가까운 100년 동안에 이룩된 시각예술 작업 중에서 가장 문제를 품은 작품이다. 복잡하고 착잡한 정세 속에서 그려져 제출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친형 이여성이, 암살당한 여운형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에서 이쾌대는 신분상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의 부인이 그림을 잘 간직했으나 그 후 오랫동안 작품의 존재조차 발설하기 힘들었다.

 

이처럼 화제가 되었다가 50여년 동안 사라졌던 이쾌대의 문제작 <조난>은 어디로 갔을까?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과연 그 <조난>일까?

 

이쾌대가 그린 일련의 대작 그림은 총 4점으로, 모두 ‘군상’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부른다. 필자는 그중 아래 2점은 ‘해방고지’라고 생각한다. 공중을 날듯 하는 두 여인이 숨어서 무엇인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설정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 해방고지1, 1945-8년,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에서는 '군상 II'로 소개되었다.
▲ 해방고지 2, 1945-8, 천에 유채, 225x181센티미터, 유족 소장.. 2015년 '군상 I'로 소개되었다.
 

나머지 2점은 ‘조난’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양상은 다르지만 두 그림에 모두 폭발이 그려졌다. 특히 앞의 그림은 폭발이 거대하여 사람들의 움직임과 조응하면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후자는 전자의 상태를 발전시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은 앞의 해방고지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 군상, 1948, 천에 유채, 160x130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 2015년 '군상 III'으로 소개되었다.
▲ 조난, 1948년, 천에 유채, 216x177센티미터, 유족 소장.&nbsp;2015년 '군상 IV'로 소개되었다.
 

문제의 이 그림은 자세한 내용이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논자들에 의해 1945년의 광복부터 대체로 한국전쟁이 발생한 시기를 가리키는 이른바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한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1,000쪽에 이르는 막대한 분량의 저서『독도 1947: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돌베개, 2010)에서 이 그림을 거론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 이화대학 사학과 교수는 이 그림이 바로 그 <조난>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이 <조난>이 아니라고 보는 여러 견해도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런 사정은 바뀌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필자는 여러 정황상 이 그림이 1948년 조선문화예술협회 3회 정기전에 출품된 바로 그 <조난>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조난>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은 폭발로 보이는 사건 혹은 사고에서 비롯된 사태임이 분명하다. 폭발의 위치를 시계에 빗대자면 12시. 한밤중에 폭발이 일어났고, 그 폭발 때문에 놀란 사람, 폭발은 모르는지 아는지 화내는 사람이 보인다.

 

▲ <조난> 오른쪽 세부.

화면의 오른쪽 사람들은 화면 안쪽 멀리서부터 보는 사람의 눈앞으로 쏟아져 나오듯 쓰러지거나 놀라거나 한다. 그 뒤로는 바위를 들어 내리찍으려는 사람과 이를 말리려는 사람이 화면 맨 안쪽에 보이고, 놀라움을 가라앉히려는 남녀를 비롯하여 놀라서 넘어지는 여자 그리고 머리를 잡거나 물어뜯는 사람으로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여자도 보인다. 맨 오른쪽에는 화면을 나누는 듯한 배경을 설정하고 아이를 거느린 여자가 무기력한 상태를 보인다.

 

▲ <조난> 왼쪽 세부.

그림 왼쪽의 인물들도 몇 개의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화면 맨 안쪽에 폭발에 놀란 듯한 여러 사람이 보인다. 오른쪽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상태를 피해 달아나려는 사람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쳐서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여자를 부축하고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남자들이다. 그들의 왼쪽에는 아이들 여럿이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왼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폭발로 인해 다친 사람을 옮기거나,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는 듯하다.

 

이쾌대의 작품 <조난>이 발표된 시기는 그해 6월 미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다. 그래서 당시 박고석은 이 작품을 보고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쾌대는 독도사건을 소재로 르포타쥬나 현실고발을 하지 않았다. 독도 사건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화면의 어디에도 바다나 배 같은 소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에서의 사태를 어디에선가 벌어진 일로 연출하였다. 직접 사건을 그려서 즉자적으로 알게 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상,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이쾌대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관심을 두고 암시 내지는 은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으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가 만든 정황은 육지에서 어떤 폭발로 혼란이 일어나지만,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이를 해결할 것이라는 듯이 말한다. 이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정체 모를 어떤 폭발에 죽거나 다치거나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현실의 고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명백히 일종의 은유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낭만주의 시대 대표화가 제리코가 당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려 참상을 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들라크르와의 대표작 <자유의 여신>과 견주는 견해 또한, 화풍은 유사하나 작의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nbsp;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

그보다는 오히려, 제리코나 들라크르와 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에 나타나는 방향성과 연관해보거나, 폴 고갱이 그의 만년작이자 전지구적이라 할 순례를 거쳐 이룬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천에 유채, 375x139센티미터, 보스턴 미술관 소장)에 견주는 편이 낫다.

 

이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조난>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처] 뉴스아트 (http://www.news-art.co.kr)

좌로부터 정주영 아들 김희중, 외손자 김동훈, 사위 김상균, 정주영 본인, 딸 김현아, 김소연, 언니 정영신, 사위 이성표

 

정주영 (62세)은 정영신동지의 친동생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녀의 지난한 삶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얼마나 살길이 막막했으면 백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6개월 동안 울었을까?

 

그러나 왈순아지매처럼 억척스럽게 자식 셋을 잘 키워 낸 것이다.

다들 대학을 졸업한 후 딸은 간호사로 아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소현이와 현아 두 딸 모두 결혼식도 코로나 시국에 치루었다.

하필 하객 초청도 못할 시절에 식을 올려 부모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자식들을 위해 축의금 적금 든 돈이 얼만데...

 

이제 두 딸 모두 시집을 보내 한시름 덜었지만,

텅 빈 집에 홀로 남아야 하는 외로움은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둘째 사위 김상균과 김현아의 결혼 날이 어저께 같은데, 삼 개월 전에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손자를 보았다는 소식만 들었지, 딸네 집에 가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코로나에 발목 잡혀 친정어머니까지 갈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나?

백일이 지나도록 손자 한 번 안아보지 못했으니... 

 

그러나 현아가 찍어 보내 준 손자 옹알거리는 사진을 들고 동내방내 자랑하며 신바람 난 것이다.

 

이제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살림이라 연신내에서 불광동으로 줄여 이사했는데,

처음으로 가족들이 이사한 불광동 집에 다 모인 것이다.

 

아들 김희중은 휴가받아 나왔고, 큰딸 소현이와 큰사위 이성표,

둘째 딸 현아와 둘째 사위 김상균까지 온 가족이 모였는데,

거기다 복덩이 손자 동훈이까지 안고 왔으니, 완전 봄 사건 난 거지.

 

이제 덤직한 사위들과 달덩이 같은 손자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든든하겠나.

사위들 먹이려고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데,

정 동지 따라 나까지 달라붙어 음식을 축냈다.

 

시종일관 손자 재롱에 푹 빠진 모습에서 첫 손자 본 할머니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릿다운 아낙이 할머니로 변한 모습에서 세월의 빠름도 실감했다.

 

이것이 평범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고, 이름 없는 소시민의 성공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남은 생을 즐겁게 가꿔, 늘 행복하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마침 '딴지일보'에서 대마를 취재한 기사가 있어 나도 한마디 보탠다.

난 76세의 늙은이로 반세기 가까이 대마초를 재배해 피워왔다.

한 때는 법정에 서기도 했으나, 악법은 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개적으로 블로그에 올려 약간의 문제도 생겼으나, 개의치않는다.

 

술을 매일 마시지 않듯이, 대마도 시도 때도 없이 피우지 않는다.

평균 일주일에 서너번 피우지만, 좋은 일이 있을 때만 피워왔다.

그러나 긴 세월  대마초에다 담배까지 즐겨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젠 대마는 피우지 않지만, 담배는 아직 못 끊었다.

어느 것이 중독성이 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마에는 CDB 성분과 THC 성분이 있는데,

CDB 성분은 암. 우울증, 뇌전증, 당뇨병 등 50여종이나 되는

다양한 질병에 치료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졌다. 

문제로 여기는 THC 성분에 환각성이 있다지만,

그건 환각이 아니고 한 곳에 집중시키는 도취감이다. 

 

그런데도 대마를 마약에 포함시켜 강력범으로 처벌하는 이유가 뭘까?

종이, 알콜, 담배, 에너지 등 미국의 거대 재벌 음모로 대마가 마약으로 둔갑했지만,

궁색하게도 관문이론, 또는 단계론을 내놓고 있다.

즉 대마초를 피우다 더 강한 마약으로 발전해 간다는 말이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한 번도 마약은 하지 않았으니까.

포도주 애호가들이 더 취하기 위해 위스키에 빠지지 않는 논리와 같다.

 

술이나 담배, 대마초등 무엇이던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끌고 다니면 된다.

필요할 때, 있으면 하고 없으면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는다.

 

2년 전부터 대마를 피우지 않는 대신 먹기 시작했다.

술을 담아 마시기도 하고, 강정을 만들거나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는데,

초기에 채취한 대마나물은 식감이나 맛이 귀가 막혔다.

선조들이 왜 대마를 나물로 먹지 않았을까?

대마 나물 덕인지는 모르지만, 오래된 변비가 깜쪽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대마나물을 후라이팬에 볶아 열을 가하게 되면

THC 성분이 살아나 도취감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었다.

담배로 피워 한 두시간 가던 도취감이 온 종일간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만약 그런 도취감이 싫다면, 데치는 것 이외의 열만 가하지 않으면 된다.

맛은 물론 몸에 이로운 약제 성분이 많아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도취감을 일으키는 THC 성분에 대한 효과로는,

술이 사람의 감정을 업 시킨다면, 대마는 감정을 다운시킨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영화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등

어느 한 곳에 몰입할 때 주로 피운다.

대마는 신체의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며 집중력을 극대화시킨다.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소리에 민감하게 하는가 하면, 

미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음식 맛에 빠져들게도 한다.

기분을 좋게 만들어 바보처럼 비실비실 웃기도 하고, 

시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사물에 빠져들게도 만든다.

어떨 때는 육감을 예민하게 만들어 따뜻한 사랑에 빠져들게도 한다.

모든 생각이 한 곳에 집중해 때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떠 오른다.

인간의 오감을 다스리는 대마가 어찌 영약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화가 날 때 대마를 피우면 화를 다스릴 수 있어 좋다.

생각이 깊어지니,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게 만든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화가 수그러들고, 상대방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니 가족과의 불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약장사 같은 소리지만, 눈치만 보는 정치인들 보니 간이 뒤집혀 하는 말이다.

이젠 강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제대로 밝혀 이해시키고,

엉터리 대마관리법부터 뜯어 고쳐라.

 

글 / 조문호

 

[호기심]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의 대마초문화 :

10년 이상 대마초를 피면 어떻게될까?

[스크랩 : 딴지일보]

대마초가 이슈다. 본지는 궁금했다. 대마초를 오랜 기간 피면 도대체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거지? 술, 담배랑 느낌이 얼마나 다른 거지? 술, 담배, 대마초를 꾸준히 접한 사람이라면 비교, 분석이 가능할 텐데, 그 경험담을 원고로 받고 싶다!, 라고.  

... 실패했다. 

 

하긴 대마초를 핀다 하더라도 대놓고 말할 리 만무하다. 찾는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대마초는 불법이라 글을 쓰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해서, 대마초가 불법이 아닌 나라의 외국인을 찾아 원고를 받았다.     [편집부 주]

 

대마초 피는 나쁜사람

 

나는 만 16살 때부터 대마초를 피워왔다.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대마초를 피우는 게 불법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는 범위내에 집에서 피우는 건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마초를 10년 이상 피웠지만 단 한 번도 법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다.

 

대마초를 즐기던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땐 살짝 충격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계 나라에 간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사람이라,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대마초를 끊었다. 끊긴 했지만 왜 한국이 대마초에 대해 이 정도로 엄격한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 온 지 꽤 지났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한국에는 대마초에 대한 과민반응이 있는 것 같다. 경험에 따르면,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한국인들도 대마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한국에서 대마초는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마약이고 손을 대는 사람들은 다 나쁜사람이 된다.

 

글쎄다. 난 16살부터 28살까지 꾸준히 대마초를 피웠지만 필로폰, 메타돈, 헤로인이나 코카인과 같은 강한 마약을 복용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의욕조차 없었다. 학교도 잘 다녔고, 재수없게도 학교 성적이 좋았고, 친구도 많았고, 여자한테 나름의 인기도 있었다. 한마디로 대마초를 피웠는데도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대마초 터부

 

한국사람과 대마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내가 19살 때 엄마가 내 서랍을 뒤져서 대마초를 찾아냈다. 울면서 이거 뭐냐고 언제부터 마약중독자가 됐냐고 나한테 물었다. 난 그때 엄마의 지나친 걱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도 매일 술 먹잖아’라고 반박했다. 두 달 동안 서로 말조차 안 했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갑자기 깨달았다. ‘대마초가 무엇인지 모르셔서 그러셨구나!’ 모르면 두렵고, 두려우면 걱정하고 보호해 주고 싶다. 선의는 좋았다. 반성하고 엄마를 찾아가서 사과했다. 사과한 다음에는 대마초가 무엇인지 차분히 설명해 줬다. 내 말이 끝나면 또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반전이었다. 자신이 술을 마시듯 아들도 대마초를 피운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쿨하게 농담으로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마초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반응한다. 내가 알기로는 70년대 초 한국에서도 대마초는 아주 흔했다. 유신 때부터 대마초를 금기시했고,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만 하는 나쁜 짓이 돼 버렸다. 

 

물론 대마초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금지시킬 정도로 나쁜 것인지는 의문이다. 실은 이 논쟁은 과학적 사실보다 정치적, 문화적 논쟁이다.

 

 

대마초가 완전히 합법화된 나라는 우루과이, 남아공, 그리고 미국(콜로라도, 오리건, 알라스카, 워싱톤주, 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네바다, 메인)밖에 없다. 그러나 대마초를 처벌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나라는 의외로 많다: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체코, 러시아,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 질환 치료의 목적으로 대마초를 허용하는 나라까지 더하면 이 목록은 훨씬 길어진다. 그리고 요새는 캐나다, 프랑스, 그리고 미국 다른 주에서도 대마초 합법화나 처벌완화가 거론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마초가 아주 나쁜 것이라면 이런 나라들은 법을 풀었을까? 후진국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대마초를 불법화시키면 어둠의 시장을 독점하는 마피아가 그만큼 커진다. 마피아나 폭력조직이 대마초 시장을 독점하게 될 경우, 대마초의 가격이 비싸지면서 품질은 떨어지게 된다. 착취나 사기도 생기고 치안 문제도 악화된다. 미국이나 우루과이처럼 합법화시키면 정부가 통제할 수 있고 세금도 걷으면서 마피아를 약화시킬 수 있다. 합법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을 느슨하게 풀면 시민들의 통제권이 높아지면서 마피아의 권력이 낮아진다.

 

참고로 미국에서 1919년부터 1933년까지는 금주법 때문에 마피아의 황금기였다. 알 카포네(Al Capone)라는 유명한 마피아 보스는 술 밀매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큰 그림으로 보자면 대마초의 합법화는 일리 없는 정책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대마초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인다. 유신헌법부터 지금까지 그냥 터부시됐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겠지만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르다 보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대마초의 처벌완화 문제가 정치적인 이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대마초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부터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을 토대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아주 구체적으로 대답해 보겠다.

 

대마초는 마약인가?

 

강한 마약(hard drugs)과 약한 마약(soft drugs)을 구별해야 한다. 강한 마약은 메타돈, 헤로인, 코카인과 같은 화학제품이다. 신체적 의존(physical dependance)이 심하기 때문에 마약을 시작하면 중독자가 될 확률이 높고 중독자가 되면 몸도 정신도 망가진다. 약한 마약인 대마초는 화학제품이 아니라 자연 물질이고 신체적 의존보다는 사회적 의존이 더 높다. 다시 말해서 몸이 요구해서 피우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이 권하면 피우려는 의욕이 생긴다. 대마초만으로 몸이나 정신이 망가질 확률은 거의 없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마초보다는 술과 담배가 건강에 더 해로우며, 의존성이 더 높다. 만약 대마초를 마약이라고 한다면 술-담배 또한 마약이라고 해야 한다.

 

출처 : Wikipedia – Substance abuse 링크

 

대마초를 어떻게 구했었나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았던 나라에서는 매우 쉽게 대마초를 구할 수 있다. 가까이 네덜란드가 있는데 네덜란드는 대마초 판매가 합법이기 때문에 2-3 시간이면 사올 수 있다. 묘하게도 네덜란드의 대마초 가게는 ‘커피숍’ (coffee shop)이라고 한다. ‘커피숍’에 들어가서 메뉴판을 보고 대마초를 종류별로 고를 수 있다. 보통 그램당 8유로 정도지만 품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참고로 1그램으로 담배 3개 정도를 만들 수 있다.

 

네덜란드의&nbsp;일반&nbsp;커피숍&nbsp;분위기

직접 네덜란드까지 가는 게 귀찮다면 ‘딜러’한테 연락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딜러’는 영화에서 나오는 험상궂게 생긴 깡패가 아니라 아주 평범하게 생긴 젊은 친구다. 보통은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고, 몇 번 만나서 같이 피우다 보면 서로한테 신뢰가 생겨 연락처를 주고 받아 거래하게 된다. ‘딜러’는 규칙적으로 네덜란드에 가서 단골 ’커피숍’에서 대량으로 산 다음, 돌아와서 파는 것이다. 도매로 받아 소매로 팔면서 자기의 이익도 남긴다. 또 다른 방법은 식물을 가꾸는 데에 재주가 있거나 인내심이 있다면 장비를 마련해서 직접 대마초를 키우는 것이다. 제일 안전하고 저렴한 방법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친구가 직접 키운 화분

 

대마초 담배를 만드는 방법과 피우는 방법은?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요리 레시피처럼 사진이 제일이다. 외국에 있는 친한 친구한테 부탁했더니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보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로마법을 따르는 착한 사람이니까, 모자이크를 했다.

그래서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있는 사진자료 2점을 올린다

 

 

다 만들고 나서는 보통 혼자서 피우는 것이 아니라 친구 여러 명이 같이 피우는 것이다. 보통 대마초 담배를 만든 사람이 불을 붙인다. 서너 번 빨고 다음 친구한테 넘겨준다. 눈치 없이 안 넘겨주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또한 안 쉬고 급하게 서너 번 연속으로 흡입하면 필터가 뜨거워지고 담배의 맛은 떨어진다. 따라서 여유 있게 천천히 서너 번만 피우다가 넘겨주면 피울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초보자로 보일 것이다.

 

대마초 담배를 피우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효과는 양과 빈도수에 달려 있다. 술을 마실 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마시면 알딸딸해서 기분이 좋다.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실수록 술주정이 심해지고 남에게 민폐가 된다. 술 마신 다음날은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서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지는데 대마초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피우면 유쾌해지는 효과가 있지만 남용하면 무기력해진다.

 

적당히 피우는 경우, 근육이 이완되기 때문에 육체적인 활동 보다는 앉아서 쉬는 것이 낫다. 눈이 반짝반짝하며 자기도 모르게 바보처럼 계속 웃게 된다. 이렇게.

 

(내&nbsp;친구&nbsp;동의 하에&nbsp;올리는 사진입니다)

몸 동작은 둔해지는 데 반해 생각은 빨라지고 날카로워진다. 대마초를 피울 때는 정신 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 친구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다. 100번 들었던 음악도 대마초를 피우면 다르게 들린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관에 가기 전에 피우는 것은 영화를 제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뭣보다도 내가 제일 즐겼던 것은 체스였다. 상대방의 수를 더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2배로 잘하게 된다. 평소에 못 이기는 친구가 있었는데 대마초를 피우고 체스보드를 꺼냈을 때는 승산이 있었다. 아, 그리고 재밌는 후유증 하나가 있는데 대마초를 피우면 입이 건조해지기 때문에 계속 목이 마르다. 그래서 보통 물병을 들고 피운다.

 

이렇게 좋은 효과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남용하면 아주 괴롭다. 나도 몇 개월 동안 겪어봤다. 습관적으로 매일 피우면 면역이 생겨서 즐거운 효과가 줄어든다. 대신에 머리만 아프고 무기력해진다. 움직이기 싫어진다. 하루 종일 피우면서 집에서만 빈둥거린다. 모든 것이 다 부담스러워지고 성격은 예민해진다. 어느새 유쾌한 효과는 사라지고 괴로움밖에 안 남는다. 그 정도로 대마초를 남용하면 아주 위험한 물질이 된다. 그런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고 몇 달 동안 끊어도 좋다. 보통 일주일에 한 두 번이 적당하다.

 

아니, 지금 대마초를 피워보라고 부추기는 건가? 이놈시끼!

 

대마초는 안 좋은 것이고 안 피우는 게 당연히 좋다. 내 요점은 대마초가 안 좋은 것은 맞지만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예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난 20년 동안 애연가였다. 술도 엄청 많이 마셨고 아직도 잘 마시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대마초도 해봤고 술, 담배도 해봤기 때문에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분명한 건 대마초는 안 좋지만 술, 담배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담배가 건강에 제일 해롭다고 생각한다. 술에 취하면 흥분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을 때도 있었지만 대마초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렇다. 대마초는 안 좋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매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대마초 피우는 사람을 판단하는 건 글쎄다. 내가 볼 때는 거기서 거기다.

 

 

지난 주말은 조햇님 은평구의원 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 날인데,

공교롭게도 방동규선생 미수연과 겹쳐 늦게 갈 수밖에 없었다.

 

미수연 끝나기가 무섭게 정동지와 연서로 선거사무실로 달려갔으나

이미 개소식은 끝나 버렸고, 행사를 도운 주민들만 남아있었다.

 

그곳에는 손녀 하랑이도 있었다.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이산가족되어 이 얼마만의 만남인가?

선거 홍보 피켓을 들고 ‘햇님은 하랑이 아빠라며 자랑해댔다.

사랑하는 손녀가 선거운동 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어린이집 친구와 어울려 사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선거 홍보 현수막과 피켓은 놀이터 세트장 역할을 했다.

 

어려운 선거를 치루야 할 처지라 마음이 무거웠으나,

손녀 재롱이 무거운 기분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아주 희망적인, 봄바람 같은 느낌이었다.

 

랄랄라 마을밴드가 축하공연하는 모습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듣기로는 랄랄라 마을밴드가 축하공연을 해주었고,

마을주민들이 유부초밥과 샐러드를 만들어 조촐한 음식상도 차렸단다.

 

주민들이 만들어 제공한 상차림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장 후보, 유동호 선대본부장, 김정훈 상황실장,

윤종현 사무국장, 박지현, 김명숙 공동후원회장, 노재학, 김승권, 김현준

역촌초 독수리 오형제 등 많은 분이 개소식을 위해 애써 주었다고 한다.

 

개소식 기념사진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아들 페북에서 개소식 행사 사진들과 자료사진 몇 장 찾아 뒤늦게 개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발언하는 조햇님 후보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많은 분들 덕분에 선거사무실 개소식은 축제의 장을 만들었다지만,

출마한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은 전쟁터에 나선 심정인 것이다.

 

정의당 권수정 서울시장후보와 화이팅을 외치는 조햇님후보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4년 전 출마했을 때는 혼자 였으나 이젠 아내와 딸까지 생겼으니,

마음이 더 무거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역촌동,신사1동을 지키는 역촌초 독수리 오형제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문제는 사람을 보고 뽑지 않고 당을 보고 뽑는

잘못된 선거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렵기 때문이다.

 

4년 전 선거유세 장면 / 자료사진

그러나 4년 전 선거에서 2.5% 차란 근소한 차이로 떨어져,

그 이후 보여준 4년간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았나 기대할 뿐이다.

 

4년 전 선거유세 장면 / 자료사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정치하는 사람들인데,

왜 하필이면 자식이 그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전공한 게 아니라 사람을 전공한 건가?

 

4년 전 선거유세 장면 / 자료사진

제 코가 석 자인데, 약자들의 권익을 위해 추운 날 피켓 들고 일인 시위를 벌이거나

살기 어려운 노인들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어느 부모가 마음 편할 수 있겠는가?

 

피켓을 들고 있는 조햇님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오래전 페북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잠든 하랑이를 안은채 핸드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은평구청 청소노동자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는 내용이었다.

 

은평구청 청소노동자의 부당해고 집회에서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아내가 일하러 나가 어린이집 보내는 시간 외에는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귀가 막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딸과 함께 피켓을 들고 있는 조햇님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싸우는 것만 보고 자라는 손녀의 성장에 바람직한 건지 모르겠다.

없는 자의 설움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켓을 들고 있는 조햇님 / 조햇님선본자료사진

 일인 시위를 하거나 사회 봉사하는 모습을 보아 온 지도 어언 십 여년이 훌쩍 넘었다.

어렵게 살아 없는 자의 심정을 알겠기에 등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잘못된 것을 바꾸어서라도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구의회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문제는 선거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아무튼, 부모로서 자식에게 도움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더 막막할 뿐이다.

 

내가 져야 할 짐을 아들에게 떠넘겨 천형의 짐을 진 듯 어깨가 무거운데 말이다.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식 선거 운동하는 쪽팔리는 짓뿐이다.

 

이제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만 믿을 뿐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부탁을 한다.

 

행여 은평구 역촌동과 신사1동에 연고가 있는 분은
조햇님 구의회 입성을 도와주시길 부탁합니다.

 

그리고 선거사무실이 있는 연서로30 길을 지나치시면

잠시 들려 차 한잔 드시고, 손 한번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사진, / 조문호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한 여성이 매년 열리는 세계 대마초의 날을 기념하고 대마 합법화에 항의하기 위해 마리화나 운동가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여성은 초록색 눈화장을 하고 눈썹에 마리화나 잎사귀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얼굴에는 마리화나를 상징하는 숫자가 적혀있다. 2022.4.20/로이터 뉴스1

 

20일 미국 뉴욕,영국 런던,멕시코 시티,캐나다 토론토등 여러나라 대도시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마리화나(대마초)의 날’ 기념 행사가 열렸다. 기호용 마리화나 찬성론자들은 매년 4월 20일을 ‘4·20 데이’로 정하고 이날 오후 4시 20분을 기해 다 함께 마리화나를 흡연하는 행사를 연다. 이 문화는 미국에서 시작돼 북미전역을 지나 태평양 건너 뉴질랜드까지 확산됐다.

 

‘420′이 어떻게 마리화나를 상징하게 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리화나의 화학성분이 모두 420종이라는 설에 의했다는 얘기도 있고, 캘리포니아 마약단속반의 코드명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마는 마약류로 규정해서 강력히 규제해왔다. 그러나 최근 해외에서 의료용 대마 합법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지난달 28일 정부는 산업용 대마 대규모 재배 단지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렸다. 또 국내 기업들도 의료용 대마로 뇌전증 치료제와 항암제, 치매·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나서고 있어 의료용 대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뀔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2022년 4월 20일 보고타에서 열린 세계 대마초의 날 기념 집회 도중 한 여성이 수박에 꽃힌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다. 대마 연기가 수박을 통과하며 또 다른 맛을 준다 2022.4.20/AFP

[스크랩] 조선일보 / 이태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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