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초에 다녀 온 곡성 이야기를 두 달이 지나서야 꺼내게 되었다.

정리하기 귀찮아 미루다보면 잊어버리는 일도 종종있는데,  

어쩌다 뒤늦게 걸려들어도 기억력이 없어 수소문하느라 더 힘들다.

철 지난 소식의 미안함에 사설을 달지만, 올려놓아야 기억하는 것이다.

 

곡성은 섬진강과 보성강, 옥과천을 끼고 도는 고장으로

일찍부터 하천 연변에 선사 문화가 남은 지역이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곡성군 입면의 정자 함허정이었다.

 

함허정은 조선전기 심광형이 만년에 시인 묵객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려고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인데, ‘호연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0년도 중수한 함허정은 남동향으로 자리 잡았는데,

가운데 방을 배치하고 사방에 툇마루를 돌린, 정면 4, 측면 2칸의 단층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우측 면에 바닥 난방을 위한 아궁이를 두고 정자 안에는 기문과 시문이 적힌 15개의 편액이 걸려있었다.

 

정자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멀리는 무등산이 자리 잡았는데,

에스 자로 굽이치는 강 천변에는 버드나무와 습지 초지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 아래 있는 '제호정고택' 길목에는 곡식을 탈곡하거나 제분할 때 사용한 연자방아가 있었다.

 

'제호정'은 사랑채 당호이며, 안채와 대문간채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안채 마당 앞에 있는 행랑채 동쪽에는 동네 사랑인 군지정사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 서당으로 쓰인 곳으로 담장이 없어 접근하기 좋았다.

 

남향의 안채는 정면 4, 측면 2칸의 일자형 겹집 형식의 집이다'

서쪽부터 2칸의 부엌이 위아래에 있으며, 그 옆에 큰방이 있는데 앞, 뒤에 툇마루를 깔았다.

 

큰방과 도장 앞은 문 없이 개방되었고, 작은방 앞은 문을 달아 가로막았다.

동쪽 끝 칸의 앞쪽 마루 머름 위에 바라지창을 설치한 것이 특이했다. 

 

다음은 곡성군 옥과면에 있는 옥과향교로 갔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지은 교육기관이다.

 

현유의 위패를 봉안한 옥과향교는 1392(태조)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49년 율정으로 이전하였고, 1755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1757(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1796년과 1898년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부터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 중 양목재절목’, ‘향교전곡출입절목등은 옥과향교만의 사료다.

 

옥과향교는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앞쪽 낮은 곳에는 배움의 공간으로 명륜당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두었다.

 

현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3칸의 동재와 서재, 3칸의 육영재,

3칸의 전사실, 1칸의 장판고, 제기고, 고사,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다.

 

명륜당은 막돌 허튼 층 쌓기의 기단에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대성전은 약 110cm 높이의 기단에 원형의 정평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외삼문 전방에 향교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긴 통나무를 걸어 놓았던 구멍 뚫린 석물이 양쪽에 있다.

 

대성전에는 5, 송조 4,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어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유팽로 장군 위패를 모신 도산사를 찾아갔다.

 

류팽로(1554년~ 1592년)는 곡성에서 태어나 1579(선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여 국방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고 왜군이 침입하자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와 수백 명의 의병을 일으킨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 안영 등과 함께 궐기하여

피난민 500명과 가동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의 군사와 합세했다.

그는 담양 추성관에서 동래부사를 역임한 고경명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여

전라도 연합의병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수만의 왜군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숨었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패전한 것이다. 류팽로는 사지에서 먼저 탈출했으나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뛰어들어 구출한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고 말았다. 왜군의 호남진출을 좌절시킨 금산전투에서...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 포충사와 금산 종용당에 제향되었다.

특히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 등 호남 연합의병의 순절은

전국적인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 중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가 있었다.

 

마지막 들린 곳은 화엄사 말사인 곡성 태안사로 갔다.

태안사 능파각을 지나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동리산 자락의 태안사는 742(경덕왕)3명의 신승이 창건하여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가 머물던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창건한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줄어들었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고, 1683(숙종)에 정심이 중창했다.

1737년(영조) 만들어진 능파각은 그 뒤에도 네 차례나 중수했다.

 

한국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버려, 근래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만세루, 해회당, 선원, 능파각, 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과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과 광자대사비, 대바라, 동종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리산 계곡 절묘한 자리에 세워진 능파각과 일주문은 전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태안사 내 연못 중앙의 삼층석탑은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지붕돌, 2, 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 기단에 3층 탑신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아 보인다.

기단은 각층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 4단씩 받침을 두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 장식은 낮은 장식 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보충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있었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연못 옆에는 부도군이 자리잡고 있다.

그 곳에 있는 '광자대사탑'은 높이가 3미터인데, 본래 탑비와 함께 건립된 것이다.

탑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았으나, 이 부도는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부도의 형태는 지대석부터 상륜보개석까지 팔각평면을 이루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이.

 

지대석과 기단부의 하대와 중대까지는 같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8각의 지대상면에 8각이 서로 엇갈리게 8각의 굄대가 하대를 받치고 있다.

하단은 각형이고 중단은 약간 높은 반원형이며 상단은 아주 낮은 각형이다.

측면부와 상면부로 구성된 하대석은 2단의 각형 굄이 새겨졌으며,

각 측면에는 선각의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광자대사탑비는 950(광종)에 세워졌다.

 해동금석원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의 높이가 5.2, 너비가 3척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부서졌는데,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은

귀부와 이수 사이에 놓여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다.

비문의 내용은 그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효공왕의 측근에서의 불심에 대한 문답,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내용 등이 실렸다고 한다.

 

태안사 입구의 일주문은 능파각에서 약 200미터 지난 높직한 돌계단 위에 있었다.

조선 숙종 9(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앞, 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다.

화려한 일주문 천장 아래 용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도 준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렸다.

 

보물 태안사적인선사탑은 높이가 3.1미터.

사찰 중심을 약간 벗어난 북쪽 언덕에 있는데 주위에 흙 담장을 쌓고 그 안에 탑비와 함께 서 있다.

 탑비는 뒷날 보완한 것이지만, 상륜부까지 모두 남아 있다.

귀부와 함께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방형 2단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세련미가 돋보이나 별다른 조식은 없다.

기단부는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8각이고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하대석은 1단이며 하단부에는 각형 1단의 높직한 굄이 조각되었고,

그 측면에는 각 면에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새김하였는데,

그 선각이 매우 예리하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하대석은 위는 좁고 아래는 넉넉한 형태이므로

측면에서 보면 사다리꼴로, 1좌씩의 사자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이 사자들은 모두 그 방향이 다르고 머리와 전,후 양다리 형태도 달리하고 있으며,

특히 머리카락과 뒤꼬리가 올려지는 유려한 곡선으로 보아 움직이는 사자를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안사로 진입하는 이 삼 킬로미터 주변의 경치가 너무 좋다.

그냥 우거진 숲 속 계곡에 멈추고 싶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 정동지 따라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 갔다.

예술인 지원금 타는 일 도움받으러 갔는데, 최석태씨도 왔더라.

 

지원금 신청은 서인형이사장이 처리해 주었는데,

얼마나 과정이 복잡한지 성질 급한 놈은 받지도 않겠더라.

주기 위해 지원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안 주려고 만든 것 같더라.

고맙게도, 담당자 전화까지 알아내어 묻고 물어 처리해 주었다.

이 보리흉년에 백만원이 어디냐?

 

일이 끝나고 나니 뉴스아트편집회의를 한다지만,

편집회의가 아니라 고정 필진으로 참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서인형이사장과 이명신 편집장, 최석태, 정영신씨가 둘러앉았는데,

최석태씨가 여러 가지 자문을 해 주었다.

 

최석태씨는 '한국근대미술사를 연재해주기로 했고

정영신씨는 '정영신의 시간자르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 '전시리뷰'를 부탁받았다.

 

이틀 뒤에는 뭔 일인지도 모른 채, 응일식당에 따라 갔더니

서인형 이사장과 장경호씨가 한 잔하고 있었다.

아마 장경호씨도 원고청탁을 받은 것 같더라.

 

그런데, 원고 마감일도 모른 채 늦장 부리다,

찍어 둔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이미 아트뉴스가 나와버렸네.

 

스마트 협동조합의 인터넷신문 '뉴스아트' (news-art.co.kr)

많은 예술가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예술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며,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진, / 조문호

 

 

'박상진과 동지들' 책표지 (가격 50,000원)

고헌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의사 순국 101주년을 기념하는 박상진과 동지들-민주공화국을 향하여가 발간되었다. 출판과 함께 지난 2 27일부터 3월27일까지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전람회도 열렸다.  배달 겨례의 의병전쟁 창의와 순국’, ‘혁신유림의 길-지신과 절의’, ‘민주공화국의 씨를 뿌리다-박상진과 동지들’, 대한독립선언서-무장독립전쟁과 육탄혈전’, ‘홍익인간과 통일-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 다섯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박상진과 동지들' 전시 포스터.

박상진의사는 1909년 하얼빈의거를 일으킨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를 잇는 광복회 총사령 출신으로 독립전쟁 자금마련을 위해 무장투쟁을 감행한 분이다. 구한말 혁신유림의 공화주의 사상으로 국내외 비밀결사의 독립전쟁을 실천한 민주공화국 건설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 되고 있다.

 

박상진 서간(書簡) 22.5x41cm 1911년 10월 11일 박상진이 부친 환갑을 맞아 자리를 빛내 달라고 부탁하는 사연을 담아 보낸 서간이다.

한일 강제합병 5년 뒤인 191512월 경북 경주 효현교에서 대구로 향하던 일제 우편마차가 권총을 든 청년 2명의 습격을 받아 현금 8700(현재 추정 가치 약 25천만원)을 털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경주 관금봉적사건으로 보도했지만, 이 사건은 그해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전국 규모의 비밀 독립운동단체 광복회가 만주 독립군기지 지원을 위해 벌인 첫 거사였다.

 

박상진, 박시룡 회갑연 초대장 32.5X41cm 종이에 먹, 아버지 회갑연을 내세워 동지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

이를 지휘한 인물이 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을 맡은 고헌 박상진 의사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판사 발령마저 팽개치고 가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주 우편마차 외에도 평북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와 대구 친일부호 등을 습격해 독립투쟁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박상진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밥그릇

뿐만 아니라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단장 김원봉이나 신채호와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독립전쟁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 박상진 의사다. 만주 연해주 등 해외독립전쟁을 주도한 김좌진, 홍범도 같은 인물 역시 독립전쟁기지 구축과 전쟁자금 확보에 있어 박상진 의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주 김진우 '묵죽' 136X87,4cm 종이에 수묵

빅상진과 동지들에는 혁신유림사상의 위정척사파와 계몽운동가, 그리고 이들 투쟁노선과 사상을 융합한 광복회, 의열단, 무정부주의자 등 독립전쟁의 선봉에 선 투사들의 작품이 총 망라되었다. 퇴계 이황의 시 유거’, 남명 조식이 쓴 이백의 시 궁중행락사를 비롯하여 개화기와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침략과 중국과 일본의 역학관계 중심인물인 명성황후의 효제충신’, ‘예의염치도 수록되었다.

 

이강년 李康秊 1858~1908 이강년 '격고각도렬읍(檄告各道列邑)' 24x53cm 1907년 종이에 먹,

그리고 개화사상가인 서재필, 김윤식, 김옥균, 김좌진 합작의 시고족자를 비롯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신민회’, ‘협동학교’, ‘서전서숙’, ‘동창학교’, 관계 인물들의 간찰, 시고도 게재되었다. 자정순국, 의병전쟁, 독립전쟁의 주요인물 필적으로는 위정척사파로 병인양요 시 순절한 이시원의 절명 시고’,  박상진의 부친 환갑잔치 초대 서간’, 의열단장 김원봉의 단장지가’, ‘독립전가등이 있다.

 

강룡권(연변역사연구소) '서일묘소 탐사기' 26x19cm 1990년 4월 15일

특히 강룡권씨가 찾아낸 최초의 독립선언문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와 여기에 서명한 39인 중 김교헌을 비롯한 20여명의 간찰, 시고 등 여러 필묵도 소개된다.

 

이구영 인자무우127X33cm 종이에 먹

박상진과 동지들에 수록된 수많은 필묵과 서간들은 '독립투쟁사기념관 추진회' 위원인 김명성씨 개인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박상진 의사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그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그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와 공훈 등급 상향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병산 ‘목계’31X63cm 종이에 먹

그리고 독립운동과는 무관한 인사동 인사 민병산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의 필묵도 실렸다그 외에도 독립운동의 시대적 상황을   상세히 알리독립 활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중근 의사의 총에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친일매국노 이완용 작품까지 실어 물의를 빗기도 했다

 

철거된 데라우치 마사다케 작품(좌)과 이완용의작품, 이토 히로부미 작품도 함께 철거됐다.

박상진과 동지들에 수록된 서간과 필묵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 박영효, 의친왕 이강, 이황, 조식, 김옥균, 최재우, 서재필, 민영환, 이준, 안중근, 홍범도, 이범석, 박열, 김좌진, 김구, 이승만, 여운형, 신채호, 신익희, 조소앙, 김창숙, 장일순, 이육사, 김진우, 김성일, 류성룡, 이하응, 이항로, 기정진, 전우, 송병선, 허묵, 허훈, 곽종석, 이기원, 최익현, 류인석, 기우만, 심상훈, 김세기, 권세연, 이인화, 최병심, 금달연, 서상렬, 이범직, 임한주, 이강년, 이규현, 김태원, 신보균, 정운경, 이승구, 문석환, 류준근, 김덕진, 정재규, 양재해, 오준선, 이남규, 김도화, 이설. 김복한, 노응규, 채광묵, 노병대. 이동수, 민형식, 김인식, 김동필, 정제두, 이건창, 이건승, 이승희, 김대락, 안창제, 정인보, 박시룡, 박시규, 허위, 박지원, 박제가, 서유구, 박규수, 김홍집, 류길준, 김윤식, 김상범, 이유인, 장지연, 이명룡, 임치정, 류인식, 이상룡, 김병식, 박광희, 이중태, 이원식, 이시원, 한규설, 김석진, 황현, 이성렬, 백인수, 정동식, 박세화, 김도현, 이만도, 조장하, 류필영, 류도발, 김근배, 이범진, 강원형, 한규설, 윤주백, 민영달, 장석영, 이직현, 윤용구, 김택영, 신돌석, 이상설, 안희제, 이진룡, 노백린, 이세영, 김재풍, 김후병, 권준희, 허병률, 김진만, 이중업, 김상기, 문영박, 김찬규, 손후익, 김창숙, 신태식, 김원봉, 김지섭, 김재덕, 이진영, 황옥, 사이토 마코토, 김산, 김교헌, 김약연, 이상룡, 여준, 신규식, 조성환, 손일민, 이세영, 박은식, 서일, 신팔균, 안병산, 이용직, 민충식, 최정식, 최해, 조용하, 이붕해, 전성호, 조명희, 이상화, 김동삼, 지청천, 손병희, 이시영, 나철, 오세창, 김철수, 전성호, 최현배, 김두봉, 나운규, 현순, 유일한, 최인훈씨 등이다

 

이번 전시와 출판은 울산 출신 독립 운동가이자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와 함께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조국 광복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조문호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박상진과 동지들' 전시장 풍경

요리 조리 코로나를 피해 다니다 기어이 덜미 잡혀버렸다.

정동지가 먼저 걸려, 뒷바라지 하다 보니 나까지 걸린 것이다.

병원에서 처방받아 녹번동 정동지 집에 함께 격리되었는데,

뼈마디가 쑤시는 고통보다 호흡기가 나빠 숨이 가빠 죽겠더라.

 

금주 금연에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 뿐이고,

둘 다 환자라 덜 아픈 사람이 일할 수밖에 없는 비상사태였다.

좁은 공간에서 몇 날 며칠을 붙어 지내는 호사도 소용없었다.

몸 아픈 것 보다 대선 결과의 실망감과 죄책감에 더 죽을 맛이었다.

할 일은 많았지만 몸이 아프니 컴퓨터도 켜기 싫었다,

 

불쌍하게 보였는지 정동지가 냉동실에 숨겨 둔 대마 나물을 꺼내 볶아 주었다.

반찬 씹는 것 조차 거슬려 대마 나물을 죽에 넣었더니, 맛도 있고 몸도 덜 아팠다.

중요한 것은 하루종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정동지는 책에 파묻혀 힘들게 견뎠으나, 난 자성의 시간을 가지며 여유롭게 지낸 것이다.

 

아픈지 일주일만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출감 기념으로 첫 나들이 한 곳은 연신내 ‘사비나미술관’이었다.

그 곳에서 안창홍씨의 ‘유령패션’이 열리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 듯 안창홍씨를 비롯하여 이명옥관장 등 여러명이

에콰도르 대사 일행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얼마 전 에콰도르에서 초대한 안창홍 '유령패션'전에 대한 답례 형식의 방문인 것 같았다.

 

삼개 층에 나누어 전시된 안창홍씨의 수많은 작품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로 물질문명에 병들어 유령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었다.

코로나에 죽어 가는 오늘의 현실같기도 했다.

 

전시장에서 나와 모처럼 ‘음암동 돈까스’에 들려 외식하는 시간도 가졌다.

죽다 살아난 정동지를 밝은 곳에서 보았더니, 화색이 진달레처럼 피어났다.

죽을 때가 가까워 헛것이 보이는 줄 알고 눈을 비벼보았으나 사실이었다.

아파 누운동안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더니, 피부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것 같다

 

대마는 마약이 아니라 약이다.

하루속히 대마를 합법화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

모두 치료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담양뎐’ 보러 간 담양에서 뜻밖의 사진전을 보게 되었다.

사진판 마당발 곽명우씨 따라 간 곳은 담양군 창평면 의병로에 있는 ‘문화공간 소통카페’였다.

문 연지 며칠 되지 않은 그 곳은 가수 박강수의 상설전시장과 매장을 겸한 문화공간이었다.

 

일층은 커피 매장이고 이층은 사진 상설전시장인데, 가수 박강수의 '느림의 미학' 사진전 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된 사진은 10여년 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이란다.

 열대 풍경과 인간애가 어우러진 사진이었다.

조그마한 프레임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누구나 부담 없이 소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포토에세이 ‘나의 노래는 그대에게 가는 길입니다‘도 출간 했다.

 

박강수는 2001년 ‘부족한 사랑’으로 데뷔해 10장의 앨범과 100곡이 넘는 자작곡을 발표했다.

2011년에는 제18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여자포크싱어상도 받았다.

젊어 신인처럼 보이나 오십대에 접어던 중견 뮤지션인데, 노랫말이나 곡도 좋지만 음색이 매력적이다.

잊혀진 가수 박인희처럼 앳되고 여린 목소리다.

곽명우씨는 박강수의 열렬 팬으로 오래전부터 잘 아는 것 같았다.

 

곽명우사진

노래하고 사진 찍는 박강수 만나려면 담양군 창평면 의병로의 ‘문화공간 소통카페’로 가라.

관람시간은 오후1시부터 5시 까지고, 가시거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도 한 번 들어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우리나라 최고의 마임이스트 유진규(70)와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배우 기주봉(67)이 열연하는

2인극 ‘건널목 삽화’가 지난 23일부터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철도 건널목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려가는 ‘건널목 삽화’는 극작가 윤조병의 희곡 중 첫 작품이다.

연출은 소극장시대를 최초로 열었던 실험연극의 입지전적인 방태수(77)가 맡았다.

 

깊은 새벽, 건널목 불빛만 깜빡이는 허허벌판의 철도 건널목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두 남자.

철도원(유진규 분)과 사나이(기주봉 분)는 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친구를 잃고 장애를 갖게 된 사나이가 털어놓은 충격적 과거와

밤마다 벌어지는 아내의 매춘을 모른 채 하기위해

퇴근 시간보다 늦게 들어가는 철도원의 이야기가 자근자근 펼쳐진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그늘진 과거와 오늘의 사회를 풍자 비판한 부조리극이다.

남북을 가르는 휴전선같은 철도 건널목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대는 분단 상황을 상징했다.

 

같은 숲이지만 철도원은 ‘울창한 숲’이라고 하는 반면 사나이는 ‘민둥산에 진흙밭’이라 말하는데,

같은 세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고 해석한다는 말이다.

 

대사로만 따지면 40분 안팎의 짧은 공연이지만, 60분 러닝 타임의 나머지는 유진규의 몸짓으로 채운다.

 

이 연극의 하일라이트는 담배 한 대 얻어 피운 사나이가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로 돌진하는 장면이다.

뛰어든 사나이와 제지하는 철도원이 뒤엉킨 장면을 조명과 음향 효과로 절박감을 극대화하였다.

 

이 연극이 초연된 당시로선 사실주의 기성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파격이었다.

‘움직임과 소리와 빛’을 중심으로 한 표현주의적 연극을 시도하여 주목도 받았다.

대사 중심의 연극에 몸짓과 행동을 도입시킨 대사와 몸짓의 만남,

즉 마임 드라마란 이름의 실험 작은 한국 연극사에 의미가 큰 작품이다.

 

마침,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늘푸른 연극제’에

‘건널목 삽화’가 선정되어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 것 같았다.

 

좌로부터 기주봉, 방태수. 유진규

방태수 연출이 '에저또’라는 극단을 창단한 것은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차라리 몸짓으로 표현하겠다는 저항의 의미를 담아 기성 연극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에저또’라는 극단 이름은 말문이 막혀 머뭇거릴 때 내뱉는 ‘에…저…또…’에서 따왔다고 한다.

 

50년 만에 선보이는 ‘건널목 삽화’는 ‘관객모독’의 연출가 기국서씨가 윤색,

협력 연출하여 초연과 달리 현대 감각을 불어넣었고,

극작가 윤조병씨의 아들 윤시중교수가 무대미술을 맡아 볼거리를 더했다.

 

요즘 들어 외출을 자제하며 가급적 일을 만들지 않지만,

페북에서 우연히 본 ‘건널목 삽화’ 공연소식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50년 만에 재연되는 전설적 작품이기도 하지만, ​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다시 서는 연극무대가 아닌가.

 

그러나 공연 일정내내 지방에 가야 할 피치 못할 사정도 있지만,

촬영이 가능한 리허설 현장을 수소문해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22일 오후7시 무렵, 대학로 ‘씨어터쿰’ 연습실에는 출연자인 유진규, 기주봉씨를 비롯하여

방태수 연출 등 전설에 가까운 연극인들이 연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노장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매서운 추위마저 녹일 듯 뜨거웠다.

 

유진규는 50년 전 자신의 데뷔 무대였던 이 연극 ‘철도원’ 역을 다시 맡았다.

‘극단76’의 원년멤버인 45년차 베테랑 배우 기주봉과

평생 마임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유진규의 정면 대결인 셈이다.

 

기주봉의 경직된 듯 중량감 있는 연기도 돋보였지만, 유진규의 진정성 있는 몸짓과 연기가 감동적이었다.

유진규의 무용 같은 몸짓과 기주봉의 팔 없는 몸 연기도 대조를 이루었다.

 

이십대 청년 유진규가 ‘에저또’라는 특이한 이름의 극단에서 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반세기 동안 한국 마임의 역사를 쓴 것이다.

 

유진규는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19로 연극계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이번 공연도 방역 때문에 총 100석 중 50석씩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젊은 연극인들이 너무 어렵게 살아간다”며 “각 지자체의 문화예술회관 등

관련 기관에서 예술인들을 채용해달라”고 제안했다.

“예술을 써먹는 사회가 아닌 예술과 함께 세상을 만드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열리는 ‘건널목 삽화는 이제 두 차례 공연만 남았다. 

이번 주말인 26일과 27일의 오후3시 공연뿐이다.

공연 문의 : 프로듀서 이재화( 010-9557-9374) 

 

사진, 글 / 조문호

 

 

일이 겹쳐 바쁜 하루를 보낸 것은 괜찮으나, 복에 없는 차를 바꾸게 되었다.

지난 8일은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린 정영신의 ‘장날’전도 철수해야 하고,

예약해둔 자동차 검사를 받는 등 할 일이 많은데, 마지막 일이 순탄치 않았다.

전시철수야 일사불란하게 마무리했으나, 자동차검사에 불합격한 것이다.

그것도 간단한 정비로 끝날 게 아니라, 폐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중고차를 구해야 하는데, 죽기 전에 폐차 장의사 신세는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그 날은 준비할게 많아 일찍부터 서둘렀다.

녹번동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요쿠르트 아줌마가 왔다.

인사 건 낼 틈도 없이 돌아서는데, 설날 지난지도 며칠 되지 않아 선물 받아 둔 과자라도 준 것이다.

뜻밖의 선물에 반색 하지만, 선물이란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게 더 기분 좋다.

 

이 분은 매주 한 번씩 요구르트를 세 개씩 갖다 주는데, 난 3년째 받아 먹는다.

독거노인에게 요구르트를 전해주는 일은 10년이나 된 지자체의 복지사업이다.

늘어나는 노인들의 고독사를 막기 위한 방편이지만, 좀 더 세심한 관심이 요구된다.

현재 동자동에 주는 분이 80여명이라는데,

몸이 불편하거나 외부와 소통이 많지 않은 분들은 대부분 빠졌기 때문이다.

 

녹번동에 차 가지러 가기 위해 지하철로 내려가니,

양말도 없는 노숙인의 맨발이 눈에 밟혔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노숙인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린다.

 

정동지를 차에 태워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부터 철수하러 갔다.

사진을 포장하여 차에 옮겨 실었는데, 비좁은 공간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80일간 수고해 주신 '돈의문박물관마을' 큐레이트 전영주씨에게

조그만 소품 한 점 선물하며 마지막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했다.

 

그나저나 그 많은 액자를 들여놓을 곳이 마땅찮았다.

지난 년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의 전시를 치렀으니 보통 짐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정선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집이 불탔으니 가져갈 수 없었다.

비좁은 녹번동 집 방 하나가 창고로 변한지 오래되었는데,

그 사정을 아는 아산의 김선우씨가 보관해 주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준비하는 공유공간 '마인' ‘백암길185 미술관’에 보관한다지만,

그 곳 또한 문을 열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판이다.

 

그 날 김선우씨가 사진을 실어가기로 했으나 일이 생겨 예정보다 늦어 진 것이다.

자동차검사 예약시간이 임박해, 짐을 내려놓고 '성산자동차검사소'부터 갔다.

예전에는 예약 없이 검사받으러 다녔으나 절차가 많이 바뀌었더라.

며칠 전 검사받으러 왔다가 허탕치고 예약 해 둔 것이다.

순서가 돌아와 검사가 진행되었는데,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검사에 통과하려면 정비비용만 80여 만원이 소요되는데,

엔진에 문제가 많아 고쳐도 오래타지 못한단다.

 

문제의 디젤 ‘크루즈’는 제 작년 여름 300만원에 구입했는데,

일 년 육 개월 동안 33,000km 타고 폐차하기에 이른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힘이 딸려 오르막에서 시동이 꺼지는 등 애를 많이 먹였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녹번동으로 끌고 가야 했다.

 

마침 아산의 김선우씨가 도착해 있었다.

자동차 사정을 듣고는 폐차가 답이라며 아산에서 쓸 만한 중고차를 알아 보겠단다,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고 방에 쌓아둔 액자를 옮겨 싣고 아산으로 내려갔다.

그 다음 날 선우씨가 만사를 제쳐두고 중고차 보러 다닌 것 같았다.

수시로 쓸 만한 차의 정보를 보내주었는데, 그 중 가격이 싸고 쓸 만한 차가 현대 투싼이었다.

 

다음 날 오후1시 무렵, 아산에서 선우씨를 만났다.

구입한 '투싼'은 178,500km 운행한 차인데 190만원이란다.

그 날 차량 명의변경과 폐차를 한꺼번에 처리할 준비해 두었는데,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동차보험이전에서부터 차량압류해제 등 모든 걸 전화로 해결하는데, 일을 똑 소리 나게 처리했다.

 

새로 구입한 현대 ‘투싼’을 점검하기 위해 잘 아는 정비소에 데리고 갔다.

아산에서 ‘월드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는 송계석씨를 찾아 간 것이다.

시운전을 해 보며 부속들을 꼼꼼히 점검해 주는데,

엔진이나 다른 곳은 이상이 없으나 하체 부식이 심하다고 했다.

비포장 도로나 도로 턱을 조심해 운행하면 삼 년 쯤은 무난히 탈 수 있겠단다.

자동차기능이나 주의해야 점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좌우지간 선우씨는 마당발이기도 하지만, 인간관계가 진득했다.

 

새로 구입한 투싼은 차체의 중량감도 있지만, 자동이라 운전하기가 편했다.

인사동에서 오후 다섯시에 열리는 박재동 화백 시사만평전, ‘한판 붙자!’에 갈 생각이었지만,

일이 지체된 되다 차까지 밀려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머리 아픈 일들을 마무리해 날아갈 듯 발길은 가벼웠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버려 둔 정선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농사철이 오기 전에 다시 측량하여 콘테이너 박스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공사에 전화해 측량할 날자 까지 잡아놓고 같이 자자는 전화가 왔다.

허구한 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는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은 복이 어디 가겠냐마는 올해도 좋은 일 많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열린공감TV, 170여 '본부장 리스크' 정리한 '윤석열 X파일'이 출판되자마자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4일 교보문고 인터넷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예스24, 알라딘 등 다른 온라인 서점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문제는 책의 인기보다 책에 실린 내용이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을 알고도 과연 윤석열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그에게 표를 찍어준다면 다 똑같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제발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등 그동안 집권해 온 권력자들의 대부분이 독재자 아니면 살인마였고

도둑놈 아니면 사기꾼이었다. 또 다시 그런 시대로 돌아가려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다.

 

돈이 없어 외국으로 이민 갈 수도 없는 처지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출처 / 김어준 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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