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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대목장은 지리산 가까이 있는 함양장을 찾아갔다.

모처럼의 여행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함양은 좋아하는 고장 중의 하나다.

거리는 떨어졌으나 내 고향 창녕과 같은 도인데다, 가까이는 이목일 화백 고향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산수와 어울려 선비들의 묵향이 은은한 고장이다.

 

지난 7일 새벽에 출발하여 오전 10시 무렵에야 도착했는데,

장터 이름은 지리산 함양장으로 바뀌었고, 기억마저 흐릿한 장터가 낯설어 보였다.

정겨운 풍정은 오 간데없고, 세속화된 좌판대만 줄 줄이다.

서울 재래장이나 시골 장터나 다를게 없다.

 

대목장이라 노인들은 많았으나, 젊은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변했으나, 장 보러 나온 노인들만 바뀌지 않았다.

 

여기만이 아니라 시골장은 어딜 가나 노인들 뿐이다.

요즘의 정동지 장터 순례길도 장돌뱅이나 노인들 만나 이야기 듣는 게 일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듯이 선지국 파는 식당을 찾았으나,

개똥도 약에 쓸려니 없었다. 대신 옛날 보리밥집에 들어갔다.

 

푸짐하게 내놓은 야채에다 된장을 넣어 맛있게 비벼 먹었는데, 밥값은 한 그릇에 사천 원이란다.

 

두 모녀가 운영하는 식당이라 인건비 나갈 걱정은 없겠으나

천정부지로 치솟는 식 재료비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모르겠다.

손님도 모두 할머니뿐인 것을 보니, 노인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까웠다.

 

늦은 조반을 들고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를 찾아갔다.

학사루의 크고 의젓한 자태는 옛날 그대로 였고

건너편에 있는 500년 묵은 학사루 느티나무도 당당했다.

 

함양은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본거지로서 경상좌도의 안동과 함께 우도 학문의 중심지였다.

선비들과 관련된 함양의 문화유산에서 가장 먼저 꼽이는 곳이 학사루다.

정면 5, 측면 2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건물 주위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있다.

 

어느 때 지어졌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창건했다고 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한다.

1380년 왜구의 노략질로 관아와 함께 불타, 1692년에 중수된 기록이 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이곳에 걸렸던 경상도관찰사 유자광의 시를 떼어내 불태워버린 적이 있다.

유자광이 남이 장군을 모함한 간신배라 학사루에 시문을 걸 자격이 없다고 본 셈이다.

이는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 '조의제문'을 둘러싸고 생겨난 무오사화의 씨앗이 됐고

이 때문에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한다.

 

 함양은 은거하던 유학자들 이야기가 세월을 거치면서 설화가 된 인물 전설이 유독 많은 곳이다.

또한 험준한 지리산과 덕유산 줄기를 끼고 있는 지형적 요인으로 바위나 봉우리에 관한 전설이 많은 점도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인 함양 상림을 찾아갔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데, 산책하기 딱 좋았다.

이 상림은 신라 말기 ‘슈퍼스타’ 최치원이 조성했.

최치원은 진성여왕 시절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수해를 막기 위해

고을 가운데로 흐르던 물길을 바깥으로 돌리는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원래는 대관림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며 가운데가 사라지고,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지금은 상림만 남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물소리와 숲의 상쾌한 공기에 휩싸여 바라보는 유적의 자취는 고풍스럽다.

인물공원에는 최치원 흉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다섯 사람 흉상이 둘씩 마주 보고 있다.

 

이은리 석불도 이곳에 있다.

원래 함양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옮겨 놓았는데,

불상 가까이 망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망가사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광배와 대좌를 갖추었으나 두 손은 떨어지고 없었다.

이러한 짓거리는 대부분 몰상식한 인간들의 종교박해다.

자태가 단정하고 얼굴은 토속적이나 두 귀는 이상하리 만치 길죽하다. 

얼굴에 비해 빈약한 두 어깨는 통견의 가사가 U자형으로 두텁게 조각되어 있었다.

타원형의 거신형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잎을 새겼으며, 신광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상림 숲 속에는 젊은 중이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여인을 사모하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었다는 상사화가 붉은 피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었고,

한쪽에는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붙은 연리지(상서로운나무)’도 있었다.

이 나무 앞에서 연인이 같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들어준단다.

 

상림에서 벗어나니 지척에서 함양산삼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 92일부터 911일까지 상림공원 일원에서 열렸는데, 산삼과 더불어 농산물 전시도 있었다.

 

아직 축제가 자리를 잡지 못해 그런지 관광객은 없었는데,

마음 약한 정동지만 약초상의 권유에 못 이겨 거금 오만원을 털렸다.

 

이제부터 영남사림의 본거지인 서원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함양의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함양향교‘, ’안의향교‘, ’남계서원‘, ’청계서원등이 있으나

그중 같은 곳에 있는 남계서원청계서원을 찾아갔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달성의 도동서원’, 안동의 병산서원’, 정읍의 무성서원’,

논산의 돈암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남계서원은 개암 강익이 1552년 짓기 시작해 10년의 세월을 거쳐 완공했다고 한다.

1542년 건립된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서원이다.

함양 선비 문화의 기둥이라 할만한데, 관이 주도한 소수서원과 달리

민이 앞장서서 건립을 주도했다는 점이 달랐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풍영루를 들어서면 남계서원, 명성당, 거경재 같은

현판이 걸린 강학 공간이 있다.

 

학생들 기숙사로 쓰던 동쪽 양정재와 서쪽 보인재,

마루가 넓은 애련헌, 영매헌이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다 연못까지 있으니 누마루에 앉으면 시상이 절로 떠오르겠다.

 

구조는 단순하고 꾸밈은 소박하나 규모는 작지 않다.

나름 짜임새를 잘 갖췄고, 잘 자란 나무들과도 어울려 아늑하다.

이곳은 정여창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웃하여 청계서원이 있는데, 남계서원보다는 작지만 분위기는 뒤지지 않는다.

청계서원은 연산군 때의 학자 탁영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하여 1921년에 건립되었다.

 

김일손은 성균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을 쓴 학자다.

하지만 조의제문수록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희생되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며 청계정사도 폐사되었으나

1906년 유림들이 청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청계정사 중건은 1917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준공해 청계서원이라 불렀다.

 

서원의 입지는 높은 곳에 제향 영역, 낮은 곳에 강학 공간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전형을 보인다.

서원 건물 중앙에는 정면 4,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다.

강당 뒤쪽의 높은 지대에는 사당인 청계사를 중심으로 맞은편에 내삼문이 배치되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탁영 김선생유허비와 연당도 있다.

 

그다음은 조선 말기 여권 신장의 상징이라는 허삼둘 가옥을 찾아보았다.

 

안의면 광풍루 옆에 자라잡은 독특한 옛집이었다.

 

2004년 안채가 불타는 변을 겪었다지만, 지금은 복원되어 있었다.

1918년 갑부 집안의 여자 허삼둘이 남편과 함께 지은 기와집이라는데,

이런 구조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이라고 한다.

 

허삼둘 가옥은 안채로 드나드는 대문이 사랑채로 이어지는 대문과 별도로 마련돼 있고,

기억자 모양인 안채도 독특하지만, 꺾이는 모서리에 부엌을 만들어 놓았다.

앞은 물론 장독대가 있는 뒤로도 문을 내어 편리함을 더했다.

 

또 부엌에서 내다보면 안채와 안마당은 물론 사랑채 쪽 인기척까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지어졌다.

부엌이 전체를 장악한 형상이어서 집안 실권을 안주인이 쥐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가옥이었다.

그러나 넓은 마당에 나무가 별로 없어 허전했다.

 

그곳에서 마애여래상을 보러 마천면 덕전리로 자리를 옮겼다.

덕전리 마애여래상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높이가 5.8m나 되는 마애불이다.

고려시대 많이 제작된 거불 중의 하나로 광배와 불신, 대좌를 고루 갖추었다.

광배는 양각선으로 조각되었는데, 안에는 연주문이, 밖에는 불꽃무늬가 돌려져 있다.

불상의 전체 크기에 비해서 머리 부분이 작지만, 얼굴은 강건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준다.

 

넓고 당당하게 벌어진 양어깨에 불의를 걸쳤는데, 가슴에서 한 번 반전되었다.

통일신라의 전통 양식을 따른 불상으로,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은 두툼하고 커다란 데 비하여 손은 비례에 맞지 않게 작아서 좀 어색하다.

대좌는 앙련좌와 그것을 받치는 하대로 구분되어 있었다.

 

함양중고등학교 교정에 있다는 고려시대 석불좌상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도 찾아보았다.

학교란 장소가 뜻밖이었으나, 높이가 4미터가 넘는 거대 석불좌상이었다.

덕전리 마애여래입상의 밝은 미소를 많이 닮았는데,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하다.

 

불상 뒤의 광배는 없어지고, 불상의 얼굴과 오른손, 무릎과 대좌 일부가 없어지거나 손상되었지만,

강건한 좌상의 규모에 압도된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4각형의 대좌는 윗부분은 깨지고 양쪽 옆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의 중간 부분에는 눈 모양의 안상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었다.

이 불상은 고려적인 불상의 힘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여겨진다.’적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문화재로 꼽힌다는 서암정사를 찾아보았다.

오래된 절은 대부분 가보았으나, 이 절은 가 보지 못했는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칠선계곡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암정사벽송사 부속 암자로 현대가 만들어낸 미래 문화재란다.

 

사찰 안에는 대방광문, 석굴 법당, 광명운대, 사자굴 등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자연 암반에다 굴을 파고 조각한, 건축학적으로 특이한 구조다.

 

석굴법당은 원웅스님께서 6,25 난리통에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려

1989년부터 10여년간에 걸쳐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상과 제불보살상 등으로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사방과 천장까지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조각가 홍덕희거사가 10년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한 채 불력으로 조성한 것이란다.

 

십년 전에 완공하였다는 대웅전은 한국 전통 목조건물로는 보기드문 자형 건축물이다.

중층구조의 겹처마를 두어 한국 고건축의 선과 미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이 절은 사방을 이어 조각한 석굴법당 외에도

절터 입구에서부터 바위에 여백만 있으면 불상을 새겨놓아, 절제의 미가 아쉬웠다.

아무리 좋아도 너무 많으면 소중함을 못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월이 한 참 지난 후 어떻게 바라보고, 그 특징을 무엇으로 짚어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경관 하나는 천하일품이었다.

 

가까이 있는 벽송사에서부터 향교나 누각 등 함양지역의 유적을

다 돌아보기란 하루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오후 여섯 시 무렵 서암정사’를 떠나, 밤 열 시쯤 서울에 도착했다.

이런 당일 코스의 강행군은 다음 날 죽어나지만,

죽어도 좋은 길이 정동지와의 여행길이다.

 

사진, / 조문호

 

[지리산 함양시장]

 

[남계서원]

 

[청계서원]

 

[함양산삼축제]

 

[함양 상림]

 

[덕전리 마애여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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