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이 있었던 그 시절, 인사동에 겨울비가 내렸다.

질퍽대던 골목에 어둠이 깔려 들어선 곳은 ‘갈까부다‘를 잘하는 점숙씨의 카페 ’레떼‘, 흐릿한 불
빛 너머의 길가 좁은 의자위에 뭔가 포기해가는 사연이 비쳤다.
자칭 여류시인이며 진보운동가라는 삼십대 후반 Y여사, 열 달이나 방세가 밀려 노숙자 신세로 토
막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기구한? 사연을 물리칠 수 없었다.
엊그제 내 결혼시계와 집사람 패물 팔아, 수배 중 이라는 친구를 도왔던 뱃심으로 수표 두 장 건네
고는 ’실비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성씨! 쌀도 떨어졌어, 이 지긋지긋한 장사 십 만원 매상만 오르면 문 닫을거야‘ 실비집 총장이
내민 외상장부에는 박광호를 비롯한 인사동 낭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십 만원 수표 한 장으로 칠 천원짜리 양주 네 병을 샀다.
'이걸로 십 만원 매상입니다. 안주는 필요 없어요.‘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기고는 쓰러져 깨어난 아침, 찬 겨울비는 그치지 않고 주룩주룩 인사동을 적
시고 있었다.

그 날 일로 가계수표 30만원 부도에 몇 년간을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되돌아보니 인사동 술값, 밥값으로 삼십년이 흘러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인력거를 끄는 초로의 내 모습을 보았다.
얼핏 슬펐지만 오늘도 다시 ‘갈까부다’ 라는 인사동에 와 있으니, 고향집의 가난한 행복이라고 억
지를 부려본다.

빚에 쫓기는 부도수표 같은 삶을 살지만 그 차가웠던 겨울비는 이미 봄비가 아니었을까 위안해본
다.







김명성(시인)


장대비가 쏟아지던 팔팔년 여름날 장가를 갔다.

택시에 내려 흥사단까지 불과 오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옷이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새양쥐 꼴로 식장에 들어갔다.
지금은 돌아가신 원로사진가 임응식 선생님께서 주례말씀을 하셨는데, 정신을 놓아 한마디도 기억에 없다.

혼례를 끝내고 인사동 친구들과 어울려 실비집에서 뒤풀이를 했으나 그마져 순탄치 않았다.
그 당시 사진협회에서 일하던 박한웅씨가 축의금 동냥하는 적음을 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싸움판이 벌어졌다.
뒤 이어 술 취한 신랑 놈이 옷을 발가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는 물론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판은 완전 개판 되었다.

판을 바꾸려 술김에 저지른 해프닝이 망가진 내 인생의 시작이었다.



조문호(사진가)


나는 '시인통신'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날 화가 서영준씨와 사진기자 김종구 씨가 후배들을 끌고와 서로 터줏대감 이라 우기며 비장의 카드로 승부를 벌였다.
먼저 서씨가 땀내뿐 아니라 꼬랑내까지 나는 양말 한쪽을 벗어 그걸 자루처럼 벌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부어 비틀어 짰다.
순식간에 새까만 땟국물 막걸리가 사발에 가득 찼다. “자, 이 술 한 잔 받으시라 !” 서씨는 막걸리 사발을 김씨 앞에 놓았다.
“좋아, 내가 이걸 마다할소냐!” 김씨는 하마같이 큰 입을 벌린 채 허허 웃더니 이내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땟국 술을 마신 김씨는 난데없이 탁자 위로 뛰어올라 바지를 훌러덩 벗었다.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더니 큼직한 사각 팬티를 벗어 가랑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 속에다 막걸리를 부었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항문 쪽은 누런 자국이 선명한 데다 앞자락에는 노르께한 땟국이 끼어 있는, 걸레에 가까운 팬티였다.
그는 서씨에게 한 방울의 술이라도 더 먹이려는 듯 팬티 자락을 한껏 비틀어 짰다.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그러자 서씨가 씩씩거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반 나체가 된 김씨는 좋아라 제 사추리에 달린 물건을 흔들어가며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귀남(수필가)



삼십 년 전의 인사동은 밤 9시만 되면 인적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
야차가 나타날 것처럼 은산하고 괴괴하였으며 쓸쓸 맞기까지 하였다.
이따금씩 한복 차림의 기생들과 함께 술 취한 넥타이꾼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사동 야경의 전부였다.

필방들과 골동품 가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겨우 구멍가게 하나와 골목 끝에 숨어 있는 실비집 만이 백열등을 밝히고 있었을 뿐,
초저녁부터 인사동은 까만 침묵 속으로 까무룩하게 빠져 들어가곤 하였다.
우리는 텅 빈 위장 속에 농약처럼 소주를 풀어 넣으며 밤이 새도록 알 수없는 사랑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제 풀에 지쳐서 절망을 하기도 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터무니없는 분노를 폭발하기도 했다.

그 후 삼십 년이 흘렀다.
몇몇은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시인이 되었고, 화가가 되었고,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사장이 되고,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몇몇은 술병으로 타계하여 전설이 되었고, 또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또 몇몇은 입산(入山)을 했다.
그리고 또 몇몇은 아직도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조해인(시인)




90년도 4월경 인사동 “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원한 후원자 김명성씨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모두들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대개 술이 취하면 젓가락 장단에 흘러간 유행가 자락으로 흐르는 것이 정석인데,
그 날 따라 전각하는 현암 최규일선생께서 화선지를 꺼내어 묵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붓을 휘둘러 달마승 비슷한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낙관이 없다며 서성거렸다.
취기가 동한 내가 바지 속에서 거시기를 꺼내, 고추장 종지에다 문질러 대신 낙관을 찍어드렸다.
현암 선생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 “찍더라도 내 것으로 찍지, 왜 니 것으로 찍느냐?”는 것이었다.
“내 그림을 우습게보고 조옷 먹인다”는 것이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 때 벌 받아 따가워 혼났습니다.”



조문호 (사진가)






30년 가까이 인사동을 드나들었지만 나에게 단골집이란 다섯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실비집’에서 총장 눈치 보며 김치에 보리차 부어 밤 늦도록 술을 퍼 마시고,
돈이 없으면 누가 나타날 때까지 죽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물주 따라 맥주집 ‘하가’에도 가끔 들렸다.
그 이후 드나들었던 집으로는 ‘우리식당’, ‘작은 뜨락’이 유일한데 이젠 그마져 다 사라지고
주인도 장소도 바뀐 ‘하가’만 남아있을 뿐이다.

몇 년 전, 옛날 술꾼들을 배려해 주었던 주막집 주인이 다시 돌아와 ‘유진식당’을 차렸다.
가끔 대포 한 잔씩 나누어 주는 맛이 옛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왜 인사동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술집들은 하나같이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꾀죄죄하고 조그만 술집들일까?
이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주머니사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때 묻지 않은 주모의 넉넉한 인정에 쏠렸을 것이다.




전강호(화가)


인사동은 친정집 같은 포근함이 있다.

숱한 세월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화가 박광호씨와 사진작가 조문호씨를 꼽을 수 있다.
애잔하고 즐거운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광호씨의 그림과 그의 삶은 너무 애잔하다.
어느 날 그의 전람회장에서 만난 그의 삶도 기구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마음을 적셨다.
생선뼈만 그려진 그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애잔한 감상에 빠져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문호씨는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소설가 배평모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첫 인사가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 같은 말로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갑자기 술상 밑을 기어 내 앞으로 나와 놀라게도 하고 시종일관 개구쟁이처럼 좌중을 웃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의 절창 ‘봄날은 간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몇 년 전에는 ‘천포문학회’ 모임을 영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시 낭송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결정판은 아침의 기념촬영이었다.
참석한 삼십 여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뜰 앞으로 모였는데, 대뜸 조문호씨가 “무슨 졸업사진 찍냐?”며 바지 지프를 내리고 거시기를 꺼냈다.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

그 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천태만상인데, 내 생애 찍은 기념사진으로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강선화(사업가)






인사동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골목골목, 주청마다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하다.
어느 집은 환쟁이들의 술타령이 이어지고,
어느 집은 술 취한 글쟁이들의 절규가 처절하다.
쾌쾌 묵은 노래와 끝없는 담론으로 온 통 시끌벅적하지만
아무도 탓하는 이가 없다.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밤의 열기에 모두들 인사불성이 된다.
인사동만이 맛볼 수 있는 밤 골목의 진풍경이다.
인사동의 매력은 바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밤 풍경이다.

그래서 인사동 문화는 거듭난다.







이수영(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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