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사랑하는 한국문화 네티즌들이시여!
새로운 은하의 우주세계로 가는 열차로 갈아탑시다.
절차탁마(切嗟琢磨) 돌과 옥처럼
아니, 크낙새처럼 단단한 나무의 깊은
속줄기의 내부를 쫍시다.
그리하여 절처봉생(絶處漨生)
그 극도로 궁핍한 고갈 끝에
문화는 소생하는 법
너른 당신의 문화 생각은
깊은 도량으로부터 셈 쳐지는 것,
심량(心量)의 매우 높고 먼 문화 천외(天外)를 점하는 것
거기에 정연(井然)한 세계가 있습니다.
종심소욕(從心所欲)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바라는 곳에
문화의 중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용문(도예가)




"인사동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을 즐겨 마신다.

이 집 저 집에서 술과 더불어 맛있는 안주들을 찾는다.
배가 출출하면 '월평'의 한정식이나 '툇마루'의 된장비빔밥을 먹고, 막걸리와 가자미 식혜를 시킨다.
낙원상가 '일미집'의 청국장,'사동면옥'의 만두전골도 맛있다.
소주 한 잔 하려면 '부산식당'의 생선찌게, '이모집'의 불고기와 간장게장, ‘종로찌게’의 내장탕도 괜찮다.
전형적 대폿집 분위기까지 찾는다면 '여자만'의 꼬막과 병어무침, '푸른별 이야기'의 산초 두부,
'시인'의 생선구이, '피맛골'의 양푼막걸리와 고갈비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색다른 먹거리다.
해장국으로는 풍류사랑'에서 맛보는 올갱이국이 별미고,
술집마담의 눈웃음이 그리우면 '인사동사람들'이나 '소담'에서 맥주를 마시면 된다.
비주류를 위한 찻집도 여럿 있다. 작설차하면 ‘수희제’와 ‘초당’이고, 모과차하면 ‘귀천’이다.

인사동에서 만나면 인사말은 접고, 맛있는 집에 가서 대포나 한 잔 합시다!


조문호(사진가)








삼십 여 년의 세월동안 뻔질나게 인사동을 드나들었다. 이곳이 나에게 생업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약속의 거리였고 만남의 자리였고 어울림의 터전 이었다. 가까이 있으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사람들과 만나 많이 떠들고 웃어댔다. 그 세월동안 나에게 모든 길은 인사동으로 통하였다.

골동품이니 예술품이니 하는 것들에는 별로 관심두지 않았다. 오로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마음
쏠렸다. 삶의 기쁨을 주는 어울림을 찾아 자꾸만 인사동으로 갔다. 때때로 취해서 꼴갑 떨어 빈축
을 사기도 했다. 대책 없이 껄덕대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 바람맞아 쓸쓸해지기도 했다.

거리의 여기 저기 아늑한 공간을 마련해 두고 술과 차와 먹거리를 준비해서 우리를 기다리는 상냥
한 여인네들이 사랑스러웠다. 그 오붓한 잔치마당에서 이야기가 난무하고 웃음이 어울어지고
정보가 소통하고 설왕설래가 이루어졌다.

그리운 사람들 정겨운 사람들의 기억이 오롯이 담겨있는 인사동에 지금도 나는 소속되어 있다.






구중관(소설가)



골목마다 시절 따라 피었다가 지는 사연(대부분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들과 마주하거나
지나치면서 상식보다 진실이 난무하고 이익보다는 이해를 앞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서툴었지만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이랴!
갈비(마른 솔잎)한 움큼 불 질러 놓고 캠프파이어한다고 선남선녀를 호객하는 누더기 복장의 미남스님,
몇 년이 가도 부르는 노래는 ‘인천에 성냥공장...’ 하나 뿐인 분,
말이 업이라 혀를 짤랐다는 사람,
온 몸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서하듯 여성분들에게 첫인사 레파토리를 거침없이 들이대는 사람,
남의 공사를 혼자 다 맡아서 해결해 주는 사내,
때론, 아줌마들 여러분을 어둑한 찻집에 앉혀 놓고 시 공부를 열심히 시키시는 대 시인님,

그 패션, 그 헤어스타일, 그 개성들.


박영현(시인)






현대인에게 문화란 공기나 물처럼 생존의 근원을 이루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필자도 오랜 세월 인사동을 드나들며 우리문화를 찾고 작품들을 구하며 그 맛을 은근히 즐겨왔다.

그동안 구입했던 소장품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80년대 중반에 구입한 운보의 ‘태양을 먹은 새’다.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는 욕망을 표현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와당에 새겨진 새가 마치 불새가 되어
가마 위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하며 창작의 집념을 다져왔다.

이십 여 년 전 어느 날 친구들 틈에 끼어 초면이었던 정승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다 갑자기 운보 김기창씨의 판화 앞에서 자리를 뜨질 못했다.
술자석이 파한 후에도 저 그림을 갖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며 드러누워
결국은 그 판화시리즈 세 점을 뺏기듯이 넘겨주었다.
필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해야 하는 성정이라 십분 이해는 하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인사동을 오가며 늘 안타깝게 생각해 온 것은 인사동만의 전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관광명소로 꼽히는 인사동은 이리 저리 얽힌 골목길의 정취를 빼 놓을 수 없다.
골목마다 신라길, 가야길, 고구려길, 백제길등 으로 명하여 그 시대의 문화를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벽화나 도자, 풍속도를 전돌이나 와당으로 재현하는, 담장문화, 굴뚝문화, 장독문화 등 을 조성하여
우리 골목문화를 살려보자는 것이다.

조문호


오래전 부산에서 올라 온 김석중씨를 인사동에서 우연히 만났다.
너무 반가워 주머니 생각도 않고 가까운 술집을 찿았다.

한 때는 부산에서 사진동아리 멤버로 어울리며 내가 운영하던 ‘한마당’에서 그의 첫 사진전을 연적도 있다.
아타 김으로 이름을 바꾼 후로는 잘 나가지만 그 때는 그도 개털이었다.
부어라 마시어라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 까지는 좋은데, 돈이 없어 주인한테 개망신을 당했다.
“장사도 안 되는데, 하루매상의 절반이나 처먹고 외상이라니!” 위기는 모면했으나 엄청 자존심이 상했다.

때마침 지나나는 청소차에 몸을 날렸다.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니 탈 자격은 있는듯 싶었다.
난지도까지 가려는 계획은 오래가지 못해 들통이 났다.
청소부한테 들켜 욕만 잔뜩 먹고 개처럼 끌려 내려와야 했다.

정말 개 같은 날 이였다.
아직도 내 몸에서 그 때의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조문호(사진가)








실비집은 인사동의 전형적인 한옥을 개조해 만든 술집이었다.
그 집은 실비집이라는 이름답게 정말 술값은 쌌고 인심은 후했다.
누구든 소주나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찾아들 수가 있었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 무침 같은 반찬을 보시기 채로 그냥 내주기도 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는 누구든 물 값이 없다고 그냥 내치는 법이 없었다.
외상인지 뻔히 알면서도 술상을 차려주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 집의 주 고객들은 그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고 불렀다.
주모는 실비대학 총장님으로 불리웠다.
그 실비대학의 수강생들은 주로 화가, 사진작가, 도예가, 조각가, 시인 같은 예술인들이었다.
또 소리꾼이나 춤꾼, 성악가들도 있었고, 심지어 수도승처럼 보이는 스님들까지도
면벽 좌선하듯 앉아 있곤 하였다.


김신용(시인)






인사동 한 귀퉁이에서 시인통신을 꾸려가기 시작한지는 20년이 넘어서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 고통 받으며 시를 쓰는 시인들을 비롯해 배고픔을 이겨내며
눈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가슴에 담아있는 진실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는 기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밖에도 보통사람들이 ‘시인통신’에 와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외상을 하고 싸움을 하고 사랑을 했음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아무튼 그 예술가란 작자들이 저지른 상상할 수 없는 기행과 아무도 못 말리는 끼를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점점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다.


한귀남(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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