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풍류가 사라진 지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건만, 새삼 인사동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풍류란 인사동에 시냇물이 흐르던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민 시인 등의 문객들이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넘어오며 풍미했던 낭만 말이다.

 

인사동에 돈 바람이 분 것은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집에 숨겨 둔 골동이나 고미술품을 팔려고 가져 나오며 비롯되었다.

오래된 집안 가보를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 있던 막 뮐러는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이나 되는 골동을 사 모으기도 했단다.

보관 창고에 임금의 옥쇄가 발에 차였다는 때로, 인사동의 골동상들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배에 가득 실은 골동품을 일본으로 내다 판 매국노 같은 장사꾼도 있었다.

 

골동상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물렀으면, ‘금당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도 생겨났다.

79에 벌어진 금당 살인사건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며 금당주인을 유인한 후,

안주인과 기사에게 현금 오백만원을 갖고 나오도록 만들어, 세 사람 모두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사동 고미술상이나 중계상 삼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6명은 그 사건과 관계없는 일로 구속되는 등 인사동 고미술상에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고미술품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사동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야바위 같은 뒷거래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하고 도굴품까지 늘렸으니,

장사꾼에서 장사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희한한 일이 많았다.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진품명품이란 프로도 일조했다.

 

고미술품 전성시대는 안으로 곪았지만, 관광 시대로 접어든 88년부터는 밖으로 곪기 시작했다.

인사동 자체가 잡동사니 거리로 변한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인사동을 누가 잡겠냐마는, ‘구하산방’, ‘통문관’, ‘명신당필방’, ‘수도약국’,

통인화랑’, 이문설농탕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가 곳곳에 살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뭐니 뭐니해도 예술 중심지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로 빌어먹는 가객들이 콩깍지 속 콩알처럼 주막에 틀어박혀 개똥철학으로 목청 높인 적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사동 골목 문화를 만들어 온 예술가들의 풍류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오 가며 들렸던 벽치기 골목에 참새방앗간 하나 있었으나, 얼마 전 젊은 매니저가 들어 오며 제동이 걸려버렸다.

늙은이들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데다, 안주 하나에 술 한 병 시켜 놓고 세월을 죽이니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인사동이야 노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 여태 살아남았지, 다른 지역은 노인들 출입이 통제된 지 오래다.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술 마실 곳이야 없겠냐마는, 사람을 만날 장소 즉 이산가족 상봉소가 사라져 걱정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전시를 여는 화랑이 밀집해 있는 이상, 등 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리는데, 이젠 지인들의 전시 뒤풀이에서 만나는 방법뿐이다.

 

 

비싼 점포세 내가며 늙은 예술가들을 반길 곳은 없으므로

참새 방앗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과 예술이 살아 넘치는 곳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십시일반 역할을 분담하여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작품을 싸게 거래하거나

시 낭송회나 여러가지 토론회를 갖는 등 하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둥지를 만들자.

 

인사동을 방황하다 외롭게 떠나가신 강민시인과 심우성선생이 그리워진다.

 

사진, / 조문호

 

 

 

 

 

늙은 화가가 떠돈다.

갈 곳이 없다.

참새 방앗간도 막혔다. 

그 사람이 그립다.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다.

 

사진, / 조문호

 

[유석재의 돌발史전]

3·1 운동의 시발점, 태화관 미스터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모습을 그린 기록화.

지난 1일은 제104년 삼일절이었습니다. 굳이 이 인물까지 이 코너에서 언급해야 할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학원강사 출신의 한 방송인이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그 좌장인 손병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었던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고, 나중에 결혼을 한다. 그 마담이 할인을 해준다고, 안주를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발언은 역사 인식의 총체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하기 위해 명월관을 나왔으니 1919년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 마담이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주옥경을 ‘마담’으로 칭한 것은 명백한 비하입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점이었던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한 해석입니다. ‘민족대표들이 낮술을 마시기 위해 태화관에 모인 것’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3·1 운동의 발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의문점을, 위의 발언이 무척 희화되고 왜곡된 형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왜 민족대표 33인은 다른 곳도 아닌 ‘기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일까? 둘째, 이들은 일경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거기 있다고 알렸다는데, 그러면 자수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보니 1997년 초판이 나온 한국사 개설서들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서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막상 3월 1일이 닥쳐오자 뒷걸음쳤다. 그들은 처음 예정대로 사람들이 만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인 후,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 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 같은 것 없이 분명하게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2019년 논문 ‘1919년 태화관의 독립선언식과 민족대표’) 두 가지 문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가?

먼저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월)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내 집에 와서 모든 일은 정하기로 하였다. …독립의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했던 장소는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최린은 “파고다공원은 (서울의) 중앙에 있고, (고종의) 국장 때문에 지방 사람도 다수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당하고 좋을 것이라 하여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이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사전 모임에서 이갑성이 “그 일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어서 약 200명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희도와 권동진이 “그런 경우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대항해 충돌할 것이 염려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및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서 학생들이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러자 손병희가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양한묵은 경찰신문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언의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말했었지만, 그 장소는 다수의 인민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발표 때에는 반드시 경관의 취체를 받고, 우리들 전부는 동행하여 안치될 것임에 틀임없다. 그 때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를 수 있어, 도리어 수행 상 불온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다고…” 명월관 지점이란 바로 태화관입니다.

사실 이것은 3·1 독립선언서 발표의 주체 중 기독교 측이 학생들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 천도교 측에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결과라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런데 왜 태화관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죠. 이미 많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경찰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일 새벽 일본 경찰들은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 전단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다른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인사동의 요릿집으로 발표 장소를 옮긴 것이 됩니다. 33인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할 경우 몰려든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으면서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는 장소’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요릿집에는 기생이 있었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기생의 유무(有無)’나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서 발표 장소로서 ①파고다공원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던 ②보안이 유지되는 ③서울 중심부의 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 /문화재청

 

◇(2)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는가?

3월 1일 태화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한때 정설처럼 유행했던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전화를 해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투항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요?

오후 2시 조금 못 미쳐 참석자들이 거의 모였을 때 학생들이 들어와 장소 변경에 대한 항의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2시 정각, 독립선언문이 배포됐습니다.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참석자들은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한용운이 일어나 “우리들은 이미 독립선언을 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일동은 기립해 ‘독립만세’를 삼창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이 무렵 최린 등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력거꾼에게 물어 그 선언문이 태화관으로부터 배송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갑성과 이규갑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실제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태화관 주인(또는 종업원)이 민족대표들에게 와서 “거기 다들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이에 민족대표들은 “당신이 본 대로 대답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우리는 지금 태화관에 있으니 잡아기시오’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죠.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차례로 경무총감부로 연행됐습니다. 이것을 과연 자수라고 봐야 할까요.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당시 민족대표 측은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의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마치자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연행돼 갔던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으니, 이제 전국의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일보 / 유석재기자

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이명복作, 사라진 꿈, 153 x 208cm,장지에 아크릴, 2023

‘나무아트’ 기획전 ‘무장지대’ 2부가 지난 17일 개막되었다.

 

2월 6일 부터 16일 까지 열린 1부에서는 강재구(사진),김진하(사진), 송창(설치), 이태호(입체), 임종업(대성동마을 스냅+르뽀), 정기현(영상, 설치) 작가가 참여했다.

 

김진하_망각의 한 방법-소원에 대하여_사진몽타_61&times;182cm_2023
강재구_private#1~3_젤라틴 실버 프린트_각 70&times;55cm_2002
송창_大兄-바라보기_스팽글, 필름출력_설치, 232&times;546cm_2020
이태호_분단풍경_여러가지 재료_100&times;85&times;168cm_2021
임종업_대성동-DMZ의 숨겨진 마을_르뽀_도서출판 소통_2021
정기현_topos_도라전망대 설치전경_2021

지난 17일 부터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2부에서는 이명복(회화), 류연복(목판화), 손기환(회화), 이동환(회화+입체),  이인철(디지털 회화) 김억(목판화) 작가가 참여한다.

 

류연복_꽃 한송이_소멸다색목판화_97&times;72cm_2018
손기환_DM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times;200cm_2015~21
이동환_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풍경_장지에 목탄, 먹, 안료_60;134cm_2023

지난 15일 전시장에 들렸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1부를 놓쳐버렸고, 2부는 정영신 동지와 함께 개막시간에 맞추어 찾아 간 것이다,

 

이인철_파주2_디지털 회화_2023
김억_DMZ-백령도에서 고성까지_목판화_2020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제주의 이명복씨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이인철씨 등 참여 작가를 두루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승미, 김 구, 장경호, 김은태, 강욱천, 성기준, 정기현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관람한 후 '산골물'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가졌다.

 

손기환작

아래는 전시를 기획한 김진하관장의 ‘무장지대’ 서문이다.

 

"1953년 유엔사와 북한의 휴전 협정에 의해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 분계선과, 그 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의 남방한계선/북방한계선에 의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비무장지대. 말 그대로 무장이 해제되어야만 하는 곳. 그러나 현재 동서 256Km, 남북 4Km인 이곳엔 수백 만 개의 지뢰가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전해진다. 게다가 북한 G.P는 북방한계선 남쪽 1.6Km, 남한의 G.P는 남방한계선 북쪽 1.2Km까지 진입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양 G.P간 실 거리는 기껏 1Km의 거리. 모두 중화기로 무장한 긴장된 상태다.

 

이인철작

일촉즉발 상태인 이곳이 어찌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비무장지대』라는 네이밍에 근거하자면, 폭 4Km의 이 공간을 제외한 북과 남쪽 국토 전체는 역설적으로 『무장지대』란 뜻이 아닌가.

 

지난 70년 간 우리는 분단 현장 남측 『무장지대』에서 분단 정치, 분단 문화, 여타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한 온갖 부조리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벙커, 참호, 철조망, 그리고 우리들 일상에 존재하는 군사 시설들... 뿐인가, 과거 교련을 위시한 반공과 군사 교육, 관제 행사 동원, 여타 학술과 문화 예술과 대중문화에까지 드리웠던 검열과 블랙리스트의 기억까지 소환된다.

 

김억 작

그 레드 컴플렉스의 작동은 최근에도 남북 관계를 더 경색 시키고, 한발 더 나가 전쟁 위기까지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에서 한반도 분단 극복과 무장지대 탈출을 위한 지성적 담론과 사회 문화 운동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동환작

이런 현실에서, 평소 사회 역사적 주제로 작업을 하던 작가들이 정체된 분단 논의에 파문을 일으키려 함께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 작가들이 직접 체험한 『무장지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이, 지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분단 논의에 던져 지는 짱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진하

 

오는 2월 26일까지 열리는 '무장지대'전을 많은 관람바랍니다.

 

류연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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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밤길을 걸었다.

술 생각에 나선 것도 아니고 약속은 더 더욱 아니다.

텅 빈 마음을 인사동은 매워 줄 것 같았다.

인사동 밤거리는 이국처럼 낯설었다.

정든 가게는 사라지고 옷가게만 즐비했다.

진열대 상품마저 이질적이다.

어떤 집은 벽보판이 되었고 어떤 집은 안녕이란다.

사람도 하나같이 낯설다.

시끌벅적 개똥철학 풀던 사람은 다 어디 갔는가?

아련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향당' 배첩장만 풀칠을 한다.

아직 인사동에 붙어 있다고...

사진, / 조문호

 

 

1

히말라야 방랑 시인으로 불렸던 김홍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가 나왔다.

첫 시집 바람 속에 꽃씨 하나에 이은 두 번째 시집으로 2006문학동네에서 펴냈으나,

16년 만에 문학동네 포에지 58호로 복간한 것이다.

 

지난 31일 오후5시부터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열린 복간기념회에는

김홍성시인을 비롯하여 썰이 빛나는 소설가 이시백씨, 독보적인 전기 작가 이충렬씨,

세상의 아침출판사를 운영하는 전상삼씨, 지리산으로 들어간 소설가 임헌갑씨,

문학동네편집인 유성원씨, 장터 사진가 정영신 동지, 박시우씨, 박인씨, 영창씨 등 모두 12명이 함께했다.

 

그런데, ‘풍류사랑옆자리에 반가운 분도 있었다.

조준영시인과 건축가 임태종씨, 인사동 지킴이로 통하는 공윤희씨였다.

약속없이 반가운 사람을 우연히 만 날 수 있는 곳이 인사동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복간 기념회는 김홍성시인의 죽마고우 이충렬씨가

중대 문창과 동문을 비롯한 몇몇 분만 연락했다는데,

평소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는 주인공의 의중을 헤아린 것 같았다.

 

나 역시 참석할 군번은 아니지만, 한 때 인사동을 풍미한 문인들 모임인데다,

포천 명성산 기슭에서 두문불출하는 전설 속의 주인공을 어찌 보고 싶지 않겠는가?

 

김홍성 시인을 모르는 분을 위해 먼저 작가부터 소개해야 겠다.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여 십여 년 동안 여행 잡지인

나그네’, ‘사람과 산등 여러 잡지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1990년 오지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로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네팔에 정착했다.

2002년 카트만두에 '소풍'이라는 조그만 밥집을 차려,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시와 기행문을 써 왔다.

그리고 사진전도 몇 차례 가진바 있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김홍성 시인은 두 권의 시집 외에도 트리술리의 물소리’, ‘천년 순정의 땅, ‘히말라야를 걷다’, 꽃향기, 두엄냄새 서로 섞인들’,

우리들의 소풍’,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 시인 김홍성의 히말라야 기행', ’꽃피는 산골’, ‘먼지 속에 꽃씨 하나‘,

온길 삼만리 갈 길 구만리등을 펴낸바 있다.

 

2006네팔 카트만두 밥집과 히말라야 떠돌이 생활 20여년을 정리하고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 온 것은 간암에 걸린 아내의 병이 깊어서다.

그러나 아내는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시집 출간을 앞두고 세상을 등져,

 그 시집은 아내를 그리는 사부곡(思婦曲)이 되어버렸다.

 

"오래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서럽지 않다 / 그만큼 많은 비와 눈이 우리 사이에 내렸다 냇물이 되어 흘러갔다 /

눈물은 아직도 뜨겁지만 이내 식는다 이제는 천천히 오래 우는 것이다 /

후회가 아니다 용서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우는 게 편해진 것이다

['그리움' 부분]

 

그의 시에는 말 못할 슬픔과 풀꽃처럼 여린 감성이 오간다.

 

"먼산 너머로 노을이 질 때면 / 기러기라도 울며 날았거늘 / 샛별이라도 글썽였거늘 //

빈 하늘 텅 소리 나게 두고 /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 쓸쓸한 사랑 깊어진 끝에 / 태풍이 지나갔다 //

쓸쓸한 사랑아 / 산에 가자 / 태풍이 지나갔다

['쓸쓸한 사랑'부분]

 

한마디로 울음의 곳간이다. 기러기도 울고 샛별도 울고 산도 울었다.

 

시집 복간기념회는 눈물이 술이 되었는지, 부어라 마시어라 넘치는 술잔 속에 시낭송이 이어졌다.

낭송한 여러 편의 시중에 절창 두 편만 소개해야 겠다.

 

원산하숙

 

무적이 우는 날이면 / 눈먼 고래처럼 무적이 우는 날이면 / 원산하숙 연못가 꽃밭에서는 /

옥잠화가 피었어 / 안개비 속에서 / 하얀 옥잠화가 피었어 / 고향땅이 그리워서 /

홀아비로 늙어 죽은 / 원산하숙 아저씨가 가여워서 / 슬프도록 어여쁜 꽃 / 옥잠화가 피었어 /

무적이 우는 날이면 / 눈먼 고래처럼 무적이 우는 날이면

 

다시 산에서

 

친구여 / 우리는 술 처먹다 늙었다 / 자다가 깨서 찬물 마시고 / 한번 크게 웃는 이 밤 /

산아래 개구리들은 / 별빛으로 목구멍을 행군다 / 친구여 / 우리의 술은 /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이었다 /

온 길 구만리 갈 길 구만리 / 구만리 안팎에 / 천둥소리 요란하다

 

술이 시가 되고 시가 술이 되는 자리는 그렇게 끝났으나, 어찌 이차를 가지 않을 소냐!

 

호프집 부얶으로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맥주는 마실 수가 없었다.

통풍이란 요상한 병에 걸려 그 시원한 맥주 맛 못 본지가 십년도 넘었다.

 

 김홍성시인이 산정호수 캠프까지 가려면 녹녹치 않은 거리라, 아쉬운 작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동지와 함께 ‘유목민에 들렸으나, 주인도 술친구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길 돌린 예당에는 장경호, 안원규, 공윤희씨가 반겼는데, 뒤늦게 사진가 김수길씨도 나타났다.

 

옆 자리에는 사진가 정명식씨가 있었다.

 

깊은 인사동의 밤은 술이 술을 마시게 했다.

술인지 독약인지, 술 마시다 '예당'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차라리 그 길이 저승길이라면 편하련만, 비틀 비틀 꿈길이더라.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인사동이 인사동 같지가 않다.

인사동이 삭막하게 변한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지만,

정든 사람마저 볼 수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사동 풍류객들은 세상을 등졌거나 대부분 떠나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도, 여느 거리와 다를 바 없다.

서울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기도 싫어졌다.

 

지난17일 오후무렵,  유목민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홍천 사는 양서욱씨가 인사동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를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술 생각이 간절한 터라 하던 일을 덮어버렸다.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 양서욱, 고은우씨가 있었다.

가게 안쪽 전등이 꺼진데다 주변이 어수선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날이 정기휴일이란다.

 

홍천에서 집 짓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서욱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뒤늦게 도언탁, 장은하씨가 등장하며 술자리도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 그런지, 벽치기길 입구의 담배포가 문을 닫아버렸다.

술 마시며 담배를 참아야 하는 인내에 한계를 느꼈다.

또 한 곳인 '예당은 술집이라 사러가기가 민망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예당에 담배 사러 갔더니, 도처에 아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었다.

 

최유진, 이만주, 이두엽, 김태서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사진만 찍고 나와 버렸다.

 

돌아오다 새로 생긴 술집에도 잠시 들려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 박원규, 노현덕씨가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쌍다구에 그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 있으니, 모처럼 인사동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 인사동이 정겹듯이, 사람도 오래된 사이가 정겹다. 농익은 술이나 곰삭은 된장처럼...

 

새로 개업한 집에서부터 예당유목민을 오가며 첨벙거리던 중에

흐린 세상으로 건너오라는 이두엽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술에 절었지만, 그 쪽 사정이 궁금해 안 갈수가 없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흐린 세상 건너기로 갔더니,

이두엽, 최유진, 이만주씨와 잘 모르는 여시인도 한 분 계셨다.

 

한 때 방송피디로 일하다 신문사사장까지 두루 거친 이두엽씨는

세상을 떠난 여운화백과 더불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렸다.

밤안개처럼, 밤 새도록 인사동을 휩쓸며 새긴 사연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뿌리 깊은 미래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사동이라며, 인사동의 뿌리를 찾아 나서겠다는 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인사동의 매력은 정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하면 인사동의 인정이니, 결국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사람아 사람아~ 인사동 사람아~"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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