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정녕 도시에서 소외된 뒷방이란 말인가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낙원동 전경(1983) 공원을 빙 둘러 "J"형상으로 들어선 상업시설(파고다아케이드)과 종로 대로변에 선 건물이 보임. 주변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c 서울역사박물관

이곳에 서면 도도한 시간의 흐름이 날로 전해 온다. 허허로운 일상을 보내는 노년 세대가 점유한 공간은, 마치 뒷물에 밀려 하구에 다다른 강물처럼 보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이 풍경 속 출연자는 분명 우리로 대체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만들어 낼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소비하는 도시공간이 이채롭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한 시점에 멈춰 서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한 세대 전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도시에서 지대(地代) 지불 능력은 소비행태 및 구매력이 결정한다. 따라서 지대가 구획한 공간조직은 세대별 특성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성을 띤다. 전유 공간 형성이다. 이런 공간은 반드시 배타성을 갖게 되며, 이는 한 공간에 형성된 그 세대의 문화와 공간소비 행태로 치환되어 유기체적 흐름으로 변화한다.

 

 

▲ 송해길 북단;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송해길. 7월 폭염에 거리가 낮잠을 자는 듯하다.ⓒ 이영천

홍대 앞이 20∼30대 공간이듯, 이곳도 시니어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탑골공원을 위시한 낙원동 일대 '송해길'이라 명명한 곳에 형성된 특이한 공간조직이다. 일종의 '환원 공간'인 셈이다.

노년이 채운 공간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터부시했다. 이들 사이에도 욕망이 작동하는 엄연한 하나의 '사회'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꾸 밀쳐내려 했다. 또한 이 공간을 타자화하며 지우려 했다. 집단으로 모인 이들 행태를 곁눈으로 흘겨보며 비난하기 바빴다.

이렇듯 이곳은 소외된 도시의 '외딴방이거나 뒷방' 취급을 받아 왔다. 월드컵 개최를 빌미로 서울시는 운현궁 맞은편에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지어 이들을 수용할 의지를 내보인다. 명분은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이었다.

 

 

▲ 서울노인복지센터 운현궁 맞은 편에 21세기 초 들어선 노인복지기관. 탑골공원 노인을 수용하려는 의도였으나, 명백한 한계를 보임.ⓒ 이영천

물론 서울노인복지센터 프로그램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무척 훌륭하다. 식생활에서부터 건강, 취미, 교육은 물론 취업 알선까지 이 시대 노인들이 당면한 제 분야를 망라한다.

그러함에도 탑골공원에서 밀려난 노인들이 종묘공원으로 자리를 바꿔, 하루 2∼3천 명씩 모여들었던 현상은 왜 일어났을까? 이들을 관리와 통제대상으로 상정하고 일정 공간에 '가두어' 두려 한 서투른 행정이, 시작부터 이미 절반은 실패한 건 아니었을까?

이제 탑골공원이건 종묘공원이건 수천이 군집하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두 공원이 갈 곳 잃은 그 많던 노인들을 어디론가 다시 쫓아버린 셈이다. 그러나 두 공원 주변엔 적잖은 수의 노인들이 지금도 모여들고 있다.

설 자리가 없는 노년

노인은 누구이며, 노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딱히 법이나 제도로 규정되어 있진 않으나 '반강제로 경제활동을 끝내야만 하는 연령대'로 규정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다니던 직장을 내 뜻과 무관하게 그만두어야만 하는, 정년을 맞이하는 시점으로 간주하는 게 사회통념이다. 생물학적 노쇠는 물론 생리적, 심리적으로 급격한 퇴화가 밀려드는 시점이기도 하다. 만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고 있다.

 

▲ 일상풍경 낙원상가 왼쪽 전면, 탑골공원 북쪽 빈터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풍경.ⓒ 이영천

 현재 구백만 명인 노인 인구가, 2032년 천사백만 명으로 예측된다. 급격한 노령사회로의 진입이다. 대중교통 이용요금이 면제된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얄팍한 연금에 의존하는 전혀 다른 세계로 생활행태 천이가 강제된다. 노인 빈곤이다. 불과 1백여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락이 펼쳐진 것이다.

노인이 핵심이던 대가족체제가 산업화 이후 급격히 해체되고, 그 자리를 핵가족화한 도시형 가구 구성이 차지했다. 이는 노인의 권위와 경륜은 물론 안락한 노후마저 보장해 주지 못했다. 노환이나 병이 찾아들면 요양원이나 병원에 갇혀 자식이 부담하는 화폐 단위에,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여생을 저당 잡혀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잉여 존재로의 전락이다.

이 길에서 누군들 예외이겠는가? 강의 뒷물은 항상 앞 물을 밀어낸다. 지금의 물은 어제의 그 물이 아니다. 세대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묻는다. 그대는 효용가치가 영원한 존재로 살아남을 것이라 자부하는가?

그래도 작동하는 공간조직

이곳 노인들은 대체로 이중의 존재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물리적 신체나이는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도태된 상황을 심리적으로 거부한다. 이곳에 나와 있어도, 스스로는 철저히 '관찰자'라 여긴다.

빈한한 경제 능력에 무료급식소를 이용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과거를 살아낸 시간에 의식의 끈을 묶어 두고 있다. 열정적이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현재 시공간에 끊임없이 투영시킨다. 분명 현실과 괴리된 몽상임에도, 이런 의식이 이곳을 노인 전유 공간으로 변화시킨 힘이라 여겨진다.

이곳은 변화하는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나이 듦'은 속도와 반대개념이다. 따라서 이 공간도 사라질 위험성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이곳에 작동하는 나름의 법칙이, 이 공간을 지켜줄 최후 보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매력한계에 따른 지대 때문이다. 지대가 배타적 노인 전유 공간으로 살아남게 한 핵심 요소다.


▲ 허리우드클래식 실버 전용 영화관으로 이용료가 저렴하며, 낙원동 일대 노인 문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영천

음식값이 무척 저렴하다. 20세기 말에 형성된 가격대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무료급식에 의존하기 싫은, 최소 지불 의사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인이 주로 이용한다. 이발소가 그렇고 목욕탕이 그러하며 아주 값싼 커피값이 또한 그렇다. 술집과 간이주점이 그렇고, 패스트푸드 주 고객마저 이들이다. 낙원상가에 있는 영화관 허리우드클래식이 '실버 전용'으로 운영되는 사례가 대표적 본보기다.


탑골공원 북측 빈터에선 바둑과 장기 대결이 일상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경운동, 봉익동, 돈의동과 피맛골 등지 골목을 소비하는 걸음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공간조직은 여전히 살아 퍼덕이고 있다. 속도와 무관하게 지나간 젊음을 회상하며 느리게 변해가는 철저한 '환원 공간'으로 생존해있다.

 

▲ 공터 간이주점 탑골공원 동측 담장과 송해길 사이에 형성된 간이주점. 잔술을 팔고 있으며, 대낮임에도 이용자가 상당수다.ⓒ 이영천

외부자 시선에 포착된 몇몇 스틸컷은, 이 공간이 오히려 넘쳐나는 활기를 버겁게 껴안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직도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라는, 감출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다가오는 미래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지를 이들은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온갖 욕망을 이 공간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다. 모두 한때는 찬란한 시절을 구가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잉여 존재로 밀려난 '노인'들이 점유·소비하는 장소기억이다.

'송해길'이 가진 힘으로

지난 6월 방송인 '송해'씨가 타계했다. 1985년 낙원동에 자리한 '원로연예인상록회'가 사랑방 역할을 맡게 되면서, 고인은 이곳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낙원동 일대에서 일상생활을 펼쳐나간다.

 

▲ 송해길 상징 최근 타계한 송해 씨 흉상과, 그를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는 종로3가역 5번출구 송해길 상징 장소.ⓒ 이영천

이곳을 활성화하려는 그의 여러 봉사와 노력이 주민들 지지를 얻게 되었고, 주민들 요청으로 명예도로명인 '송해길'이 2016년 탄생하였다. 수표로 북쪽 끝 240m 구간으로 종로2가에서 종로3가역 5번 출구까지다. 이곳이 아슬아슬한 노년의 삶을 보듬어 주며, 이들을 젊은 시절로 환류시켜주는 공간이다.

공간조직은 대체로 소탈하고 허름하며, 좁은 골목마다 점포가 상당수다. 꼭 노년만을 위한 점포들도 아니다. 젊은 세대도 얼마든지 이용할 넉넉한 품을 갖췄다.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스레 지혜와 경륜을 엿보고 익힌다면, 지금보다 더 너른 품의 '어른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 송해길 남측 초입 종로에서 송해길로 드는 초입. 보도에 문을 세워 명명한 길을 표현하고 있으며, 오른쪽 붉은 집이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마리서사" 서점 자리.ⓒ 이영천

자본과 도시 권력의 촉수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곳 역시 개발 압력이 상당하다. 최후 보루라 할 수 있는 낙원상가가 한때 존폐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

'송해길'은 지역주민들 힘으로 탄생하였다. 모두가 공존하자는 지혜가 담긴 제안이었고, 한 대중문화예술인의 삶과 헌신에 대한 보답이었다. 송해길이 무자비한 자본의 개발 압력으로부터, 이 공간조직을 든든히 지켜내는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 이영천

마지막 인연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는 곳이 동자동과 인사동이다.

한 곳은 삶의 전쟁터고 한 곳은 마음의 고향이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지만, 어쩌겠는가?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 것을...

 

지난 수요일은 동자동 빈민들 생수 나누어 주는 날이었다.

쪽방 더위를 견딜수만 있다면, 한 시간 쯤 땡볕에서 줄 서는 것이야 할수도 있다.

더위에 지친 이들의 갈증에 불만도 따랐으나, 고마운 배려였다.

 

사소한 일로 목소리가 높아진 두 젊은이는 죽일 듯 주먹을 치켜세웠다.

 "씨발놈아~", "오로새끼!"만 서로 반복하며, 주먹은 계속 허공을 맴돌았다.

매값을 훤히 알고 있으니, 어찌 성질대로 하겠는가?

 

지루함을 메워주는 퍼포먼스처럼 한참을 싸우더니,

물이 도착하니 약속이라도 한듯 싸움을 끝냈다.

 

작은 생수 스무 병 묶음이 일사불란하게 분배되었다.

삼백 명 한정이라 외출을 하지 않는 늙은이는 몰라서도 못 얻지만,

힘없는 노인들은 높은 곳까지 들고 가기도 힘들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매번 늙고 힘없는 사람만 소외된다.

 

 '공정'이란 말을 혁명 공약처럼 내 세우는 분들이시여!

제발 밑바닥 인생, 작은 것부터 공정하게 해 주세요.

 

오후 늦게는 모처럼 인사동 나갈 일이 생겼다.

한때 인사동에서 작은 뜨락을 운영한 노인자씨가 추억이나 까먹자는 연락이 와서다.

 

먼저 인사동 골목부터 돌아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이곳 저곳 돌아본다던데, 죽을 때가 되었을까?

콧수염으로 불리던 사진가 김영수씨가 오르내리던 작업실 골목도 갔다.

 

깐죽대던 강용대가 김영수의 군화발에 차여 처박힌 곳에서부터,

10원짜리 동전을 펼쳐 놓고 일원 짜리와 바꾸어주는 돈장사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화가 강용대 유적지가 가장 많이 떠올랐.

금방이라도 머리를 풀어 헤친 까딱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나타날 것 같았다.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식당'은 개털의 소굴이었다.

물주 기다리다 잠든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의 땡초시인 적음도,

유일한 물주였던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도 이제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

 

노동자시인 김신용의 '조빠하'란 시어가 안주가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알몸으로 난장판 된 실비대학 결혼식 뒤풀이 등

끊어지고 뒤엉킨 추억의 실타래를 되 감는다.

 

소설가 배평모를 만나 이박 삼일동안 한자리에서 죽쳤던 레떼도 생각났다.

죽이 맞은 술친구보다, 주모 이점숙의 갈까보다’ 노래가 발목 잡았다.

 

사진쟁이들이 많이 들락거린 꽃나라흑백현상소보다

그들과 어울려 술잔 나누던  뚱뚱이 삼겹살 집이 더 그립더라.

 

천상병시인의 아지트였던 귀천만 자리를 옮겨 살아남았을 뿐,

‘실비집'에서 부터 ‘누님칼국수’, 수희재',  '하가', '춘원', '평화만들기' 등

많은 주막과 찻집이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때 이야기를 아는 분도 별로 없겠지만,

세대 따라 인사동에 대한 추억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40대의 한 분처럼 추운 겨울날 호떡 하나 사 먹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떨며 기다리다 호떡을 사고보니 입이 얼어 호떡 맛을 알 수 없었다는 분에서 부터,

 쌈지에 대한 추억이 많은 3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추억을 떠올린다.

 

 노인자씨가 운영한 작은 뜨락도 한 때는 인사동 참새들의 방앗간이었다.

마신 만큼 자진 납부하는 콧구멍한 대폿집이라 매상도 신통찮은데다,

그마저 외상 하는 골패들이 늘렸으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약속장소인 유목민 본래의 카페도 떠올랐다.

그땐 ’이란 카페였는데, 착 가라앉은 술집 분위기가 연애걸기 딱 좋았다.

그곳에서 들었던 킹크림슨의 아일랜드‘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돈다.

 

유목민에는 이대훈, 노인자 내외와 정영신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안쪽에는 화가 유준씨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내외를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노보살은 살이 포동포동한데 반해 이대감은 나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노보살만 드시고 이대감은 굶겼을까도 생각했는데,

진짜 단식원에 집어넣어 모질게 십키로나 살을 뺏다고 한다.

그러고도 술과 인연을 끊지 못해 빨간딱지나 찾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유목민' 주인장 역시 술은 독약이지만,

술을 너무 사랑해 목숨 걸고 마시는 것이다.

 

 오늘도 술에 절어 '미워도 다시 한번'을 곱씹는다.

 

인사동은 마음의 고향이 아니라 술의 고향이던가?

 

사진,  / 조문호

 

 

 

 

지난 토요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아트프라자앞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 자선 공연'에 들리기 위해서다.

 

보름 전에 사진은 찍어 올렸으나, 그때 돈이 없어 모금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자선 공연은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나설 뮤지션이 없었을까?

아니면 모금이 신통찮아 그만두었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자선음악회가 있다고 나팔 분 것이 문제였다.

행여 그 글을 보고 나왔다면 얼마나 원망하고, 실없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주최 측에 재확인하지 못한 탓이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헛걸음 한 모든 분에게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몇 푼 되지 않는 후원금은 후원계좌를 찾아 보내기로 하고,

비참한 심정을 달래려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치기 딱 좋은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반대편에서 장춘씨가 걸어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유목민에는 전활철씨 3-40년전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안면 있는 분도 여럿 있었는데, 술 장사에 찌든 활철씨가 제일 많이 삭았더라.

 

다행히 그날부터 유목민에 새 지배인이 들어와 활철씨도 편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전활철씨의 해방인지, 아니면 사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한건지 분간 안 간다.

 

담배 피우기 딱 좋은 술집 입구에 술상을 차렸는데,

장춘씨에 이어 강남에 전시 보러 간다던 정동지도 돌아오고,

갤러리시네노광래 관장과 불화가 이인섭선생 등 줄줄이었다.

 

덕분에 정성진, 안지현씨 등 미녀들도 알현할 수 있었다.

 

노관장은 전시 중인 “Funny Art, Money Art’ 리플렛 한 장 내놓았다.

 

71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는 돌아가신 민병산, 김구림, 변우식, 임창렬,

이존수, 강용대, 김지하시인에서 부터 요즘 잘 나가는 최울가, 강찬모에 이르기까지

22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로 소품 위주라 마음에 들면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술자리가 만들어져 술은 취했으나,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레기나 다를 게 뭐 있나?

 

덕분에 반가운 분들 만나 잘 마셨다.

인사동에서 그리운 분들 만나 전시 보아가며 좋은 시간 만들자.

남는 건 그리움의 추억뿐이다.

 

사진, / 조문호

 

 

 

! 이게 얼마 만이더냐?

그놈의 코로나에 발목 잡혀 못 만난 지가 2년을 훌쩍 넘었다.

조준영 시인의 사발통문으로 모처럼 인사동 골통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인사동 풍류를 사랑하는 예술가 패거리가 생겨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7-80년대 목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귀천을 아지트 삼아,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 민,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민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 풍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소식 끊긴 구중관, 배평모를 비롯하여 김종구, 강용대, 최정자, 이청운,

강찬모, 조해인, 최울가, 박광호, 전강호, 김신용, 석파, 적음, 김용문씨 등 많은 풍류객이

만들어 낸 사연들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것이다.

그중에는 김명성씨가 있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화가도 더러 있으나, 예전엔 다들 개털이라 술값 낼 물주가 필요했다.

김명성씨가 창예헌이란 모임을 만들어 인사동은 물론,

지방까지 예술축제를 개최하여 지역 예술가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인사동에 세운 아라아트건물이 빚더미에 올라

중국 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조준영 시인이 주선하여 유목민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인원은 십여 명 밖애 모이지 않았지만, 터줏대감들의 유지는 이어 온 셈이다.

그것도 형식상으로 일 인당 만 원을 거두지만,

주태백이 술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항상 제 주머니를 털어 온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랜만에 모임을 규합하기 위해 봉화 사는 신동여화백을 불러 온 것이다.

신화백은 인사동에서 전시했던 4년 전에 보고 처음이니, 다들 얼마나 반갑겠나?

, 신동여씨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우익선생이 생각난다.

 

신경림시인의 간고등어시에도 소개되었지만,

봉화에서 인사동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안동 간고등어를 들고 오셨다.

신화백도 같은 봉화 살지만, 삶의 철학이 비슷하다.

신화백 역시 예전에는 간고등어 대신 약초를 갖다주었다.

 

전우익선생 말씀대로 재미있게 사는게 최고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럴려면 저어기 무인도에나 가서 살어.

별로 재미없는 세상 재미나게 살아가야제. 안 그려?

비잉신처럼 굴지말고 학실히 살다 가. 알았냐?”

 

인사동 모임은 지난 금요일 오후 여섯 시로  잡혔는데,

전시 리뷰 하나 전송하고 나가려다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인사동에 도착하니 삼십 분쯤 늦었는데, 이미 유목민벽치기 골목은 대목장이었다.

 

봉화에서 올라온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임태종, 조해인, 이명희, 김상현,

장경호, 전강호, 정복수, 노광래, 유근오, 김수길, 김 구, 임경일, 정영신, 노박사,

이인섭, 최유진, 김민경, 전활철씨 등 이 십여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도 와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대신 카메라부터 들이댔는데, 찍고 빠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걸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슬슬 취했다.

술맛 좀 날 만 하자, 일찍 마신 술꾼들은 도망갈 준비부터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니, 바톤 받듯이 임헌갑, 서인형, 류연복, 최석태, 안원규,

발렌티노 김이 뒤를 이었는데, 한때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 이두엽까지 나타났다.

아직 인사동 밤안개가 나올 시간은 아닌데...

 

기분이 좋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갔다.

요새 한꺼번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자주 생긴다.

그제는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이 인사동에서 열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까지 올라 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는 정동지 눈치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신 화백하고 빨다 잘 테니, 먼저 들어가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에 나온다는 말이 딱 맞다.

모셔드려야 할 밤늦은 시간에, 어찌 동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늦게 온 술꾼들마저 사라지는 걸 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평소 문 닫을 때 까지 마신다는 장경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신화백까지 사라져 활철씨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여관에 갔단다.

활철씨 안내로 '한흥장'을 찾아가니, 이미 신화백은 뻗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화백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인사동 거리는 사람 청소를 했는지,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나 인사동에 해장할 곳이 마땅찮다.

아침 식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뿐이라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반주도 없이 급하게 설렁탕을 퍼 넣는데, 전활철씨가 해장국 끓어 놓았다는 기별을 했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국물이라 소주가 술술 넘어가 단숨에 한라산 세 병을 까고서야 일어섰다.

활철씨는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가는 동안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간 크게 택시를 잡아탔다.

 

모처럼 시골 영감이 상경했는데, '대마불사주'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해장술에  제정신이 아니라, 활철씨가 찔러 준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외상이 아니라는 투로 주모에게 대마불사주와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대마 나물과 대마불사주가 나왔는데, 시골 영감이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았다.

불광동 사는 장춘씨까지 불러냈으나, 이미 정신이 풀려버렸다.

많지도 않은 대마불사주 씨를 말리고서야 일어섰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신화백을 부축하여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는데,

장춘씨가 술 취한 신화백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듣는 내가 짜증 났다.

처녀로 늙었기에 망정이지, 시집이라도 갔더라면 서방 잡을 것 같았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입구에서 내려 유목민으로 돌아오니,

활철씨도 장을 보아 영업준비를 마무리했더라.

 

장춘씨의 잔소리를 안주로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노박사가 안주하라며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갖다주네.

입가심으로 마신 막걸리 두 병에 신화백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활철씨가 여관방을 잡아두었다기에, 그를 부축하느라 술이 깰 지경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리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2층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니, 장춘씨도 가버렸다.

그만 막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인사동에 방 잡아 놓고 술 마신 지가 얼마 만이더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래된 일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접어 넣었다.

신화백이 자리에 눕자, 긴장이 풀어져 다시 취기가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한 밤중에 깨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야 정신을 차렸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각났다.

뉴스 아트에 보내준 전시리뷰를 페북에 걸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 교정을 못 본 것이다.

 

컴퓨터를 열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마치 취중에 올린 글 같은 상스러운 표현인데, 이미 볼 사람은 다 봐 버렸다.

 댓글까지 달린 전시리뷰를 내리고, 수정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글을 다시 페북에 링크한 것이다.

 

카메라에 든 이미지를 꺼내 정리하며, 불 꺼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으니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닭죽을 끓여 놓았는데, 신화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화백은 일찍 봉화로 내려 간 것 같았다.

만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그래! 잘 내려가시게나.

당신이 또 하나의 인사동 추억을 남겨주었구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인사동 풍류, 불 꺼진 창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삭막한 인사동,

뒷골목 정마저 사라진다면 전우익 선생 말처럼 무슨 재민겨?”

다들 조준영 시인이 부여잡은 인사동 끈을 모두 놓지 맙시다.

 

이상으로 ‘신동여 선생 상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진, / 조문호

 

 

김문호씨의 豊裏眞景(풍리진경)’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5일 오후6시 전북도립미술관서울관“(인사아트6)에서 많은 분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사진집 제목으로 내 건 豊裏眞景이란 풍요로움 속의 이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풍요로운 현대 문명을 누리는 감춰진 그 속에 진짜 경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디스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다.

 

개막식에는 사진가 이수철씨의 사회로 사진비평가 이광수씨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 관장의

사진의 이해를 돕는 찬사와 김문호씨의 사진작업에 대한 인사말로 이어졌다.

 

이광수교수는 '작가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하면서 현재를 보지만,

결국 사력을 다해 죽음으로 퇴보하는 물질문명의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풍리진경' 김문호 사진집 표지 / 눈빛출판사 / 160페이지 양장 / 가격 35,000원

모처럼 인사동에서 볼만한 전시가 열렸으나,  20(월요일)까지라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을 낼 수 없거나 지방에 계시는 분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풍리진경' 사진집을 보면 된다.

 

그날 전시 개막식에는 부산과 장흥에서 오신 이광수교수와 무영스님 등 멀리서 온 분도 계셨다.

 

그리고 30여 년 전 같은 리얼포토맴버였던 안해룡,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김남진, 성남훈, 서준영, 정장식, 이수철, 이동준, 제이슨 김, 이윤기, 곽명우,

최인기, 안미숙, 한금선, 정영신, 이주영, 김영호, 전형근, 임계제, 타이거 백

장경호, 최석태, 임경일, 조명환, 유근오, 안원규, 김수길, 이지연, 김영복,전활철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전시 뒤풀이는 인사동 사동면옥에서 시작하여 '유목민'으로 이어졌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사동 벽치기 골목이 모처럼 사진가들로 흥청댔다.

 

전시 오프닝과 뒤풀이에서 찍은 사진이 너무 많지만,

 참석한 분이라면 두루 살펴보며 그날을 기념하시라.

 

사진, / 조문호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를 돕기 위한 사랑과 평화자선 음악회가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앞에서 열리고 있다.

 

이 자선음악회는 사랑과 평화를 지향하는 예술인 모임인 사랑과 평화경성구락부,

장소팔기념사업회에서 공동 주최하고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주관한다.

 

42일 열린 첫 공연에는 음악극 경성구락부팀의 공연을 시작으로,

어르신들의 향수를 달래는 장광팔, 독고랑의 서울 전통이야기문화 만담 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단장 임실비아씨가 자선 음악회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 주 열린 버스킹에서는 소프라노 김희정, 테너 김철호, 기타리스트 장윤식,

메조소프라노 김소영, 소프라노 한명성이 참여하여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그냥 지나치다 자선음악회를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놓치거나 미루다, 이번엔 작정하고 찾아 나선 것이다.

 

주말의 인사동 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모처럼 흥청대는 인사동을 거리는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버스킹 공연이 시작된 인사아트프라자앞에는 발 디딜 틈 없었다.

 

2005년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열린 이목일씨의 호랑이 그림 퍼포먼스

그 장면을 보니, 오래전 그 곳에서 열린 이목일의 호랑이그림 퍼포먼스와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이남이 공연이 떠 올랐다.

 

가수 이남이씨가 노래를 부르고, 오른 쪽 아래는 전유성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김명성씨와 전유성씨 등 인사동 사람들과 축제를 즐긴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칠 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공연을 지켜보는 전유성, 이목일, 김명성씨

이날은 인사아트프라자박복신 대표를 비롯하여

만담가 장광팔, 화가 황경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보였다.

 

인사아트프자자 대표 박복신

열한 번째 맞이한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돕기 자선음악회에는

재즈의 여왕 윤희정과 친구들’, 쏘머즈싱어송 라이터,

배수영, 서혜성, 김윤경씨 등 많은 가수들이 출연했다.

 

유명 가수뿐 아니라 학생 밴드의 공연도 있었고, 전시 중인 화가 홍성룡씨가

노래를 부르는 등, 우크라이나 어린이를 돕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았다.

 

화가 홍성룡씨가 열창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적은 돈이나마  많은 분이 동참해야 하는데,

성금함이 가려, 뒤에서는 성금을 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 모자를 돌려서라도, 난민 아린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선 버스킹으로 진행되는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돕기 공연은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열린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박순아 가야금 연주회가 오는 9일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공연된다

‘가장 작은 공연장에서 가장 큰 꿈을 연주한다.’

오는 9일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열리는 박순아의 가야금 연주회

 

오는 9일 저녁 인사동 카페 ‘열시꽃’에서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54)씨의 초청공연이 열린다.

관훈재는 2012년 서울 사대문 안에 처음으로 지어진 2층 한옥으로, 2층에 '열시꽃'이 자리하고 있다.

열시꽃은  쑥차 등의 전통차와 베트남식 샌드위치인 ‘반미’ 등을 함께 제공하는 카페로

전통을 지키되 새로움을 더하는 문화공간이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 등 베트남 평화운동을 해온 이들이 함께 만든 열시꽃은

이번에 ‘아주 특별한 베트남 식탁’(아특식)이라는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직접 공수해온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나누면서,

좋은 공연을 공유하며 함께 ‘평화의 꿈’을 키워가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그 첫 번째 ‘문화 손님’이  재일동포 3세인 박순아 가야금 연주자다. 

박순아씨는 2019년 연말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노쓰코리아 가야금’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열린 수 많은 공연에서 호평 받은바 있다.

 

그런 연주자가 열시꽃이라는 인사동의 작은 카페를 찾은 이유는 뭘까?

그것은 “가야금 풍류를 일반인들에게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박순아씨는 이미 ‘어떤 가야금 연주자도 경험하지 못한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다. 

그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민족학교에 다니던 10살 때 처음으로 가야금과 만났다.

일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던 그는 금세 이 ‘민족악기’가 내는 소리에 빠져버렸다.

그는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오사카 조선고급학교 2학년 때인

1985년 ‘통신교육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진학했다.

 

통신교육생은 학기 중에는 ‘통신’으로 수업을 듣다가, 방학 때 평양을 방문해 대면교육을 받는 제도다.

박순아씨가 이런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북한에서 개량한 ‘21현 가야금’이다.

21현 가야금은 한국 전통의 5음계 음을 내던 ‘12현 가야금’을 현대 음악의 바탕인

7음계 음을 낼 수 있도록 만든 악기다. 북한은 이를 통해 ‘왕과 귀족을 위한 악기였던

가야금을 인민을 위한 악기로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박순아씨는 이후 일본에서 도쿄 조선대학교를 마친 뒤 금강산가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에야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전통예술원에서 공부했다.

일반 대학원의 석사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한국 국적을 얻기 이전까지 그는 ‘조선적’이었다. ‘조선적’은 사실 무국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의 편의를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식민지 조선 출신’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대만적’은 ‘식민지 대만 출신’을 뜻한다.

박순아씨 가족이 무국적인 ‘조선적’을 유지했던 것은 ‘통일된 조국의 국적을 갖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으나 그 소망을 접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한국 전통 가야금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앞섰기 때문이다.

 

박순아씨는 "북한의 개량 가야금은 ‘인민화’에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전통 가야금이 가진 ‘농현’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왼손으로 가야금 줄을 짚고 강약을 조절하며 본래의 음 이외에 여러 가지

음을 내는 농현은 12줄 전통 가야금 연주의 고갱이다."고 말했다.

 

박순아씨는 이 농현이 살아 있는 전통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먼 미래의 민족 통일’보다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남북 가야금 소리의

통합’이라는 꿈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재일의 가야금, 북한의 가야금, 남한의 가야금을 몸으로 익힌 유일한 연주자가 됐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택한 ‘작은 통일’이 앞으로 ‘큰 통일’을 이루는 데 하나의 거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열시꽃 공연은 그런 그에게 가야금 체험의 확장을 다시 ‘유혹’했다고 한다.

“열시꽃 공연이 ‘이제는 경험하기 힘든 조선시대 사랑방 연주에 가깝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현재의 가야금 연주는 큰 무대에서 좋은 음향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관객이 체감하는 음은 조선시대 사랑방에서 음향시설 없이

이루어졌던 가야금 연주의 음과는 또 다르다.

 

조선시대 남성들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에서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청하여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담소를 즐기는 ‘곡회’(曲會)가 자주 열렸다.

이 곡회에서 주인이나 손님이 가야금을 타는 일 또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예전 사랑방에서 진행됐던 연주처럼, 연주자의 호흡까지 느끼면서 가야금의 자연 소리를 듣는 경험은

참 신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열시꽃이 위치한 관훈재는 한옥입니다.

 관훈재가 살아 숨 쉬는 공기를 내뱉어 가야금 음을 더욱 살아 숨 쉬게 만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관객에게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가야금 체험’을 선사하는 일이고,

연주자 자신도 관객과 호흡하면서 그 ‘체험의 새로움’을 공유하는 일이다.

하지만 박순아씨가 이번 공연에서 더욱 애착을 가진 것은 ‘음악이 주는 메시지의 넓힘’이다.

2006년 남한에 온 이후, 2개의 음반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2년에 내놓은 <인터비잉>과 2019년에 선보인 <노쓰코리아 가야금>이 그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함께 존재함(Inter Being)’”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열쇳말로 한

<인터비잉>에서 그는 소외되지 않은 삶을 꿈꿨고, <노쓰코리아 가야금>에서는

북한에서 가야금을 배우던 시절에 많이 불렸던 북한 음악을 가야금으로 연주했다.

그 속에 남북을 모두 ‘고향’이라 생각하나 어떤 곳에서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박순아의 삶’을 담았다.

박순아씨는 이번 열시꽃 공연을 통해 앞으로 “이런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더욱 힘쓸 것”이라고 말한다.

 

“가야금 연주는 연주자가 경험한 삶의 이야기를 가야금 선율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은 그 소리에 묻어나는 연주자의 삶을 느끼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상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한 음을 내더라도 항상 제 삶에 바탕을 두면서 ‘책임과 도전의식’을 갖고 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념에 의한 전쟁을 경험한 나라’, 그리고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을 경험한 나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아특식’ 자리이기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이 주는 울림은 더욱 커질 것 같다.

 

박순아씨는 이날 30분 동안 4~5곡을 선사할 예정이다.

우선 12현 가야금으로 판소리 ‘적벽가’ 중 한 부분을 들려주고,

이어 25현 가야금으로 전통 산조 가락을 ‘박순아식’으로 다시 해석한 ‘흐트러진 가락’을 연주한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하는 평화의 노래 ‘어머니’를 가야금 노래로 편곡해 들려준다.

 

출처 [보도자료]

인사동은 젊은이 천국이지만, 길만 건너면 늙은이 낙원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낙원동이다.

 

그 곳은 사회와 가정에서 퇴출 당한 늙은이들 아지트다.

평생 몸 바쳐 돈만 벌며 살았으니, 놀 줄도 모른다.

 

식구들 눈치 보여 별 볼일 없이 지하철 탄다.

공짜 전철로 어디든 못 가겠나마는, 맘 편히 소일 할 수 있는 곳은 탑골공원 뿐이다.

 

탑골공원 담장에는 장기판이 줄을 섰고, 골목에는 대폿집과 국밥집이 줄지었다.

장기판에 훈수 들다 목노주점에서 시간 죽인다.

 

국밥 한 그릇에 추억을 되 세기고, 탁배기 한 사발에 왕년의 무용담이 쏟아진다.

 

그들은 우리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 아니던가?

한 때는 월남전에서 피 흘렸고, 독재정권과 싸운 사람들이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늙은이 대부분이 꼴통 보수라는 점이다.

그토록 보수정권을 지지했으나, 늙은이 복지는 항상 찬밥 신세다.

 

'거리두기로 공원 문이 닫혀도 장기판은 돌아 간다성북동 김씨가 하소연 한다.

 

마누라한테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여요.

돈 없고 힘 없으니, 벌레 취급받기 싫어 나오지요,

해장국 삼천원에다 소주 삼천원, 하루 만원이면 찍 싸요.“

 

이제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단다.

덧없는 세월 속에 인생 무상을 체감한다.

 

허리우드에 걸린 영화 간판처럼, 모든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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