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고향 같은 곳이다. 사람이 살다 지치면, 외롭고 피폐해지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고향이다. 그곳엔 그가 태어나 자란 골목들이 있고, 머리 허옇고 허리 꾸부정 하지만 아직 살아숨쉬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웃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인사동은 여러 사람들에게 고향같은 그리움을 안겨 주고 있는 곳이다. 따뜻함을 던져 주고 있는 곳이다. 번다한 서울 거리에서 인사동 만큼 아직도 정이 남아 있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 많이 복잡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곳은 비록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막걸리 한 사발 국밥 한 그릇쯤 흔쾌히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은 화랑과 술집들이 허다하지만, 이십년 삼십년쯤 전엔 그렇지가 않았다. 관훈미술관에서 주로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었고, 그 뒷 편의 ‘부산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곤 했다. 문영태, 황주리, 이청운 등이 이 시절 자주 드나들던 ‘그림쟁이’들이었다.

오후 느지막히 출근(?)하면 먼저 천상병 선생의 부인 문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찻집 ‘귀천’에 들린다. 거기엔 아는 이들이 늘 죽치고 있어 손을 번쩍 치켜들며 자리를 권하고, 커피나 모과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뒤 어울려 이차로 막걸리를 마시러 ‘실비집’으로 향한다.

실비집엔 또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막걸리, 빈대떡, 돼지갈비, 등속을 앞에 놓고 무슨 이야긴지 담소를 나누는 아는 얼굴들이 늘상 있게 마련이었다.

시를 쓰는 박종수형, 그림쟁이 박광호, 사진쟁이 조문호, 김종구 등이 어울려 역시 손을 번쩍 치켜들며 아는 체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맨 날 보는데도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그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그 당시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따로이 별로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귀천이나 실비집으로 가면 모두 다 거의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으므로, 주머니에 차비와 담배값과 막걸리값 정도를 챙겨 넣고 허위허위 무슨 바쁜 일이 급한 사람처럼 찾아들면, 그렇게 아는 얼굴들이 매일처럼 앉아 있게 마련이었다.

좋은 시절이였고, 그야말로 정이 넘치는 그런 시절이었다. 인사동 골목을 들락거렸던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 중에서 실비집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허름한 한옥을 대충 수리해서 만든, 테이블 몇 개와 방 두어 개가 있는 그 술청에서 참으로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과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스쳐 지나가고 흘러갔다.

천상병 선생은 자리에 잘 앉지 않았다. 막걸리 한 되를 시켜 놓고 주방 앞에 서서 한두 잔 마시곤 이내 나갔다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다. 천선생을 비롯해 많은 주객들이 이승을 떠났고, 남아 있는 이들도 이제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 하다.

귀천은 아직 그대로 있지만 실비집은 오래 전에 인사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골목을 기웃거리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조금씩 남아 있는 이웃들과 함께 낯선 이방인인 듯 이 술집 저 찻집을 떠돌고 있을 따름이다.

인사동은 서울 속의 조그만 섬과 같은 동네다. 파고다 공원을 지나 인사동 네거리를 거쳐 안국동 입구에 이르는, 길어야 이백 미터 남짓한 길모퉁이의 이쪽저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래 된 한옥들이 인사동의 주 무대를 이루고 있다. 아기자기 하고 정겨운 동네다. 인사동을 잘 알면 쉴 데도 많다.

오래 전,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 화가 강용대. 대낮에 취해 뻗어버린 그를 업고 경인미술관 뒤쪽 마루에 눕힌 적도 있지만, 인사동 곳곳엔 이런 성지(聖地)가 남아 있어 피곤한 떠돌이들의 삶을 돌본다.

인사동-기억의 풍경.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그 주변을 안개처럼 떠돌고 있다.







寂音 최영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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