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한 세상 살다보면 몇 년이 지난 일도 바로 엊그제처럼 기억되는 추억이 있다.
벌써 만 3년이나 지난일이 며칠 전의 일처럼 생각 나 이 글을 쓴다.
2006년 2월15일(수) 오후 6시부터 <고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다.
(가회동 북촌미술관에서, 초대인 신경림, 백낙청, 구중서, 황명걸, 채현국, 민영)
애환의 한 세상을 살아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거 모여 들었다.
모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자유당 시절, 516 이후 제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하고 행동할 수 없었던

자유롭지 못한 세상과의 불화로 어려운 삶을 살아온, 나보다는 조금 연배가 많은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한을 삭이고 눈물을 삼키며 그들만의 세상을 찾아 명동으로 인사동으로 종로통으로 옮겨 다니며 관헌의 눈을 피해
애오라지 자기들끼리의 즐거운 시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고자 이심전심 “아지트”를 만들어 나갔다.

우리 시대의 "디오게네스" - 고 <민병산> 선생

문학과 예술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흔히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하지만, 막상 당시 그 옛 주역들은 돈 많은 동네에서 가난한 동네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어울리는 놀이터도 그랬고 사는 집도 그랬다. 한국전쟁 이후 수복된 서울의 명동과 충무로에서 시작된 문학인들의 쉼터가 종로로 옮긴 것은 60년대 중반의 일이다. 이것은 명동이 갑자기 가난한 문학, 예술인들이 감내하기에는 벅찬 상업지대로 변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찻값 술값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학의 유목민들 앞에 허름한 옷을 입고 어깨에 봇짐을 메고 앞장선 이가 당시에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던 청구자 민병산 선생이었다. 그 후 관철동 한국기원 근처에서 머뭇거리다가 80년대 초반 한길 건너 인사동으로 어울림의 터를 옮겼는데 언제나 이런 유목민들의 맨 앞에는 온유한 인품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민병산 선생이 계셨다. 그 유목민 대열에 끼어든 사람 중에 많은 문학작품을 번역한 작가 박이엽과 시인 천상병도 들어 있었다.

청구자 민병산, 그는 철저한 무소유의 자유인이었다.

구한말 명문세가 집 대부호의 장남이었지만, 조상의 친일해서 모은 재산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가출해 버린, 그는 참으로 보기 드문 이 시대의 양심이었다. 혼인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직장에도 매인 적 없이 오직 독서와 집필, 그리고 그 나름의 서체로 붓글씨를 써서 개인전도 열고 교유하는 많은 예술 문화인들에게 자신의 글씨를 선물하기를 즐겼다. 인생이란 얄궂어 민선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애써 준비한 1988년 9월 19일 회갑을 하루 앞두고 급작스레 타계해, 하객들이 하룻새 문상객이 되고 잔칫날이 장례날이 되었었다.

천상병 !

그는 서울 상대 나(범초)의 대선배다. 그리고 그의 일생만 생각하면 나는 늘 화가 나고 우울해진다.
행려병자처럼 너무나 어렵게 고생만 하다, 정말 개떡 같은 세상만 살다 갔기 때문이다!

1930년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가난을 직업 아닌 직업으로 택한 이 나라 마지막 기인이었다.

친구들에게 푼돈을 얻어 막걸리를 마셨고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유를 만끽했다.
결코 많은 돈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요즈음 돈으로 치면 기껏해야 만원 짜리 한 장이나 될까!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의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그는 낭만적인 삶을 살았지만 생활은 처참했다. 1967년 엉뚱하게 조작된 소위<동백림 간첩단사건> 에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당시 김형욱 부장)는 천상병이란 천재를 졸지에 바보로 만들었다 (뇌 손상을 입었고 전기고문을 받으면 생식능력이 없어진다는 설도 있다. 범초의 친구 한 분도 전기고문 후유증인지 뒤늦게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선천적 심장기형으로 태어나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다 3살 되던 해에 죽었다).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 한 마리 새/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의 시 일부)

그는 시를 <먹물>들이나 하는 고급예술에서 아이들도 쓸 수 있는 생활예술로 끌어내렸고, 술과 가난의 뒤끝에 마침내 1993 년 간경화로 자신이 쓴 시어와 같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 정녕 그는 자신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을까!> -
범초가 보기엔 너무나 힘들고 불행한 세상을 살다간 불쌍한 인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 반대의 세상을 꿈꾸며 꿈에본 그 아름다운 세상을 시로 쓰다 꿈속에서 인생을 끝낸 것일 게다!

인사동에서 <귀천> 이란 찻집을 하고 계신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의 작고 구부정해진 "실루엣"은 범초의 마음에 천상병 선배의 초상이 되어 늘 우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수락산엘 가면 그를 기념해 <천상병 산길>이란 산책로가 있다. 거기에는 그의 대표시 <귀천>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 중산리 산자락 그의 시비에도!


귀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박이엽(1936~2002), 그는 타고난 번역가이자 방송작가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한나라 기행> <탐라기행> 같은 마음의 양식이 될 책만을 번역했다.
그중 <한나라 기행> <탐라기행>은 범초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국민작가 “시바료우타로우”의 한국과 제주도에 대한 기행문이다.

박이엽은 1936년 부산 출신으로 부산 kbs 프로듀서. 월간음악 편집장 등을 직업으로 삼았으며 저서로 <여명200년>등이 있다. 은자(隱者)의 깊은 사색으로 빛났던 박이엽(朴以燁), 사람들은 그를 생전에 친했던 민병산, 천상병과 함께 <인사동 거리 문인>이라 하여 인사동에 흉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그의 <과객과 주인>은 거리의 철학자였던 민병산을 그리워하며 쓴 <민병산의 약전(略傳)>이다. 1956년 명동의 멋쟁이 박인환 시인이 <세월이 가면>을 남기고 유행가처럼 가버린 빈자리에 느린 걸음의 사색인 박이엽이 나타났다. 50년대 후반의 우중충한 명동에서 비록 구호품일망정 “홈스방-자켓”에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물고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은 이 거리를 떠들썩하게 하던 술꾼 속에서 유일하게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었던 멋쟁이였다.

박은국(이엽의 본명)은 1936년 2월 2일, 부산 동래의 연산동에서 가난한집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시절(이게 그의 학력의 전부)에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한다. 그의 독서편력은 영어를 완벽하게 번역해 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자 한층 날개를 단다. 영문 해독은 그의 독서의 영역 확대는 물론, 나중에는 번역작업으로 생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

그의 정신적 조숙은 열아홉 살 때 자유당에 맞서 대통령 출마를 한 죽산 조봉암의 포스터를 곳곳에 붙이고 다니면서 진보적 사상을 행동으로 보였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해 부산을 떠나야 했다. 그는 1960년에서 다음해까지 충주비료에서 발행하던 기관지 <농업과 공업>(계간)의 편집 일을 맡았었는데 이것은 그의 친구 김광수(출판 인쇄인) 때문이었다. 4. 19 이후에 발간하기 시작한 이 잡지는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는 61년 MBC 단막극 공모에 <사랑이 익을 무렵>이 당선 되어 방송작가의 길로 나선다. 방송작가는 어둡고 칙칙하던 시대에 원고료로 살 수 있는 확실한 직업이었다. 박이엽은 기독교 방송을 통해 7년 가까이 <여명 200년>이라는 대작을 연속 방송했다.

***그는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아주 드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연속물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중략). 그의 섬세함, 성실함, 그리고 인간적인 깨끗함은 그가 가끔 선보인 산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산문은 한 편 한 편이 완성도 높은 시적 향기를 지닌다. 아니, 그것들은 그의 번역에도 나타나고 있다. 흔히 여기(餘技)로 간주하여 대충 넘기는 번역에도 그의 이런 성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의 번역을 예술이라고 극찬한 민병산 선생의 말을 뒷받침한다. ㅡ 신경림의 회상 <저절로 아름다운 것들>에서 ***

기독교 유입사를 정리한 <여명 200년>의 대하소설은 그의 작가적 역량이 총 집결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근 이천 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삼십 장의 원고를 전파에 실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필자 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여명 200년>의 애청자, 그리고 이 책의 독자들은 다 아실 일이지만 그 동안 기독교방송이 겪어온 신산(辛酸)은 바로 이 프로그램과 궤(軌)를 같이 한다(중략). 그러나 기독교방송은 살아남았고 내가 집필하는 <여명 200년>도 방송사상 유례가 드문 이천 회를 가록하면서 나아가 책으로 출판되는 보람까지 누리게 되었다. (1985) ㅡ 박이엽 <여명 200년> 머리말에서 -


70년대의 관철동 시대와 이후 인사동 시대를 함께 했던 정신적 동반자 민병산을 그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그날 부슬비 내리고 / 저무는 인사동의 국수 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 / 어느 인색한 처마 밑에서 두 시간쯤 나를 기다리던 민 선생 / 오늘은 무슨 일로 안 오려나? 아 저기 오는구나! / 어둑신한 뒤에 마침내 쥐어보는 다정한 손길 / 왜 여기 계셨어요? / 늦으셨구만! 그러나 선생은 / 두 시간 이상 기다리셔놓고도 / 정작 말을 못하신다 / 그리고 선생은 이틀 후에 죽었다 / 무엇이었을까? 그 하시려 던 말 / 그 말을 내가 들을 수 있었더라면 한 오 년은 더 사셨을 것 같은 /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 / 자꾸만 그 생각에 잡히는 것은 나도 죽음이 가까운 탓일까? ㅡ 병상 메모(전문 / 1988. 9)

박이엽은 2002년 11월 13일, 존경하던 민병산을 따라 같은 병 - 호흡기질환으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채현국!

그는 419세대 맏형 벌로 서울문리대 철학과를 수석으로 들어가 꼴찌로 졸업했다. 그리고는 글쟁이, 환쟁이, 풍각쟁이, 춤 쟁이, 목각장이, 남사당패 등 장이들과만 어울리는, 우리 시대의 통 큰 지성이고 인정의 기미를 알고 풍류를 아는 영원한 반골재야인사다! 출세하고 돈 버는 데만 골몰하는 인간들은 아예 사람취급을 안 한다.

평소의 그답게 "프랑스"유학하며 40 이 넘도록 애먹이던 맏딸이 재작년 늦가을에 직업이 택견(한국전통무술)인 연하의 청년과 사귀는 것을 알고 당장 시집 보내고는 속 시원하다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었다. 친구 <리영희>선생이 불편한 운신에도 불구하고(뇌졸증으로 쓰러졌다 회복) 마지막까지 피로연장을 지키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날 범초는 이 재미나는 혼주와 더불어 대취하여 혀가 꼬부라졌었다.

그는 자유당, 419-민주당 정권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5 대 재벌에 들어갔던, 흥국탄광을 갖고 있는 재벌이었다. 문화-예술계에서 그를 모르면 가짜다! 헐벗고 주거부정인 문학청년에게 집을 사주기도 했고 그걸 시샘해 <왜 나에게는 안 사주는가!>라는 행패를 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창작과 비평>(백락청)도 그가 없었으면 몇 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치 그는 가난했던 문화계인재들에게 돈을 쏟아 부어 지금은 빈 털털이다! 소설가 이호철, 신경림(본명 신응식)시인과는 동갑으로 죽마고우처럼 지낸다. 필명을 날렸던 언론인이자 친구인 임재경과는 오래전에 사돈 간(임재경 딸이 며느리)이 되었다. 7년 전, 지리산 중산리 자락에 천상병시인의 <귀천>시비를 세우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황명걸과 범초와 함께 갔었다).

가히 이 시대 한국문화계에서는 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늘 홍안미소년처럼 행복하다.

<북촌미술관>「추모공연장」자체가 하나의「한류(韓流)생산현장」이었다. 이 현장은 영원히 생생한 <문화의 場>으로 모두에게 기억될 것이다.“하이라이트”는 역시 장사익의 <소리>였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 향!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놀았지. . . .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장사익은 시도 쓰고 붓글씨 또한 달필, 참 재주가 많은 친구다!
그는 위 노랫말을 쓴 詩人이기도 하다. 그걸 자신이 불러 대표곡이 되었다!
우리 山川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하얀 찔레꽃 ― 우리네 민초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닮았다!
그 가사,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순수함을 되찾게 된다. 장사익은 한 떨기 찔레꽃의 화신(化身)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소리(音)에는"카타르시스"의 힘이 있다.
조금“허스키“한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느릿하게 들리다가 점차 높아져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절규가 튀어 나올 때는 전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그마하고 깡마른 몸매 어디에 그런 천지진동하는 소리가 들어있는지. . .
깜짝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저음과 고음, 탁음과 청음의 조화, 여기에 장사익 특유의 한(恨)과 슬픔이
묻어나오는 창(唱)에는 관객 모두가 넋을 놓기 마련이다.
게다가 고수(鼓手)의 추임새에 맞춰 가끔 한쪽 발을 살짝 들었다 놓거나 손세(손사래)치는 모습은
고혹(蠱惑)적이다. 한복차림의 단아한 美와 파격의 아름다움에 딱 맞아 떨어지는 장사익!
그는 아름다움의 숙연함을 소리와 함께 청중에게 선사한다.
나르는 새처럼 가볍게 저음을 내다가 악을 쓰며 고성을 질러댈 때는 간질이 발작한 듯
온 몸을 비틀기도 하지만 부담이 없다. 들릴 듯 말 듯 감미로운 저음 ― 조는 듯 듣고 있는데,
순간 토해내는 청아한 고성이 고막을 찌를 때는 정신이 번쩍 나며
응어린 진 한 돌덩이가 쑥 빠져 나가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의 창을 실시간 육성으로 듣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슬픔이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흥이 절로 나 어께를 들썩이게도 된다. 온 청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소리세상으로 몰고 들어간다.
북촌 마당은 그의 열기로 끓어올라 여러 번“앵콜“을 받았고,
흑우(黑雨) 김대환(북의 대가, 사물놀이는 그로 인해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대선배다)
선생이 즐겨 불렀던 우리세대의 유행가「대전발 영시오십분」「성황당길」「봄날은 간다」「밤의 부르스」
「목포행완행열차」「동백아가씨」등을 특유의 가창력(곡조와 고저장단을 변조시킴)으로 잘도 불러 제쳤다.
흑우선생은 평생 고음(高音)속에서만 살다보니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말년에 청각장애에 시달렸지만,
이날의 장사익의 창 소리만은 천상(天上)에서도 분명 들으셨으리라!
나는 누가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장사익을 우리시대 최고의「소리꾼」이라 부를 것이다.

노래를 마친 장사익은 날보고 <형님, 보고 싶었씨유!>
(사익은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이 고향이다)라며 좋아했다.
역시 장사익이 최고 인기여서 "사인"받으려는 "팬"들이 줄을 이었었다.

밤10시 경 <북촌미술관>의 화려한 잔치마당도 거의 파장이 되어갈 무렵,
채현국 회장을 비롯해서 몇몇 문인들이 2차로 자리를 옮긴 곳이 대학로에 있는 배평모의 <작가폐업>!
배평모는 원래 소설 쓰는 작가이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카페”를 내고는 상호를 아예
<작가폐업> 으로 하면서 속이 후련해 했었다.
나는 그해(2006)부터 <민족작가회의> 이사장이 된 정희성 시인(<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지음),
배평모, 채현국 회장 등과 양주에 포도주, 소주에 막걸리를 안주삼아 청탁가리지 않고 마셔대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왔었다.
아무런 업적도 없는 내 인생이 허망하다는 투로 푸념하는 날보고, 그들은
<지금껏 살아남아 술 마시고 노는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 이라 해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고. . .
하기야 어느 누군들 허망하지 않은 인생이 있겠는가!
진정 자신의 치열한 삶을 사랑하고, 살아있음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언제나 고맙고 멋지고 재미나는 사람들 -
그들이야말로 일순의 삶을 영원으로 통하게 하는 마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채현국 회장은 이날도 <작가폐업> 에서 새벽 3시 경까지 고서점하는 친구, 조각가, 신부(카토릭), 문인들과
술자리를 끝까지 함께 해주었다. 술값은 늘 그의 몫이다. 그래서 평생 대장 소릴 듣는 걸 좋아하고 그날도
대장이었다. 고희가 다 되어가는 사모님은 군말 한마디 없이 그 술자리를 함께 하셨다.
채현국 - 범초를 친동생처럼 대하며 터놓고 지낸지도 어언 30여 년!
갖가지 사연들로 주름살 깊어지며 확 늙어버린 인생들!
채현국 회장, 신경림 시인이 금년(2009)에 74세, 그 다음이 황명걸, 그리고 나,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흘렀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밤새 마신 술기운마저 쑥쑥 빠져나가던 새벽 길!
전립선 암이라 그 좋아하던 술을 끊은 황명걸 시인이 끝까지 자릴 함께 못했던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추억에 남은 기분 좋은 밤이었다.



-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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