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마임이스트 유진규(70)와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배우 기주봉(67)이 열연하는

2인극 ‘건널목 삽화’가 지난 23일부터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철도 건널목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려가는 ‘건널목 삽화’는 극작가 윤조병의 희곡 중 첫 작품이다.

연출은 소극장시대를 최초로 열었던 실험연극의 입지전적인 방태수(77)가 맡았다.

 

깊은 새벽, 건널목 불빛만 깜빡이는 허허벌판의 철도 건널목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두 남자.

철도원(유진규 분)과 사나이(기주봉 분)는 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친구를 잃고 장애를 갖게 된 사나이가 털어놓은 충격적 과거와

밤마다 벌어지는 아내의 매춘을 모른 채 하기위해

퇴근 시간보다 늦게 들어가는 철도원의 이야기가 자근자근 펼쳐진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그늘진 과거와 오늘의 사회를 풍자 비판한 부조리극이다.

남북을 가르는 휴전선같은 철도 건널목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대는 분단 상황을 상징했다.

 

같은 숲이지만 철도원은 ‘울창한 숲’이라고 하는 반면 사나이는 ‘민둥산에 진흙밭’이라 말하는데,

같은 세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고 해석한다는 말이다.

 

대사로만 따지면 40분 안팎의 짧은 공연이지만, 60분 러닝 타임의 나머지는 유진규의 몸짓으로 채운다.

 

이 연극의 하일라이트는 담배 한 대 얻어 피운 사나이가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로 돌진하는 장면이다.

뛰어든 사나이와 제지하는 철도원이 뒤엉킨 장면을 조명과 음향 효과로 절박감을 극대화하였다.

 

이 연극이 초연된 당시로선 사실주의 기성 연극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파격이었다.

‘움직임과 소리와 빛’을 중심으로 한 표현주의적 연극을 시도하여 주목도 받았다.

대사 중심의 연극에 몸짓과 행동을 도입시킨 대사와 몸짓의 만남,

즉 마임 드라마란 이름의 실험 작은 한국 연극사에 의미가 큰 작품이다.

 

마침,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늘푸른 연극제’에

‘건널목 삽화’가 선정되어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 것 같았다.

 

좌로부터 기주봉, 방태수. 유진규

방태수 연출이 '에저또’라는 극단을 창단한 것은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차라리 몸짓으로 표현하겠다는 저항의 의미를 담아 기성 연극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에저또’라는 극단 이름은 말문이 막혀 머뭇거릴 때 내뱉는 ‘에…저…또…’에서 따왔다고 한다.

 

50년 만에 선보이는 ‘건널목 삽화’는 ‘관객모독’의 연출가 기국서씨가 윤색,

협력 연출하여 초연과 달리 현대 감각을 불어넣었고,

극작가 윤조병씨의 아들 윤시중교수가 무대미술을 맡아 볼거리를 더했다.

 

요즘 들어 외출을 자제하며 가급적 일을 만들지 않지만,

페북에서 우연히 본 ‘건널목 삽화’ 공연소식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50년 만에 재연되는 전설적 작품이기도 하지만, ​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다시 서는 연극무대가 아닌가.

 

그러나 공연 일정내내 지방에 가야 할 피치 못할 사정도 있지만,

촬영이 가능한 리허설 현장을 수소문해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22일 오후7시 무렵, 대학로 ‘씨어터쿰’ 연습실에는 출연자인 유진규, 기주봉씨를 비롯하여

방태수 연출 등 전설에 가까운 연극인들이 연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노장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매서운 추위마저 녹일 듯 뜨거웠다.

 

유진규는 50년 전 자신의 데뷔 무대였던 이 연극 ‘철도원’ 역을 다시 맡았다.

‘극단76’의 원년멤버인 45년차 베테랑 배우 기주봉과

평생 마임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유진규의 정면 대결인 셈이다.

 

기주봉의 경직된 듯 중량감 있는 연기도 돋보였지만, 유진규의 진정성 있는 몸짓과 연기가 감동적이었다.

유진규의 무용 같은 몸짓과 기주봉의 팔 없는 몸 연기도 대조를 이루었다.

 

이십대 청년 유진규가 ‘에저또’라는 특이한 이름의 극단에서 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반세기 동안 한국 마임의 역사를 쓴 것이다.

 

유진규는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19로 연극계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이번 공연도 방역 때문에 총 100석 중 50석씩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젊은 연극인들이 너무 어렵게 살아간다”며 “각 지자체의 문화예술회관 등

관련 기관에서 예술인들을 채용해달라”고 제안했다.

“예술을 써먹는 사회가 아닌 예술과 함께 세상을 만드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로 ‘씨어터쿰'에서 열리는 ‘건널목 삽화는 이제 두 차례 공연만 남았다. 

이번 주말인 26일과 27일의 오후3시 공연뿐이다.

공연 문의 : 프로듀서 이재화( 010-9557-9374)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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