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사람들을 대개 기인 부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는 천상병선생과 중광스님의 기행적 삶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인이라고 기이한 행동만 일삼는 비사회적인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낭만과 자유, 그리고 순수의 열정이 너무 강할 뿐이다.
일상적인 삶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늘 일상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항상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외로움을 덜 타려는 별난 행동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기인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인이란 말 뒤에는 미쳤다는 뜻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때론 창작에 대한 일념으로 한 가지에 몰입하다 보면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진짜 미칠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만드는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할 산이다.

비록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과 미친 사람 사이의 그 경계를 지킬 수 없을지라도 미치고 또 미쳐야 한다.




최울가(서양화가)


나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청년기를 보낸 명동 시절이고, 두 번째는 장년기를 보낸 관철동 시기이며, 세 번째가 노년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의 인사동 시대이다.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다. 나는 내 취향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코드 음악이 흐르는 명동의 음악다방 <엠프레스>를 즐겨 찾았고, 한국 바둑의 총본산인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도처가 그림인 인사동 거리를 걷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나의 교우 영역은 넓어 시인․ 소설가․ 바둑칼럼리스트․ 음악가․ 연극인 지인이 허다하나, 그중 대표적으로 <엠프레스>에서 이일(불문학과 선배로서 시인으로 출발해 나중에 아방가르드를 이끈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 타계), 한국기원에서는 신동문(초로에 시업을 접고 단양으로 내려가 땅을 개간하며 무료 침술을 펼치다 별세)과 강홍규(고교 후배로 스포츠 소설을 개척하고 바둑 야사를 감칠맛나게 썼으나 요절)를 들겠다.

명동 시절은, 이청운의 어둡고 아픈 「구석」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6․25 전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 한데 어울려 예술과 술과 사랑으로 꽃피웠던,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 ‘라 벨 에폭’이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좋아 거기 깊이 빠져 공부는 고사하고 대학도 팽개쳤다. 또 한편으로 내기바둑에 빠져 마침내는 놀음바둑에 미쳐 금쪽같은 돈을 상당수 날리며 인성마저 피폐해졌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내 생애의 세 시기를 관통하여 함께한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한 분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요, 다른 한 이는 천진무구의 시인 천상병이며, 또 한 사람은 무학의 수재 번역가 박이엽이다. 위․아래층으로 한 건물에 있던 송원기원과 청동다방에서 뵈었던 민병산과는 관철동으로 이어져 한국기원에서 한 식구처럼 지냈는데, 해가 져 어스름해지면 나를 포함해 1개 분대나 되는 떼거리가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이웃한 꼬마집이나 예쁜이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즐겼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으나 그가 인사동으로 옮기고는 관철동이 전과 같지 않았으며 나 또한 그와 뜸해졌다. 해직기자로 민병산에게 신세지던 임재경이 신세를 갚을 양으로 발의해서 조건영이 설계․시공한 연립주택에 집 없이 떠도는 민병산을 모셔 안정시켜드리자는 운동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걸로 해서 결국은 민병산 기념문집 「철학하는 즐거움」에 그의 프로필을 그리는 난에 조차 끼지 못했다. 이는 나에게 두고두고 후회스럽고 끝내 유감으로 남았다. 그 까닭은 임재경이 벌이는 운동이 좋은 일이긴 하나, 이를 당사자도 적극 사양하는 형국이고 나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위선이 느껴졌던 때문이었다.

천상병과 나와의 첫 만남은 낙원동 초입의 고전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서였는데, 종로 1가 <말리앙스 프랑세즈>에 불어를 배우러 다니는 나는 고교 3년생의 까까머리인데 반해 그는 이미 시 「강물」,「갈매기」와 평론 「허윤석론 으로 <문예>지의 추천을 마친, 한참 촉망받는 최연소 ‘2관왕’이었다. 나는 그를 쫓아 명동의 여러 예술인 집합처는 물론 을지로 입구 내무부 못미처에 있는 동방살롱과 소공동 쪽 미도파 맞은편의 문예살롱까지 두루 주유했는데, 붙어다니는 우리는 흡사 돈키호테와 그를 따르는 종자 산초판자와 같았다. 음식점을 하던 내 집에 천상병은 환대를 받으며 드나들었고, 나는 그의 전리품을 팔아 누상동 한옥 여관에서 잠자며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디퉁디퉁 불안한 걸음걸이와 왁자지껄 볼륨 높은 언성, 그리고 고르지 못한 이빨을 온통 드러내는 파안대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지금도 보고 싶고 그립다.

본명이 박은국인 박이엽을 처음 만난 것도 천상병과 만난 그 무렵이었다. 부산 수영 밖 촌놈이 대처 서울에 올라와 국민음악연구회의 편집장을 맡아하던, 어엿한 직장인 박은국은 그때 서라벌예대․ 동국대의 문학 지망생들에게 어리굴젓을 곁들인 녹두지짐을 자주 맛보게 해준 독지가였다. 조숙하면서 어른스러운 박은국의 수영집의 신문지로 도배된 흙벽 방에서 나는 처음 정성껏 필사한 오장환의 시집 「헌사」와 「병든 서울」을 보았으며, 러시아의 마지막 농민시인 예세닌의 번역시집을 감격스럽게 읽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은국 이야말로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까지 꾸준히 우정을 이어온 흔치 않은 친구이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박이엽이 진정 따랐던 선배 민병산이 지병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둔 바로 그 병으로 숨진 것인데, 나도 지금 같은 병으로 고생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근년에 부쩍 박이엽과 단짝이었던 채현국을 여기서 빠뜨릴 수 없다.

채현국으로 말하자면, 대학생 적에 넝마 같은 검정 교복에 까까중머리를 하고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다녔지만, 친구들의 점심은 도맡아 챙겨 배불려주었던, 당시 제2의 민영 탄광주의 외아들로서,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고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집을 채로 사준 오척단구의 거한이었으며, 예대해야 할 ‘농무’의 시인 신경림과 리얼리즘의 문학평론가 구중서에게는 현찰로 주기 계면쩍어 그들이 다니는 술집에 술값으로 상당액을 미리 적금해주었고, 나중에 사돈이 된 임재경에게는 그가 워낙 현찰을 밝히므로 꼭 돈으로 안겨주었으며, 후배인 구중관이나 방영웅에게는 수시로 용돈을 건네주었으니, 흔히 보기 드문 인정의 사나이였다.

나는 관철동을 지키다 뒤늦게 인사동으로 건너간 편인데, 이미 새들이 둥지를 옮겨 튼 터라 그 곳에 나가서야 외려 오랜 친구와 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어쨌든 분명 인사동은 관철동과는 다른 잔정과도 같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오늘에 생각해보면, 칠십줄 노인이 된 이제 가끔 하는 서울 나들이에 인사동 같은 곳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자문해본다.

지금 인사동의 주인은 60대 초반의 형벌인 배평모와 조문호, 그리고 좀 아래의 김명성과 전활철, 이청운 등 ‘인사모’의 면면들이다. 천애고아 화가 이청운과 결의형제를 한 「분례기」의 작가 방영웅이나 숱한 독신남을 거느렸던 총각대장 구중관은 이제는 한물갔다고 보아야 옳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닥 걱정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으니, 예술 벨트가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이행한 오늘의 문화지도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강남을 선망하듯 언제 그쪽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사동은 잡다한 잡상인을 떨쳐버리고 국적을 알수 없는 상품들을 쫓아내고 전통을 살려내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통금이 있었던 그 시절, 인사동에 겨울비가 내렸다.

질퍽대던 골목에 어둠이 깔려 들어선 곳은 ‘갈까부다‘를 잘하는 점숙씨의 카페 ’레떼‘, 흐릿한 불
빛 너머의 길가 좁은 의자위에 뭔가 포기해가는 사연이 비쳤다.
자칭 여류시인이며 진보운동가라는 삼십대 후반 Y여사, 열 달이나 방세가 밀려 노숙자 신세로 토
막잠을 잘 수밖에 없다는 기구한? 사연을 물리칠 수 없었다.
엊그제 내 결혼시계와 집사람 패물 팔아, 수배 중 이라는 친구를 도왔던 뱃심으로 수표 두 장 건네
고는 ’실비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성씨! 쌀도 떨어졌어, 이 지긋지긋한 장사 십 만원 매상만 오르면 문 닫을거야‘ 실비집 총장이
내민 외상장부에는 박광호를 비롯한 인사동 낭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십 만원 수표 한 장으로 칠 천원짜리 양주 네 병을 샀다.
'이걸로 십 만원 매상입니다. 안주는 필요 없어요.‘
마지막 한 모금을 남기고는 쓰러져 깨어난 아침, 찬 겨울비는 그치지 않고 주룩주룩 인사동을 적
시고 있었다.

그 날 일로 가계수표 30만원 부도에 몇 년간을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되돌아보니 인사동 술값, 밥값으로 삼십년이 흘러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인사동 골목으로 인력거를 끄는 초로의 내 모습을 보았다.
얼핏 슬펐지만 오늘도 다시 ‘갈까부다’ 라는 인사동에 와 있으니, 고향집의 가난한 행복이라고 억
지를 부려본다.

빚에 쫓기는 부도수표 같은 삶을 살지만 그 차가웠던 겨울비는 이미 봄비가 아니었을까 위안해본
다.







김명성(시인)


장대비가 쏟아지던 팔팔년 여름날 장가를 갔다.

택시에 내려 흥사단까지 불과 오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옷이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새양쥐 꼴로 식장에 들어갔다.
지금은 돌아가신 원로사진가 임응식 선생님께서 주례말씀을 하셨는데, 정신을 놓아 한마디도 기억에 없다.

혼례를 끝내고 인사동 친구들과 어울려 실비집에서 뒤풀이를 했으나 그마져 순탄치 않았다.
그 당시 사진협회에서 일하던 박한웅씨가 축의금 동냥하는 적음을 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싸움판이 벌어졌다.
뒤 이어 술 취한 신랑 놈이 옷을 발가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는 물론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판은 완전 개판 되었다.

판을 바꾸려 술김에 저지른 해프닝이 망가진 내 인생의 시작이었다.



조문호(사진가)


나는 '시인통신'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날 화가 서영준씨와 사진기자 김종구 씨가 후배들을 끌고와 서로 터줏대감 이라 우기며 비장의 카드로 승부를 벌였다.
먼저 서씨가 땀내뿐 아니라 꼬랑내까지 나는 양말 한쪽을 벗어 그걸 자루처럼 벌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부어 비틀어 짰다.
순식간에 새까만 땟국물 막걸리가 사발에 가득 찼다. “자, 이 술 한 잔 받으시라 !” 서씨는 막걸리 사발을 김씨 앞에 놓았다.
“좋아, 내가 이걸 마다할소냐!” 김씨는 하마같이 큰 입을 벌린 채 허허 웃더니 이내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땟국 술을 마신 김씨는 난데없이 탁자 위로 뛰어올라 바지를 훌러덩 벗었다.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더니 큼직한 사각 팬티를 벗어 가랑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 속에다 막걸리를 부었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항문 쪽은 누런 자국이 선명한 데다 앞자락에는 노르께한 땟국이 끼어 있는, 걸레에 가까운 팬티였다.
그는 서씨에게 한 방울의 술이라도 더 먹이려는 듯 팬티 자락을 한껏 비틀어 짰다.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그러자 서씨가 씩씩거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반 나체가 된 김씨는 좋아라 제 사추리에 달린 물건을 흔들어가며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귀남(수필가)



삼십 년 전의 인사동은 밤 9시만 되면 인적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
야차가 나타날 것처럼 은산하고 괴괴하였으며 쓸쓸 맞기까지 하였다.
이따금씩 한복 차림의 기생들과 함께 술 취한 넥타이꾼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사동 야경의 전부였다.

필방들과 골동품 가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겨우 구멍가게 하나와 골목 끝에 숨어 있는 실비집 만이 백열등을 밝히고 있었을 뿐,
초저녁부터 인사동은 까만 침묵 속으로 까무룩하게 빠져 들어가곤 하였다.
우리는 텅 빈 위장 속에 농약처럼 소주를 풀어 넣으며 밤이 새도록 알 수없는 사랑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제 풀에 지쳐서 절망을 하기도 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터무니없는 분노를 폭발하기도 했다.

그 후 삼십 년이 흘렀다.
몇몇은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시인이 되었고, 화가가 되었고,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사장이 되고,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몇몇은 술병으로 타계하여 전설이 되었고, 또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또 몇몇은 입산(入山)을 했다.
그리고 또 몇몇은 아직도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조해인(시인)




90년도 4월경 인사동 “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영원한 후원자 김명성씨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모두들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대개 술이 취하면 젓가락 장단에 흘러간 유행가 자락으로 흐르는 것이 정석인데,
그 날 따라 전각하는 현암 최규일선생께서 화선지를 꺼내어 묵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붓을 휘둘러 달마승 비슷한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낙관이 없다며 서성거렸다.
취기가 동한 내가 바지 속에서 거시기를 꺼내, 고추장 종지에다 문질러 대신 낙관을 찍어드렸다.
현암 선생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 “찍더라도 내 것으로 찍지, 왜 니 것으로 찍느냐?”는 것이었다.
“내 그림을 우습게보고 조옷 먹인다”는 것이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 때 벌 받아 따가워 혼났습니다.”



조문호 (사진가)






30년 가까이 인사동을 드나들었지만 나에게 단골집이란 다섯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실비집’에서 총장 눈치 보며 김치에 보리차 부어 밤 늦도록 술을 퍼 마시고,
돈이 없으면 누가 나타날 때까지 죽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물주 따라 맥주집 ‘하가’에도 가끔 들렸다.
그 이후 드나들었던 집으로는 ‘우리식당’, ‘작은 뜨락’이 유일한데 이젠 그마져 다 사라지고
주인도 장소도 바뀐 ‘하가’만 남아있을 뿐이다.

몇 년 전, 옛날 술꾼들을 배려해 주었던 주막집 주인이 다시 돌아와 ‘유진식당’을 차렸다.
가끔 대포 한 잔씩 나누어 주는 맛이 옛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왜 인사동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술집들은 하나같이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꾀죄죄하고 조그만 술집들일까?
이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주머니사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때 묻지 않은 주모의 넉넉한 인정에 쏠렸을 것이다.




전강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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