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3·1 운동의 시발점, 태화관 미스터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모습을 그린 기록화.

지난 1일은 제104년 삼일절이었습니다. 굳이 이 인물까지 이 코너에서 언급해야 할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학원강사 출신의 한 방송인이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그 좌장인 손병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었던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고, 나중에 결혼을 한다. 그 마담이 할인을 해준다고, 안주를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발언은 역사 인식의 총체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하기 위해 명월관을 나왔으니 1919년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 마담이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주옥경을 ‘마담’으로 칭한 것은 명백한 비하입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점이었던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한 해석입니다. ‘민족대표들이 낮술을 마시기 위해 태화관에 모인 것’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3·1 운동의 발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의문점을, 위의 발언이 무척 희화되고 왜곡된 형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왜 민족대표 33인은 다른 곳도 아닌 ‘기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일까? 둘째, 이들은 일경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거기 있다고 알렸다는데, 그러면 자수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보니 1997년 초판이 나온 한국사 개설서들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서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막상 3월 1일이 닥쳐오자 뒷걸음쳤다. 그들은 처음 예정대로 사람들이 만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인 후,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 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 같은 것 없이 분명하게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2019년 논문 ‘1919년 태화관의 독립선언식과 민족대표’) 두 가지 문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가?

먼저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월)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내 집에 와서 모든 일은 정하기로 하였다. …독립의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했던 장소는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최린은 “파고다공원은 (서울의) 중앙에 있고, (고종의) 국장 때문에 지방 사람도 다수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당하고 좋을 것이라 하여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이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사전 모임에서 이갑성이 “그 일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어서 약 200명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희도와 권동진이 “그런 경우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대항해 충돌할 것이 염려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및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서 학생들이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러자 손병희가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양한묵은 경찰신문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언의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말했었지만, 그 장소는 다수의 인민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발표 때에는 반드시 경관의 취체를 받고, 우리들 전부는 동행하여 안치될 것임에 틀임없다. 그 때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를 수 있어, 도리어 수행 상 불온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다고…” 명월관 지점이란 바로 태화관입니다.

사실 이것은 3·1 독립선언서 발표의 주체 중 기독교 측이 학생들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 천도교 측에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결과라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런데 왜 태화관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죠. 이미 많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경찰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일 새벽 일본 경찰들은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 전단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다른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인사동의 요릿집으로 발표 장소를 옮긴 것이 됩니다. 33인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할 경우 몰려든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으면서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는 장소’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요릿집에는 기생이 있었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기생의 유무(有無)’나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서 발표 장소로서 ①파고다공원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던 ②보안이 유지되는 ③서울 중심부의 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 /문화재청

 

◇(2)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는가?

3월 1일 태화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한때 정설처럼 유행했던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전화를 해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투항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요?

오후 2시 조금 못 미쳐 참석자들이 거의 모였을 때 학생들이 들어와 장소 변경에 대한 항의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2시 정각, 독립선언문이 배포됐습니다.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참석자들은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한용운이 일어나 “우리들은 이미 독립선언을 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일동은 기립해 ‘독립만세’를 삼창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이 무렵 최린 등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력거꾼에게 물어 그 선언문이 태화관으로부터 배송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갑성과 이규갑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실제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태화관 주인(또는 종업원)이 민족대표들에게 와서 “거기 다들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이에 민족대표들은 “당신이 본 대로 대답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우리는 지금 태화관에 있으니 잡아기시오’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죠.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차례로 경무총감부로 연행됐습니다. 이것을 과연 자수라고 봐야 할까요.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당시 민족대표 측은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의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마치자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연행돼 갔던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으니, 이제 전국의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일보 / 유석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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