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사동의 속살을 보았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개개인의 정체성과 특성을 유지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추상적이지만 '너'는 실체적인 존재이다.

세속의 가치에서 한 발 비껴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지닌 '너'라는 존재들이 '우리'라는 추상성을 지우고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인사동의 힘이면서 큰 흐름이었다.

인사동은 가시적으로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하는 힘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영혼과 특성을 지닌 '너'라는 존재들이 마음을 열고 만나는 실체적이면서도 다원화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 인사동이기 때문이다.

인사동에는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 일상성을 찾으려는,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인사동을 통해서 박제된 일상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함일 터이다.

일상의 색깔을 보고, 일상의 소리를 듣고, 일상의 빛을 접촉하면서 비 일상성을 찾는 그들은 일상의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곧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하는 힘이다.

일상과 비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 인사동의 힘을 언젠가는 파인더로 끌어 모으는 작업을 하고 싶다.




조인숙(사진가)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가 어느 날 인사동 거리에서 동전 바꾸기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어디서 돈이 좀 생겼는지 모두 십 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일원짜리 동전이 나오면 십원짜리 동전과 맞 바꾸어주는 돈 장사를 한 것이다.
행인들이 모두들 의아해하면서도 일원짜리 찾느라 난리를 피웠다.
그는 주머니에 가득한 일원짜리 동전으로 소주 한 병을 샀다.
투덜거리는 구멍가게 주인의 짜증도 마다하고, 큰돈이나 번 것처럼 낄낄거리며 안주도 없이 나팔 불었다.



조문호 (사진가)


88년 무렵,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옥탑 방을 몇 년 동안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여기 저기 떠돌다가 후배의 도움으로 그 때 그 옥탑 방을 다시 찾게 된 것이 동기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놀랍게도 방 곳곳에서 손 때 묻은 나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끼익 끼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 쓰레기 더미에 섞여 나온 "카메라 워크'라 찍힌 옛 간판이 빛바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유적 같은 파편들이 옛 친구들을 그립게 하였다.

인사동 향기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아쉬워하며, 그동안 만나왔던 인사동 풍류객들을 찾아 나섰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토박이와 제집처럼 드나드는 문화예술인들의 기억을 통해 인사동 풍류를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추억이 담긴 인사동 풍경의 어느 한 공간에 선 모습에서 잊혀져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찾아보려 하였다.

그동안 세상을 하직하거나 종적을 감춘 분도 더러 있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의 문화지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거리인 인사동에 잡상인들이 판을 치고 최근에는 ‘광주요’가 있던 자리에 화장품 매장이 들어서더니 또 다른 경쟁사의 화장품 매장도 들어섰다.
그리고 행인들에게 대형작품으로 발길을 멈추게 한 ‘아트 사이드’ 전시장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대형 매장이 문을 열었지만 누가 강제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

이제 부터라도 인사동을 사랑하는 우리가 힘을 모아 인사동문화를 지키는 캠페인을 펼쳤으면 한다.





조문호(사진가)



흔히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얘기한다. 

‘인사동 사람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인사동에서 사는 사람들? 아니면 인사동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 그렇게 말하기에는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인사동의 빛깔을 지닌 사람들’이 보다 가까울 것 같다. 
인사동에서 산다고, 그리고 인사동을 터전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다 인사동의 빛깔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사동에서 살고, 놀고, 일하면서 인사동만의 어떤 분위기가 체취로 우러나오는 사람들이 그들이
다.  
그들의 분위기를 빛깔로 친다면 무어라고 해야 할까? 가까이서 그들, 진짜배기 인사동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회색빛, 그중에도 연한 회색빛을 느낀다. 
연한 회색의 승복에 감추어진 도통함의 이미지라 할까? 하루 중에는 저녁 어스름의 기운을 그들에
게서 느낀다. 
그들은 새벽의 정신 번쩍 나는 차가운 분위기가 아니다. 
저녁, 많은 일상인들이 자신들의 하루를 접으려 할 때쯤, 인사동 사람들은 활기가 돌며 생생해진
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접을 때쯤 인사동 사람들은 그때까지 
해 왔던 자기들의 일로 더욱 신명이 나고 바빠진다. 
그래서인가, 지금까지는 특별하지 않았던 그들이 저녁 어스름에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다. 
하루의 저녁쯤에, 인생의 저녁 무렵에 그들의 진가가 드러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빛나는 게 진짜배기다. 
그렇게 오래 동안 숙성해온 시간들이 비로소 빛으로 나타나는 그런 체취를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인사동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연한 회색의 멋을 느낀 
다.                                                                         

 
이정숙(문학평론가)







세상을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많은 행동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출세한 친구도 인사동에서만 보고

미국 가는 친구도 인사동에 앉아 배웅했듯

그의 죽음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



세상을 떠나서도

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

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





신경림(시인)


인사동은 이제 인사동이 아니게 되고 말았다.

인사동이 언제부터 이름이 나서 특히 외국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에 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인사동이 한국 또는 서울의 얼굴 노릇을 해 주는 곳이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한국의 냄새로 해서 한국인의 체취가 느껴지고, 서울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 그래서 한국을 느끼고 서울을 보려면 이 동네를 걸어봐라, 하는 뜻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납작한 기와지붕을 쓴 자그마한 상점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은 서울의 전형적인 길거리 풍경이었다.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들은 그대로 서울의 숨결이기도 했다.

그 인사동은 지금 너무나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좀 속되게 변해서 이제는 장삿속에 닳고 닳은, 민속의 탈을 쓴 싸구려 장터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납작한 기와지붕이 사라지고 시멘트 빌딩들이 한옥들을 내쫓고 들어앉으면서 인사동은 이제 이름만 남고 말았다. 인사동뿐일까. 건너편 교동이 그렇고 재동, 계동, 가회동이 다 사라지고 말았으니 인사동이 인사불성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신통한 것이 있다. 인사동 골목에 양식집이 보이는 것 같지가 않다, 아직은. 그러고 보면 일식집도 안 보인다. 인사동 북쪽 입구 근처에 무슨 솥밥 집이 간판부터가 일본 냄새를 풍기기는 해도 그것을 일식집이라기엔 좀 뭣하고, 대부분의 밥집이 대개는 ‘한정식’이다. 그것이 기특한 것은 내 이름을 내걸어서가 아니다. 그런 면이 그래도 인사동의 얄팍한 변명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그보다 인사동이 아직 인사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인사동 뒷골목 속에 들어박힌 ‘인사동 사람들’로 해서일 것이다. 납작한 인사동 지붕 밑에서 인사동의 기억을 소주잔에 부어 마시며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이 골목 저 골목에 콩깍지 속 콩알처럼 박혀 있어서 인사동이 아직은 인사동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옛 시인의 한탄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아닌 것이다. 인사동에 한한 한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 데 없네.”가 되고 말았다.

하나가 더 있다. 막힐 듯 뚫리고, 숨을 듯 다시 나타나는 골목길. 외틀어지고 비틀어진 우리 소나무처럼 구불구불 휘이고 꺾인 골목길. 엇갈릴 때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부딪고 지나야 하고 마주 오는 사람의 입김을 얼굴로 받아야 하는 좁은 골목길. 이런 골목길은 그대로 서울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 골목이 인사동 사람들과 함께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산천은 의구한 것인지.

그 인사동 사람들을 인사동 사진가 조 문호가 찍어 이번에 사진집으로 엮어 낸다. 이름만 대면 대개는 알 만한 문화계 인사가 중심이 된 사진집으로 알고 있다.

인사동은 그래도 아직은 우리의 문화이다. ‘인사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런 것을 껴안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사동 사람들’이고 아직 남아 있는 인사동 문화인 것이다. 그 인사동 문화를 일단 정리해 본 것이 이 사진집이다.

사진가 조 문호의 이미지는 사실 인사동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인다. 그의 풍모는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 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에 더 잘 어울리는 그런 그림인데, 그런 그가 인사동을 떠나지 못한다. 인사동 골목 어느 구석에 그를 잡아 묶고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일까.

조 문호, 그 이름과 달리 문호가 아니라 사진가이지만, 사람 좋은 조 문호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꼬인다. 그의 어떤 전시 첫날, 천정 낮은 밥집에 모인 면면들은 사진 쪽 사람들은 물론, 미술이나 문학 쪽 사람들도 퍽 많았다. 그의 흡인력이 보였다. 동시에 바로 그들이 조 문호를 인사동에 가두어 놓은 울타리였구나, 느껴졌다.

‘인사동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사진집이다. 조 문호를 좋아해 조 문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조 문호 역시 그 따뜻한 품을 잊지 못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인사동을 인사동이게 하는 인사동 인사들.

그 인사동이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인사동이 바뀌면 인사동 사람들도 떠나고, 박 인환이 명동을 떠나듯 조문호도 떠날 것이다. 이 사진집이 홀로 남아 펼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가을비처럼 축축이 적실 것이고....


한 정 식(사진가, 중앙대 명예교수)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었습니다.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으나 화랑엔 관객이 없다는 싸늘한 문화예술의 불가 메카지역.‘이화갤러리에서 처음 만난 재미 작가 안동국 화백은 우연한 만남이지만 너무 친근하고, 그림 전반에 흐르는 에너지가 대단했습니다.
금방이라도 큰 전시장에 황룡이 출몰할 듯, 바다 속 깊숙한 환타지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미국 라트거스 대학교 ‘짐머리 미술관’ 수석 큐레이트 제프리 웨스트는, ‘안동국이 선보인 회화 연작은 보는이로 하여금 흥분에 빠져들게 한다. 거의 모든 회화들이 엄청난 속도와 우연성으로 표면 위를 질주하는 빠른 붓질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문득 한국 옹기 기법인 수화문이 생각납니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손을 들어 빠른 손동작으로 깃대를 휘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옹기기법 지두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건너편 화랑 ‘갤러리 31’에서는 재미 뉴욕, 민화작가 이수자님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미국에서 민화를 제작하는 일은 일종의 한국문화의 확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엔 서예로 시작했고, 요즘 불붙은 코리아 환타지아는 민화에 대한 믿음에 빠져듭니다. 화려한 한국의 오방색과 넘치는 듯한 자유분방함에 전시장은 오랫동안 묵직했습니다.





김용문 (도예가)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입니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 받는 맛을 들인 지가 벌써 스물다섯 해를 넘겼거든요.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더러 꽃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또 더러는 아침 우물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우짖는 까막까치의 울음처럼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풍류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는 함박눈처럼 차곡 차곡 쌓여갔습니다.
그 눈들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봅니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옵니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거지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건가요.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옵니다.
그 그리움과 정분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다가 ‘인사동 블루스’라는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박인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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