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20일 인사동 ‘코트’에서 민주당 이재명후보 공약발표회가 있었다.

"문화예술인에게 연간 백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공공임대주택 보급을 확대하겠다"는 등의 귀가 번쩍 뜨이는 공약을 했다.

그리고 "국가 재정에서 문화예산 비중을 현재보다 두 배 이상 더 높게 확대하겠다"며,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대폭 확대해 문화컨텐츠 세계 2강으로 우뚝 서겠다"고도 말했다.

 

이외에도 전국 기초단위 지방정부에 '작은미술관'과 '작은영화관'을 건립하고,

전국 3501개 읍면동마다 문화마을을 조성하며,

청년 문화예술인에게 5년간 지원 프로젝트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등의 문화정책을 공약했다.

그 공약이 모두 현실화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 예술가의 삶이란 찢어지게 가난하다.

오죽하면 굶어 죽는 작가까지 생겨나겠는가?

자기가 좋아 선택한 예술인데 왜 국가가 도와주느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으나,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수입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정을 공약으로 내 세운 후보는 이재명 후보가 정부수립 후 처음이라니,

그동안 예술가는 국민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놓은 문화예술 정책들이 한꺼번에 다 실행하기는 어려우나

년 차적으로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백범 선생께서 말씀하신 문화강국 정치를 추구하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날 전주의 서예가 여태명씨가 ‘문화강국’이라는 서예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글/ 조문호, 사진 / 여태명씨 페이스북에서 스크랩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와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을 했다.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이 난리 쳐들어 온 것처럼 시끄러웠다.

조계사에서부터 안국역까지 버스가 줄지어 섰고,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 인사동을 울렸다.

 

‘조계사'에서 정청래의원 ’봉이 김선달‘ 발언에 반발하는

승려대회가 열리는데, 오천명여 명이나 몰렸다고 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방역규칙을 어겨가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광화문광장에서 규탄대회하다 교도소까지 전전한 전광훈 목사 패거리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정치에 까지 개입하려는 못된 짓거리다.

‘공수래 공수거’라며 무소유를 설법한 부처의 말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행여 아는 중 만날까 두려워, 얼른 약속장소로 옮겼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그 때까지 문이 잠겨있었다.

‘유담‘에서 기다리는 오세필씨를 불러내어 밥집부터 갔다.

어디가 좋겠냐고 물어왔지만, 당신이 정하라며 한 발 물러났다.

나야 끼니를 때우는 식이지만, 그는 맛을 즐기는 미식가가 아니던가?

 

속으로는 ‘툇마루’ 된장비빔밥이나 ‘부산식당’의 생태탕,

아니면 ‘나주곰탕’이나 ‘여자만‘ 정식 등 여러가지를 떠 올렸지만,

생각지도 못한 북인사마당 코너에 있는 ’조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한정식선생 따라 한 번 간적이 있는데, 일식 풍의 분위기도 별로지만,

돌솥 밥 하나에 만 칠천 원이라 다른 밥집에 비해 비샀다.

 

그리고 실내조명도 조도를 낮추어 어두침침했다.

밥을 비볐으나, 무슨 맛인지 아무 맛도 모르겠더라.

입맛이 간 것인지 음식 맛이 없는 건지, 분간 못한 채 먹어 치웠는데,

다 먹고 보니 양념장도 넣지 않고 비벼 먹은 것이다.

이제 치매환자나 다름없어 실수를 밥 먹듯 한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 마시러 ‘유담’에 다시 들렸다.

그때사 주인 마담이 타주는 달달한 커피 맛을 즐겼는데,

오세필씨가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형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는데, 그 때가 어디 있을 때요?“

아마 돈 벌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돈이 많으면 잘 나가는 걸까?

40여 년 전 ‘한마당’ 시절을 떠 올리며 케케묵은 추억을 들먹였는데,

아마 그 운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돈벌레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때 마침 장보러 갔던 전활철씨가 등짐을 지고 ‘유목민’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이런 저런 안부만 전하고 헤어져야 했다.

나도 하는 일 없이 바쁘지만, 전활철씨는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오세필씨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인사동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건물 벽을 임대한 노점상은 늘어났고, 아직 빈 점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주와 임대자가 분쟁 중에 있는 인사동 문화공간 ‘코트’ 건물 전면에는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전시를 방해하는 자동차 두 대가 버티고 있었는데.

천으로 덮어 놓았다.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악덕 지주를 정말 단죄할 수 없을까?

​문화예술을 짓밟는 '코트' 폭력사건만은 절대 승복하선 안 된다.

예술과 돈의 한 판 싸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래전 '인사문화마당'에서 찍은 포도대장과 순라꾼들

인사동은 추억을 먹고 산지 오래다,

40여 년 전 예총회관이 있던 인사문화마당 자리는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순라꾼들이 인사동 거리를 돌며 조선시대 풍정을 연출했으나,

재개발로 파헤쳐지며 지하에 묻힌 유물만 쏟아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은 문화마당만 바뀐게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인심까지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아무런 대책도 관심도 없다

왜, 나만 못잊어 한물 간 인사동 노래를 줄창 부르고 있을까?

아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추억의 창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전 결산이 안 된다는 노광래씨 연락을 받아서다.

홍수표씨가 사진 값을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는 것이다.

사진 전해 준 사람에게 주거나 계좌이체하면 될 텐데...

 

해가 바뀌었으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인지 인사동 거리는 한산했다.

홍수표씨를 만나러 인사동14길 골목을 들어서서 ‘신궁장 모텔’ 앞에 섰는데,

 ‘지리산’ 건물이 사라진 골목이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쪽 면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새 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된 자리에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나, 변하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SK허브빌딩 쉼터인 ‘개천정’위로 솟은 앙상한 가지들이 스산한 겨울풍경을 연출했다.

‘개천산업’ 회장실에 들어가니 홍수표씨 혼자 있었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 한번 보자는 심사였다.

 

홍회장은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고등학교 제자였고, 나와는 동갑내기다.

젊은 시절 법원 서기로 일했으나 월급 많이 주는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단다.

행원 공채에 응시해 인사동 태화관 자리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홍회장 사무실은 흡연이 가능한 보기 드문 장소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연신 줄담배를 피운 것은 흡연자의 설움에서다.

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담배 피우는 사람만 만나면 동지애를 느낄 정도인가?

 

그곳을 나와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나,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대감집’으로 바뀐지 오래된 옛 실비집 주변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실비집에서 만났던, 먼저 떠났거나 소식 끊긴 사람이 그리워서다.

 

적음 시집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천재시인이라며 웃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민폐를 가장 많이 끼친 땡초 적음이었다.

‘월간 빠’란 이야기로 온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했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잡지지만, 자기가 주간이고 날 더러 조대표라며 수시로 깔깔거렸다.

서울만 오면 실비집에 죽치며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실비집에서 술 마시다 잠든 적음스님

그런 그가 갑자기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한 번 웃자며 ’일소암‘이라 이름붙인 그의 방을 들여다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오래 전 찍어 준 초상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고,

숨진 지 며칠이 지났는지, 바닥에 시신 썩은 자욱이 선명했다.

벽에 목을 기대어 기도가 막혀 숨진 것 같았으나,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의 시 처럼 너무 그리워서 이승을 떠났을까?

 

적음스님이 열반한 자리

저녁에 / 최영해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사진기자 김종구, 소리꾼 김민경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상을 하직한 인사동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마는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낄낄거리며 인사동 술꾼들 물주 노릇 톡톡히 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인사동 밤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이청운과 강용대

별을 그리다 별나라로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긴 이근우씨와 실비대학 총장님

 

이근우와 벼평모씨가 어울려 '레떼'에서 춤을 추고있다.

인사동이 그리워 ‘서울로 서울로’ 노래 부른 미국계신 최정자시인,

 

최정자시인 좌우로 김정혜씨와 이점숙씨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만 / 최정자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눈오는 인사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다 바뀐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시인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규일, 최정자, 박이엽, 채현국선생)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https://youtu.be/fiqWyTLmWEc

 

 
-사진평론가 이광수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글-
 

사진은 그 본질이라 부르든지 속성이라 부르든지, 그 성격이 참 다양하다. 그런데 그것을 곰곰히 곱씹어보면, 그 여러 성질들이 서로 충돌하고 모순적이기까지 해,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은 각자 '꼴리는대로' - 이 글의 주인공인 조문호 선배 상투어임 ^^ - 받아들일 수 있는 참으로 오묘한 매체다. 그렇게 모던한 것이 그렇게 포스트모던 하다니...그 여러가지 것들 가운데 출발선상을 기준으로 보면, 사실에 대한 모사인데, 사진가의 주관으로 '모사'를 하니 재현representation이 되고, 결국 기록의 문제가 된다.

 

기록은 결국 기억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슬픈 것이 되고 사라진 것에 대한 비탄 내지는 찬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제시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최대한 사진가 자신의 주관이라는 기름기를 쫙 빼버리고, 가능할 수 있는 데까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그저 그런 평범한 이미지를 남겨 많은 사람들이 그 기억의 늪으로 쉽게 빠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사진가 조문호 선생은 바로 이렇게 사진을 찍는다. 기름기 없이, 사람의 눈을 중심에 놓고...
 
 
그리고는 여러 사람을 함께 참여하게 한다. 기억의 눞에 같이 빠지자는 것이다. 사진은 한 장 한 장 재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를 토대로 하여 사람들에게 제시presentation하는 일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가 조문호가 택한 제시 방법은 강민, 김명성, 김진하, 정영신 등 인사동에서 함께 지냈고 지내는 그리고 앞으로도 지낼 사람들 글을 싣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인 것은 그곳을 스쳐간 그리고 지금도 스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을 찍는 사진가 조문호의 작품은 볼 때마다, 읽을 때마다, 그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뭉클해진다. 그가 사진에 대해 취하는 태도 때문이고 그 태도가 아마도 그가 "인간은 악이다"라는 테제에 나하고 백퍼 일치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를 사유하고 세상 일에 참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서울을 가지 못해 막걸리 한 주전자 같이 못 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선배님 축하드리고, 이대표 좋은 책 [인사동 이야기] 다시 내주셔서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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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귀천’ 골목 깊숙이 자리 잡은 음식점 ‘지리산’이 돈에 밀려났다.

얼마 전부터 문 닫힌 지리산을 철거하기 위해 가림막을 쳐 놓았는데, 며칠사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놀부집 같았던 지리산 한옥이 사라지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서쪽 면이 훤하게 드러난 것이다.

다시 신축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왼쪽에는 박정희정권 때 세운 수운회관이 천도교당을 위협하듯 내려다보고 있는데,

수운회관 건물은 이곳에 들어설 수 없는 높이의 건물이었다.

역사의 흐름을 증언하는 두 건물이 대비를 이루고 있으나, 돌이켜보면 참 혼란스러운 역사였다.

천도교중앙교당은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기울어 진 교세와 함께 건축물의 가치까지 기울어진 셈이다.

 

그런데, 지리산이 철거된 자리에는 어떤 건물이 들어설까?

이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다시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점점 변해가는 인사동의 현실이 암담할 뿐이다.

하기야! 인사동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바뀌는 게 세상이치가 아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인사동 이야기’는 11년 전에 나와 절판된 사진집이다.

 

인사동이야기 / 250페이지 / 25,000원 / 눈빛출판사

 

 개정판으로 나온 지가 한 달이 채 못되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풀어놓은 인사동 이야기와

인사동을 추억하는 곳곳에서 찍은 입상사진으로 엮었다.

 

아래는 책에 실린 내용이다.

 

서문 / 인사동 친구들 / 한정식 사진가

 

나의 인사동 이야기 / 고) 강민 시인

인사동의 역사는 골목에서 만들어진다 / 강기희 소설가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 / 강선화 사업가

인사동 나그네 / 구중관 소설가

인사동 풍경 / 기국서 연출가

봄비를 기다리며 / 김명성 시인

인사동 낙수 한 토막 / 김신용 시인

인사동에서 길을 잃다 / 김여옥 시인

무대 잃은 인사동 노악사 / 조문호

인사동에서의 하루 / 김용문 도예가

유연의 얼굴들 / 김형숙 수필가

 

어느 고미술상에게서 들은 얘기 / 김진하 미술평론가

인사동 회화나무 하나 / 김호근 전 갤러리 북스 대표

땡초 전성시대 / 조문호

세월은 흘러가고 / 민영 시인

인사동 / 박영현 시인

모델료 받아 노잣돈 한다던 천상병 시인 / 조문호

인사동은 늪이었다 / 배평모 소설가

활극과 인정의 터, 인사동 / 변순우 시인

서울, 1962년 인사동 / 서정춘 시인

인사동은 고장 난 피아노의 건반 같은 곳 / 송상욱 시인

인사동-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 / 신경림 시인

 

그리운 인사동 / 신동여 도예가

통문관의 산기 선생이 그립다 / 고) 심우성 민속학자

인사동 골목을 살리자 / 오세필 기와 장인

인사동과 막 뮐러 / 윤양섭 리버티 에셋 매니지먼트 회장

인사동과의 인연 / 고) 이계익 전 교통부장관

나의 소우주, 잃어버린 낙원 / 이나무 작가, 출판인

인사동 사람들, 그들의 빛깔 / 이정숙 문학평론가

인사동은 공간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인가 / 임재경 언론인

인사동 풍류 / 임춘원 시인

김일의 후예 박대머리 / 조문호

인사동 시의 거리’ / 조정애 시인

 

인사동의 단골집들 / 전강호 화가

미지의 세계 / 정영신 사진가 겸 소설가

인사동의 힘 / 조인숙 사진가

땡땡이로 시작된 인연 / 조준영 시인

인사동 친구들 / 조해인 시인

인사동 역사 / 최대식 화가

인사동, 기억의 풍경 / 고) 최영해 시인

인사동 사람들은 기인인가 / 최울가 화가

인사동에서 꿈을 꾸다 / 최일순 연극배우

인사동으로 상경한 세 화가 / 조문호

인사모’여 영원하라 / 황명걸 시인

 

작업 노트 /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 조문호

 

강찬모 / 히말라야 별만큼 반짝이는 화가

구중서 / ‘한국작가회의’ 원조이신 리얼리즘 문학평론가

공창호 / 인사동 고미술의 대가

공윤희 / 여지껏 ‘공대위’로 불리는 인사동 지킴이.

금보성 / 인사동에서 한글 회화를 시작하다

고) 김동수 /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로맨티스트

김수길 / ‘구름에 달 가듯이’ 술집 하다 달 가듯 떠도는 사진가

고) 김영수 /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민사협’의 대부

고) 김용태, ‘민예총’과 동격인 화가.

노광래 / 평생을 노부장으로 부르는 ‘갤러리 시네’ 이장

 

류연복 / 다채로운 칼춤으로 풍미하는 목판화가

고) 목순옥 / 천상병 시인을 사랑한 ‘귀천’의 사모님

박 건 / 값싼 사물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공산품 작가

박불똥 / 민중미술에 불똥 지핀 화가.

박상희 / 세계를 방랑하며 문명의 시대정신 담아내는 조각가

박재동 / 초상화와 버스킹으로 인사동을 풍미하는 시사만화가

방동규 /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시대의 의인

서정란 / ‘꽃구름 카페’를 노래한 이름 같은 서정시인

성완경 / ‘현실과발언’의 주체로 활동한 미술평론가

수안 / 시, 전각, 그림을 잘하는 통도사 스님.

 

안동해 / 티롤 음악감상실을 운영한 서예가

안창홍 / 45년간 인간성 회복을 형상화한 화가

엄인호 /「골목길」을 부른 ‘신촌블루스’의 리더.

고) 여운 / 조선시대 화가 최북을 닮은 목탄화가,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다

유재만 / ‘김대환박물관’을 지키는 아리랑 명품관 대표

육명심 / ‘장승’과 ‘백민’ 시리즈로 우리 모습을 잡아 낸 사진가.

이만주 / 시로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무용평론가.

이명희 / ‘말괄량이 길들이기’ 보다 대폿집 주모 역이 제격이네

고) 이종문 / 거리에서 하늘로 유랑 떠난 유랑악사

이종승 / 인사동 화랑을 순회하는 비주류 화가

 

이청운 / 어려웠던 시절의 그 파아란 바다를 그리는 서양화가.

고) 이호철 / 분단문학을 승화시킨 소설가

임경일 / 인사동 문화를 사랑하는 전방위 예술애호가

임영주 / 전통문화재의 달인인 고미술 학자

임태종 / 인사동 문화터를 탈바꿈하는 건축가

장경호 / 한강미술관장을 역임한 화가.

장사익 / 노래와 소리의 경계를 허문 가수

전유성 / ‘학교종이 땡땡땡’의 교장을 역임한 인생 개그의 대부

전활철 / 인사동 풍류를 연출하는 ‘유목민‘ 주인

정동용 / 인사동 ‘시인학교’ 10년 하다 말아먹은 시인

 

정해광 / 인사동에 아프리카미술을 끌어들인 미술관장

정희성 / 저문 강에 삽을 씻는 시인

고) 채현국 / 한때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였던 철학자

최백호 / 시인 같은 가수가 그림도 잘 그리네.

최석태 / 우리 미술을 연구하는 고집불통 평론가

최효준 / 인사동과 미술을 이어온 전 서울시립미술관장.

하태웅 / 전통무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무예가

한봉림 / 전주문화계 맹주 도예가

허태수 /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목사

 

이밖에 소개한 분들이 70여명 더 있다.

 

책은 인터넷에서 구하면 편하지만, 저자 서명을 원한다면 연락바란다.

 

얼마 전에는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조문호의 ‘노숙인, 길에서 살다’ 도 나왔다.

 

‘인사동 이야기’ / 눈빛출판사 / 가격 25,000원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사진집 / 눈빛출판사 /가격 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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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지난 달 물대포를 쏘며 강제철거 논란이 일었던 인사동 소재 복합문화공간 '코트' 전시장에

또 다시 승합차 두 대를 전시장에 밀어넣어 재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러 나간 것이다.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 큰길로 들어가니, 구세군 종소리가 연말분위기를 풍겼으나,

왠지 쓸쓸한 인사동 풍경이 낮 설게만 느껴졌다.

 

곳곳에 대포 맞은듯, 구멍 뚫린 빈 점포가 자리잡은 음산한 풍경이야 익숙하지만,

인사동 사거리 대로변에 들어서는 식당의 대형 간판이

마치 정육점 같은 벌건 고기 덩어리로 장식되고 있었다.

 

건물철거 등으로 곳곳에 출입통제 막이 쳐져 있었고,

남인사마당 공연장 앞에는 바닥교체 작업으로 어수선했다.

 

해마다 년 말이 가까워오면 지자체에서 남은 예산을 탕진하기위해

멀쩡한 바닥을 교체하는 장면은 이제 연례행사나 마찬가지다.

 

문제를 일으킨 복합문화공간 '코트' 전시장은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니, 벽면에는 ‘깨어진 땅’이라는 제목의 김지욱, 함형렬씨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바닥에는 텐트와 승용차가 들어 차 있었다.

 

지난 4일, 건물 입주민들을 향해 물대포를 쏜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이

특수폭행 혐의로 입건돼 분쟁이 일단락 되는 듯 했지만,

이날 추가로 점거 사태가 일어나면서 분쟁이 재점화된 것이다.

 

'코트'는 예술인들에게 작업 공간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전시 및 공연 장소로도 활용하는 복합문화 공간이다.

현재 다큐멘터리 감독, 디자이너, 사진가 등

약 30여 명이 2층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전시장을 치우고 승용차를 끌어들이는 용역업체 직원들 [사진, 점포주제공]

법정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돈 앞에는 예술도 상도의도 필요 없는 무지막지한 요지경 세상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만 할까?

엉뚱하게 피해 보는 전시작가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돈이 인사동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가를 말살하고 있다.

인사동이 위태롭다. 이대로는 안 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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