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선생은 시인이기 전에 훌륭한 사진모델이었다.
사진 찍을 때마다 마치 사진사의 마음을 읽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으로 놀라게 했다.

내가 월간사진 편집장 할 무렵, 사진협회에 일이 있어 잠시 들렸다.
그 당시에는 예총회관이 인사동 초입에 있었는데, 난데없이 천상병 선생이 문을 열고 나타나신 것이다.
“어! 육명심씨는 어딧노? 육명심씨는 어딧노?”를 반복하며 마치 돈 떼어먹고 달아난 사람 찾듯 목청을 높이셨다.
육명심선생은 왜 찾으시냐고 여쭈었더니 대뜸 모델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받아야 되냐고 여쭈었더니 “만원은 받아야 된다. 만원은 받아야 된다.”를 반복하셨다.
선생님의 천원짜리 세금 징수는 당연시 여겼으나 모델료는 좀 생뚱맞았고, 돈이 없어 더 난감했다.
하여튼 초상권이니 저작권이니 하는 권리 주장이 당연시된 지금 되돌아보면 천선생은 매사에 앞서가고 있었다.
문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있던 오화경씨가 찾아와 모셔갔지만 노잣돈 할 것이라는 천선생의 말씀이 영 잊히지 않는다.

고향 가는 여비인지 저승 가는 여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 노잣돈 못 챙겨 드린 것이 회한으로 남는다.


조문호(사진가)






나에게 인사동은 50년대 르네상스음악실의 동내였다.
그 뒤에는 이승만자유당과 싸우던 민주당(조병옥선생)당사가 있던 동내였고,
나중에 엠비시 문화방송 라디오국이 거기 있었다.
건너편에 있던 동일가구에서 책장을 사다가 신혼가정을 꾸몄다.

한참 뒤 동아일보 기자시절 선배들 술 뒷바라지하러 인사동을 다니다가

나이가 들면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만나는 동네가 되었다.
유신독재가 심하던 때 정권의 갈퀴에 할 킨 남재희 이영희.....
평화만들기 시대에도 슬슬 인사동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다.
세월이 지난 뒤 맥주카페에서 낙서처럼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는 치기를 발휘하다
여운선생의 눈에 띄어 그림 공부하러 왔다 갔다 하고 아코디온을 들고 다니는 바람에 한량이 되었다.

캐주얼 차림으로 인사동 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계익(전 교통부장관)





스무살! 선물로 받은 시집 한 권 달랑 들고 “귀천‘의 천상병
시인을 만나 뵙기 위해 처음으로 인사동 골목을 찾아 들었다.
시인과 더불어 인사동을 만나고 선생님, 선배님들을 만났다.

밤이면 찾아들던 골목 어귀의 허름한 선술집 하나! 그 술집에
서 산골 청년의 꿈은 하나 둘 피어올랐다.
더운 가슴들을 만나며 집을 찾듯 인사동 골목을 드나들었다.
불혹의 마흔을 넘은 지금, 인사동과 함께 다시 꿈 하나 피워
올린다. 인사동! 그 푸른 별 이야기,


최일순 (연극배우)










빈털터리 술꾼들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술자리가 끝난 뒤의 잠자리다.

술이야 얻어먹기도 하고 외상술도 마시지만 여관비는 외상이 안 된다.
대개 술자리가 파할 즈음엔 대중교통이 끊기고, 모범택시들만 기다렸다.
요즘은 사우나탕이라도 가지만, 예전엔 주로 술 먹고 뻗는 작전을 많이 썼다.
타켓은 그래도 녹녹한 ‘실비집’이었다.
술 마시며 잘 놀다가 자정만 가까워 오면 폭주로 나자빠진다.
술상 밑에 개 같이 끼어 자지만 운이 좋으면 아침 해장국까지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절대 비밀이다.
추운 겨울에는 곤란하지만 특급 호텔 파고다 공원이 지척에 있다.
문 잠긴 텅 빈 공원에 잠입하려면 일단 나즈막한 대리석담을 넘어야 하고,
모기가 좀 귀찮게 하지만 술 취한 사람에겐 별거 아니다.

잔디 카페트가 쫘악 깔린 데다 너무 시원해 신선이 부럽지 않은 웰빙 호텔이다.

조문호(사진가)

우수마발 같았던 시절, 그러나 가슴 속에 따뜻한 둥지 같은 것을 품게 해 주었던 곳, 인사동.
요즘도 나는 인사동을 찾아들면 그 좁다란 골목 안으로 시선을 던져 넣곤 한다.
한때, 내 빈곤했던 영혼을 따뜻이 채워주었던 실비집, 그 실비집이 그리워서다.
내게 그 실비집의 풍경은 너무도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에게는 아는 예술가
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또 혼자서 문학 공부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내게 비록 가난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열망으로 모여드는 실비집의 분위기는 고담준론과 같은 것이었고, 비록 시끌
렁한 잡담과 음담패설로 왁자지껄 하더라도 내게는 자기비하가 아닌 꿈을 향한 비젼처럼 비쳐졌었다.



김신용(시인)

사람들은 와서 고장 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이지만 소리는 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내가 인사동에 작은 골방 하나를 얻어 쉼터를 마련한 때는 1998년 9월이다.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을 30년간 하다가 진정으로 내 ‘인생 일’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과감하게 사퇴를 하였다.
그때 인사동 학고재 골목을 어정거리다가 무슨 카페 같은 곳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와 그 안을 기웃하는데
요상한 사람들 몇이 맥주를 마시고 한 여인은 “빛나는 졸업장”이란 곡의 풍금을 치고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그곳 “시인과 화가”라는 카페 2층에 방을 얻어 나의 인사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사동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상한 기운을 타게 한 곳이다.
내가 시와 함께 음악을 한 탓으로 ‘음유시인’이란 명칭이 따른 탓인지
인사동에서는 풍류인들과 심심찮게 만나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노래 중에서도 특히 “부용산”이란 노래를 즐겨 부른다.
부용산 노래는 인사동을 드나드는 많은 지인들과 예인들이 좋아한다.
이 노래의 사연이 애상적인데다 곡이 가곡 이상의 신선함을 자아내 좋다.

송상욱(시인)








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중후반, 영어공부 좀 해보겠다고 종로 2가 언저리에 있던 학원 단과반
을 오가면서, 홍수환과 차범근이 나오는 권투, 축구 등의 빅 이벤트 중계방송을 보려고 가끔씩 땡
땡이를 치고 허리우드 극장, 낙원상가 근처의 TV가 있는 중국집과 분식집을 기웃거릴 때만 해도
인사동의 진면목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인사동의 골목 기웃거리기는 이렇게 땡땡이에서 시작되었다.


조준영(시인)

부산에서 인사동으로 상경한 세 화가가 있다.

영도다리 밑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존수씨와 최울가씨, 박광호씨다.
이들은 70년대 중반 부산 남포동의 ‘한마당’에서 알게 되어 10년 후 인사동에서 재회했다.
어느 날 술이 취해 포장마차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박광호씨를 만났는데 “형!”하며 반가워하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몇 푼 되지 않는 외상 술값으로 ‘실내악’에 건네 준 박광호씨의 그림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또렷하다.
생선뼈만 앙상하게 남은 빈 쟁반을 그린 그림은 그의 삶을 말하는 것 같아,
가끔 그 술집을 찾기도 했으나 이제는 문을 닫아 그마져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 이존수씨와 최울가씨는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여 승승장구 했으나
박광호씨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을 모아 몇 번이나 불태웠다.

지난 해 갑자기 이존수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다.
인심을 잃어 그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해 주는 사람이 없어 더 슬펐다.

최울가씨는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녀 자주 볼 수가 없고,
박광호씨는 몹쓸 병에 걸려 다리를 쓰지 못해 자주 볼 수가 없다.



조문호(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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