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청년기를 보낸 명동 시절이고, 두 번째는 장년기를 보낸 관철동 시기이며, 세 번째가 노년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의 인사동 시대이다.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다. 나는 내 취향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코드 음악이 흐르는 명동의 음악다방 <엠프레스>를 즐겨 찾았고, 한국 바둑의 총본산인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도처가 그림인 인사동 거리를 걷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나의 교우 영역은 넓어 시인․ 소설가․ 바둑칼럼리스트․ 음악가․ 연극인 지인이 허다하나, 그중 대표적으로 <엠프레스>에서 이일(불문학과 선배로서 시인으로 출발해 나중에 아방가르드를 이끈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 타계), 한국기원에서는 신동문(초로에 시업을 접고 단양으로 내려가 땅을 개간하며 무료 침술을 펼치다 별세)과 강홍규(고교 후배로 스포츠 소설을 개척하고 바둑 야사를 감칠맛나게 썼으나 요절)를 들겠다.
명동 시절은, 이청운의 어둡고 아픈 「구석」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6․25 전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 한데 어울려 예술과 술과 사랑으로 꽃피웠던,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 ‘라 벨 에폭’이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좋아 거기 깊이 빠져 공부는 고사하고 대학도 팽개쳤다. 또 한편으로 내기바둑에 빠져 마침내는 놀음바둑에 미쳐 금쪽같은 돈을 상당수 날리며 인성마저 피폐해졌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내 생애의 세 시기를 관통하여 함께한 세 사람이 있었으니, 한 분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요, 다른 한 이는 천진무구의 시인 천상병이며, 또 한 사람은 무학의 수재 번역가 박이엽이다. 위․아래층으로 한 건물에 있던 송원기원과 청동다방에서 뵈었던 민병산과는 관철동으로 이어져 한국기원에서 한 식구처럼 지냈는데, 해가 져 어스름해지면 나를 포함해 1개 분대나 되는 떼거리가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이웃한 꼬마집이나 예쁜이집으로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즐겼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으나 그가 인사동으로 옮기고는 관철동이 전과 같지 않았으며 나 또한 그와 뜸해졌다. 해직기자로 민병산에게 신세지던 임재경이 신세를 갚을 양으로 발의해서 조건영이 설계․시공한 연립주택에 집 없이 떠도는 민병산을 모셔 안정시켜드리자는 운동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걸로 해서 결국은 민병산 기념문집 「철학하는 즐거움」에 그의 프로필을 그리는 난에 조차 끼지 못했다. 이는 나에게 두고두고 후회스럽고 끝내 유감으로 남았다. 그 까닭은 임재경이 벌이는 운동이 좋은 일이긴 하나, 이를 당사자도 적극 사양하는 형국이고 나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위선이 느껴졌던 때문이었다.
천상병과 나와의 첫 만남은 낙원동 초입의 고전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서였는데, 종로 1가 <말리앙스 프랑세즈>에 불어를 배우러 다니는 나는 고교 3년생의 까까머리인데 반해 그는 이미 시 「강물」,「갈매기」와 평론 「허윤석론 으로 <문예>지의 추천을 마친, 한참 촉망받는 최연소 ‘2관왕’이었다. 나는 그를 쫓아 명동의 여러 예술인 집합처는 물론 을지로 입구 내무부 못미처에 있는 동방살롱과 소공동 쪽 미도파 맞은편의 문예살롱까지 두루 주유했는데, 붙어다니는 우리는 흡사 돈키호테와 그를 따르는 종자 산초판자와 같았다. 음식점을 하던 내 집에 천상병은 환대를 받으며 드나들었고, 나는 그의 전리품을 팔아 누상동 한옥 여관에서 잠자며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디퉁디퉁 불안한 걸음걸이와 왁자지껄 볼륨 높은 언성, 그리고 고르지 못한 이빨을 온통 드러내는 파안대소,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지금도 보고 싶고 그립다.
본명이 박은국인 박이엽을 처음 만난 것도 천상병과 만난 그 무렵이었다. 부산 수영 밖 촌놈이 대처 서울에 올라와 국민음악연구회의 편집장을 맡아하던, 어엿한 직장인 박은국은 그때 서라벌예대․ 동국대의 문학 지망생들에게 어리굴젓을 곁들인 녹두지짐을 자주 맛보게 해준 독지가였다. 조숙하면서 어른스러운 박은국의 수영집의 신문지로 도배된 흙벽 방에서 나는 처음 정성껏 필사한 오장환의 시집 「헌사」와 「병든 서울」을 보았으며, 러시아의 마지막 농민시인 예세닌의 번역시집을 감격스럽게 읽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은국 이야말로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까지 꾸준히 우정을 이어온 흔치 않은 친구이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박이엽이 진정 따랐던 선배 민병산이 지병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둔 바로 그 병으로 숨진 것인데, 나도 지금 같은 병으로 고생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근년에 부쩍 박이엽과 단짝이었던 채현국을 여기서 빠뜨릴 수 없다.
채현국으로 말하자면, 대학생 적에 넝마 같은 검정 교복에 까까중머리를 하고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다녔지만, 친구들의 점심은 도맡아 챙겨 배불려주었던, 당시 제2의 민영 탄광주의 외아들로서,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고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집을 채로 사준 오척단구의 거한이었으며, 예대해야 할 ‘농무’의 시인 신경림과 리얼리즘의 문학평론가 구중서에게는 현찰로 주기 계면쩍어 그들이 다니는 술집에 술값으로 상당액을 미리 적금해주었고, 나중에 사돈이 된 임재경에게는 그가 워낙 현찰을 밝히므로 꼭 돈으로 안겨주었으며, 후배인 구중관이나 방영웅에게는 수시로 용돈을 건네주었으니, 흔히 보기 드문 인정의 사나이였다.
나는 관철동을 지키다 뒤늦게 인사동으로 건너간 편인데, 이미 새들이 둥지를 옮겨 튼 터라 그 곳에 나가서야 외려 오랜 친구와 후배를 만날 수 있었다. 어쨌든 분명 인사동은 관철동과는 다른 잔정과도 같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오늘에 생각해보면, 칠십줄 노인이 된 이제 가끔 하는 서울 나들이에 인사동 같은 곳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자문해본다.
지금 인사동의 주인은 60대 초반의 형벌인 배평모와 조문호, 그리고 좀 아래의 김명성과 전활철, 이청운 등 ‘인사모’의 면면들이다. 천애고아 화가 이청운과 결의형제를 한 「분례기」의 작가 방영웅이나 숱한 독신남을 거느렸던 총각대장 구중관은 이제는 한물갔다고 보아야 옳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닥 걱정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으니, 예술 벨트가 명동을 시발로 해서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이행한 오늘의 문화지도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강남을 선망하듯 언제 그쪽으로 떠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사동은 잡다한 잡상인을 떨쳐버리고 국적을 알수 없는 상품들을 쫓아내고 전통을 살려내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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