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그 아득한 거리에
내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다.
나는 생각한다.
실비집과
귀천에 죽치던,
문학이니 그림이니 뭐니 하던
대책 없던 술패들...

봉화에 내려와 산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나는 그들을 만나러
가끔 인사동으로 간다.
여전히 반갑다.
술잔이 돌고 밤이 깊으면
나는 그들에게 어깨를 기대고 싶다.


신동여(도예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 하나가 있다.

인사동에서 몇 분과 어울려 낮술을 마시다 소설 쓰는 형의 안내로 조그만 카페에 들어섰는데 그
마담의 형색이 영판 툇물 포주인 듯한 모습이었다, 거친 피부에 천박스럽게 보이는 주름살과 레이
스가 많이 달린 빨간 원피스, 모자테가 거추장스러운 빨간 비키니모자. 전체 모습에서 고상미는
눈 씻고 찾을래도 없을 듯 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분위기를 띄우던 형이 한쪽 구석의 낡은
풍금을 향해 손짓하며 그 주인을 앉으라 한다. 아무도 선동하지 않았지만 차츰 고양되는 흥겨움으
로 쉬지 않고 한 두어 시간 합창을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노래가 다 끝난 후에 풍금에서 일어서는
그 아줌마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풍금은 처음에 ‘학교
종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은 루치아니 파바로티를 넘어서 나의 무식을 조롱하는 선율까지 담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풍금을 생각하니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박영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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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을 친 ‘작은 뜨락’은 ‘시인통신’이 있는 건물의 서측 외벽을 이용한 겨우 비를 피하는
가건물로 비가 오면 좌석을 옮겨야 했다.
슬레트가 부족하여 바이닐류로 막음한 일부 천정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선으로 낮에도 그리 어둡지
는 않았다.

소원당(素園堂)은 고행의 방편으로 이곳에 국수집을 열었을 뿐인데 예술가들이 부추겨 주막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경험이 없어 내 놓는 술이나 안주도 모두 과객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사실 주인이 없는 집이었다.
이곳은 애술가들의 천국이었고 풍류해방구였다.
어제 고함이 오늘 또 고함을 쳤다. 어제 울분이 오늘 울분을 토한다. 어제 비평이 오늘 같은 내용
의 비평을 쏟는다. 어제 딴지가 오늘 딴지를 걸어도 어느 누가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해를 새 마음으로 맞이하려는 소원당이 하루 종일 도배한 흰 벽지 위에 김진두화백이 두 시간에
걸쳐 여인과 정자그림을 완성하였다.
고추장낙관을 자정에 맞추어 누르고 내가 新年元旦素苑堂이라 적어 夢遊亭子圖를 완성시킨 적도
있다.

이 해괴한 주막은 그 철학의 우위성으로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방송에도 나왔다.
술값을 내지 않고 그냥 나갈 수 있는 것도 공개된 자유였다.
화장실 가다 갈 수 있게 건물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소원당은 애술인들이 시키는 여러 안주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값을 내는 것도 한번 씩 수금을 돕는 대바구니가 돌때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여 얼마건
넣으면 되는 것이다.
주막이 걱정스러워 채현국선생님께서 분위기를 다잡아 주고 바구니에 돈을 슬그머니 놓고 가시곤
했다.

풍류해방구가 되기는 했으나 그 해방구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윤양섭 (펀드매니져)








박치기를 잘 하는 박한웅씨, 인사동에서는 박대머리로 통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칠십 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마산에서 음악주점 “감격시대”를 할 무렵 판돌이로 들어 왔다.
영업만 파하면 종업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군기 잡는다는 핑계로 박치기를 일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났다. 사진협회에서 일할 무렵,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서로 기구한 팔자라 내 자리에 그를 밀어 넣었다. 그의 딱한 사정도 있었지만 나도 그만두어야할 사정이 있었다.

노태우정권 때 ‘민주항쟁’사진전을 준비하는데 당시 문모 이사장께서 지레 겁먹고 못하게 했다.
'사진협회'의 존재의미가 무색해 그만두고 전시는 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박한웅씨를 편집장으로 추천했으니
거짓말을 지껄인 대가로 몇 달 동안을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때부터 악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들어간 지 며칠 만에 적음스님을 머리로 받아 앞니를 깨더니,
술만 취하면 차 유리를 머리로 들이박아 세 번이나 갈아 끼워야 했다.

인사동 술집의 벽이건, 사람 머리건 수없이 박아대더니 결국 뒤통수 치고 시골로 낙향했다.




조문호(사진가)

해가 설핏 기울고 나뭇잎 그림자마저 땅거미가 지우는 시간이면 더욱 활발한 기운이 감도는 인사동.
눈에 띄는 카페의 이름들도 낯익은 시의 제목이나 시대의 혼돈을 풍자하는 고풍스런 단어라 반갑다.
어느 집엘 가면 낡은 베레모의 화가가 술에 취해있고, 어느 집엘 가면 글쟁이들이 동동주를 즐기며
‘성현도 시속에 따르랬다’며 적당히 풀어져 있다.
그 속에서 어울려 가곡 몇 곡 쯤 불러가며 함께 즐거울 수 있는 낭만의 거리가 인사동이다.
집시 형 귀족들이 몰리는 인사동에서 백작부인으로 불린 까닭에 이상한 낯익은 각설이라도 만나게
될지 몰라 주머닛돈을 확인한다.
미워할 수 없는 웬수들이 혼자서 고독을 삼킬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쩌지도 못하고 오가는 거리 인사동



임춘원(시인)


인사동 입구에 들어서면 일단 발걸음이 느릿해진다.
여행자의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목조건물 2층의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싶기도 하고,
작은 화랑들 창문 밖을 서성대면서 안에 전시된 그림들을 하나하나 음미한다.
언젠가 갔었던 파리의 몽마르뜨르 언덕에서의 배회처럼...

인파 사이로 문득, 자주 범상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행색과 눈초리로 대뜸 예술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동네사람들이고 직업인이고 또...즉, 인사동 인사들이다.
대학로 연극인들이 화려한 젊은 내방객들에 가려 골목길을 서성이는데 반해 여기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어서
검정 베레모, 낡은 바바리, 파이프등으로 거리의 풍경을 연출한다.

고졸한 정원을 갖춘 가옥에서 친구와 애인과 아내와 녹차를 마신다.
전혀 날카롭지 않은 시간. 결코 둥둥 뜨지 않는 생각. 새삼스럽게 밝은 낯색. 체취.


기국서(연출가)



팔도 쟁이들이 몰려드는 인사동은 한 편의 무협지였다.
술이 서너 순배 오가면 젓가락이 춤을 추고 술 주전자가 날아다녔다. 먼저 맛이 간 사람이 대장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극은 오래 가지 않고 으르렁거리던 서로는 이내 킬킬거리며 어깨동무하곤 했다.

억압과 제한의 시대에도 인사동은 해방구였다.
금기의 언어들이 술판에 난무했고, 절대 권력자도 술상 위에서 난도질당했었다.

인사동은 인정의 터였다.
추운 겨울, 입었던 옷을 떨고 있는 후배에게 입혀주던 선배들,
가족 몫으로 챙겨 가던 풀빵을 거리의 사내들에게 기꺼이 내놓던 인정 많은 지인들, 그네들이 그립다.

요즘 들어 인사동이 조금은 삭막해졌다고들 하지만, 인사동 탓도 세월 탓도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 가슴이 메말라가는 것이리라. 나는 인사동이 사막화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인사동에는 각지의 정겨운 사투리가 살아 숨 쉬고, 옛 모습 잃지 않고 계신 선생님들,
내가 닮고 싶어 하던 형들과 사랑하는 후배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것이 내 발을 인사동에 잡아 묶는 이유인 것 같다.
귀소본능이라 하는가?





변순우(시인)


천상병 시인은 온갖 기행으로 살아생전 이미 전설이 되어 귀천한 분이다.

박재삼시인의 단칸방에 끼어 자다 오줌을 싼 이야기며, 소설가 한무숙선생의 집에서 샤넬 파이브 향수병을
미니 양주병으로 알고 마셔 몇 날을 방귀만 뀌면 향수냄새를 풍겼다는 이야기,
행려병자로 알고 정신병동에 갇혀 몇 달동안 행방불명되어 문우들이 유작 시집을 펴내 찾은 일,
간첩으로 몰려 정보부에서 겪었던 사건 등 그 일화들이 숱하다.

인사동 '귀천'에 앉아 귀천할 시간을 기다리듯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면식이 있는 사람만 나타나면 천원짜리 노잣돈을 징수해 이승을 떠나셨다.
천상시인의 절창 “귀천”은 이미 국민시가 되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다음으로 잊을 수 없는 시가 “주막”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몽롱한 것은 장엄하다!” 이 얼마나 천선생 다운 화두냐?

한 평생을 몽롱하게 사시다 하늘로 떠나신 천상시인이 항상 부럽다.



조문호(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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