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은 친정집 같은 포근함이 있다.

숱한 세월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화가 박광호씨와 사진작가 조문호씨를 꼽을 수 있다.
애잔하고 즐거운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박광호씨의 그림과 그의 삶은 너무 애잔하다.
어느 날 그의 전람회장에서 만난 그의 삶도 기구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마음을 적셨다.
생선뼈만 그려진 그의 그림을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애잔한 감상에 빠져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문호씨는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소설가 배평모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첫 인사가 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서약 같은 말로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갑자기 술상 밑을 기어 내 앞으로 나와 놀라게도 하고 시종일관 개구쟁이처럼 좌중을 웃기는 그의 모습이 너무 신비스러웠다.
그의 절창 ‘봄날은 간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몇 년 전에는 ‘천포문학회’ 모임을 영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시 낭송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결정판은 아침의 기념촬영이었다.
참석한 삼십 여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뜰 앞으로 모였는데, 대뜸 조문호씨가 “무슨 졸업사진 찍냐?”며 바지 지프를 내리고 거시기를 꺼냈다.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상황은 끝났다.

그 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천태만상인데, 내 생애 찍은 기념사진으로는 최고의 걸작이었다.



강선화(사업가)






인사동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골목골목, 주청마다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하다.
어느 집은 환쟁이들의 술타령이 이어지고,
어느 집은 술 취한 글쟁이들의 절규가 처절하다.
쾌쾌 묵은 노래와 끝없는 담론으로 온 통 시끌벅적하지만
아무도 탓하는 이가 없다.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밤의 열기에 모두들 인사불성이 된다.
인사동만이 맛볼 수 있는 밤 골목의 진풍경이다.
인사동의 매력은 바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밤 풍경이다.

그래서 인사동 문화는 거듭난다.







이수영(사진가)


인사동을 영업구역으로 누볐던 노악사 김학종씨의 이야기다. 그 분은 밤이 어둑하고 술청의 열기가 무르익을 즈음에 나타나는 분이다.
빈털터리 술꾼들 속에 돈 많은 물주라도 한 명 끼이면 그는 신바람이 난다.
가요반세기를 다 꿰고, 작사, 작곡자 까지 들이대며 메들리로 이어진다.
기타 통에 돈이 좀 모이면 기분 좋아, 부어라 마시어라 술이 취해 돌아간다.

어느날, 인사동에 적수가 나타났다.
음유시인으로 통하는 송상욱선생께서 입성하신 것이다.
팁도 필요 없는데다, 노래면 노래, 기타면 기타, 술좌석을 니나노 판으로 끌고 가는 그의 광대끼에는 아무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인사동 무대를 빼앗긴 노 악사를 낙원동 부근에서 보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가끔은 그가 보고 싶고, 그의 기타소리도 듣고 싶다.


조문호(사진가)


고백은 R&B이고
사연도 블루스다
그러나
밤마다
불면에 시달리는
그 네거리
가로등 아래에서
휜 술에
허물어지는 사랑아

행자(行者)의
고독으로 다가오는
새벽에
여윈 미소하나
던져두고

집에 간다.





인사동의 매력은 골목이다.

골목이 없는 인사동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은 숱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깊은밤 술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골목이고 어찌어찌 찾아든 곳도 인사동의 여관방이다.
다음 날 해장국을 사러 나온 이도 인사동으로 왔고 해장국에 따라 나온 해장술을 마시고 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한 골목이다.

인사동은 그렇게 내 키를 키웠고 마음을 키웠다.
허접한 내 정신을 키운 것도 헌책방의 낡은 책과 인사동 골목이다.
오래된 책 한 권 만나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책을 읽던 기억은 인사동의 또 다른 추억이다.

인사동은 보헤미안을 위한 거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인사동 오면 마음이 풍성했다.
거리를 떠도는 것들은 들이마시기만 해도 양식이 되었다.
정신의 영양실조는 인사동에서만 극복이 가능했다.
인사동 골목에서 문학을 줍고 그림을 줍고 사진을 줍는 동안 내 정신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서울탁주’ 한 사발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정은 가슴시린 이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어느 집을 불쑥 찾아가도 아는 안면들을 만날 수 있는 인사동 골목은 언제나 잔치마당이다.
훌쩍 떠났다 돌아온다 해도 인사동은 그런 이를 타박 않고 반가이 맞아준다.

강기희(소설가)





인사동은 전국 기인들이 몰려드는 무협지 속의 양산박 같은 곳이다.
그 중에서도 땡초들의 행색이나 짓거리가 유별나다.

인사동 땡초스님의 원조로는 빛 광자를 법명으로 쓰는 중광과 원광스님이었다.
중광스님은 화가로서의 기행기벽이 이미 잘 알려졌지만,
원광스님은 인사동 거리에 앉아 두 손으로 바람을 일으킬 것만 같은 부동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코디온 연주로 행인들의 눈길을 끌며 탁발을 하지만, 법력은 꽤 깊은 분이다.
이제 두 도사님은 머나 먼 열반의 길로 떠나 만날 수가 없지만 그 선각자 뒤를 따르는 땡초들이 여럿 떠돈다.

항상 개를 끌고 다니는 ‘마도사’나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 ‘사사행인’은 요즘 뜸하고, 색(色)을 밝히는 ‘석’모,
주(酒)를 밝히는 ‘평‘모, 차(茶)를 밝히는 ‘까딱이’만 남아 떠돈다.
까딱이는 항상 고개를 까딱거리고 다녀 부친 별명이다. 절집에 있을 때 녹차에 중독되어, 거지 형상으로 인사동 한 모퉁이를 지키다
면식이 있는 사람만 만나면 돈을 갈취한다.
특히 조계사 스님들이 그의 밥이다.
그 돈으로 밥보다는 차 마시는데 탕진한다.
어느 날은 돈이 없어 가게에 진열된 녹차를 슬쩍하다 덜미를 잡힌 적도 있는 위인이다.

두 번째, ‘평’모 땡초는 인사동만 나오면 술을 퍼 마신다.
제 돈 주고 마시는 술이야 탓할 수 없지만 죽봉을 휘두르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쌍말을 해 말썽을 일으킨다.
세 번째, ‘석’모란 땡초는 멀쩡하게 생긴 얼굴이 업인지 여자를 너무 밝혀 문제다.

땡초 셋 모두 80년대 초반에 나타났고, 중독 증세로 종로경찰서를 들락거린 것이 공통점이다.



조문호(사진가)




인사동은 여전히 나에겐 미지의 세계다,

종로통과 인사동은 한발자국차이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동이라는 공간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었다.
양푼가득 막걸리와 고갈비를 시켜놓고 굵은 소금을 안주 삼아 삶과 젊음을, 무거워진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건너가곤 했다.
인사동에서 풍기는 예술가들의 광기를 흠모하면서 꿈을 키우던 시간은 지금 고스란히 책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취기가 동한 친구의 입에서 “소진 할 수 있는 삶이 최고지, 예술이 뭐 그리 대단하다구” 말꼬리를 감추며 술잔을 들어 올리는 떨림 속에는

이십대의 끝자락이 매달려 있었다.
숨은 그림을 찾듯 인사동 골목골목을 걷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 막걸리 한사발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골목언저리에서 내 유년의 고향을 발견하면 한참동안 서성거려 핀잔을 받기도 했다.

수많은 시간을 오가면서도 여전히 인사동 골목은 나에게 숨은 그림을 찾아나서는 미지의 세계다.



정영신(소설가)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없다

聖인지
俗인지
구별이 없다

봄바람에
낭창낭창한
이 無己의 거미줄


김여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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