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얼마 만이더냐?

그놈의 코로나에 발목 잡혀 못 만난 지가 2년을 훌쩍 넘었다.

조준영 시인의 사발통문으로 모처럼 인사동 골통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인사동 풍류를 사랑하는 예술가 패거리가 생겨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7-80년대 목순옥여사가 운영하는 귀천을 아지트 삼아,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 민, 신경림, 황명걸, 구중서, 민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 풍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월 따라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소식 끊긴 구중관, 배평모를 비롯하여 김종구, 강용대, 최정자, 이청운,

강찬모, 조해인, 최울가, 박광호, 전강호, 김신용, 석파, 적음, 김용문씨 등 많은 풍류객이

만들어 낸 사연들이 소설 한 권은 족히 될것이다.

그중에는 김명성씨가 있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화가도 더러 있으나, 예전엔 다들 개털이라 술값 낼 물주가 필요했다.

김명성씨가 창예헌이란 모임을 만들어 인사동은 물론,

지방까지 예술축제를 개최하여 지역 예술가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인사동에 세운 아라아트건물이 빚더미에 올라

중국 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조준영 시인이 주선하여 유목민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인원은 십여 명 밖애 모이지 않았지만, 터줏대감들의 유지는 이어 온 셈이다.

그것도 형식상으로 일 인당 만 원을 거두지만,

주태백이 술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항상 제 주머니를 털어 온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오랜만에 모임을 규합하기 위해 봉화 사는 신동여화백을 불러 온 것이다.

신화백은 인사동에서 전시했던 4년 전에 보고 처음이니, 다들 얼마나 반갑겠나?

, 신동여씨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우익선생이 생각난다.

 

신경림시인의 간고등어시에도 소개되었지만,

봉화에서 인사동으로 올라오시면 항상 안동 간고등어를 들고 오셨다.

신화백도 같은 봉화 살지만, 삶의 철학이 비슷하다.

신화백 역시 예전에는 간고등어 대신 약초를 갖다주었다.

 

전우익선생 말씀대로 재미있게 사는게 최고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럴려면 저어기 무인도에나 가서 살어.

별로 재미없는 세상 재미나게 살아가야제. 안 그려?

비잉신처럼 굴지말고 학실히 살다 가. 알았냐?”

 

인사동 모임은 지난 금요일 오후 여섯 시로  잡혔는데,

전시 리뷰 하나 전송하고 나가려다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다.

인사동에 도착하니 삼십 분쯤 늦었는데, 이미 유목민벽치기 골목은 대목장이었다.

 

봉화에서 올라온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임태종, 조해인, 이명희, 김상현,

장경호, 전강호, 정복수, 노광래, 유근오, 김수길, 김 구, 임경일, 정영신, 노박사,

이인섭, 최유진, 김민경, 전활철씨 등 이 십여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도 와 있었다.

 

반갑다는 인사대신 카메라부터 들이댔는데, 찍고 빠느라 정신없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걸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슬슬 취했다.

술맛 좀 날 만 하자, 일찍 마신 술꾼들은 도망갈 준비부터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지니, 바톤 받듯이 임헌갑, 서인형, 류연복, 최석태, 안원규,

발렌티노 김이 뒤를 이었는데, 한때 인사동 밤안개로 불린 이두엽까지 나타났다.

아직 인사동 밤안개가 나올 시간은 아닌데...

 

기분이 좋으니, 시간은 더 빨리 갔다.

요새 한꺼번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이 자주 생긴다.

그제는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이 인사동에서 열려,

부산에서 이광수교수까지 올라 와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신 것이다.

 

갈 시간이 되었다는 정동지 눈치에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오늘 신 화백하고 빨다 잘 테니, 먼저 들어가

술 취하면 간이 배 밖에 나온다는 말이 딱 맞다.

모셔드려야 할 밤늦은 시간에, 어찌 동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늦게 온 술꾼들마저 사라지는 걸 보니, 이미 파장이었다.

평소 문 닫을 때 까지 마신다는 장경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신화백까지 사라져 활철씨에게 물어보니, 너무 취해 여관에 갔단다.

활철씨 안내로 '한흥장'을 찾아가니, 이미 신화백은 뻗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신화백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인사동 거리는 사람 청소를 했는지,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나 인사동에 해장할 곳이 마땅찮다.

아침 식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뿐이라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반주도 없이 급하게 설렁탕을 퍼 넣는데, 전활철씨가 해장국 끓어 놓았다는 기별을 했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한 국물이라 소주가 술술 넘어가 단숨에 한라산 세 병을 까고서야 일어섰다.

활철씨는 영천시장에 장 보러 가는 동안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간 크게 택시를 잡아탔다.

 

모처럼 시골 영감이 상경했는데, '대마불사주'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미 해장술에  제정신이 아니라, 활철씨가 찔러 준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외상이 아니라는 투로 주모에게 대마불사주와 안주를 주문한 것이다.

 

대마 나물과 대마불사주가 나왔는데, 시골 영감이 너무 빨리 마시는 것 같았다.

불광동 사는 장춘씨까지 불러냈으나, 이미 정신이 풀려버렸다.

많지도 않은 대마불사주 씨를 말리고서야 일어섰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신화백을 부축하여 어렵사리 택시를 잡았는데,

장춘씨가 술 취한 신화백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듣는 내가 짜증 났다.

처녀로 늙었기에 망정이지, 시집이라도 갔더라면 서방 잡을 것 같았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입구에서 내려 유목민으로 돌아오니,

활철씨도 장을 보아 영업준비를 마무리했더라.

 

장춘씨의 잔소리를 안주로 다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노박사가 안주하라며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을 갖다주네.

입가심으로 마신 막걸리 두 병에 신화백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활철씨가 여관방을 잡아두었다기에, 그를 부축하느라 술이 깰 지경이었다.

몸에 힘이 풀려버리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2층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니, 장춘씨도 가버렸다.

그만 막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나저나, 인사동에 방 잡아 놓고 술 마신 지가 얼마 만이더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래된 일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접어 넣었다.

신화백이 자리에 눕자, 긴장이 풀어져 다시 취기가 올랐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버렸다.

한 밤중에 깨어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야 정신을 차렸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생각났다.

뉴스 아트에 보내준 전시리뷰를 페북에 걸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 교정을 못 본 것이다.

 

컴퓨터를 열어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요 없는 글이 있었다.

마치 취중에 올린 글 같은 상스러운 표현인데, 이미 볼 사람은 다 봐 버렸다.

 댓글까지 달린 전시리뷰를 내리고, 수정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 글을 다시 페북에 링크한 것이다.

 

카메라에 든 이미지를 꺼내 정리하며, 불 꺼진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으니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닭죽을 끓여 놓았는데, 신화백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화백은 일찍 봉화로 내려 간 것 같았다.

만나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그래! 잘 내려가시게나.

당신이 또 하나의 인사동 추억을 남겨주었구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인사동 풍류, 불 꺼진 창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다 사라지고 변해버린 삭막한 인사동,

뒷골목 정마저 사라진다면 전우익 선생 말처럼 무슨 재민겨?”

다들 조준영 시인이 부여잡은 인사동 끈을 모두 놓지 맙시다.

 

이상으로 ‘신동여 선생 상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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