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아 가야금 연주회가 오는 9일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공연된다

‘가장 작은 공연장에서 가장 큰 꿈을 연주한다.’

오는 9일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열리는 박순아의 가야금 연주회

 

오는 9일 저녁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54)씨의 초청공연이 열린다.

관훈재는 2012년 서울 사대문 안에 처음으로 지어진 2층 한옥으로, 2층에 '열시꽃'이 자리하고 있다.

열시꽃은  쑥차 등의 전통차와 베트남식 샌드위치인 ‘반미’ 등을 함께 제공하는 카페로

전통을 지키되 새로움을 더하는 문화공간이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 등 베트남 평화운동을 해온 이들이 함께 만든 열시꽃은

이번에 ‘아주 특별한 베트남 식탁’(아특식)이라는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직접 공수해온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나누면서,

좋은 공연을 공유하며 함께 ‘평화의 꿈’을 키워가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그 첫 번째 ‘문화 손님’이  재일동포 3세인 박순아 가야금 연주자다. 

박순아씨는 2019년 연말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노쓰코리아 가야금’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열린 수 많은 공연에서 호평 받은바 있다.

 

그런 연주자가 열시꽃이라는 인사동의 작은 카페를 찾은 이유는 뭘까?

그것은 “가야금 풍류를 일반인들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박순아씨는 이미 ‘어떤 가야금 연주자도 경험하지 못한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다. 

그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민족학교에 다니던 10살 때 처음으로 가야금과 만났다.

일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던 그는 금세 이 ‘민족악기’가 내는 소리에 빠져버렸다.

그는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2학년 때인

1985년 ‘통신교육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진학했다.

 

통신교육생은 학기 중에는 ‘통신’으로 수업을 듣다가, 방학 때 평양을 방문해 대면교육을 받는 제도다.

박순아씨가 이런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북한에서 개량한 ‘21현 가야금’이다.

21현 가야금은 한국 전통의 5음계 음을 내던 ‘12현 가야금’을 현대 음악의 바탕인

7음계 음을 낼 수 있도록 만든 악기다. 북한은 이를 통해 ‘왕과 귀족을 위한 악기였던

가야금을 인민을 위한 악기로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박순아씨는 이후 일본에서 도쿄 조선대학교를 마친 뒤 금강산가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에야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전통예술원에서 공부했다.

일반 대학원의 석사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한국 국적을 얻기 이전까지 그는 ‘조선적’이었다. ‘조선적’은 사실 무국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의 편의를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식민지 조선 출신’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대만적’은 ‘식민지 대만 출신’을 뜻한다.

박순아씨 가족이 무국적인 ‘조선적’을 유지했던 것은 ‘통일된 조국의 국적을 갖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으나 그 소망을 접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한국 전통 가야금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앞섰기 때문이다.

 

박순아씨는 "북한의 개량 가야금은 ‘인민화’에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전통 가야금이 가진 ‘농현’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왼손으로 가야금 줄을 짚고 강약을 조절하며 본래의 음 이외에 여러 가지

음을 내는 농현은 12줄 전통 가야금 연주의 고갱이다."고 말했다.

 

박순아씨는 이 농현이 살아 있는 전통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먼 미래의 민족 통일’보다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남북 가야금 소리의

통합’이라는 꿈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재일의 가야금, 북한의 가야금, 남한의 가야금을 몸으로 익힌 유일한 연주자가 됐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택한 ‘작은 통일’이 앞으로 ‘큰 통일’을 이루는 데 하나의 거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열시꽃 공연은 그런 그에게 가야금 체험의 확장을 다시 ‘유혹’했다고 한다.

“열시꽃 공연이 ‘이제는 경험하기 힘든 조선시대 사랑방 연주에 가깝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현재의 가야금 연주는 큰 무대에서 좋은 음향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관객이 체감하는 음은 조선시대 사랑방에서 음향시설 없이

이루어졌던 가야금 연주의 음과는 또 다르다.

 

조선시대 남성들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에서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청하여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담소를 즐기는 ‘곡회’(曲會)가 자주 열렸다.

이 곡회에서 주인이나 손님이 가야금을 타는 일 또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예전 사랑방에서 진행됐던 연주처럼, 연주자의 호흡까지 느끼면서 가야금의 자연 소리를 듣는 경험은

참 신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열시꽃이 위치한 관훈재는 한옥입니다.

 관훈재가 살아 숨 쉬는 공기를 내뱉어 가야금 음을 더욱 살아 숨 쉬게 만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관객에게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가야금 체험’을 선사하는 일이고,

연주자 자신도 관객과 호흡하면서 그 ‘체험의 새로움’을 공유하는 일이다.

하지만 박순아씨가 이번 공연에서 더욱 애착을 가진 것은 ‘음악이 주는 메시지의 넓힘’이다.

2006년 남한에 온 이후, 2개의 음반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2년에 내놓은 <인터비잉>과 2019년에 선보인 <노쓰코리아 가야금>이 그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함께 존재함(Inter Being)’”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열쇳말로 한

<인터비잉>에서 그는 소외되지 않은 삶을 꿈꿨고, <노쓰코리아 가야금>에서는

북한에서 가야금을 배우던 시절에 많이 불렸던 북한 음악을 가야금으로 연주했다.

그 속에 남북을 모두 ‘고향’이라 생각하나 어떤 곳에서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박순아의 삶’을 담았다.

박순아씨는 이번 열시꽃 공연을 통해 앞으로 “이런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더욱 힘쓸 것”이라고 말한다.

 

“가야금 연주는 연주자가 경험한 삶의 이야기를 가야금 선율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은 그 소리에 묻어나는 연주자의 삶을 느끼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상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한 음을 내더라도 항상 제 삶에 바탕을 두면서 ‘책임과 도전의식’을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념에 의한 전쟁을 경험한 나라’, 그리고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을 경험한 나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아특식’ 자리이기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이 주는 울림은 더욱 커질 것 같다.

 

박순아씨는 이날 30분 동안 4~5곡을 선사할 예정이다.

우선 12현 가야금으로 판소리 ‘적벽가’ 중 한 부분을 들려주고,

이어 25현 가야금으로 전통 산조 가락을 ‘박순아식’으로 다시 해석한 ‘흐트러진 가락’을 연주한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하는 평화의 노래 ‘어머니’를 가야금 노래로 편곡해 들려준다.

 

출처 [보도자료]

인사동은 젊은이 천국이지만, 길만 건너면 늙은이 낙원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낙원동이다.

 

그 곳은 사회와 가정에서 퇴출 당한 늙은이들 아지트다.

평생 몸 바쳐 돈만 벌며 살았으니, 놀 줄도 모른다.

 

식구들 눈치 보여 별 볼일 없이 지하철 탄다.

공짜 전철로 어디든 못 가겠나마는, 맘 편히 소일 할 수 있는 곳은 탑골공원 뿐이다.

 

탑골공원 담장에는 장기판이 줄을 섰고, 골목에는 대폿집과 국밥집이 줄지었다.

장기판에 훈수 들다 목노주점에서 시간 죽인다.

 

국밥 한 그릇에 추억을 되 세기고, 탁배기 한 사발에 왕년의 무용담이 쏟아진다.

 

그들은 우리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 아니던가?

한 때는 월남전에서 피 흘렸고, 독재정권과 싸운 사람들이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늙은이 대부분이 꼴통 보수라는 점이다.

그토록 보수정권을 지지했으나, 늙은이 복지는 항상 찬밥 신세다.

 

'거리두기로 공원 문이 닫혀도 장기판은 돌아 간다성북동 김씨가 하소연 한다.

 

마누라한테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여요.

돈 없고 힘 없으니, 벌레 취급받기 싫어 나오지요,

해장국 삼천원에다 소주 삼천원, 하루 만원이면 찍 싸요.“

 

이제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단다.

덧없는 세월 속에 인생 무상을 체감한다.

 

허리우드에 걸린 영화 간판처럼, 모든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사진, / 조문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복궁 옆 송현동 부지가 올 하반기 개방된다.

굴곡진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긴 송현동 부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금단의 땅이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들여다볼 수도 없던 송현동 부지가 시민에게 돌아오기까지 110년 걸렸다.

 

한때 조선시대 왕족과 명문 세도가가 살던 땅으로,

구한말 친일파 윤덕영과 윤택영 형제가 땅을 소유해 집을 지었다.

1938년에는 윤덕영 집이 일제 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에 넘겨지며 사택으로 쓰다

해방 후에는 미국으로 넘어 가 1940년부터 1990년까지 미 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되었다.

 

미국이 부지를 반환하고 삼성이 국방부에서 1,400억에 사들이면서 송현동 부지는 민간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삼성은 건축 규제에 부딪혀, 2008년 대한항공에 2900억에 팔았다.

 

대한항공은  7성급 한옥 호텔을 만들려고 했으나 교육청과 서울시의 반대에 부딪혔다.

 호텔 건설을 포기하는 대신 '복합문화허브'를 조성하려 했으나

한진 그룹 일가의 비리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에 걸려 손을 들게 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에서 대한항공, 한국토지주택공사 3자 매매교환방식으로 송현동 부지를 확보했다.

대한항공에서 5580억 받고 주택공사에 넘긴 후, 다시 서울시 소유 땅과 맞바꾸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서울시 자료사진

 

그래서 송현동 부지(37117)가 녹지광장으로 바뀌어 시민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서울광장의 약 3배이고 연트럴파크와 맞먹는 규모다.

 

서울시는 국제설계공모를 통해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준비하며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인사동과 북촌, 광화문,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만들고,

그늘막과 벤치 등 시민 휴게시설과 공연 및 전시 공간도 꾸릴 예정이었다.

 

110년 넘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공간인 만큼, 

최소한의 시설물만 배치하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2024년까지 송현동 부지에 대한 조성을 끝내고,

2025년 이건희 기증관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오는 7월 새 광화문광장 개장 시기와 연계해 올 하반기 임시 개방할 예정이다.

최근 청와대 개방에 따른 광화문 일대 교통정체가 극심하여

송현동 부지를 임시 주차장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송현동 부지는 관광버스 수백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고

국립현대미술관(서울) 뒷편과 맞닿아 청와대까지 걸어서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아 주차장으로 사용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다만 6월 말 임시 개방에 맞추어 녹지를 조성해야 하므로

청와대 1차 개방기간 동안만 주차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 조문호

 

 

 

 

모처럼 질퍽한 술자리가 인사동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난 수요일은 나무화랑에서 이명복의 어멍전이 시작되었고,

인사아트프라자에서는 박옥수의 시간여행이 열리는 날이었다.

 

코로나 규제까지 풀려 모처럼의 해방감에 많은 분과 어울려 바쁜 잔치 판을 오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항상 많이 마셔 탈이다.

 

술 취해 사진은 얼마나 찍었는지, 메모리카드가 찼더라.

요즘 몸도 비실거리지만, 하던 일도 귀찮아 게으름을 피운다.

미루고 미루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뒷북치는 것이다.

 

전시가 열리던 날, 안국역에서 가까운나무화랑부터 갔더니

작가 이명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박흥순, 이재민, 김구, 홍성미, 김양훈, 양상철, 김성명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주 사는 이명복씨는 4.3의 한 맺힌 응어리를 형상화하는 작가다.

전시된 어멍전에는 어머니의 초상과 일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한 사람의 인물을 그렸지만, 그 속에 우리 민중의 한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눈빛에서 지난한 세월의 아픔도 읽을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하고 강인한 제주 어멍의 모습이었다,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지라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다

 

같은 시간에 개막된 박옥수씨의 시간여행‘ 사진전도 보러 갔다.

전시를 기획한 지승룡씨가 개막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박옥수씨 내외를 비롯하여

사진가 김문호, 김녕만, 곽명우, 정영신, 가수 장사익,

연출가 김혜련씨 등 많은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사익씨가 축가를 구성지게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사진들을 돌아보니, 아파트가 즐비한 배경으로 쓰러질 듯

자리를 지킨 청계천 판자촌에서 부터 물지게를 지고 가는 어린 소녀들,

창경원에서 휴대 전축을 틀어놓고 춤추는 젊은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연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진가 박옥수씨는 나보다 나이는 두 살 아래지만, 사진은 한참 선배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진 활동을 해, 전시하는 사진들도 65년부터 80년까지의 시대상이다.

사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근현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그날 박옥수씨 부인도 처음 뵈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를 숨겨 둔지 미처 몰랐다.

더구나 연출가 김혜련씨와 절친이라는데, 세상은 넓고도 참 좁았다.

 

뒤풀이가 있는 사동집에도 반가운 분들이 있었다.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사진가 정장식, 심보겸, 성유나, 조명환씨를 비롯하여

김구, 김이하, 이만주, 노광래씨 등 많은 분이 어울린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사동집 주인 송점순씨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았더니, 주방에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일손을 줄여 쉴 틈도 없다며 바쁘시다.

 

안쪽 자리에는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일행이 마시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떼거리 술판이던가?

반가운 자리지만 다른 뒤풀이가 궁금해 급하게 마셨더니,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이명복씨 뒤풀이를 찾아갔다.

 

유목민으로 가다 보니, 길목 사랑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에 이명복, 장경호, 이재민, 박흥순씨가 나와 있었고,

안에는 손기환, 김진하, 김재홍, 고옥룡, 나종희, 송 창, 류연복씨 등 민중미술가들 판이었다.

 

장경호씨와 유목민‘으로 가보니, 그곳도 북적였다.

 

박성남씨를 비롯하여 임헌갑, 임동은, 이경희, 주홍수, 유준 씨 등 성함이 오락가락하는 많은 분들이 있었다.

 

뒤따라 사동집에 있던 김문호, 정장식, 정영신, 노광래, 김이하씨가 차례로 나타났고,

사랑채에 있던 이재민, 김 구, 김재홍씨도 합류했다

 

김명성, 김상현, 이상훈, 안원규씨 등 줄줄이 사탕이다.

 

! 이 얼마만의 이산가족 만남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냐 마는 다들 시간이 늦어 몸 사린다.

 

인사동에서 좋은 전시 있으면 작품보러 나오는 길에 자주 만나자.

 

 다시 뭉쳐 인사동에 봄바람 날리자.

 

사진, / 조문호

 

이명복 '어멍'전시장 사진 / 나무화랑

 

박옥수 '시간여행' 개막식 사진 / 인사아트프라자2층

 

박옥수 '시간여행' 뒤풀이 사진 / 사동집

 

  이명복 '어멍'전 뒤풀이 사진/ 사랑채

 

'유목민'에서 만난 사진 

 

요즘 사진 정리하는 일은 물론 포스팅마저 차일피일 하다 때를 놓치거나,

기억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군 그만둘 때가 되었다지만, 돌아다니는 동안은

그 때를 기억할수 있는 일기를 아니 쓸 수 없다.

 

이 글도 한 주가 지나 더 이상 미룰 상황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두 차례 인사동 이야기를 하려니 사설이 길어졌다.

 

425일의 인사동은 날씨가 흐려서인지 분위기가 설렁했다.

 

나무화랑에서 열렸던 심현희씨 전시를 보았다.

 

자화상에서부터 주변 일상을 그렸더라.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동화처럼 자유롭고 순수했다.

 

거창한 이야기보다 작가 주변의 작은 풍경이라 더 애착이 갔다.

한 작가가 코로나의 암울한 시대를 겪으며 느꼈던

 주변 단상을 그만의 어법으로 말하고 있었다.

작가의 내공이 엿보였다.

 

옷가게 진열장에는 봄 처녀 치마가 들썩였고

필방 진열장에는 털 방망이가 주렁주렁 달렸다.

 

경고문 치고는 무지막지하다. 정신 나간 놈들...

 

일주일이 지난 52일도 인사동길을 걸었다.

 

북인사마당 초입의 제과점 자리는 수리하느라 분주하고 사람도 많았다.

 

모처럼 인사동의 봄이 실감 났다.

 

갤러리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고수정씨 그림을 보러 갔다.

 

작가의 사유를 우화화 한 작품인데, 무거웠다.

 

왜곡되거나 이그러진 형상들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같았다.

 

고독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대변한 걸까?

 

청소부로 다시 들어간 발렌티노 김을 길에서 만났다.

 

강제로 끌어내 '땡처리' 매장으로 둔갑시킨 코트

장사가 되지 않는지 상품을 철수하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의 미수연이

지난23일 정오 무렵, 조계사 옆 '은성한정식'에서 열렸다.

 

지난해 통일뉴스창간 21주년을 맞은 시상식에서

유튜브 채널의 첫발을 떼게 한 방배추 유튜브팀이 특별공로상을 수상함에 따라, 

'통일뉴스'에서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마련한 것 같았다.

 

올해로 88세를 맞이한 방동규선생 미수연에는 사모님 이신자여사,

딸 방그레와 방시레 등 가족을 비롯하여 이계환, 구중서, 염무웅, 김승환, 백낙청,

정지창, 유인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 민정기, 명진스님, 김명성, 최원일, 임진택,

장순향, 장봉숙, 정영신, 김지영, 채원희, 경복궁 재직동료 등 친구와 후배 

3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리꾼 임진택씨가 농부가와 사철가를 부르자

춤꾼 장순향씨가 나서서 너울 춤을 추는 등, 잔치가 흥겨웠다.

 

방동규 선생께서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불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사모님 이신자여사의 노래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젊은 시절 성악가로 활동하셨는지,

아직까지 프로 못지않은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명진스님은 스님답지 않게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미수연에 참석한 분들이 차례대로 축하말씀이나 선생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어찌나 기구한 사연이 많은지, 이야기 듣느라 음식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재야운동가 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선생은 입심뿐 아니라 주먹도 보통주먹이 아니다.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20여년 전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방동규선생을 묘사한 시다.

땅에 뿌리 박고 천장을 받치고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선생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선생은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48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불렸고,

튼실한 체력을 바탕으로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백기완, 이부영, 김태홍, 구중서선생 등 수많은

재야세력과 교분을 쌓아 지난한 민주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광화문 촛불집회도 빠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투쟁 현장에서 선생을 종종 뵐 수 있다.

그러한 몸사리지 않는 투쟁정신에 어찌 고난이 따르지 않을소냐?

 

재야인사들과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고,

86년에는 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에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듯 이일 저일 가리지 않는다.

서른이 되던 해에는 파독 광부생활을 했고, 4년여 파리에서 유랑생활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고급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73년에는 강원도 철원의 노느메기밭에서 공동체생활의 꿈을 이뤘다.

 

79년부터 2년 동안 중동 아랍에미리트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91년에는 서해화성 CEO로 취임했고, 94년에는 중국공장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변신했고,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도 일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없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가해 상을 받았는데,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를 하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16년 전 선생께서 펴 내신

'배추가 돌아왔다"[전2권]에 실렸는데, 이름보다 방배추가 더 잘알려진 이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일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푼되지 않는 돈을 벌기위해 가내수공업 잔업까지 하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가 아니던가?

정도를 보여주는 어른이 귀한 세상이라

젊은이들이 나쁜 짓을 해도 다들 못 본척 몸을 사리는데,

선생께서는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지병으로 운신을 못하거나 치매에 걸려 정신없는 현실도 서글프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정한 노인들의 추함이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아집과 독선, 물질과 허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늙어감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으로 부터 훌쩍 벗어난 분이 바로 방동규선생인 것이다.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이기 까지 한다.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겸손하기 이를데 없는 선생의 답사도 재미있었다.

"난,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다. 어영 부영 열심히 살았다:"

 

팔팔하신 방동규 선생님의 미수연을 축하하며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은 누가 찍은 사진인지 모르지만, 장순향씨 페북에 있는 사진을 옮겨 트리밍했다.

이날 방동규선생 미수연은 아들 선거사무실 개소식과 겹쳐

인사만 드리고 갈 작정이었으나, 이야기를 듣다보니 금새 두시간이 지나버렸다.

잔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마침 다른 분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 

녹번동에서 동자동 갈 때는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 거리를 지나쳐 종각역에서 갈아탄다.

빨리 가는 코스도 있지만, 인사동 들리는 재미가 좋아서다.

 

일주일에 한 번은 별 볼일 없이 인사동 길을 걷게 되는데,

더러는 좋은 전시도 보지만, 반가운 분도 만날 수도 있어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다.

 

지난 월요일은 작심하고 볼만한 전람회를 찾아 나섰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원치용의 길 건너기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시장에 올라가니, 문명 비판적인 작품들이 더 숨 막히게 한다.

 

드로잉 방식으로 그린 원치용의 화법도 독특했다.

철로에 코뿔소가 있거나 고속도로에 오리가 방황하는 

현대 문명에 의한 반생명적 개발행위를 비판하고 있었다.

 

눈앞에 다가온 재앙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두 번째 들린 곳은 인사아트센터 지하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미술아카이브 기획전 바라 이었다.

 

4,3과 관련된 전시로는 이달 초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렸던,

동백이 피엄수다에 이은 두번째 전시로 탐라미술인협회에서 주최했다.

 

참여작가로는 고길천, 고혁진, 김수범, 박경훈, 양미경, 오석훈,

이경재, 이명복, 정용성씨 등 아홉 명이었다.

 

4,3의 아픔을 상징한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 분위기가 숙연감을 주었다.

그 가운데 이명복 작품 광란의 기억이 있었다.

이승만 도당의 본색과 악질 패거리 만행에 치를 떨었다.

 

지난 달 세상을 떠난 미술평론가 성완경선생의 글도 반가웠다.

 

세 번째는 한국펜화가협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프라자'로 갔는데,

관람객 없는 다른 전시장과 달리 관람객이 몇 있었다.

 

평소 회원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지난해 많은 초상을 그려 보여준 임동은씨 작품이 기억나서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군침 도는 문어 한 마리가 꿈틀대며 글자를 흘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문호라 그런지, 문어가 남 같지 않더라.

 

네 번째는 김명식씨의 ‘East side story’가 열리는 선갤러리에 들렸다.

 

이분은 동아대에서 오래동안 교편잡던 분인데,

20여년 전부터 ‘East Side Story’연작으로 주목받은 화가다.

 

비슷한 집들이 적당하게 배치된 그림들은 주택단지의 평면도를 연상시키는데,

벗겨질 듯 연하게 묻은 물감 자욱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전시제목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란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들의 공동체 이야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집 배열이 새마을 운동 같은 느낌도 난다.

 

담백한 구도와 풍부한 색감을 빚어낸 칼 질의

민감한 리듬성은 설렘의 활력소를 만들어낸다.

색으로 모인 집들의 조화와 여백이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이하 시인의 홍제천 사진전’이 열리는 ‘다섯시’에 갔다.

김교서 시인의 비득치에 가면출판기념회도 함께 했다. 

 

김이하 시인은 오랫동안 사람과 홍제천을 기록해 왔다.

 

지난해의 사람에 이어 두 번째 보여 준 홍제천’은, 결국 사람과 자연은 하나라는 것일게다. 

사람을 좋아하고 자연 생태를 사랑하는 한 작가의 일상적 기록이고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다.

 

작가가 오랜 세월 찍어 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에 의한 기록이라기보다

좋아하는 자연환경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홍제천에 서식하는 청동오리나 왜가리, 해오라기 같은

작은 몸짓들을 살피며 함께 정 나누어 온 것이다.

 

아직 서울이 살아 있다는 것에 위안하며...

 

사진전과 함께 김교서 시인의 비득치에 가면’(영화나무) 출판기념회도 있었다.

 

40여 년 전 등단한 이래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는 김교서의 시는

시인 모습이나 이력처럼 갯벌처럼 끈적거렸다.

 

이 시집은 편향된 사회에 대한 그의 편향된 분노이자

음습하게 가려진 그곳을 되비추는 거울이다고 김이하시인이 적고 있다.

 

전시장에는 김이하. 김교서 시인이 자리를 지켰고,

연극배우 이명희, 시인 이승철, 홍순창, 이동엽, 강경석씨 등

여러 명이 축하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 피해 콜라를 방패막이로 앉았는데,

이명희씨는 '스마트협동조합'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는

일인극을 핸드폰으로 보여주었다.

 

앤지 한 번 안 내고 단숨에 촬영했다는 동영상인데,

배우 이명희의 절규가 처절하도록 슬프게 만들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순정의 드라마가 아니겠는가? 

'광고로 사용하면 대박나겠다'며 바람도 넣었다.

 

               

다섯시에서 열린 김이하의 홍제천을 마지막으로 서울역 가는 지하철을 탔다.

 

원치용의 길 건너기 한국펜화가협전은 지난 화요일로 전시가 끝나버렸다.

그러나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미술아카이브 바라   5 9일까지 열린다.

선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명식 ‘East side story’ 426일까지고,

다섯시의 김이하 홍제천 4월30일까지 열린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인사동에서 봄바람 나자.

 

사진,  / 조문호

 

아래는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 미술아카이브 '바라-봄' 전시작입니다

 

 

며칠 전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최울가를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만나자고 한다.

속상한 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최울가 때문에 안 갈 수 없었다.

 

최울가는 부산 시절부터 알던 동생 같은 후배인데, 만난 지가 삼 년 가까이 되었다.

자리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공간에서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가는 유목민 같은 작가라 자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권은 물론 파리에서 북미 지역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데,
서울에 오면 파주에 있으나 파주 작업실은 물론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 떠도는 유동성이 최울가 만의 방식이 되어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화이트, 블랙, 레드+’전도 보러 갔으나 작가는 만나지 못했다.

 

상형문자 같이 원시성을 띤 그림들은 자유로웠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는데,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고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 그림도 있었다.

 

최울가만의 독창성과 기발함을 세상이 모를 리 없다.

요즘은 스타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작가라 작품값도 천정부지다.

 

지하철에서 옛날 생각에 빠지다 보니, 금방 안국역에 도착했다.

유목민’에 가니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도 있었다.

 

안 쪽에는 최울가,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를 운영하는 김정대씨 내외도 와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최울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 요즘 좋은 곳에서 산다면서라는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전시 때 못 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을 전해 주었는데,

쓰리쿠숀으로 돌려 준 돈봉투에 삼십만원이나 들었네.

"고맙다. 그 돈으로 햇님이 지방선거 현수막 값이라도 좀 보태 애비 체면 좀 세울께.."

 

김명성씨는 얼마 전 울산서 전시한 박상진과 동지들이야기를 했다.

박상진 투사의 활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매국노 이완용 글씨까지 걸었다가

여론에 밀려 철수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단다.

 

그런데, 김정대씨가 4년 전에 결혼했다는데,

이렇게 젊고 예쁜 부인을 두었는지 미처 몰랐다.

소장수 같은 인상에 마누라 복은 있네요.

 

술 마시다 정선집 불난 이야기가 나오니,

30년 전에 최울가가 선물한 그림 생각이 났다.

 

화마에 휩쓸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 오는 날 개울가에 아이가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 앉은 그림이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인데,

그림을 그린 작가도 보고 싶어 했으나,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빠져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금새 취해 버렸다.

술집 실내에서 담배까지 피웠으니 취해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최울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탔는데, 불광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는 잠들어 버렸네.

 

돌고 돌아 녹번동을 찾아갔더니, ‘스마트협동조합이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취했고 서인형씨는 기다리다 취했으니, 용건이 뭔지도 모르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마시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언제나 술이 술을 마셔, 오바하는 것이 문제다.

속은 쓰린데다 엊저녁 실수한 일이 생각나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