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정 동지와 함께 서산의 불교 유적을 찾아 갔다.

삼십여 년 전 불교 유적 답사 때, 문화재급은 대부분 촬영했으나 대부분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그러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생김새나 표정이 이웃 아저씨처럼 친근해 가끔 생각났다.

요즘이야 내비 따라가면 쉽게 찾아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물어물어 찾아 간 곳이었다.

 

백제 후기 서산은 고구려나 중국과의 해상 무역 요충지였다.

중국 불교문화도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당연히 융성했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부터 찾아갔다.

마애불이란 암벽에 새긴 불상이고, 여래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의,

부처를 뜻하는 열가지 이름 중 하나다.

 

화강암에 조각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 말기 불상이다.

본존 여래 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반가 사유형의 보살 좌상이, 오른쪽에 보살 입상이 안치되었다.

마애불 중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지만, 가야산 수정봉 기슭에 숨어있어 1959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께서 보원사지유물조사 나왔다가 발견한 국보다.

 

이곳에 가려면 운산면 저수지와 터널을 지나 용현계곡을 끼고 조금 가면 

마애불을 알리는 표지가 있고, 용현계곡 다리를 건너 초입에서 650m 지점에 있다.

관리소 옆의 불이문을 통과하여 돌계단 따라 가면 거대한 절벽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침 스님께서 마애여래삼존상 앞에서 예불을 올려, 함께 평안을 빌었다.

대좌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는 삼존상의 자태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초생달 모양의 눈썹에다 얕고 넓은 코, 미소 띤 여래입상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제화갈라보살 입상과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자비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입상의 편안한 조각과는 달리, 광배 부분은 섬세했다.

광배 중심에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법의는 가슴 띠 매듭이 있고, U자형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무릎 아래까지 드리운 옷 주름이 사실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발밑에는 연꽃이 조각되었다.

 

머리에 관을 쓴 오른쪽 보살 입상은 눈과 입을 통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 장식만 있고, 아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반가상의 두 팔은 떨어져 나갔으나, 왼쪽 다리에 오른쪽 다리를 걸쳤다.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오른 손가락으로 턱을 받친 세련된 솜씨다.

 

삼존불은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새겨진 삼존불은 햇빛의 방향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르게 보인다.

약간 기울어진 암벽에 새겨 비바람에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만든 미적, 과학적 재치도 돋보였다.

 

다음에는 그 곳에서 약 1,2km 지점에 있는 보원사지’를 찾아갔다.

 

백제 양식의 '보원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천년을 세월을 뛰어넘었다.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4m 높이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석조,

법인국사 보승탑과 보승비가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그 가치가 높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이르는 불교 유물이 다수 발견된 곳이다.

 

한 때는 사찰에 머문 승려가 천 명에 이르렀다는데,

이 넓은 절터에 전각이 가득 들어 찼다면, 분명 대 사찰임이 틀림없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유적과 발굴된 유물들이

보물이나 국보급이라 조선시대 이전부터 융성한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절터 곳곳에 천년 고찰의 위용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오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절터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두고, 개울 쪽에는 당간지주와 돌물확이,

개울 너머에는 오층석탑과 금당터, 사리탑이 남아 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앞쪽 면에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가 새겨져 있다.

지주의 마주 보는 안쪽 면의 위, 아래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게 만들었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각 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알려졌다.

당간지주 오른편 절터 끝부분에 보원사지 석조도 있었다.

 

아마 그 부근에 요사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건물의 흔적은 없었다.

이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커다란 직사각형의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안쪽과 윗쪽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보아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윗쪽에는 크다란 멧돌도 남아 있었다.

 

드넓은 절터 중앙에 오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석탑은 중후한 안정감과 경쾌한 상승감이 돋보이는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로 꼽힌다.

높이가 9m나 되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고, 위층 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새겼다.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었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백제계 석탑의 특색이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긴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 있다.

 

오층석탑 뒤에는 금당터가 자리 잡고 있다.

주춧돌만 드문드문 남아 있으나, 그 위에 웅장하고 정교하게 쌓은 돌 축대가 있었다.

그 돌 계단 부근에 불이문이나 금강문이 있었을 것 같다.

금당터 뒤에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는 법인국사탑을 모셨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법인국사 탄문은 신라 말과 고려 초의 고승으로, 고려 광종 19년에 왕사, 광종 25년에 국사가 되었다.

말년에 보원사에 머물렀다는데, 이곳에 사리탑을 세운 걸 보면 아마 어렸을 때 수도한 것 같다. 

법인국사 탄문은 광종 26년에 보원사에 입적했다.

당시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임금인 광종이 슬퍼하며 부도를 세우라고 명했단다.

 

자연석을 입체적으로 쌓은 부도의 석축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정연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는 8각의 아래 받침돌을 2단으로 쌓은 뒤 8각 기둥을 세우고, 윗 받침돌을 올렸다.

아랫단에는 8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아래는 사자를,

윗단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윗 받침돌 아랫면에는 연꽃무늬, 윗면에는 난간 형태로 만들었다.

​팔각의 몸돌은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과 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이었다.

그 양쪽에는 사천왕과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면에는 목조건축 같은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상륜부에는 연꽃이 조각된 복발 위로, 세개의 보륜이 차례로 놓여 있다.

 

사리탑 옆에는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가 있다.

높이 2.3m, 1.15m로 글자 수가 5,000여자나 되는 크기로

법인국사의 일생과 비를 세운 경위를 기록해 두었다.

비석 받침인 귀부는 거북 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이 밖에도 보원사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말하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대형 철불도 출토되었다.

철조여래좌상, 철불좌상외에도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도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 / 국립중앙박물관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제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8~9세기의 철제불상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딱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 수려한 얼굴 생김에 완벽한 신체 비례로 보아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목에는 신라 불상 특유의 삼도가 뚜렷하며,

 오른팔과 어깨 및 가슴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의 주름도 철로 주조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주는데,

신라 미술을 대표하는 아름답고 완벽한 불상으로 알려졌다.

파손된 손 부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훼손한 후,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한다.

 

보원사지 출토 철불좌상 / 국립중앙박물관

이 철불좌상은 '못난이 철불'로도 불리며, 크기에 비해 전체적인 조형미는 떨어진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데다가, 하체에 비해 상체가 작고 어깨는 좁다.

법의도 몸통에 대충 선을 그어 주름만 표현한 느낌이다.

추상화되어 가는 네모꼴의 얼굴과 직선으로 표현된 눈과 입의 형태는

고려시대 들어 개성적으로 변해 가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시주자의 얼굴을 본 따 만들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보원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 국립중앙박물관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 은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19684월 보원사지를 발굴 정비하는 과정에서,

보원사지에서 약 200m 거리에 있는 경작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인 도금 상태가 양호하여 아직도 금빛 찬란하다.

약간 앞으로 숙인 얼굴은 갸름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며,

근엄하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띄고 있다.

온몸을 감싼 법의 한쪽 자락은 왼쪽 팔뚝에 걸쳐 넘겨져 있으며,

끝자락이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두 손과 두 발은 손상이 심하고,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보원사지에서 나와 '개심사'로 가기 전에 해미장터부터 들렸다.

그날이 해미 장날이기도 하지만, 시장기가 돌아서다.

2년 만에 들린 해미장터였는데, 그사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더라.

난장은 오간 데 없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장돌뱅이도 별로 없는 데다, 난장을 지키는 할머니도 몇 명 없었다.

전통시장이 사라지고 변해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장터풍경이었다.

장터 현대화가 장터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당국자들은 정말 모를까?

해미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번듯한 현대식 장옥을 좋아할 리가 없다.

이제 해미만의 장터 추억은 사진 속에서나 남아 있을 뿐이다.

 

해미읍성 앞 종합상가에 있는 부여식당’으로 들어갔다

해미의 향토 음식이라는 호박게국지를 시켰는데, 묵은김치와 호박을 넣고 끓인 찌개였다.

호박의 단맛이 좀 거슬렸으나, 국물은 시원했다.

게가 없으니, ‘호박김치국지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에 자리 잡은 수덕사 말사 개심사를 찾아갔다.

마음을 열라는 개심사의 멋은 절집의 작은 아름다움에 있다.

한국의 미는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다.

명산에 자리 잡은 아담한 건축이야말로 한국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해강 김규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현판이 붙은 안양루가 버티고 있었다.

안양루를 돌아 해탈문을 들어서니 개심사 대웅보전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심검당과 무량수전이 안양루를 에워싸고,

그 옆으로 명부전, 해우소, 종각, 산신각과 연못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자연을 경영한 조선 정원 미학의 본보기다.

 

절의 진입 방식이 경상도 부석사나 불국사처럼 누각 아래를 거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내소사나 선암사 같이 누각을 끼고 진입하는 백제계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안양루 옆에 해탈문을 두어 대웅전의 측면을 보면서 들어가,

대웅전과 중정의 아름다운 어울림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웅보전은 단정한 장대석 기단에 자연석을 주초로

정면 3, 측면 3칸의 앞뒤로 조금 긴 장방형 9칸 다포 건물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혜감이 창건하여 개원사라 불렀다는데,

1350년 처능이 중창하며 개심사로 바꾸었다.

 

1710년에 개수한, 몇 채 남지 않은 조선 초기 건축물이다,

절집의 공포는 다포계지만, 건물 안쪽으로 다시 주심포식 천장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 준다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옮겨 가는 과정의 절충 형식에 가치를 둔다.

 

대웅전의 불상은 여느 불상과 사뭇 다른 푸근하고 인간적인 면모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소를 머금은 불상의 풍모에서 조각가의 장인적 심미안을 엿볼 수 있다.

 

불단 장엄의 대표적 방식은 화려한 닫집을 만들고, 그 안에 청룡과 운학으로 장식하는 것이지만,

개심사 대웅보전 삼존불 위에는 화려한 닫집 대신 운궁형의 소박한 보개를 만들었다.

정교한 목조 조각이 생기를 불어넣으며, 고색창연한 단청이 세월의 멋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개심사 전각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지만,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과 부재로 삼아

조선 건축의 멋인 자연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

 

개심사문화재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그 앞의 오층석탑’, 그리고 ‘청동 향로가 있다.

불가의 큰 행사나 대중 법회 때만 볼 수 있는 괘불도 있다.

옥 외 걸개그림인 개심사 괘불은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에 그려진 불화다.

 

1772년에 제작된 이 괘불은 삼베에다 석채와 당채로 채색한

길이 10.1미터에 폭 5.87미터나 되는 거대한 불화다.

석가모니 영산회상 장면을 그린 것인데, 화면을 꽉 채운 석가모니 상에 견주어

주변의 보살과 시중들은 매우 작게 묘사되었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녹색과 청색, 붉은빛이 어우러져, 밝고 장엄한 맛이 일품이다.

 

조선의 전통 건축에서 민가나 서원, 사찰 마당에는 꽃과 나무를 심지 않고 불필요한 석물도 놓지 않았다.

조선 사대부는 내면에 흐르는 금욕의 절제미를 마당에 표현하는 것이다.

담 너머 수목을 감상하며 시야를 넓혔으며, 내당 후원에 화단을 두어 답답한 여인네 마음을 풀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심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심은 꽃나무는

모두 걷어내 반듯하고 정갈한 절집 풍경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대중 법회 때 사용되는 철재 괘불 지지대도 철거해

원래대로 돌로 된 지지대만 두어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심사에서 내려와 아산의 김선우씨를 만나야 했다.

선우씨가 정선 불난 집 대신 자신의 땅에 작업실을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지난 달에도 가봤지만,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야산이었다.

 

김선우씨를 비롯한 지역활동가들이 오래전부터

대안학교를 만들기 위해 산을 사들였으나,

건축법 등 여러 가지 제약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젠 모든 규제가 풀렸으나, 세월이 흘러 대안학교 건립이 무산된 것 같았다.

더러는 자신의 지분을 팔거나 찾아갔다고 했다.

이제 김선우씨와 김창복씨 등 몇 명만 남았는데,

선우씨가 소유한 부지가 4,000평에 이른다고 했다.

 

오후 4시 무렵에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선우씨 외에도

김창복씨와 김 온, 양햇살 양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과 한 달여 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오래전에 지은 기존 기와집 외에도 대형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여러 용도의 작업실로 개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할 주택 자리는, 포크레인으로 언덕을 평지로 만들어 놓았더라.

당장 이동식 주택을 구입할 형편은 안 되지만, 이제 한시름 놓은 것이다.

 

주말이라 상행선 차 밀릴 것이 걱정되어 저녁 식사후 급히 돌아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할 일도 많아졌지만, 도움만 받는 마음의 빚이 무거워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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