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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