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씨의 조각 초대전이 4월14일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시간과 우상'이란 주제로 개최된 조각전은 오는 4월 27일까지 열립니다.
개막식에는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전활철, 노광래, 조문호, 박성남, 김용문, 장경호,
김정남씨 등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하였습니다.

 

 

 

 

 

 

 

 

 

 

 

 

 


황정아 첫번째 개인전 개막식이 3월 17일 오후6시30분 인사갤러리 3층에서 열렸다.
"자연과 회화의 층위-경계를 묻다"라는 타이틀을 내건 작품전에는
황토, 숯, 짚 등 자연적 질료들로 제작된 작품 25점이 선보였다.

전시장에는 화가 장경호씨,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전활철씨, 이강용씨, 이경오씨, 김민경씨, 김낙영씨,
이운구씨, 조문호씨 권양수씨 등 화가들과 지인 50여명이 참석하여 황정아씨의 전시회를 축하하였습니다.
뒤풀이는 '완우'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막니주를 빚어,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전시는 3월 23일까지 열립니다.

 

 

 

 

 

 

 

 

 

 

 

 

 

 

 

 

 



이미지의 이미지를 새겨 넣는 최울가의 뉴욕 스튜디오


최울가라는 아티스트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고, 소품 몇 점도 뉴욕의 군소 아트 페어에서 본적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최울가를 카자흐스탄이나 우츠베키스탄 출신의 교포 아티스트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우연히 작가 오프닝에서 만나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뜬금없이 러시아 역사나 과거 소련의 동방정책 등과 같은 이슈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한 것이 최울가가 부산 출신 나보다도 더욱 완벽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다 못해 넌지시 개인 신상에 대해 물었더니, 파리, 서울, 동경, 뉴욕을 중심으로 오래 동안 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출신지도 카자흐스탄이 아니라 대한민국 부산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잘못된 선입관이 불러 일으킨 어이없는 오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의의 근원이 이름 “울가”를 “올가”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최울가의 해명을 들으면서 납득은 했지만, 사람의 그릇된 고정 관념이라는 게 얼마나 맹목적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울가는 지난 20여 년을 파리를 베이스로 해서 유럽, 동경과 서울을 베이스로 해서는 아시아, 그리고 뉴욕을 베이스로 북미 지역을 넘나들며 작업을 해왔다. 삶과 작업 장소의 이동이라는 유목성이 최울가 예술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중복되는 이미지와 중첩적인 텍스트 사이의 유동성이 최울가 예술의 다른 축을 이룬다. 인생 그 자체처럼 예술도 본질적으로는 흐르는 움직임 자체이지만, 유동성 그 자체가 특정한 감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 형식화 되면서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서 포착되고 이해되어 재현된다. 흐름과 고정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틀로 짜이고 엮이면서 그 틀 자체가 다시 더 큰 흐름 속으로 흘러 들고, 더욱 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구성되면서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반복적 확장이 궁극적으로 인생과 예술을 하나의 거대한 내용과 형식으로 직조되어서 인생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인생이 되는 것이다. 물론 꿈 같이 이상적이고 몽롱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꿈 같은 이야기가 최울가의 예술적 꿈이고, 야욕이며, 예술의 여정이다. 그 꿈 때문에 최울가는 지난 10년 동안 겨우내 익숙해 진 삶의 공간을 떠나서, 스스로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면서 뉴욕에서 홀로 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굳이 스튜디오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뉴욕에 두고 혈연단신, 말 다르고 물 다른 곳에서 혼자 밥을 지어먹으면서 궁상스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자명한 세계에서 자기를 떼어 내고, 낮 선 장소, 이질적 공간에 자신을 투입하고, 자신이 투입된 새로운 세계를 다시 자기 스스로 관조하고 의심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주체를 대상처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자기 내면을 이질적 세계로 만들면서 외부 세계를 동질화시켜, 그 낮 선 이질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다시 동질적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현실적 공간이 최울가의 몸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으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 데도, 낮 선 세계, 새로운 장소에 거주하는 경험 자체가 작품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최울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것은 여름의 끝 무렵이었다. 스튜디오는 맨하탄 섬 북서쪽 끝, 워싱턴 하이츠(Washington Heights)와 인우드(Inwood)라는 지역의 접경에 있었다. 한국 작가의 스튜디오가 그다지 미술과 상관이 없고, 게다가 도미니컨과 아이리쉬가 밀집한 지역에 작업 공간과 생활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부터 아시아 출신의 작가에게는 드문 일이다. 맨하탄 북서쪽 끝에 있는 거리는 전통적으로 아이리쉬와 유태인 중산층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지난 수 십 년간 세계 각국에서 유입된 이민자들로 인해 거기서 한 블록만 더 동쪽으로 내려가도 영어가 공용어가 아닐 정도로 스페니쉬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좀 요란스러운 동네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도미니칸 마약 카르텔이 밤의 거리를 장악하던 흉흉한 동네였다. 그러나 그런 도심의 전장 같은 곳을 맨 몸으로 이민을 와서 구멍가게나 동전 세탁소를 운영하던 한국 교포들의 서바이벌 무용담이 전설처럼 녹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물론 옛 말이다. 맨하탄 자체가 재개발(gentrification)되면서 섬 전체에 거주 비용이 비싸지고 치안이 강화되어 지금은 대체로 맨하탄 대부분 지역이 안전해졌다. 최울가의 스튜디오가 있는 블락은 이전에도 이런 야성의 세계에서부터 분리된 일종의 섬 같이 평온한 지역이다. 가게 하나 없이 길 한쪽으로만 이차 대전 이전에 지은 오래된 성채같이 견고한 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몇 블록 위, 북쪽에는 포트 트리언 파크(Fort Tryon Park)라고 대단히 아름답고 숲이 울창한 공원이 있다. 그 공원의 북쪽 끝에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중세 유럽 미술품과 건축물을 소장하고 있는 클로이스터(cloister)라는 분관이 있다.

이렇게 오래된 동네에 정착한 최울가는 맨하탄 기준으로는 상당히 넓은 원 베드룸 아파트의 리빙 룸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아파트 자체가 이차 대전 이전에 지은 것이라 요즘 아파트와는 다르게 벽도 두껍고 천정도 높다. 그다지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높은 천장 때문에 화실은 실제 면적보다 상대적으로 넓어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 몇 달간 작업을 했던 그림들이 벽에 기대어 새워져 있었다. 블랙 엑스피 씨리즈라고 한다.

이른 새벽의 하늘 빛 같은 어두운 바탕색을 칠한 캔버스 위에 화려한 색색으로 형상화된 조형들이 빽빽하게, 마치 바위에 정으로 새긴 듯이 그려져 있었다. 그 새기듯이 그려져 있는 이미지 때문에 언뜻 보면 동굴이나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암각화 같기도 하고, 또 자연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프리카나 남미 원주민들의 토기 위에 새겨져 있을법한 문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울가의 작품이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하고 평한다. 그러나 내 눈 앞에 놓여있는 최울가의 그림 속 이미지는 더 없이 세련되고 숙련되어 보였다. 그 이미지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티스트로 엄격하게 훈련된 숙련된 손과 엄밀하게 단련된 세련된 눈이 아니면 재현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속에서 프리미티비즘이 미친 영향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프리미티브스(the primitives)에게 프리미티비즘이란 존재하지가 않듯이, 프리미티비즘은 프리미티브스가 아닌 사람이 프리미티브하다고 생각되는 소재를 사용하여 동시대적 표현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닌가. 프리미티비즘은 서구 미술사에서 스스로의 미술에 대하여 만들어 낸 대항적 이미지(counter-image)로 서구 미술사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서구 미술의 하나의 경향이며, 동시에 비서구 사회에서는 서구 사회 같은 미술의 역사가 부재할 것이라고 하는 자폐적인 미술에 대한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엉성하기도 하고 설렁설렁 그린 것 같은 개나 늑대의 얼굴을 한 남자와 물고기, 새,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는 다양한 채색 배경이나 나선 같은 도형과 그것들의 배치는 다분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최울가의 머리 속에서 자라나서 그의 눈과 손 아래에서 재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울가에게 중요한 것은 캔버스 위에 그려질 조형 자체가 아니라 그의 머리 속에서 새겨지는 이미지들이다.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캔버스에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머리 속에 이미지를 새겨내는데 사용한다. 이렇게 머리 속에 새겨지는 그림이라는 게 현실적인 이미지라기 보다는 특정 이미지에 대한 아이디어인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현실에서 우리 관념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라기 보다는 이미지의 이미지, 즉 메타 이미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최울가에게 이미지를 이미지 자체로 직접 이해하는 것과 이미지 일반의 본질에 대한 아이디어를 형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울가가 재현해 내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사실상 최울가의 머리 속에서 일상 이미지 자체가 이중화되어서 재귀적으로 구성된 아이디어, 관념으로서 이미지인 것이다.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의 비유처럼, 감각작용과 사유작용을 통하여 현실에서 보이지 않거나 부재한 것으로 느껴지는, 경험적으로 지각 되지 않는 대상을 머리 안에서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이미지가 어둠 속에서 투영되는, 일종의 “정신의 그림”을 최울가응 스스로 그려나갔다.

그렇지만, 지각과 상상력으로 정신에 새기는 그림이 카메라의 원리처럼 광학적으로 전도된 수동적 이미지가 아니다. 정신 속에 새겨진 그 이미지가 그대로 자동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문지르고 그리는 신체를 통해서, 또 그 신체를 훈련시킨 문화적 필터를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캔버스 위에서 재구성 된다. 통상적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전도된 이미지가 신체의 수행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 생활과정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재조정되어, 그 자체가 원래 아이디어에서 독립된 것으로 작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은 그 과정에서 역으로 아이디어로 환원될 수 가 없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이 불가능한 비가역성 속에서 최울가의 작품은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한국적” 그림이라는 역사 사회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형용의 내용이 한국적 소재를 대상으로 했다거나, 한국적 오방색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한국적 미술 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최울가와 동시대의 한국인들이 이미지를 이중화 시키는 방식, 즉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묘사하고, 상상력의 활동을 상상하고, 형상화의 실천을 형상화하는 패튼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작품의 구상을 머리 속에서 도면처럼 차곡차곡 엄밀하게 배치하여서, 그 전체 설계도에 입각해서 건물을 짓듯이 하나하나 촘촘하게 밑 공사가 끝난 캔버스 위에 채워 놓는 것이다. 워낙 노동의 강도가 높은 고밀도로 색을 칠하고 그려놓았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턱턱 숨이 막힐 정도다. 엉성한 듯이 그려져 있고, 느슨한 듯이 배치된 형상들이 피상적으로 보면 마치 어린 아이가 그려놓은 낙서처럼 보이지만, 좀 느린 호흡으로 집중해서 보면 그야말로 천라지망처럼 물 샐 틈도 없이 촘촘하다. 그 촘촘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숨막히게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인 것이고, 최울가는 그렇게 팍팍하게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천진난만하고 헐렁하게 그려 숨통을 트이게끔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장난스럽고 유희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최울가의 작품 세계는 사실 심각하고 우울하여 슬프기 조차한 진지함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그런 아이러니로 꽉 찬 세계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스튜디오 안을 이리저리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따끈따끈한 그림들을 보고 또 보면서, 커피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포트 트리온 파크로 걸어갔다. 그 공원 내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늦여름 오후 맨하튼 북쪽 끝 나무 밑에 앉아서 먹고 마시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칠 무렵,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다가다 못하고 공원에 갇혀서 부득불 이른 저녁까지 먹으면서 미술계나 연예계의 가십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최울가와 보낸 여름 한나절 현실 세계는 그의 작품 세계와는 반대로 삶과 작품을 둘러싼 심각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가십과 허망한 농담으로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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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苑散筆
‘나의 서울(京)에는 아직도 뜨락이 있다’

글을 가문의 업으로 내려 받기는 하였으나 문학을 두루 살피기에는 재주가 부족하여 주로 기문(記文)을 써온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천성이 게을러 문대(文臺)에 이름을 걸기에는 일이 어긋나 이제 그 주변의 이름 없는 산인(散人)에 불과하다. 늘 재미스런 일을 노경의 낙으로 삼고 사는 조동강(東岡)선생의 원고 청을 받고 순전히 그의 재미스런 일을 돋우기 위해 양산박, 작은 뜨락의 폐업과정과 그 주변에 대하여 글을 드린다.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거울을 보니 검고 윤기 나던 머리에 서리가 내려 흰머리가 더 늘어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가 된 名色이 노인이 되고 말았다. 만년에 이른 마당에 새삼스럽게 몸을 세워보는 일 보다 산인(散人)으로 자호하여 호에 맞추어 살기로 작정하고 우거 江茗亭을 포구에 마련했다. 소요하고 만년을 보내기에는 京江이 좋고 그 중에서도 서달산 적벽에 기댄 서호의 가장 넉넉한 백사장을 깔고 앉은 반포가 좋겠다 싶어서였다.
반포는 고인들이 서호라 부른 강변의 일부로서 선조 오음상공 이후 일족이 관악산 자하동에 초려와 지금 서달산 동향비탈에 창란정, 강 건너 서호언덕에는 관산정을 마련한 전거가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강물이 스스로 와서 동창에 넘실대다 보니 매일 창강에 비친 목멱산음(山陰)을 살피며 말없이 서 있는 白鷗를 벗 삼는 일이나 江岸을 올라 원경을 감상하는 일로도 일과를 충당할 수 있었다. 원래 일준차(一樽茶)를 들이키는 차치茶痴라 목마르면 차 마시면 되는 사람이지만 가금 허전할 때에는 우거 앞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오래된 주막 ‘하얀돌’ 에 가면 마리오 란자의 노래를 원판으로 들을 수 있었다. 지인들을 끌어들여 맥주를 여러 상자 비우고 황망히 세상을 뜬 평론가 김현의 유적지 반포치킨도 있었다. 삼년치 외상장부를 놓고 여주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김현류의 풍월을 짚어 볼 수 있는 사연이 있는 맥주집이다. 그러니 이즈음 밤에 渡江하여 인사동으로 향할 이유는 나에게 따로 없었다.
인사동은 나에게 고향 같은 곳으로 이 일대에서 칠십 년대를 소화했다. 내가 처음 살던 곳은 비원에 붙은 왜식 다다미 집으로 이층에 내 방이 있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펼쳐지는 정원이 비원이니 비원은 나의 온전한 뜨락이나 다름 없었다.
비원 뒷산의 이름은 와룡산으로 내 고향 산 이름과 같다. 내 이름자는 제갈량의 亮으로 같다. 제갈량으로 鄕名이 높은 촉나라는 지금의 사천인데 이는 내 고향땅의 이름과 같다. 제갈량의 비범한 통찰력은 차에서 나왔다. 그가 차나무를 가르쳐준 운남에서는 오래 전부터 차의 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가 통치한 사천은 현재 중국차의 절반 이상을 생산해 내고 있다. 내 고향 사천은 단일 다원으로 제일 큰 삼십만평의 사천강다원이 있다. 참으로 기이한 일치다. 그러나 나는 茶都에서 태어난 복으로 一樽茶를 붙들고 종일 마셔대는 차력이지만 이는 樽酒의 해독에 소용이 있어서이니 茶神의 반열에 오른 와룡선생의 차와는 길이 당초 어긋나 있다.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것을 인연으로 차를 마실 때 한 번씩 반추해보며 스스로 웃어보는 내용이다. 세상에는 이러한 우연들이 엮어내는 일로 그나마 웃을 일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와룡산의 기색을 토대로 있는 것이 동쪽 기슭인 와룡동, 명륜동이고 중앙이 원서동, 가회동이고 西溪가 삼청동이고 정원으로 秘苑이 따로 있다.
인사동 사람들이란 낮에는 본업에 충실하다가 밤에 슬슬 몰려오는 그리운 얼굴들을 지칭할 것이므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려면 인사동 주변의 밤의 지나온 대강을 짚어 볼 수밖에 없다. 실은 70년대만 하여도 사대문 안 모두가 지금의 인사동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교토에 가서 느끼는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고풍의 밤을 탐색하는데 굳이 인사동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의 밤은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당시는 요정시대로 와룡산을 중간으로 요정권은 북의 성북동과 남의 낙원동으로 이분되어 있었다. 낙원떡집에서 접어드는 골목에 첫집이 임화수별장인데 그 별장을 요정으로 이용하던 집을 포함하여 명월관 등이 자리하였다. 와룡산너머 성북동에는 삼청각과 대원각이 있어 중앙청인사나 사업가들이 그 쪽을 출입하였는데 하필이면 한용운 만해 대선사의 심우장을 마주하고 매일 밤 풍악을 올렸다는 점이 참 맹랑하다. 삼청각에서는 누가 오는 날에는 출입이 통제된 속에서 난데없는 황성옛터가 산에 쩡쩡하였다. 특히 ‘이그러진 조각달’ 부분이 애잔했는데 얼마 안 가서 그도 가수 수봉방면으로 이지러지고 말았다. 나는 와룡산 정상에서 두 군데를 번갈아 보면서 불야성 서울의 요정현상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었다. 가끔씩 명월쪽에서 몇 대의 차량이 비상등을 켜고 대원각쪽으로 향하거나 더 깊은 밤에는 반대로 이동하는 것이 나의 망원경에 포착되기도 하였다.
요정은 원래 茶食에서 온 懷石, 가이세키요리집이 사납게 변질되어 나타난 한 때의 왜식 풍경으로 문학과 음악의 현장이었을 전통의 풍류와는 차이가 많다. 어두컴컴한 일본 다실에서 남녀가 둘이 앉았을 때 성립되는 은밀하고 은근한 기색에서 차 정신을 버리고 성립되는 가치요소를 영업으로 끌어낸 것이 요정이다. 사실 너무 고상한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다실과 요정업의 갈림길에서 알 수 있겠다. 참고로 일본 정통 다실에서 다도를 할 때 입는 기모노는 속옷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문화들이 요정업에서는 돈으로 연결되는 가치있는 수칙이 된 다. 지금은 요정지역은 모두 착하게 바뀌어 범인사동 문화권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들은 물론 청년들과는 상관없는 일들일 뿐이다. 주로 혜화동 학림다방이나 명륜다실 등 다실이 번성하였다. 혜화동에서 삼선교로 오르는 언덕과 비원쪽 두 군데 천연동굴에 알타미라라는 간판을 내 건 주막이 있었는데 영업시간만 옛 주막등을 걸었다. 학림은 지하가 앉아 창밖 담쟁이를 멋있게 쳐다보고 있기도 하였다. 실크로드의 동굴사원처럼 생긴 알타미라 동굴주막에는 술 취한 은태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으르렁거리던 풍경이 종종 연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술값의 부담에서 벗어나 술배를 두드리며 인사동 방향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시절 그는 빡빡머리에 걸망을 걸치고 곡주를 먹어대니 사람들은 땡중으로 취급하는데 자신은 승적이 없어 땡중이 아니라는 식이 고함의 내용이었다. 알타미라 이 쪽 저 쪽의 알타미라에 대부대를 데리고 가는 뜻은 나에게는 손쉬운 ‘명태’나 ‘떠나가는 배’ 몇 곡으로도 옆좌석에서 통째로 우리 술값을 계산해 주거나 많은 술을 보내주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술판이 파하고 통금이 넘어 올 데 갈 데가 없어지고 나면 유유히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숙소에 스며들어 편하게 자는 수가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균관 사성의 숙소에서 자보는 일도 있었다. 성균관 사성의 옛 방에서 촛불을 켜 놓고 명륜식당에 부탁하여 술을 먹는 호강을 누리기도 했다. 문화재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뒤에 알았다.
여름에는 더 좋은 곳이 있었다. 와룡산 기슭의 신선처럼 구름 위에서 자고 아침에 달디 단 돌샘물에 차를 달여 몇 잔을 하고 나면 세상이 다 개운하였다. 이런 천국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옥류정(玉流亭) 정자다. 물론 玉流亭은 당시에도 정자지기 할머니가 정자 밑기둥을 토대로 그때까지 살고 있어서 자다가 일어나 파전을 만들어주거나 조기찜 같은 제대로 된 요리해 내 놓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는 물론 밀거래이기는 하지만 당시는 대단한 풍류로 삼아 벗들에게 자랑하였고 때로는 별천지에서 십 수명의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수년이 지나 이곳을 들렀을 때 할머니는 없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전에부터 산 곳이지만 자체가 불법거류인이라 철거시켰다는 것이다.
여름밤에는 삼청공원 안에서 북단으로 휙 돌아드는 다리 밑 斜徑을 드듬어 내려서면 계류가 장대처럼 떨어져 내리는 泊沼가 나오고 돌샘이 흐르는 즈음에 水閣형 亭子가 남아 있어 深山別界의 풍미를 누릴 수 있었다. 나만 발견한 이 꿈 같은 桃源境을 오래도록 누린 것은 기이한 추억이다. 그곳에서 몸을 깨운하게 씻고 신선이 되어 계류성을 들으며 폭포에 앉아 우연히 나타난 달을 보면 머리가 다 서늘하였다. 달과 별에 내 청운의 뜻을 빌어보면 가슴에는 될 것 같은 기대가 서고 손에는 잡힐 것 같은 무엇이 꿈틀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군사지역으로 이런 짓을 하면 안되는 줄은 물론 벗이 이곳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그의 관할구역이 되면서 알게 되었을 뿐이다. 시간에 따라서는 총을 든 병사들이 순찰을 돈다고 하였다.
따라서 와룡산 일대에서 경험할 풍상을 다 겪은 내가 더욱이 인사동을 출입할 이유는 밤에 따로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의외의 일들로 인사동에 다시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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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한사로 사는 것에 익술할 즈음 ‘국경의 마을’이란 제목으로 충무로 최낙선교수와 사진전을 하게 되었다. 반포연구실 옆에 개인 암실을 마련해 놓고 인화작업에 매달리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옆 연구실 정진석교수께서 서양화가 김정교수를 모시고 내 방에 왔는데 그는 연구실 한 켠에 언덕처럼 쌓여있던 나의 드로잉과 크로키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여행문학(Travel Literature Writing)의 한 요소로서 평생 매달려온 나의 드로잉인데 그에 의하여 뜻밖에 초대작가로 가산화랑에서 미술전시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정진석에서 김정으로 김정에서 다시 김진두로 그 관리인이 순식간에 넘어가게 되었다. 내 관리인이 김진두화백으로 넘어간 그날 부로 나는 양산박 ‘뜨락인사’가 되고 말았다.
비원은 왕가의 정원이니 정해진 시간만 개방되는 것이고 비원을 나와 그 언저리를 산책 공간으로 본다면 인사동은 素苑이라 불러도 무방할 터인데 주막 ‘작은 뜨락’의 이름 자체가 素苑을 문자내용으로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를 따라 수 십년전 젊은 날 이미 졸업했다고 생각했던 인생학교 ‘밤의 인사동’에 불필요하게 재입학하게 된 것이다. 인생학교 학장이 채현국선생인 것은 여전한데 학생들은 착한사람들은 빠지고 소위 말하여 선수들만 남아 있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든가?
내가 뜨락에 빠지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그곳에는 비행기를 타고 나그네가 되어 머나먼 곳으로 찾아서라도 가서 만나야하는 기상천외의 여행문학의 재료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발로서 끝났다고 여기던 청춘시절의 낭만의 미련을 이 인생극장에 재입학하여 다시 시작해도 되겠구나 싶어서였다. 이렇듯 칠십년대적 인정시절이 그립기도 했던 것이다. 사진장비가 든 가방과 스케치북 그리고 공책을 들고 해가 지면 출근하여 다음날 새벽에 인사동을 철수하는 날이 잦아졌다. 매일 스케치, 좌석배치도면, 기문을 포함한 서너 권의 여행기록을 남겼고 수통의 필름을 소진했다. ‘인사동사람들’이란 이 땅에 본격적인 여행문학서를 내려는 의욕으로 하루치 술값을 통째로 내가며 취재를 해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진을 친 작은 뜨락은 무슨 통신인가하여 시인들이 진을 친 곳의 일층이 아니고 통신이 있는 건물의 서측 외벽을 이용한 안타까운 재질로 겨우 비를 피하는 가건물에 불과하여 비가 오면 물론 좌석을 옮겨야 했다. 슬레트가 부족하여 바이닐류로 막음한 일부 천정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선의 도움으로 낮에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벽은 자재가 부족해 폐냉장고로 바람을 가두고 창고처럼 북어포 등을 넣어놓거나 동강선생의 큰 여행가방과 카메라 장비일체의 수납에 私用되고 있었다.
화장실은 통신의 것을 이용해야 하는데 간혹 통신 측의 소용에 따라 잠겨있는 경우도 많아서 통신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통신측도 선수들이 만만챦은 모양인지 한번 씩 계단에서 목젖을 누르는 분들이 있는데 보통 그의 옆에는 무사의 할복을 도와주는 사람의 자세로 사정없이 등을 쳐주는 동행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목젖을 대강 누르고 나오면 통신사장이 호스로 쏴 계단을 소제하는 공정이다. 이 때문에 간혹 어두움 속에서 뜨락 손님들이 낭패를 보는 수가 생기곤 했다. 당시 우리는 이런 저런 일들을 평정해야 겠다고 조동강선생을 단장으로 군용 워커를 신고 전투복차림으로 순찰을 돌기도 했다.
배평모 선생은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을 끌어들여 현장 촬영케하여 스스로 대변인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주막이 이래야 한다, 이제 진정한 예술가들의 쉼터가 생겼다, 이래야 전통이 산다하고 유창하게 설파했다. 나는 대표가수로 뽑혀 한 손에는 잔을 들고 한 손으로 마이크를 든 채 ‘라글론드리나’를 불렀고 나머지 모두는 춤을 췄다. 촬영이 끝난 것도 모르고 박중식시인은 쿠반 살사를 부르고 몇 명은 탁자 위로 올라가서 쿠반살사를 췄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뜨락을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이 뜨락현상에 나 스스로 빠져든 것이 작업의 탄력을 잃게 한 것이다. 호기심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전개되는 것이 여행문학의 생명인데 작가가 이미 그 사람들이 되고 부터는 작가 스스로 취재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내려면 호기심이 극도로 가거나 그 반대가 되거나 한 시점에서 결론을 내야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그들이 되고 나면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우기 책으로 엮을 흥미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Spring Water’ 즉 춘수라는 상하이출신 완차이 유흥가의 여왕을 취재하러 홍콩에 잠입한 기자가 그녀의 왕국 완차이에 반하여 기자직을 아예 사표내고 자신이 Spring Water에 동화되어 수년을 허송하고 남긴 ‘수지’의 후일담과 비슷하다.
이러한 일과는 별도로, 나의 작업이 반 정도 진척되었을 때 이미 뜨락은 폐업하고 말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작은 뜨락’이 아니라 웃음이 흥근한 뜨락 이름하여 소원(笑苑)이 되었지만, 그 뒤를 치송을 한다고 처녀사장은 허리가 휘었건만, 도대체 운영자금이 나오지 않는 구조가 고착되어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처녀대표 소원당(素苑堂)은 예술가들에 대한 봉사차원에서 일을 시작했지 애초에 주막을 경영코자 시작한 일이 아닌 것이 탈이었다. 그녀는 인도에서 수년을 苦行을 연구하고 아프리카를 맨발로 횡단한 여인이었다. 오십년대 ‘世紀의 나그네’ 김찬삼선생이 슈바이츠를 찾아갔던 일은 들어보았지만 이 이야기는 책으로 나오지 않아 일반인들은 물론 모르는 사안이다. 맨발의 아프리카 冒險家도 적자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는 苦行의 방편으로 이곳에 국수집을 열었을 뿐인데 예술가들이 부추겨 주막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아무런 경험이 없어 내 놓는 술이나 안주도 모두 과객들이 지정해 주었으니 사실 주인이 없는 집이었다. 여기는 애술가들의 천국이었다. 풍류해방구였다.
주인이 없으니 선량한 관리자가 우리 모두인 것은 바람직 한데 우리가 술을 먹다보면 취하는 사람이란 점이 문제였다. 술만 먹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이유없이 쳐대어도 제제하는 사람이 없다. 어제 고함이 오늘 또 고함을 쳤다. 어제 울분이 오늘 울분을 토한다. 어제 비평이 오늘 같은 내용의 비평을 쏟는다. 어제 딴지가 오늘 딴지를 걸어도 어느 누가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술값을 내지 않고 그냥 나갈 수 있는 것은 공개된 자유였다. 화장실 가는 기색으로 나갈 수 있게 건물 구조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을 보고 야단은 커녕 소원당은 애술인들이 시키는 여러 안주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값을 내는 것도 한번 씩 수금을 도우는 대바구니가 지나가기는 하는데 이 때 다만 술값을 그날 치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여 되도록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마건 넣으면 되는 것이었고 이 바구니가 돌 때면 소원당은 미안하여 창밖을 보고 있었다. 즉 누가 얼마를 내는지 주인도 모르게 되어 있었다.
주막이 걱정스러워 채현국선생이 오셔서 분위기를 다잡아 주고 바구니에 큰 돈을 슬그머니 놓고 가시곤 하고 가끔 김명성시인이 하루치에 해당되는 돈을 넣어 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했다. 풍류해방구가 되기는 했으나 그 해방구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해방공간 뜨락은 망해도 일화는 희자된다. 그러나 일화들이 진하여 입에 담아 남에게 옮기거나 글로 남길 것은 못된다. 실증법을 검토 해봐야 할 일도 많았다. 그 중 2004년 섣달 그믐날 밤 완전히 새 벽지로 도배되어 마음까지 맑다고 그날따라 소원당의 미소가 유독 좋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 도배지에 올을 중시하는 김진두화백이 왼 손에 맥주를 들고 연신 마셔대며 그려낸 아름다운 여인과 亭子그림은 2005년 0시를 30초 남기고 두 시간만에 완성되었다. 이에 인사동 낙관전문 조동강선생이 댕강 고추장낙관을 찍은 일과 그 뒤 무거운 침묵을 잊지 못한다. 깨끗한 벽지로 새해를 시작하려는 정확한 0시에 맞추어 낙관을 누르고 내가 그 위쯤 신년원단이라 적었던 삼인합작을 완성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이 잘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런 일들이 여사로 일어나는 공간이 뜨락이다. 물론 새해가 되어서도 아무도 그 그림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낙관과는 크기가 달랐던 것이다. 이는 아마 낙관을 누를 때의 순간 스냅을 이용하는 동강만의 특수기술에 속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였다.
그즈음 우리는 늘 새벽 이른 시간에 헤어졌다는 점, 술을 종지로 먹지 않고 사발로 먹은 것도 아니고 각자가 일준주(一樽)를 비웠다는 점, 당대에 당연히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주당들이었던 점은 기억난다. 세상일을 가볍고 보고 오직 한 잔 술에 욕심내던 그 아름답고 순수한 사람들의 이름과 옛날 그 자리에 있던 소원당(素園堂)이 그립다.
상대를 찾지 못해 주먹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주로하던 한봉림교수, 김진두화백이 선사한 마도로스 모자에 흐뭇해하던 天降시인 김신용선배, 주사를 主事하던 主思 이명선선배, 안중근을 몹시 닮았던 의리의 민예가 전활철선생, 지리산에서 일부로 고로쇠 여러 통을 보내주던 문상희선생, 해방전 노래연구회를 가지고 있는 삼천포 시인 박영현, 시를 구하기 위하여 시작노트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아무도 모르는 레게 노래를 편하게 불러대며 좌중을 뒤흔들던 박중식시인 등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러한 분들과는 일찍이 선을 긋기 위해 입구 자리에 앉아 자신의 술값은 자신이 내고 언제 갔는지 전혀 모르게 사라지던 중절모의 이인섭선생, 조선막사발의 김용문선생과 캐나다 도예가 남녀, 미모의 막내동생 경아, 이분들은 잘 보이지 않기에 특별히 적었다.
나를 따라 우연이 뜨락에 들어섰던 축구심리 손외태박사, 사진가 최교수, 유삭순교수, 탱고의 사빠또, 윤희, 나비, 그리고 살사의 떼레, 블랙칸도 그립다. 몇몇은 나를 따라 뜨락에 들어섰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인생을 풍류로 바꾸어 경영하는 분들이 있다. 나중에 주막 ‘인사동사람들’을 인수하여 경영하던 조정애대표, 채현국선생이 잘다니는 주막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들은 강시인도 그립다.
참고로 김진두화백은 입원가료 중이며 박중식시인은 충주로 낙향했고 임채돈 시인은 死去했다. 뜨락이 망해도 나머지 과객들은 아무 탈없이 지금도 인사동을 누비고 다니니 덧붙일게 없다. 소원당은 현재 내가 이끄는 대한차인회에 한번씩 참석하여 다도를 연구하고 있고 뜨락을 경영하지 않은 지난 몇 년만에 앳된 모습을 되찾았다. 나의 뜨락만 없어졌을 뿐이다. 인생이 그런 것 아닌가! 이러한 기인담은 누가 쓰도 옛날이면 야사나 잡필, 만필, 산필 등에서 다루어 만고에 알려야 하는데 요즘은 돈과 연결되지 않는 글은 쓰지 않는 풍토가 되어 아쉽다.

뜨락의 뜨락 앞에는 늘 강렬한 백열등이 쏘아대었다. 처음 김진두화백을 따라 들어섰던 그날 시야의 확보가 당연히 그 반사광으로 어렵다. 뽀얀 입김에 서린 소당에서 나는 웃음소리, 고함소리, 등장인물에 대한 환영의 소리, 그리고 24시간 틀어져 있는 배호의 안개끼고 돌아가는 노래들 장빈산화백이 손을 들어 크게 환영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렇게 몇자라도 간추려 놓고나니 내 마음의 뜨락이 남겨되어 다행이다.

그렇다.
‘나의 서울(京)에는 아직도 뜨락이 있다’

인사동을 이야기 하면서 꼭 언급할 인사가 있다. 내 친구 막 뮐러의 이야기다. 인사동이 한국의 골동거리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은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그로 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인사동을 통하여 팔자를 고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45년 점령군 정보장교로 이 땅에 도착한 그는 오자마자 골동 수집에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조상이 물려 준 옛 것을 돈으로 바꾸지 않는 한국인들의 문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1.4 후퇴 이후 서울 수복이 되자 한국인들의 인생 인식이 달라졌더라는 것이다. 선조의 유물을 가문의 자존심으로 떠받들던 종래의 인식을 바꾼 것이다. 아니 동족상잔은 우리의 유물에 관한 태도 뿐만 아니라 관념자체를 통째로 바꾸게 한 것이다.
오래된 물건들을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든지 미군 장교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의 골동을 실었는데 그 중에 임금 옥쇄도 실려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한 번의 골동거래는 이후 성북동 저택과 천리포수목원을 장만하는 원천이 되었다. 물론 임금 옥쇄는 지금 이화여대에 기증되어 있기는 하다. 막 뮐러의 인사동은 그런 곳이었다.
60년대 어느 날 20세기 최고의 투자가 존 템플턴 경(Sir. John Templeton)으로부터 007가방 두개의 달러를 직접 건너 받은 곳도 인사동 어디였다 한다. 이 돈은 자본시장에서 수 십 년간 성공적으로 운용되어 외국인 자본투자가 허용된 1991년 템플턴 어른의 바하마군도 집으로 거대한 자본이 되어 주인을 찾아 가게 되었다. 물론 이는 필자가 해외에서 그의 부탁으로 이 트랜잭션 일부에 관여하게 되어 알게 된 일이다. 그를 천리포수목원에서 나무에 빠져있던 순진한 외국인 정도로 이해하면 오해가 된다. 평생 한옥을 좋아하고 한복을 챙겨 입고 인사동을 산책하던 그였지만 그렇다고 결코 녹녹한 사람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인사동을 갈 때마다 골동을 트럭에 담아 싣고 떠나던 젊은 장교를, 지상 제일의 투자가 템플턴 경이 검은 가방 두 개를 들고 나타났을 고문서점과 고문서 더미에서 검은 가방을 찾아 숨가쁘게 벽안의 중년을 회상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불법(일리걸트랜잭션)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과 고서점 하나 하나의 이름들은 불멸의 이름들인데 이 셋을 연결한 1960년대 인사동은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불법거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통시장의 자본유입을 왜 그렇게 정부에서 막았는지 궁금하다. 당시 템플턴 어른은 미국인으로 국제 투자를 한 유일한 분으로 오늘날의 자유자본시대의 개척자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목원에 들렀을 때 그는 자본운용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헤어질 때 자신 있게 오른 손을 반원을 그리듯 치켜 올렸는데 너무 올려 주먹 하늘로 치솟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이일을 마지막으로 삼 개월만에 이승을 떠났다. 아무튼 그는 이국의 땅에서 장가도 들지 않고 인생을 자신 있게 완주하여 살아생전 자신의 정원이요 죽어 자기의 묘역이 된 천리포수목원에서 목련군락을 자식삼아 서해낙조를 보고 잠들어 있다. 올해도 곧 그의 자목련이 필 것이다. 인사동과 천리포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의 인생사를 바탕하여 보면 둘이 하나로 연결된다.

나처럼 돈으로 교환될 수 없는 업을 본업으로 삼는 산중처사가 조東岡선생이다. 그는 東江 가까운 산골언덕 초려를 사들이고 좋은 꽃나무를 심고 그저 보는 한사의 낙을 챙기는 재미에 한동안 빠져 있으며 동강의 절벽 위 외로운 소나무나 이끼낀 바위를 촬영하고 비탈에 서서 곧 낙엽처럼 사라질 마지막 산민들 그 그리운 모습을 촬영하고 흐릿한 날만 골라 산골짜기를 찍은 사진들을 몊년마다 한 번씩 가지고 나와 하나하나 전시하고 있으니 그가 산골에서 상화(賞花)에만 늘상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인이 사진작업을 위하여 제공한 인사동 매우 삐거덕거리는 옥탑방에서 소파에서 여제자를 받은 것을 기화로 자신의 산중별서를 오래 버려두고 절골사람들을 불러내어 한 사람씩 사진을 촬영해 갔다. 이제 그 사진들과 추억담을 통째로 배접하여, 추억을 한 손에 넣어 들고 다닐 수도 있게, 책으로 댕강 만들고 말겠다고 하는 단계에 까지 가고 만 것이다. 추억을 책으로 만들어 손에 넣으려는 마음은 촬영한 사진을 그 때 그 때 암실작업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진작가 자체 마음의 순결성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체 그의 이러한 일들은 수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와서 그 끝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여기에 미인 애제자가 앞장서고 있으니 이제 그 추억이 좋은 책이 되도록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게 되었다. 마치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 사진관에 가서 단추나 머리스타일, 고개의 각도, 표정, 호흡까지도 사진사 아저씨에게 맡기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착한 소년 소녀의 그런 추억과도 비슷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동강선생의 이야기고 나의 일은 남는다. 지금 인사동 기문과 사진이 연구실에 가득한데 그것이 별 쓸모가 없게 되었다. 미발표의 나의 책 ‘인사동사람들’의 주인공격인 조선생이 책을 낸다고 하니 나의 뜨락에 한정된 글이 그의 수십년을 커버하는 인사동전체의 글을 당할 수 없거니와 나의 사진은 애시당초 그의 사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파장을 예감하고 일찍이 여행문학가의 마음을 거두어드렸다. 그러나 아직도 ‘인사동사람들 드라프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나 스스로 소장하여 노경에 읽고 웃을 소용이 있을까 해서일 뿐이다.

일이 엇갈리는 데는 세월이 간여한다. 세월 속에 나는 강명정으로 복귀하여 서호에 의지하여 사는 옛스런 재미에 빠져 산다. 가끔씩 먼지가 자욱한 산너머 와룡산 기슭을 보며 생각한다. “아 내가 그런 일들을 하고 다녔던가?”

산속에서도 가까이서 볼 수 없는 산비둘기가 새벽마다 나의 처소 뜨락에 날아와 노닌다.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색깔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 행동도 움직임이 귀티가 나고 적막하다. 같은 비둘기라도 서양의 그것과는 저렇게도 다르구나! 그들이 산으로 가버린 오후에는 내가 그들을 찾아 서달산에 오른다.
반포가 일찍이 명당이었던 것은 빈의 묘가 기슭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조에 이곳에 이르려면 마포에서 연락선을 타고 노량으로 온 다음 조랑말을 다스려 흑석동으로 스며든 다음, 걸어서 절벽을 넘어 나타나는 곳이 이곳이다. 선조가 이렇게 숨어있는 명당을 기꺼이 찾아 할머니의 유택을 잡은 것을 보면 이곳이 바로 명당인 까닭이리라. 선조는 庶系였다. 원래 빈은 출신이 비천하여 빈이 아니었는데 손자가 왕이 되고 나서야 빈으로 격상되어 옛 무덤을 찾아 다시 장사지내고 유택을 마련하고 묘갈의 문자작업을 하였다. 신도비도 무척 웅대하다.
이렇게 산을 오르다 보면 묘를 만나야 되어 즐겁지는 않아도 몇가지 재미가 부수되기도 한다. 우선 정문에 들어서면 산사람은 하나도 살지 않는 동작동 호위병들의 거수의 례를 받아내는 재미, 유택을 보고 비문을 살피거나 방명록을 들추어 보면서 고개를 끄떡여 보는 재미, 특별한 벗과의 약속을 아예 이곳으로 하여 그들의 반응을 재미도 있다.
화장사에 오르거나 서달산을 올라 상도동이나 흑석동으로 이어지는 산정산보에서 남으로 청계산, 관악산, 수리산, 동으로 검단산과 남한산정, 북으로 북한산 삼각산, 목멱산을 감상하고 시야를 강으로 주면 물길따라 동호에서 서호, 서강까지의 원경을 다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원경으로 접근했을 때에는 산천이 그렇게 변한 것도 아니고 고인들을 생각하거나 옛일을 생각하면 동호의 저자도와 압구정 그리고 봉은사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속에서 남한산성, 옛 도성, 양주, 광주, 시흥땅의 고경(古景)을 감상하며 근경으로 지금의 강남현장을 겹쳐 얻는 대비가 주는 쾌락(Joy of the contrast)으로도 허전한 시간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참으로 해질녘의 노량낙조는 예나 지금이나 물론 장관이다.

영리한 새는 해가 지기 전에 歸巢하는 것이니 뜨락의 페업으로 미완이 된 청춘을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노인의 마음, 枯木의 마음, 가을의 마음으로 다만 草家名馬의 隱者가 되고자 할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 부쩍 나의 백발에 흑발이 많아졌다는 말을 다만 듣고 있다.


(사)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고 아라재콜렉션이 후원하는
천상병시인문학관 건립 기금마련 특별전이 지난 12월 30일 오후5시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개막식에는 목순옥, 채현국, 배평모, 김낙영,김명성, 조문호, 안수사, 전강호, 임계재, 노광래, 편근희씨 등
많은 지인들이 참석하여 성공적인 전시를 바라며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시 : 2009년 12월 30일 부터 2010년 1월 12일까지
장소 : 토포하우스 갤러리 (인사동 부산식당 골목 초입)02-734-7555

본 회의 고문이신 목순옥여사가 주관하는 이 전람회에는 찬상병시인의 육필원고와 소지품,
지인들이 기증한 그림과 사진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전시됩니다.
많은 관람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박영현도자전 개막식이 지난 21일 오후 6시부터 가나아트스페이스 2층에서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배평모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에는 민영선생의 격려사와 이계익(전 교통부장관)씨의 아코디온 축하연주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정희성씨, 그리고 황명걸, 채현국, 민 영, 무세중, 목순옥, 변순우, 조준영, 안다혜, 이청운, 송상욱, 조문호, 구중관씨등
본회의 고문을 위시한 회원들이 다수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었다.
뒷풀이는 최백호씨와 같이 할 예정이었으나, 자리가 부족하여 대학로 "작가폐업"에서 가졌다

 

 

 

 

 

 

 

 

 

 

 

 

 

 

 

 

 

 


최백호그림전 개막식이 지난 21일 오후5시30분부터 공화랑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임재경, 공창호, 민 영, 무세중, 김명성, 김정남, 조준영, 공윤희,목순옥, 박인식, 조문호, 이청운, 송상욱,장경호씨 등의
본 회 회원들과 최열 환경재단이사장, 가수 장사익, 전영록, 김흥국, 김태곤, 남궁옥분씨를 비롯한 전유성, 배철수씨등 많은 연예인들이

참석하여 전시장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개막식은 최백호씨의 간단한 인사말과 김태곤씨의 단소 축하연주로 끝냈다.
전시 관람이 불가능할 정도의 많은 축하객들이 몰려, 와인파티에 와인 한 잔 들기가 힘들 지경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오랫만의 만남에 반가워 서로 환담을 나누며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노광래씨가 기획한,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의 12주기 유작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습니다.
강용대 "우주를 거닐다"라는 표제로 2009년 3월 4일부터 10일까지,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열렸고
지금은 유카리화랑에서 연장 전시중입니다.

지난 3월 4일 오후5시에 열린 오프닝 행사에는, 김영훈씨의 사회로 채현국, 민영. 임재경.목순옥, 구중관, 이청운, 배평모씨 등의 지인들과
많은 관람객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아리랑"에 마련된 뒷풀이에는 100여명이 모여 만찬을 즐기며 환담을 나누었고,
2차로 '로마네 꽁티"에서, 3차는 " 하가'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 괌람하지 못하신 분은 수운회관 1306호 "유카리 화랑"을 찾아 주십시요.
그리고 daum에 강용대카페가 마련되었으니 많은 방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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