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인사동도 많이 변했다.

 

화랑을 주축으로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등이 모여 있었고,

인사동 골목 골목에 똬리 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낭만과 풍류가 넘치던 곳이었다.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한참 방황했다.

인사동에 숨겨둔 애인도 없는데, 왜 틈만 나면 인사동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인사동 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남았는지 찾아보려 작심한 것이다.

 

기존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며 잡화상이나 옷가게들이 대신했는데,

이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만의 풍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아직 많은 화랑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으로 남았지만,

인사동의 추억으로 꼽을 대상은 아니었다.

 

1924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지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때 생겨난 것이란다.

 

지금은 민가다헌’, ‘경인미술관’, ‘통문관’, ‘통인가게’, 수도약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뀌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인사동과의 인연은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이나 '시인통신',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고,

찻집으로는 천상병 선생이 계시던 귀천이나 수희제’, ‘초당등이었다.

 

그리고 옛 순라꾼 터에 있던 초창기 예총회관건물이나

건국빌딩에 둥지 튼 민예총사무실에 대한 추억도 많다.

 

'민예총'창립총회에 갔다가 우연히 고향의 은사 조성국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민예총'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자리하심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림마당 민이나 꽃나라흑백현상소', ‘민사협사무실 등

들락거린 곳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골목골목 숨어있던 술집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아직 살아남은 식당은 부산식당이나 사동집이 고작이다.

 

그런 특정한 장소의 현장 보존성을 찾는다면

한때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활용했던 옥탑방 철계단이 유일했다.

 

문 닫은 지 오래된 술집 문에 쌓인 우편물이나

옛 잔재물들이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인사동다운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경인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두엽씨가 가장 인사동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사동과의 첫 만남도 사람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사동을 못 잊어 하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 그리운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인사동은 유효하다.

 

사진, / 조문호

 

 

 

며칠전 녹번동에서 뜻밖의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오래 전, 정동지의 ‘어머니의 땅’ 전시 때, 김남선씨가 준 선물을 찾아 낸 것이다.

‘수정방’이라는 중국술인데, 50도가 넘는 독주였다.

 

둘다 몸이 아파 마시면 안 되지만 '죽어도 고'를 외쳤다.

좋아하는 음악 들어가며 재미있게 보낸 분위기 탓일 수도 있겠으나

너무 행복해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다.

 쪽 팔려 평생을 말 못한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며...

 

그 날밤에 찍힌 사진을 보니, 아무래도 간이 배 밖에 나온 것 같다.

집에서 안되는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

 

기어아 술병 바닥을 보고서야 쓰러졌는데, 

취하여 기분좋게 죽자고 명세에 명세를 했건만, 그만 잠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가뿐했다.

그 정도 마셨으면 속이라도 쓰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 맛본 '수정방', 정말 쥑이더라.

"고맙게 잘 마셨어요. 남선씨!"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주말은 뜻밖에 손님이 찿아 와 모처럼 인사동의 봄을 즐겼다.

마산 사는 후배 변형주씨와 인사동과 녹번동,

동자동 쪽방촌을 두루 돌아다니며 봄날의 회우를 기념했다.

 

지난 3일, 동자동에서 늦은 아침 밥을 준비하는 중에

유목민 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엊저녁에 변형주씨가 왔는데, 함께 점심이나 먹자고 한다.

손님 접대에는 대마불사주가 좋을 것 같아 녹번동 가자고 했다.

 

정영신씨는 지방 촬영을 떠나버려,

인사동 '유목민'부터 들려 김치찌개 한 냄비 끓여 가지고 간 것이다.

녹번동 좁은 탁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옛이야기로 추억을 더듬었다.

 

변형주씨는 40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한탄한다.

정말, 나이가 들수록 어찌나 세월이 빠른지, 총알 같다.

 

말년을 자연과 함께 지내려고 지리산에 집 지을 준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지리산 집들이 가서 한 번 취할 꿈도 꾸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바닥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다들 밥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치매환자들인가?

 

전활철씨는 영천시장 장 보러 가는 틈에, 둘이서 동자동 간 것이다.

숨 막히는 좁은 공간이지만, 그곳만큼은 흡연구역이 아니던가?

얼마나 줄담배를 피웠는지, 담배 연기에 질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한때 변형주씨를 인사동 골목대장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그는 괴물로 통한다.

그 괴물의 실체를 찍은 오래전 사진을 찾아 본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된 10년 전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인사동에서 찍은 변형주씨 알몸사진은 실제 크기로 뽑았으나

정선 작업실 화재 때 타버려 원본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다.

 

쪽방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목민’에 들려 부족한 술부터 보충하고 싶었으나,

술시가 일러 인사동 돌아다니며 봄바람 맞은 것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나들이객들이 많았는데,

북인사마당’엔 부채춤이 봄꽃처럼 피었더라.

 

오랜만에 괴짜 고 헌씨를 거리에서 만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가로등만 찍는 사진가였으나,

이젠 사진과 작별했는지 카메라 잡은 것 본 지 오래되었다.

 

버스킹에 나선 인사동 단골 뮤지션들의 연주도 각양각색이었다.

一心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은 변형주씨가 샀다.

 

인사아트프라자에 들려,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묶은 동백이 피엄수다도 보았다.

외세에 의한 동족 살상의 끔찍한 사건을 떠 올리며 치를 떨었다.

 

인사동 수도약국앞에서 변형주씨 아들 변도영군을 만났다.

본 지가 오래되어 낯설었으나, 붕어빵 같은 모습은 여전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다시 음악에 매진할 것이라 했다.

 

다 같이 유목민으로 갔더니, 그때사 준비가 끝났는지 문을 열어 놓았다.

부자간 대작하도록 남겨두고,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겼다.

 

사진을 빨리 보내 달라는 복에 없는 원고청탁에 바쁜 걸음 쳐야 했다.

두 시간이나 걸려서야 돌아왔더니, ‘유목민은 이미 흥청댔다.

 

한쪽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이하씨 일행이 술판을 벌였고

윗쪽에는 신단수, 장홍순씨 일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전에서 돌아온 정 동지도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 저 자리 끼어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 따라 전활철씨 더러 노래 한곡 하라며 장경호씨가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기타에 꽂아 주기도 했다.

 

전활철씨 노래와 기타 솜씨야 익히 알지만,

록과 부루스가 주특기인 도영이 기타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들어 본 도영이 연주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곡은 잘 모르겠으나, 슬픔과 한이 배어있는 부루스였다

 

장음계에서 3도움과 7도움을 반음 낮춰 연주하는 블루스가

약간 늘어지는 박자이긴 하지만,

불루스 특유의 슬픔과 한이 잘 배어 났다.

잔잔한 애드립 여운이 촉촉이 적셔주는 멋진 연주였다.

 

정동지는 벌써 무더울 여름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올여름엔 꼭 에어컨을 살 것이라며, 나더러 말리지 말란다.

돈도 돈이지만, 그 비좁은 집에 어디다 놓을 것인지 모르겠다.

신단수와 최석태씨까지 나서서 에어컨 살것을 부추기며, 극빈자 모금까지 하겠단다.

 

끝날 시간이 되었는지 한 사람 두 사람 물러나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안 쪽에 있던 '학고재' 우찬규씨가 우리 자리 술값까지 계산해 버렸다.

더 마실 형편도 되지 않는데, 잘 모르는 화가 한 분은 골든 벨을 누르겠다고 큰 소리다.

변형주씨는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도영이 부축을 받아 여관 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틈만 나면 인사동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은 사람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인사동이 인사동 다워 지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백화점 떨이매장으로 변한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 전경

인사동의 복합 문화 공간 코트돈에 예술이 밀려나는 인사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반드시 지켜내야 할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예술가들이 이 공간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돈에 눈먼 임대 업자가 '땡처리' 물건 파는 곳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생긴단 말인가?

 

땡처리 매장으로 바뀐 전시장

지난해부터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 건물 운영을 둘러싼 분쟁은 계속되어 왔다. 임대업체가 임대기간이 완료되지 않은 코트를 내보내기 위해 용역 깡패를 동원하여 건물 내부를 무단 철거하고, 전시장을 지키는 예술인들에게 물대포를 살포하는 횡포까지 부리며 법적 논쟁으로 비화된 사건이다.

 

지난 해 용역업체에서 테이블을 밀어내고 차를 밀어넣는 장면

임대업체는 수익이 안 나는 문화 공간 대신 주차장과 의류 매장을 원하고 있고, 임대자는 "예술인들이 가꾼 공간을 임대 만료기간까지 지켜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참여 예술인들이 힘을 모아 인사동의 문화 공간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며 함께 싸우는 실정에 있다.

 

차를 진입시켜 문을 걸어 잠근 전시장에 텐트를 쳐 놓았다.

인사동 복합 문화공간 코트(KOTE)는 예술인들이 공유하는 작업실로, 전시를 비롯하여 공연이나 강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이다. 때로는 광고나 방송 촬영 세트장이 되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2층의 코트랩은 예술인 작업 공간과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2층의 코트랩 작업공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1층에서 전시하는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전을 방해하려고 자동차 두 대를 집어넣어 문을 잠가 놓았는데, 지난 주말 가보니 '백화점 철수상품을 정리'한다는 땡 처리 매장이 열리고 있었다.

입구 매대에 진열된 양말과 옷

길 앞으로 나온 매대에는 옷과 양말이 걸려 있고, 가게 안에는 가방, 등산복, 지갑과 건강식품 등 잡다한 물건들을 가득 펼쳐놓았더라.

 

2층 카페

분쟁의 두 점유 주체가 건물 운영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은 지는 오래 되었다. 한쪽은 수익을 내야 한다며 예술인들을 쫒아 내려하고, 다른 쪽은 계약 만료까지 예술인들이 가꾼 공간을 지켜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공간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되자 용역 깡패까지 동원하여 강제 철거하는 폭력 사태까지 벌인 것이다.

 

2층 작업공간 벽에 걸린 사진가 김용호의 작품 '신여성'

코트 건물은 지난해 사망한 김문기 상지대 전 총장 소유인데, ㈜CAAMC 최경순 대표가 10년 임차 계약을 맺은 곳이다.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는 최 대표는 삼년 전부터 줄라이파트너스 안주영 대표에게 임차 대행권 및 운영권을 모두 넘겼다. '코트'라는 이름도 안 대표가 '경계의 뜰에 핀 꽃'이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코로나 전염병이 시작되며 인사동 상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렵사리 예술 공간을 지켜왔지만, 최대표가 돈 되는 사업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임차권 분쟁을 벌인 것이다.

 

왼편 골목 벽에 그려진 벨기에 어반 아티스트 드니 메이어의 코트 커뮤니티 벽화

안 대표 측은 지난 111일 서울중앙지법 영업방해금지가처분 소송 1에서 승소했다. 최경순 대표가 안주영 대표의 임차대행권에 따른 권리행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 최대표는 안 대표에겐 임차 대행권만 있을 뿐 자체적인 운영 권한이 없는데, 건물주와 임차 계약한 최씨 이름으로 임대 업무를 하지 않고, 안주영 대표 이름으로 한 게 불법이라고 맞서고 있다.  그리고 안대표가 임차료를 내지 않아 명도 소송이 진행 중인데다, 나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며 땡처리 매장을 끌어들인 당위성을 강조했다.

 

텅빈 공간에 남아 있는 의자 하나가 말 걸고 있다.

그동안 ‘코트에선 화가, 사진가, 산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창작활동을 해 왔다.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어울리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며, 코트의 정체성은 '만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예술가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하다 중단된 별관

그러나 지난해 11월 최 대표 측이 코트 별관을 주차장으로 만들기 위해 철거를 시작하자, 갑자기 쫓겨나게 된 예술인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년 반 동안 코트에서 노력해 온 결과가 물거품이 될 지경이기도 하지만, 코트처럼 저렴하게 대관할 곳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몰린 예술인들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았다. 예술인들이 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문화제를 여는 등 연대 활동을 벌인 것이다.

 

전시공간 구석에 남아 있는 설치물들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협업하고 싶은 욕구도 갖게 되는데, 미술이 음악 이나 다른 매체와 어우러지니까 확장성이 생겨 새로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구석 공간을 지키는 작품들

이처럼 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던 데에는 안 대표의 노력이 컸다. 안 대표는 예술가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 대관료를 제대로 받지 않고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더러 지금의 분쟁 상황을 업자들의 이권 싸움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안 대표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맞선다면 예술가들도 이렇게 발 벗고 나서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공간의 설치물

지자체나 국가에서 지원 받는 다른 문화 공간들은 대부분 제도화되어 규정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지만, 민간 공간은 상업화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코트는 민간공간으로서 제도화되지 않고 상업화되지 않은 전례 없는 공간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지난헤 코트 1층 전시실에서 열린 최소리의 두드림으로 그린 '겁' 전시장 풍경

지금은 코트랩 입주 작가가 40여 명에서 20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건물을 둘러싼 갈등으로 상당수 예술가가 떠나긴 했지만, 새로 입주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깨어진 틈 사이로 꽃이 피다'라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그리고 코트에서 벌어진 폭력과 그에 저항하는 예술인들이 연대하는 실상을 소재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 "경계 속에 핀 꽃"도 제작중이라고 한다.

지난 해 포크레인이 별관을 부술 때부터 예술인 20여 명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앞으로 코트를 지켜준 작가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공간을 개방하여 예술에 대한 지평을 넓히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지난헤 코트 1층 전시실에서 열린 최소리의 두드림으로 그린 '겁' 전시장 풍경

전문가들은 코트 사태와 같은 현상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일이라며, 예술 공간은 시장 질서에 맡기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문화공간을 지탱해 가려면 지자체나 기업 등의 지원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애초부터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돈 욕심에 눈이 어두워 문화공간을 만들었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예술가들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는데, 코트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그런 대표적 사례라고 말한다.

 

지난 해 여름 '코트' 별관에 전시된 사진가 성남훈의 작품

또 인사동 특성상 건물이 역사적 분위기에 맞게 운영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코트가 있는 자리는 600년 역사의 피맛골과 독립투사들이 묵었던 '호해여관'과 '조선극장' 터가 있던 곳이다. 

서울특별시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백화점 철수 상품 매장'은 인사동 권장 업종은 아니지만, 제한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사동 가로 변 지역에서 조금 벗어나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 공간을 지키고 있는 설치물들

그렇지만 예술가들이 모인 장소에 '스토리'가 있는 경우라면 더욱 보존되어야 한다. 예술이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질에 기여해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돈에 변질해 가는 인사동을 지켜야 할 예술가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법이나 제도를 고쳐서라도 기필코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코트 옥상에 전시된 작품, 액자의 녹물이 흘러내린 자욱이 세월의 의미까지 더해준다.

이제 예술 공간 보호를 위해 공공이 적극 나서 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예술인들이 연대하여 잘 못된 현실과 싸워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인사동 에서 유일한 예술 복합공간을 지켜는 일이야 말로 예술인들의 마지막 자존감이 걸린 문제다.

 

사진, / 조문호

 

  

삼일절 전 날 밤은 고향 생각에 잠을 설쳤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고장이다.

그래서 삼일절이 다가오면 옛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기개는 대단했다.

그 독립정신을 되 세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영산삼일문화제'다.

옛 부터 정월대보름이면 즐기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를

60년 전부터 시작된 삼일문화제에 끌어들인 것이다.

 

삼일문화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 외에도

구계목도, 문오장, 연등놀이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를 주축으로 3일 동안 치루어 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진영을 나누어 벌이는 줄다리기다.

지금은 고향친구인 신수식씨가 이어받았지만, 조성국선생의 열정으로 재현된 민속놀이다.

 

60년 전 삼일문화제가 처음 열릴 때는 중학생 시절이다.

그 당시 부친의 친구끼리 동부와 서부 대장을 나누어 맡았는데,

적장이 된 후로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지금의 대선 판처럼 추잡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동부의 거점이 되어 며칠 동안 풍물패 술과 음식 대느라 잔치집처럼 북적였다.

 

 줄다리기도 지금처럼 학교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다.

장수들이 말 위에서 칼춤을 추며 진영을 지휘했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터지는 군중들의 함성과 자욱한 흙먼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곁 줄이 끊어져 넘어지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기도 했으나

승부가 판가름 나는 긴박한 순간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고향을 등진 후에도 삼일절이 되면 찾았으나, 카메라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는 낭패도 당했다.

삼일문화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진인들이 몰려오는데, 카메라를 노리는 전문절도단에게 털린 것이다.

전야제가 있던 날, 고향친구 조대권을 만나 다방에서 차 한 잔 하고 나오니

카메라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사진인들이 장비를 차에 두고 간편한 카메라만 휴대하는 습관을 노린 것 같았다.

 

파출소에 카메라 분실을 알리며 사진인에게 카메라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부탁 했는데도

그 이튿날 행사장에서 세 사람이 카메라가방을 도둑맞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분실한 사람 중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진가였는데, 나처럼 오래된 차는 차문을 쉽게 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는 좋은 차는 차 유리를 깨어 훔쳐 간 것이다.

 

내가 도둑맞은 장비만 해도 중소형 카메라 바디 세 개에 달린 갖가지 렌즈를 합하면

분실 액수가 만만찮은데, 그 속에는 빌려 온 핫셀브라드 망원렌즈가 있어 더 걱정되었다.

그 외에도 당시 '이미지 라이프'라는 취재대행업을 했는데, 부탁받은 일 때문에 난감했다.

오래 전 찍어 둔 사진으로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난다.

 

근 이십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메라를 모두 잃었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메라를 잊어버린 후로는 삼일문화제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 대신 삼일절만 되면 탑골공원에서 선열들을 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늦잠에 빠져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오전10시가 가까웠다.

지하철 타러 서울역으로 달려 갔으나 정신없이 타다보니 반대방향의 열차를 탔는데,

남영역에서 내려 갈아타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종로3가역까지 몇 구역 되지도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은 끝났는지 공원은 텅 비었고,

탑골공원 주변에는 민족지도자대회나 시민대회라는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명을 돋우는 풍물패를 찍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씨를 만난 것이다.

 

그 곳에서 최석태를 만나기로 했다지만, 목부터 추기자며 인사동으로 옮겼다.

술시가 이른지 ‘유목민’도 ‘사랑채’도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둘 다 아침을 먹지 않아 ‘부산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시원한 생태탕으로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그날따라 장경호씨가 술을 아꼈다.

하기야! 매일 같이 마시는 술을 이른 시간부터 취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최석태씨가 나타났다.

 

최석태씨 따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즐거운 찻집’이라는 처음가는 곳이었다.

술 마시다 차 마시는 별난 자리지만, 아마 그 곳에서 우문명씨를 만나기로 한것 같았다.

그 날 술값과 찻값을 모두 최석태씨가 계산했지만, 술값은 아깝지 않은데 차 값은 왜 그리 아까울까?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그때 사 전활철씨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술도 땡긴다고 마구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계산해 마셔야 했다.

하루종일 버텨내기 위해 막걸리를 아껴 마신 장경호씨가 이해되었다.

 

‘유목민’ 전활철씨 말로는 가게 문 열 때 들어와 문 닫을 때 간다지만,

술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그런데, 장경호씨와는 왜 매번 길이 엇갈렸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을 사랑한다는 인사동사람은 많지만, 다들 말로만 사랑한다.

얼마 전 ‘나무화랑’에서 ‘인사동이야기’ 전시할 때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경호 처럼 인사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사동하면 천상병시인 떠 올리듯, 먼 훗날 화가 장경호 이름을 떠 올릴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송현동 부지에 인사동 잇는 지름길 조성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

이건희 소장품 기증관을 비롯한 문화공원으로 조성

 

 

문화공원으로 조성될 송현동 부지 / 사진: 서울시제공

서울시는 올 하반기부터 오랜 기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방치되어 온 송현동 부지를 시민들에게 임시 개방할 계획이다.

경복궁과 북촌, 그리고 인사동을 잇는 송현 지름길을 조성하기 위해 서울시가 팔을 걷어 부쳤다. 그동안 경복궁과 북촌에서 인사동을 오가기 위해서는 송현동 부지 담장을 빙 둘러 이동해야 했다.

지난해 대한항공, 한국토지공사(LH)와 3자 매매·교환 방식으로 서울시에서 송현동 부지를 매입하여, 시민들이 다양한 문화예술 경험과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송현동 부지를 문화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도 밝힌바 있다.

특히 송현동 부지에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보존·전시하는 '이건희 기증관'(가칭)을 송현동 부지 내에 대지면적 9787㎡ 규모로 건립할 계획인데,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제설계공모를 거쳐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사추진 이전에 송현동 부지를 시민의 공간으로 활용 가능한 창의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모 하겠다”고 밝혔다. 공모는 일상의 휴식과 비일상의 문화예술 경험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 조성을 위한 창의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된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오는 3월 8일까지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선정된 아이디어는 올 하반기까지 진행되는 공사 내용에 반영할 예정이다. 심사는 예비심사 후 본 심사를 거쳐 20여점을 선정하고, 총 500만원 상당의 상금 중 최우수작은 100만원이 수여된다. 당선작은 3월18일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다.

​홍선기 서울시 공공개발기획단장은 "송현동 일대를 광화문, 주변 문화 인프라와 어우러지는 문화 명소로 조성하기 위한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공모전을 마련했다"며 "지역에 특성에 맞는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혔다.

글 / 조문호

지난 주말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한산했던 인사동 거리가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이 나왔더라.

 

술 마시기는 좀 이른 것 같아 '나무화랑'부터 올라갔다.

전시장엔 용해숙씨의 '유토피아 삼경'이 열리고 있었는데,

작가를 비롯하여 최석태, 김구, 김이하 시인등 여러명이 있었다.

 

전시는 특정 장소를 입체 거울을 통해 재구성한 사진전인데,

일곱 개의 삼각 피라미드로 구성된 입체 거울이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로는 거울 같지만, 잘 가공된 스테인리스였다.

 

가로 3m,·세로 1m의 대형 설치물이라 전시장에 올릴 때 고생했겠더라.

전시하는 사진이 각진 거울의 반사를 통해 태어났으니, 설치물 자체가 작품의 모태인 셈이다.

 

작가는 최석태씨에게 작업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반사된 다각도의 이미지가 장소의 고유성을 허문다는 것 같았다.

 

작가 용해숙씨를 처음 보았는데, 대단한 열정을 가진 여장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주목해 볼 작가로 생각되었다.

 

법당 단청을 거울에 반영시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했는데,

공간을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 같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으로 기록의 매개인 사진마저 무위라는 걸까?

사진이 폭 넓게 활용되며 사진 본연의 목적에서 점차 멀어 간다는 씁씁한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초저녁인데도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좀 쌀쌀했지만, 담배 피우기 좋은 골목에 상을 차렸다.

 

안쪽에서 마시던 김태영, 이승철 시인, 전상기 문학평론가 등

몇몇 분들이 담배 피우러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최석태, 김구, 김이하씨도 전시장에서 왔으나 자리가 없어 ‘사랑채’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김태영씨가 ‘이즈’에서 그림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주었다.

시간이 늦어 볼 수는 없었으나, 전시 리프렛과 새로 펴낸 시집

‘버드나무 버드나무 흰 그림자’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집은 읽을 수 없었으나, 리프렛에 실린 그림은 볼수 있었다.

그림에 환영어린 몸짓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흐릿한 붓질에서 인간의 불안감이나 삶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도 고개 내밀었다.

 

그 날은 ‘유목민’과 ‘사랑채’를 넘나들며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뒤늦게는 '사랑채'에 안원규씨와 우문명씨도 나타났다.

여기저기 옮겨가며 마셔 그런지 주량을 한참 초과해 버렸다.

 

필름이 끊겨 어떻게 돌아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며 그 날 방기식씨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와중에 선물 받은 김태영씨 시집을 흘리지 않은 게 신통했다.

 

속은 쓰렸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시집부터 읽었다.

김태영씨 그림과 시의 연관성이 궁금했는데, 공통점이 보였다.

 

 

첫장에 실린 ‘만종’이란 제목의 시는 이러했다.

 

“묻지도 않고

스포츠로 민 머리

손수 감겨주고

뽀드득,

물기를 훔친다.“

 

‘잠꼬대’란 시는 더 난해했다.

“비단길 흰 허벅살 한 입의 사과즙”

 

‘즉물성의 감각, 즉물성의 형이상학’이란 제목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전상기씨는 김태영시의 불친절함을 이렇게 말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전봉건의 초현실주의시, 아니면 김종삼의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감흥을 시화한 방식에 견준다면 어떨까. 예의 없고 불친절하며 뜬금없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 시를 보노라면 김태영의 시가 어떨지 감이 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시적 화자의 시작 당시의 생각과 감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고 했다. 즉흥성과 즉물성의 감각을 이미지화하는 것, 다시 말하면 거기에 집중하는 미세하고 예리한 감각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것이 김태영의 시작 목표라고 적고 있다.

 

시어가 잠꼬대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어를 나열시킨 무슨 암호 같았다.

김태영의 시는 세심한 독해력이 요구되었다,

 

‘고아’

 

​엄마는 어쩌자고

뻐꾸기 둥지였을까

나는 삐뚤빼뚤

도대체 천사는

언제까지나 유구할까

 

임동확 시인은 김태영의 시집에 ‘모순과 소퉁의 시학’이라는 추천사를 썼고,

홍일선 시인은 “천길 나락 ‘절벽’ 속에 피워낸 만다라 시편”이라는 글을 썼다.

요즘 작품들은 너무 난해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설날을 하루 앞둔 31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집을 방문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차 들렸는데, 대접할 음식이 마땅찮았다.

설날 세찬과 함께 마신다는 도소주는 없으나 대마불사주로 목을 달랬다.

 

이년 넘게 어렵사리 가게를 끌어가는 그로서는 빨리 코로나 역병이 끝나고

정상적으로 영업 하도록 해주는 것이 새해의 바람일 것이다.

만사형통을 기원했지만, 다들 나이가 들어 건강이 문제다.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연식이라 술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활철씨는 당뇨가 심해 술을 멀리해야하지만, 술장사가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술만 마시면 숨이 가빠 정신을 못 차리지만, 거절할 줄 모른다.

그러나 혼자서는 마시지 않고 주량도 점차 줄여나가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설날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가까운 분들과 술 한 잔하기로 했다기에 나도 가겠다고 했다.

활철씨가 시장 보러 가야한다며 일어나기에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했는데,

자고나니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으슬으슬 추웠다.

감기 같았지만, 불길한 생각도 들어 온 종일 누워 뒤척였다.

 

유목민에 가겠다고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오후에야 몸을 추서려 인사동에 나갔다.

좀 이른 시간이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한복 입은 사람은 커녕, 거리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 전시장만 기웃거리다 유목민으로 발길을 옮겼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담배 피우러 나온 정영철씨가 멀리서 반가워했다.

오후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목민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영철씨와 필립, 두 사람 뿐이었다.

여지 것 약속 없이 술 마시러 나온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입구에 자리 잡아 전활철씨와 술 마시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어제는 몸이 아파 오늘 왔다니까,

자기도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 안원규씨 에게 맡겨두고 잤다는 것이다.

이인섭선생과 장경호씨 등 몇 사람 나오지도 않았다며

어제 먹다 남은 갈비 살이 있다며 한 접시 구워냈다.

 

얼마 전 김홍성씨가 페북에서 궁금해 한, 적음의 산문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래 전 김홍성씨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시집 저녁에가을밤의 춤만 내고 산문집은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적음의 정리되지 않은 많은 원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했다는데,

유목민에 메달리다 보니 출판에 관한 일은 손댈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그 일을 맡아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마침 가을밤의 춤표지에 사용된 신준식의 담뱃불 그림 속에

적음 육필로 쓴 파적이란 시가 적힌 작품이 벽에 붙어 있었다.

김홍성씨 말처럼, 적음의 음모정렬체가 또렷했다.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 '파적' 부분-

 

두 사람 다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적음은 암자에서 술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신준식은 술이 취해 길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아무리 운명의 장난이라지만, 어찌 이리 기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사동 이야기사진전 이후의 불편한 심정도 털어 놓았다.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한라산을 두 병이나 깠는데, 손님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여덟시 반 밖에 되지 않았으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이년 넘게 끌었던 코로나가 주당들의 음주문화까지 바꾸어 버렸다.

처음 보는 나야 황당했지만, 활철씨는 익숙한 듯 자리를 치웠다.

 

나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여지 것 이른 시간에 술 취해 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하릴없이 인사동 밤거리를 방황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흥타령이 잠잠한 인사동을 들썩였다

 

그런데,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실수를 저질렀다.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마스크를 쓸 수가 없는데,

대중교통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는가?

경노석 구석자리에 앉아, 몰래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세상에! 숨 못 쉬면 죽는 것 아닌가?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산소호흡기 달린 마스크는 나오지 않는가?

정초부터 저승 문턱에 갔다 온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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