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100년 넘게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보는이로 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어켰던

'송현동 부지'가 지난7일 시민들에게 임시 개방되었다.

이건희 기증관 건립과 문화공원 조성에 앞서, 약 2년간 녹지광장으로 활용한단다.

 

인사동 지척에 자리잡은 송현동부지는 서울광장 면적의 3배에 달하는 규모지만,

한 세기가 넘도록 일반인은 볼 수조차 없던 금단의 땅이 아니던가?

숱한 역경을 거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기에 더 반가운 것이다.

 

이 땅은 경복궁을 감싸고 있어 조선 시대는 왕족이 흩어져 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조선식산은행 사택이 들어서며 부터

4m에 달하는 높은 담이 올라 일반인은 볼 수도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광복 후에는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쓰이다, 1997년에야 돌려받은 곳이다.

소유권이 한국 정부에서 삼성생명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대한항공’으로 넘긴 것이다.

'삼성생명'이 미술관을 건립하려 했으나 아마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것 같다.

'대한항공'은 이곳에 7성급 한옥 호텔을 지으려했으나 그 또한 장애가 따랐다.

학교문제로 인허가에 번번이 제동이 걸리며 결국은 공공부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서울시가 한국토지주택공사대한항공과의 3자 간 합의로 사들인 것이다.

7월 초 소유권이 대한항공에서 한국토지주택공사로 변경되었다는데,

서울시에서 보유한 강남구 서울의료원 남측부지와 맞교환 할 예정이라고 한다.

 

개방 첫 날인 지난 7일 오후 다섯 시 무렵, 열린송현을 찾아갔다.

때 마침 개장식에 맞춘 '가을달빛송현'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시장을 비롯한 300여명이 참석한다기에 서둘러 돌아보고 나왔다.

 

부지 전체를 둘러싼 4m 높이의 장벽을 철거하여 1.2m 돌담으로 낮추었고

넓은 잔디 광장 주변에는 코스모스와 백일홍 등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해 놓았다.

북인사마당에서 바로 연결되는 송현광장의 접근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도심 한 복판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생겼다는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송현동 부지가 가로막았던 경복궁과 북촌은, 지름길이 트이며 더 가까워진 것이다.

인사동에서 광장을 가로지르는 보행로 따라 가면 경복궁과 광화문광장,

청와대에서 북촌 골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새로운 관광코스다.

 

잔디광장 중앙에는 대형 달을 형상화한 지름 5m 크기의 달 조명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작은 달이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조명 조형물도 설치해 놓았다.

100년 만에 열린 공간이, 달빛 쏟아지는 가을밤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서울시는 임시개방 기간동안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한단다.

내년 5~10월에는 이곳에서 서울건축비엔날레가 열리고,

올해 처음으로 열린바 있는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내년에는 이곳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2025년 다시 문을 닫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건희 기증관을 포함한 문화공원으로 재단장하여 2027년에 재개관할 예정이라는데,

가급적 건축물이나 인위적인 설치물은 배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숨 막힐듯 답답한 서울도심, 시원하게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장애학생돕기 자선전인 함께 맞는 비가 지난 921, 오후4인사동 마루아트센터3층 그랜드관에서 개막되었다.

 

화가, 조각가, 만화가, 사진가, 도예가등 4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함비전

비장애인이 어려운 장애아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우산을 같이 쓰며 함께 비를 맞는 아름다운 행사다.

 

이날 개막식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렵기까지 했다.

 

주홍수, 유준, 박성남, 강레아, 조풍류, 정영신, 조명환, 조신호, 임동은, 김수길, 박복신,

김발렌티노, 이한복, 공윤희, 전활철 씨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운영위원과 출품작가를 비롯하여 관람객까지 더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작품감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함비전에 대한 일반인의 지대한 관심은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청신호가 아니던가?

 

이 자선전은 많은 분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작품가격도 기존 가격보다 대폭 낮추어 판매한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저렴하게 소장할 좋은 기회다.

많은 분의 동참을 부탁드린다.

 

부디 첫 함비전이 오색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그 소중한 마음을 모아 좋은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

 

공윤희, 정영신, 김수길씨와 전시장을 먼저 빠져나와

인사아트센터4층 부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성현대미술작가회원전에 갔다.

 

참여작가인 양계선씨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인사동 늘마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는 베이징 코아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 코아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 메뉴인 오리구이보다 마지막에 나온 짜장면이 압권이었다.

오리고기 맛을 몰라 그런지 모르지만, 잘 삶은 삼겹살보다 못했다.

 

촌놈에게는 비싼 중국요리보다 오로지 짜장면이다.

양파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오리고기 가격이 만만치 않으나, 짜장면 먹으러 다시 가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제가 아주서화사를 열던 1970년, 근처에 현대화랑이 생겼습니다. 화랑은 쉽게 말해서 부유한 손님을 대상으로 고급 미술품을 판매하는 곳이에요. 당시 그런 고급 화랑이 많이 생겼어요. 화랑들이 생기니까 인사동에 가면 그림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서 오가며 그림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지금은 인사동길로 알려진 인사동, 관훈동에는 음식점도 많고 술집도 많았어요. 그때는 술 한잔 드시고 점포 앞을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이 그림 얼마예요?” 이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그래서 얼마라고 하면, 또 “어? 술값보다 싸네. 좋은 그림 하나 주세요.” 이러면서 사가고는 했습니다. 꼭 값비싼 그림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그림을 파니 저도 기분 좋고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141쪽)

표구점에서 미술품 판매까지 하게 된 아주서화사를 운영했던 이기웅 보영학원 이사장이 뜻밖의 미술사를 전한다. 아주서화사의 경영자로서 1970~80년대 한국 표구의 전성기를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이 이사장은 전통문화의 거리를 주도하며 인사동의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 '표구의 사회사'(연립서가)는 이 이사장의 ‘구술’을 바탕으로 서술되어 이전의 문헌 기록에서는 담지 못했던 영역을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김경연(대전시립 이응노미술관 책임연구원)과 김미나(국립현대미술관 지류 작품 보존 담당 학예사)가 구술채록 프로젝트로 추진해 나온 책은 '표구란 무엇인가?'부터 미술사에서 배제되어온 프레임의 존재를 환기한다.

20세기 후반기 한국 표구와 표구사(表具師), 표구업의 역사는 물론 조선 후기 경제 발전과 도시문화의 발달에 따른 미술시장의 성장을 광통교 서화사까지 표구를 사회사로 다룬 첫 연구서다. "이 책이 말하는 미술이란 그려진 화면 자체만이 아니라 화면을 둘러싼 액자, 프레임, 그것이 걸리는 공간, 전람회 제도, 그리고 시장과 대중의 취향이 만들어낸 ‘문화’를 아우른다."(권행가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표구점-화랑은 이제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공장, 화랑, 문화재 보존, 그리고 소규모 표구점 등의 영역으로 쪼개져서 각자 운영된다. 현재 표구, 표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배첩장’, ‘표구공’, ‘표구사’, ‘장황사’, ‘보존과학자’ 등 이들 각각의 이름 속에는 그 용어들이 탄생하고 사용되던 시대의 모습이 녹아 있다. 이처럼 닮은 듯, 서로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오늘날 표구는 존재하고 있다." (267쪽)

공창호 전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은 "인사동에서 만나 50년 이상의 우정을 이어온 이기웅 이사장의 구술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책은 그 어떤 연구보다 생생하게 인사동 표구화랑 업계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며 "구한말부터 이어져온 표구의 변화와 사회적 인식을 정갈하게 보여준 이 책은 모든 표구인은 물론 미래 세대의 연구자와 관계자에게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추천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의 원로 시인 황명걸(87)선생께서 지난 9 13일 새벽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전에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병 병문도 못한 채 운명하시어 더 가슴 아픕니다.

 

황명걸선생을 인사동 대표 시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창예헌)’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사동에 일만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오시던 선생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명걸시인의 강력한 현실비판시는 60~70년대 한국시단을 풍미한바 있습니다.

서울대불문과를 중퇴한 후 여상’, ‘주부생활’, 여성동아기자로 일했으며,

1962자유문학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하셨지요.

그동안 ‘한국의 아이’(1976)를 비롯하여 마음의 솔밭’(1996),‘ 저고리 검정 치마’(2004),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2017)등의 시집을 펴낸바 있습니다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가 나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요.

생계를 위해 일했던 LG에서 퇴직한 뒤는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 만큼 아름답다.

칠순이 되어서야 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이 황명걸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상찬한 말입니다.

아래는 판금 조치라는 수난을 겪기도 한, 선생의 대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도시 소시민의 무기력한 생활을 반성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 시였지요.

인사동을 못 잊어,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달랜 선생의 지난 자취가 너무 가슴 아립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장례식장 :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6호

발인 : 2022년 9월 15일 오전6시30분

장지 :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묘역

 

상주 : 황요한 유성희, 황서정 김경덕

배우자 서상실

손자 : 황일우, 손녀 : 황지은, 황지혜

외손녀 : 김나영, 김경민

손서 : 변문균, 손부 : 서가이

 

그동안 찍은 선생님의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생일이 다가오면 반갑기보다 술병 날 걱정이 앞선다.

솔직히 말해,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스럽지만, 어릴 적부터 생일을 유난히 싫어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인 미역국을 먹는 것에서부터 나를 위해 떠벌리는 자체가 싫었다.

집에서 나와 객지로 떠돌며 생일 챙긴지 오래되어 음력생일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정동지를 만나며 사정이 달라졌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양력 생일만 되면 제삿날처럼 기억해 내,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가까이하며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생일을 나팔 불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축하 인사받느라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태어난 자체가 악업인데, 축하받을 일인가?

 

그 중 주변 사람 불러 모아 생일잔치 여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부터 촬영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

정동지와 생일 전날 여수로 출발하여 다음 날 돌아올 계획인데,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듯, 태풍 온다는 일기예보로 그마저 취소되었다.

 

마침 페이스북에 판화가 류연복씨가 인사동에 나왔다며 훌훌 털고 나오라는 댓글이 달렸다.

마침 나무화랑에 전해 주어야 할 숙제 같은 문제도 있어 겸사겸사 술 동네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나무화랑에 있어야 할 류연복씨는 술집 유목민에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미인 두 분을 앞자리와 옆자리에 모신 채, 이미 술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연극배우 이명희와 장경호, 이기만, 김발렌티노 등 조연도 많았다.

뒤늦게 나타난 최석태, 정영신까지 어울려 술판이 한창 무르익는데,

그 자리에서 정동지가 천기누설을 하고 말았다.

 

내일이 조문호 생일이다고 나팔 분 것은 떡 본김에 제사 지내겠다는 말이다.

졸지에 술자리가 생일잔치가 되어 생일 케익을 대신한 그득한 생일 팥빙수가 올라오는 등

술자리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졌다.

홀짝홀짝 마신 술에 맛이 가 결국 돼지 멱따는 소리까지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다짐에 다짐을 해도 술만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취했으면, 그냥 자빠져 잘 것이지 컴퓨터는 왜 켤까?

술 취해 떠 오른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글에다 알몸사진 한 장 올려놓고,

아는 분 포스팅에 댓글까지 달고 쓰러져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컴퓨터를 열어 보니 다행스럽게도 검열에 걸려, 그 포스팅은 삭제되고 없었다.

그러나 볼 사람은 다 보았을 것이다. 쪽팔려 미치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댓글 또한 무례한 관람자 나무라는 말이 작가를 탓하는 글로 비칠 수도 있었다.

오죽하면 정동지 십팔 번이 제발 아는 채하지 마라는 말이겠는가?

 

속은 쓰려 죽겠는데, 생일이라고 일찍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정동지의 동생 정주영씨와 딸 소영이가 온 것이다.

아산 마인팀의 양햇살양이 보내 준 생일 케익에다 정동지가 준비한 새우 안주가 술상을 가득 채웠다.

진짜 생일 술은 해장술로 마신 것이리라.

점잖게 마셔야 하는 가축적인 분위기라 술맛은 어제보다 못했다.

 

연이은 생일 술에 치어 며칠을 낑낑거렸으나, 이번에는 추석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치 않던가.

전라도 아낙이 끊인 경상도식 탕국을 술안주로 술이 술술 넘어간다.

보름달 뜨면, 달 파먹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 엔틱페어 포스터

 

'2022 인사동 엔틱 & 아트페어’'831일부터 925일까지 인사동 문화지구 일대에서열린다.

인사동 문화복합몰 '안녕인사동' 지하1층 센트럴뮤지엄을 비롯한 인사동 일대에서 열리는

엔틱페어를 시작으로, NFT, 메타버스, 비디오아트, 청년작가전, 명품 차·공예 박람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진다.

 

행사를 주관하는 신소윤(인사전통문화보존회)회장은 "인사동은 조선 초기 한양 천도 이후

600년간 한결같이 수 많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고 전통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인사동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행사를 개최한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전통과는 거리가 먼 장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여 인사동 본래의 전통문화가

점점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전구관문연상  28.5x40x28cm

 

지난 31일 오후 4, ‘안녕인사동센트럴뮤지엄에서 개막한 엔틱페어에서는 고미술, 표구, 지필묵 등

전통문화 관련 전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시연 행사와 국악 공연이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2022 인사동 엔틱 & 아트페어에는 인사동 문화지구 내에 위치한 고미술 업체들은 물론,

'한국고미술협회' 소속 업체들도 참여한다. 지난해 좋은 평을 받은 고미술 전시행사를 제대로 보여주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미술 페어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

특별전에 전시된 나전칠기와 주칠 공예품은 많은 관람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칠사각반   36x35x24.5cm

 

'한국표구협회'에서는 엔틱페어기간 동안 표구 전시와 시연 행사 외에도 지필묵이나 문방사우 등 다양한 품목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인사동 전통차음식 단체인 인사동 식구들은 전통차와 전통 한정식 홍보를 하고 있다.

 

강국진, 점(Dot), Water paint on hemp wallpaper, 46 x 46 cm, 1974

 

98부터 18일까지 열리는 2부 행사 ‘NFT & 아트페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NFT·메타버스·비디오아트·화랑 전시가 열린다.

기성 작가만이 아니라 신진 청년 작가나 대학생에게도 전시 기회가 주어졌.

 

NFT 전시를 통하여 미래의 예술 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춘다.

 

김순협 , 감귤나무  E2234 Gold leaf, oil on canvas112x112 2022

 

921부터 25일까지 열리는 3부 행사에는 ·공예 박람회가 열린다.

여러 가지 차와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을 구경하며, 소박한 일상 속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924일 토요일에는 인사동의 매력을 말하는 소설가 김홍신의 특별강연과 시낭송회도 진행할 예정이다.

그뿐 아니라 인사동 문화지구 내 각 분야별 전문가나 장인, 명장 등의

강연과 시 낭송회, 국악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2022 인사동 엔틱 & 아트페어 행사 메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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